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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으로... 봉하마을 바보를 애도하느라 몇 날을 슬픔으로 뒹굴건 아내가 오늘은 동네 아낙들과 십리대숲으로 나들이를 가고 금방 잠에서 깬 나는 밥 생각이 별로 없어 우유와 빵 그리고 냉동실의 얼음물을 꺼내 가방에 넣고는 집을 나섰다. 약초를 배운답시고 시작한 것이 여러 달이 지났건만 떠오르는 그림 하나 제대로 없어 무작정 나선 것이다. 며칠 전에 길가에 메꽃을 본 것이 있어 뿌리는 어떻게 생겼나 궁금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들을 지나 산기슭에 차를 대었다. 뱀이 무서운지라 장화를 신고 바지는 가시덩쿨을 생각하여 군복바지를 입었다. 동네 뒤 야산이라 별 생각 없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도라지나 더덕 정도는 구별되니 운 좋으면 한 뿌리 캘 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했다. 가시덤불을 헤치고 골을 오르내리면서 때 지난 산나물은 더러 보았지만 보고 싶은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선충 때문에 잘려진 소나무 무덤은 꽤나 많았다. 앞으로 70년 정도가 지나면 우리나라의 기후가 아열대기후로 변하여 소나무가 살 수 없는 환경이 된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는데 설마 제선충이 그 조짐은 아닐테지. 약초 한 뿌리 구경하지 못하고 산을 헤매고 있었지만 투덜거리진 않았다. 애초 약초를 시작할 때 캐는 즐거움도 있을 테지만 자연에 안기는 여유와 산을 오르내리는 건강도 함께 있다는 걸 깨닫기로 했으니까. 하루살이가 땀 흘리는 이마에 앉기라도 하려는 듯 왱왱거리며 나를 귀찮게 하고 청미래덩굴과 찔래나무가 나를 찔러댔지만 나는 이 골 저 골을 헤매고 다녔다. 괭이는 땅을 쫒기 보다는 지팡이로서의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꼬르륵거리는 뱃속을 달래고 담배 한 모금 길게 들이키고는 다시 길을 잡았다. 뱀을 만났다. 밀뱀(?)이었다. 멀리가라고 괭이자루로 나무를 탁탁 두들겼지만 쉬이 사라지지 않아 약 3분정도의 실랑이를 벌였다. 장화를 신었기에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걸을 수 있었다. 얼마를 지나지 않아 나는 놀라서 넘어질 뻔하였다. 한 자 정도의 거리에서 장끼가 푸드득 날아간 것이다. 날아간 자리에 18개의 따뜻한 알이 있었다. 멀리서 부터 들려오는 인기척이 자기를 향해 올 때 날아가야 할 까? 개겨볼까? 하고 말이다.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에는 이게 웬 떡이야 하고 얼른 주워 모았 겠지만 집에 가서 달걀 몇 개 삶 아 먹지 뭐 하고 돌아섰다. "약초를 하는 사람은 살생을 하지마라. 특히 산에서는..."라는 선배의 말이 떠올랐고 또 며칠 전 서거한 노빠도 생각이 났다. 산에 들어온 지 3시간이 지나 약간의 피로를 느껴 주차한 곳으로 길을 잡았다. 산을 거의 다 내려올 즈음에 참마를 발견했다. 처음 몇 뿌리는 가는 줄기를 캤지만 나중에는 굵은 줄기만을 찾았다. 젓가락만한 줄기를 몇 개 찾아 캐보니 뿌리도 굵었다. 돌 틈에서 납작하게 자란 것도 있었고 이리저리 해매며 자라 요상하게 생긴 것도 있었다. 밭에서 고구마 캐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마무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길을 따라 내려왔는데 차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어디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길을 따라 계속 내려오니 눈에 익은 곳이 보였다. 4시간 정도를 산 속에 있었으니 조금은 지친 상태이고 물도 바닥난 터라 '어이쿠'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들의 말이 생각났다. '약초하는 사람 산에서 길 잃는 것은 다반사다' 동네 야산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 이런 실수를 한 것이다. 차가 있는 곳을 짐작하여 다시 산을 올랐다. 산을 넘으며 혹시나 하는 염려를 하였는데 운 좋게도 멀리 눈에 익은 산자락이 보였다. 다행이었다. 다섯 시간이 넘는 산행이었다. 길 없는 산을 오르내린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장화 속에 들어간 나뭇가지와 흙을 털어내고 슬리퍼를 신으니 냉장고 문을 여는 것처럼 시원하였다. 내일은 술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다는 것을 찾아 나설 생각이다. 딱딱한 등산화에 적응된 발바닥을 물렁물렁한 장화에 적응 시킬려면 자주 다녀야 할 것 같다. 2009.5.31
"-향개마을- 바보상자님의 글" |
첫댓글 ㅎㅎ 성철스님의 말씀처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란 구절이 여기에 있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