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청도 몰래길 2코스인 성곡저수지 주변을 박성기 위원장의 안내로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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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 새해는 엄밀한 의미에서 음력 설날부터 시작된다. 갑오년이란 말 자체가 음력 기준이기 때문이다. 양력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한 번 공전하는 시간을 기준으로 만든 달력을 말하고, 음력은 달이 지구를 일주하는 시간을 기본으로 만든 달력이다. 예전 우리 농경사회에서는 음력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농경사회는 달·여신·대지의 음성원리(陰性原理) 또는 풍요원리를 기본으로 했다. 태양이 양(陽)이고 남성으로 인격화되는 데 반해 달은 음(陰)이며 여성으로 인격화된다. 그래서 달의 상징구조는 여성·출산력·물·식물들과 연결된다. 여신(女神)은 대지와 결합되며, 만물을 낳는 지모신(地母神)으로서의 출산력을 가진다.
세시풍속이라는 의미도 달을 중심으로 한 농경사회의 전통 풍습이었다. 우리의 세시풍속은 음력의 월별 24절기와 명절로 구분되어 있으며, 집단적 또는 공통적으로 집집마다 또는 촌락마다 관행으로 전승되는 의식 및 의례행사와 놀이였다.
세시풍속에서 보름달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강했다. 정월 대보름은 전통적으로 설날보다 더 큰 명절이었다. <한국의 세시풍속>은 음력 12개월에 총 192건의 세시행사를 수록하고 있다. 그중 정월 한 달에 102건으로, 전체 행사의 절반이 훨씬 넘는다. 그리고 정월 14, 15일의 대보름날 관계 항목수가 55건으로 1년 전체의 4분의 1이 넘을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담는 날이었다.
- ▲ 1 전형적인 시골길인 청도 몰래길 1코스 전유성 코미디철가방극장에서 최복호 패션문화연구소까지의 길을 걷고 있다. 2 성곡저수지 안에 섬을 만들어 수몰되기 전의 당산나무를 옮겨 심었다.
- 줄다리기는 성행위 상징하기도
첫 보름달이 뜨는 시간은 여신에게 대지의 풍요를 비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줄다리기도 대부분 대보름날 행사였다. 첫 보름달이 뜨는 밤에 행했다. 경남 영산에서는 줄다리기를 대낮에 절대 할 수 없도록 했다. 줄다리기를 마치 성행위처럼 여기는 전통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줄다리기의 암줄(서부, 여자편)과 수줄(동부, 남자편)의 고리를 거는 일이 그런 관념에 속했다. 이때 암줄편(여성편)이 이겨야 대지에 풍년이 든다고 했다.
조선 후기 홍석모가 연중행사와 풍속을 정리하고 설명한 세시풍속집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이날은 온 집안에 등잔불을 켜놓고 밤을 새운다. 마치 섣달 그믐날 밤 수세(守歲)하는 예와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대보름날의 관습의 전통은 지금까지도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전남에서는 열나흘 날 저녁부터 보름달이 밝아야 운수가 좋다고 하여 집안이 환해지도록 불을 켜놓으며, 배를 가진 사람은 배에도 불을 켜놓는다. 경기도에서는 열나흘 날 밤 제야(除夜)와 같이 밤을 새우는 풍속이 있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해서 잠 안자기 내기를 하는 곳도 있었다. 충북에서도 열나흘 날 밤 ‘보름새기’를 하는 곳이 여러 군데다. 이러한 관습은 달을 표준으로 하던 고대생활의 풍습이 강하게 전승돼 왔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실제 농경사회에서는 음력이 한 달씩이나 자연계절과 차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계절이 정확한 태양력적 요소로 24절기를 쓰기도 했지만 일반 세시풍속에서는 여전히 달의 비중이 결정적이었고, 그중에서 정월 대보름은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날이었다.
- ▲ 1 물이 빠진 저수지 안에 있는 수몰되기 전의 마을길. 옛날의 자취를 그대로 보여 주는 듯하다. 2 몰래길 안내 비석 앞에서 재미있는 듯 글자를 가리키며 웃고 있다. 3 박성기 위원장이 성곡리 유적 석곽묘 이전 표지판을 보며 당시 유적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농경사회 대보름축제는 풍요 기원
율력서(律曆書)에 의하면 정월은 사람과 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화합하고, 한 해 동안 할 일을 계획하고 기원하며 점쳐보는 달이라고 한다. 따라서 정월 대보름날 또는 보름달을 보며 한 해의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동국세시기>에는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맞이 하는 것을 망월(望月)이라 하며,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재수가 좋다’고 적혀 있다.
대보름이 되면 각 마을에서는 동네 안의 악기(惡氣)를 진압해 연중 무사하기를 비는 뜻으로 ‘사자놀음’, ‘지신밟기’, ‘들놀음’, ‘매귀놀음’ 등을 하며, 풍년을 기원하는 놀이로서 ‘줄다리기’, ‘횃불싸움’ 등을 한다. 또 보름날 밤에는 동산에 올라가 달이 떠오르는 것을 맞이해 달빛을 보고 그해의 풍흉(豊凶)을 점치며, 다리가 튼튼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다리밟기’를 한다.
정월 대보름의 대표적인 놀이 중에 쥐불놀이가 있다. 쥐를 쫓는 뜻으로 논밭둑에 불을 놓는 세시풍속의 하나였다. 이 날은 마을마다 아이들이 논두렁이나 밭두렁에다 짚을 쌓아놓고 해가 지면 일제히 “망월이야”하고 외치면서 밭두렁과 논두렁, 마른 잔디에 불을 놓는다. 사방에서 불이 일어나 장관을 이루는데, 이것을 쥐불놀이라 한다.
이 쥐불놀이는 쥐를 없애고 논밭의 해충과 세균을 제거하고 마른풀 베기를 쉽게 하며, 또 새싹을 잘 자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쥐불의 크고 작음에 따라 그해의 풍흉, 또는 그 마을의 길흉을 점치기도 했다. 불이 크게 일어나면 좋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마을과 대응해 쥐불을 놓기도 했는데, 한쪽 마을의 쥐불이 왕성하면 쥐들은 기세가 약한 쪽 마을로 옮겨가게 되며, 불의 기세가 큰 마을이 이기는 것이 된다.
정월 대보름 점치기도 있다. 초저녁에 뒷동산에 올라가서 달맞이를 하는데, 달의 모양, 크기, 출렁거림, 높낮이 등으로 1년 농사를 점치기도 한다. 또 대보름날 달집태우기를 한다. 짚이나 솔가지 등을 모아 언덕이나 산 위에 쌓아 놓고 보름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려 불을 지른다. 사발에 재를 담고 그 위에 여러 가지 곡식의 씨앗을 담아 지붕 위에 올려놓은 뒤 이튿날 아침 씨앗들이 남아 있으면 풍년이 들고, 날아갔거나 떨어졌으면 흉년이 든다고 했다.
- ▲ 1 길손의 안녕을 기원하는 리본을 보고 있다. 2 최복호 패션문화연구소 앞에 있는 몰래길 이정표와 안내판.
- 그 외에도 농사가 잘 되고 마을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며, 마을 사람들이 모여 ‘지신밟기’, ‘차전놀이’ 등을 벌이고, 한 해의 나쁜 액을 멀리 보내는 의미로 연줄을 끊어 하늘에 연을 날려 보낸다. 또 한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달집태우기’와 부녀자들만의 집단적 놀이인 ‘놋다리밟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집 근처의 다리로 나와 다리를 밟고 건너감으로써 한 해의 액을 막고 복을 불러들인다고 믿던 ‘다리밟기’ 놀이를 한다. 달집태우기 때 달은 풍요의 상징이고, 불은 모든 부정과 사악을 살라버리는 정화의 상징이었다. 이 불꽃이 기울어지는 방향에 따라 풍흉을 점치기도 했다.
많은 지역에서 정월 대보름축제를 개최한다. 경북 청도도 마찬가지로 도주줄다리기와 풍물경연대회, 달집·볏짚 태우기 등의 행사를 벌인다. 도주(道州)는 청도의 고려 때 지명이다. 박윤제 청도문화원장에 따르면 도주줄다리기는 죽은 원혼을 달래기 위해 시작됐다고 한다.
청도의 본거지는 원래 화양이었다. 화양은 옛날 사형장이라고 한다. 밤만 되면 귀신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끓자 활을 쏘는 장소로 만들었다. 이번에 화살 날아가는 소리가 밤마다 들렸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만든 게 모든 사람이 모여 힘찬 소리를 내는 장터였다. 거기서 줄다리기가 시작된 게 지금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서군이 이기면 풍년이 든다는 관습은 이어졌다. 만약 동군이 중간에 이기더라도 중간에 줄을 확 놓아버려 서군이 이기게 한다. 이긴 서군은 상여를 메고 동군이 그 뒤를 따르면서 곡을 하는 전통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줄다리기의 의미는 마을 주민끼리 화합을 하고, 모여서 농사에 관한 정보교환도 나누는 교류의 장이었다.
또 대보름 달맞이 행사와 달집태우기도 한다. 저녁달이 동쪽에서 솟아오를 때면 사람들은 달맞이 하러 뒷동산에 올라간다. 횃불에 불을 붙여 먼저 달을 보기 위해 산길을 따라 간다. 동쪽 하늘이 붉어지고 대보름달이 솟을 때에 횃불을 땅에 꽂고 두 손을 모아 제각기 기원을 한다. 농부들은 풍년을, 유생은 과거 급제를, 총각과 처녀는 결혼을 빈다.
이때 대보름달을 보고 1년 농사를 미리 점치기도 한다. 달빛이 희면 강우량이 많고 붉으면 한발(旱魃 : 가뭄)의 우려가 있으며, 달빛이 진하면 풍년이 들고 달빛이 흐리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또 달이 남쪽으로 치우치면 해변에 풍년이 들고, 달이 북쪽으로 치우치면 산촌에 풍년이 든다고 했다.
둘레 20m, 높이 20m에 달하는 달집을 만들어 대보름이 떠오르는 동시에 풍년을 기원하면서 활활 태운다. 이때 마을사람들은 농악을 울리며 달집 둘레를 돌며 춤을 추고 환성을 지르며 한바탕 즐겁게 논다. 이 달집이 활활 잘 타야 마을이 태평하고 풍년이 든다고 한다. 만일에 달집에 화기만 나고 도중에 불이 꺼지거나 잘 타지 않으면 마을에 액운이 들고 농사도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아들을 두지 못한 아낙네들은 타다 남은 달집 기둥을 다리 사이에 넣고 타고 가기도 하고, 타다 남은 숯을 가져다 지붕에 얹어두면 아들을 낳는다고도 했다.
매년 청도의 화평과 안녕을 기원하는 달집태우기 행사는 청도천 둔치에서 재현된다. 올해도 2월 14일 성대하게 치러진다. 그리고 1년 송액영복과 풍년을 기원하는 민속연날리기 대회, 제기차기, 투호, 널뛰기, 윷놀이, 세시음식 나누어먹기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풍물경연대회는 농촌 인력부족으로 격년제로 열리며, 올해는 풍물시연대회로 대신한다.
박윤제 문화원장은 “옛날 행사엔 아이들을 참여시키는 볏짚태우기도 있었다. 청장년은 달집으로, 어린이는 볏짚으로 축제를 치렀다. 지금의 관 위주로 변질되면서 아이들이 축제에서 빠져버렸다. 온 가족이 참가하는 축제로 자연스럽게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생겨났다. 두레도 우리와 같은 의미였다. 새마을운동이 청도에서 처음 발생한 것도 이같은 맥락이었다. 축제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 ▲ 1 청도 대보름축제 행사 중의 하나인 도주줄다리기 때 마을 주민들이 동서로 나뉘어 열심히 줄을 당기고 있다. <사진 청도군청 제공> 2 청도 대보름축제 때 풍년을 기원하며 달집태우기를 하고 있다. 3 몰래길 1코스인 성곡저수지 주변을 걸으면 청소 소싸움 때 출전하는 소들을 볼 수 있다.
- 개그맨 전유성씨가 철가방극장 세운 곳
청도에서 정월 대보름축제를 즐긴 뒤 개그맨 전유성씨가 개그 메카를 꿈꾸며 조성한 ‘코미디 철가방극장’에서 대구의 ‘앙드레 김’으로 불리는 패션 디자이너 최복씨의 최복호패션문화연구소까지 몰래길 1코스(GPS기준 6.3km)와 청도에 있었던 옛 지방국가인 이서국(伊西國)의 유물과 성곡1리·3리가 수몰된 지역에 조성한 저수지 주변을 걷는 몰래길 2코스(GPS기준 6.6km)가 있다.
수몰 마을은 인근 성수월마을로 재탄생하면서 전유성씨가 정착했고, ‘개그 메카’를 꿈꾸는 명소로 탈바꿈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성수월 마을추진위원장 박성기씨가 있다. 전유성씨는 8년 전 시골로 내려와 박성기씨를 만나면서 성수월마을로 아예 주소지를 옮겼다. 박성기씨는 농촌개발사업을 진행하면서 국책사업비 70억 원을 확보하고 14억 원을 ‘전유성의 코미디철가방극장’ 건립에 투자했다.
개그맨을 꿈꾸는 청년들 30여 명이 상주하며 개그연습을 하며 공연하고 있다. 극장을 철가방 같이 지은 건 원하는 곳 어디든지 개그공연을 한다는 의미에서다. 그래서 ‘개그도 배달됩니다’란 말이 나왔고, 성수월마을이 그 중심에 있다. 철가방극장 50여m 옆에 성수월마을 ‘그린투어센터’가 있다. 이곳이 몰래길 1·2코스 출발점이면서 안내센터 역할을 한다.
몰래길 1코스부터 출발해 보자. 그린투어센터에 도착하자 ‘고객이 돈 버는 주차장’이란 플래카드가 눈길을 끈다. 2시간 이상 주차할 경우 현금 500원을 주거나 그린센터 내 카페나 식당에서 먹을 때 1,000원을 할인해 준다고 안내하고 있다. 사람들이 지나가지 않고 머물게 하기 위한 기발한 아이디어다. 성수월마을엔 10년 전 수몰되기 전의 마을과 마을사람들의 모습, 10년이 지난 현재의 모습을 사진으로 비교하면서 벽화처럼 꾸며놓았다. 이 모든 아이디어를 낸 박성기 위원장이 일일이 사진을 가리키며 설명해 준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린센터 옆 마을 입구엔 성황당 돌탑을 만들고 솟대도 같이 세웠다. 그 앞에는 ‘성곡리 유적 석곽묘’라는 안내판이 있다. ‘삼국-통일신라시대 목곽묘와 석곽묘 등과 고려시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석곽묘와 옹관 등 총 919기의 유구가 확인됐다. 이 중 321기가 정식 발굴 조사됐으며, 출토유물은 토기와 철기를 비롯한 3,600여 점에 이른다’고 안내하고 있다.
청도 옛 이름이 이서·도주
- ▲ 1 몰래길 1·2코스 안내센터이자 마을 농산물판매장 역할을 하는 그린투어센터. 2 개그맨 전유성씨가 청도에 안착해 건립한 코미디철가방 극장. 3 최복호 패션문화연구소. 4 성수월마을의 벽은 다양한 사진으로 도배돼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 청도의 초기국가는 이서국(伊西國)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신라에 편입되고, 경덕왕 16년(757) 소산현, 형산현, 오악현으로 개명하고 밀성군의 속군이 됐다. 고려시대 들어 3현을 합해 청도군, 일명 도주가 됐다. <청도 고문서>에는 ‘청도의 옛 이름은 이서(伊西), 대성(大成), 도주(道州), 오산(鰲山) 등이 있다. 청도라 함은 산천청려 대도사통(山川淸麗 大道四通·산수가 맑고 아름다우며 큰 길이 사방으로 나 있어 교통이 편하다)에서 유래됐다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곡리 유적에서 이서국의 유적이 일부 출토됐다고 박성기 위원장은 전했다. 새로 조성한 저수지 속에 성곡마을이 잠겨 있듯이 이서국도 과거 어딘가에 머물러 있을 것 같다.
몰래길은 대부분 콘크리트로 포장돼 있다. 농민들이 수확한 과일을 경운기로 원활하게 수송하기 위해 요즘은 농촌마다 길을 포장하는 추세다. 걷기엔 다소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다.
곧이어 장기마을로 들어간다. 농촌마을의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한산하다. 인기척은 없고 개 짖는 소리밖에 안 들린다. 장기(長基)마을은 ‘골짜기가 길고 깊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마을 주변은 온통 과수원이다. 사과·복숭아나무가 넓게 자라고 있다. 가로수로 감나무가 심어져 있고, 그 옆엔 비닐하우스가 있다. 이 밭들은 몇십 년 전까지 전부 논이었지만 수익이 좋은 밭으로 개간했다. 논은 간혹 눈에 띌 정도였다.
성인키만 한 바위에 ‘몰래길’이란 글자를 새겨 안내하고 있다. 몰래길 걸을 땐 ‘구라치기 없기, 큰 소리 안 내기, 각종 소원 환영, 분실물 환영, 보는 사람이 임자’란 내용도 보인다. 개그맨 전유성씨 냄새가 물씬 난다. 제일 밑에 조그맣게 ‘패션 디자이너 최복호와 코미디시장 전유성’이란 글자도 새겨져 있다. 역시! 이어서 몰래걷기 수칙과 몰래길 이야기 1·2·3편이 연속으로 나온다. 정말 구라 같은 얘기를 적어 놓고 있다. 황당하지만 길을 걷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소를 머금게 한다.
저 멀리 비슬산 정상도 보인다. 그 자락에 경관은 해치지만 기상관측소도 첨성대같이 세워져 있다. 비슬산 등산도 가능하다. 비슬산을 넘어가면 대구다.
몰래길 고개에 소원을 비는 장소인 양 많은 리본이 걸려 있다. 이곳이 풍각면 성수마을과 각북면의 경계이기도 하다. 이제부터 각북면이다. 대구의 ‘앙드레 김’이라 불리는 최복호 디자이너가 사는 동네다.
군불로 펜션타운이 나온다. 마을 전체가 펜션단지다. 24시간 찜질방도 있다. 제법 차들이 많다. 대구 외곽지역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이윽고 1코스 종점 최복호 패션문화연구소다. 패션카페와 남녀 다양한 패션복이 걸려 있다. 마당에는 마치 인형공원 같이 꾸며놓았다. 사람만 한 인형이 이곳의 주인공이다. 마당 한편에는 한 사람 정도 들어갈 공간의 조그만 교회도 보인다. 최복호씨가 너무 바빠서 교회 갈 시간이 없어 자기 혼자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얘기다. 1코스 6.3km를 자연과 더불어 마을길을 즐기며 느긋하게 걸으면 2시간이면 될 것 같다.
2코스는 성곡마을을 수몰시킨 성곡저수지 주변으로 걷는 길이다. 출발지인 그린투어센터 앞에서 보면 저수지 안에 있는 당산나무 인공섬이 단연 눈에 띈다. 마을의 정신적 지주였던 400여 년 된 당산나무를 댐 안에 인공섬을 만들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식재했다. 다행히 잘 자라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축복해 주는 듯하다. 모두 박성기 위원장의 작품이다.
조용하던 산골마을에 연 15만여명 찾아
2코스도 성곡1리 우실마을에서 성곡2리 바깥장기마을 앞까지 올라간다. 우실마을은 마을 뒷산의 형상이 마치 소가 누워 있는 형상과 닮았다고 해서 불리게 됐다. 또한 주위의 지형이 황새·범·여우들이 죽은 소의 시체를 뜯어먹는 형세를 하고 있어, 이를 둘러싸고 있는 골짜기를 황새등(덤)·호등·여우등으로 불렀다.
한겨울이라 산속 깊은 골짜기지만 저수지 주변에서 부는 바람이 매우 차다. 손이 얼어 글을 제대로 쓸 수 없을 정도다. 어느 덧 황새등에 이르렀다. 박 위원장이 그곳을 가리키며 “지금은 저수지로 변했지만 과수원이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수지 수변의 전경을 풍경 그 자체로 무덤덤하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몇 백 년 이어온 삶의 터전을 빼앗긴 주민에게는 설움을 달래고 지난날을 추억하며 걷는 길이다. 그래서 몰래길이라고 했던가!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망향의 설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듯하다.
성곡마을과 수월마을이 성수월로 재탄생하면서 마을은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그린투어센터 연 방문객이 10만~15만 명 정도 된다. 옛날 조용하던 산골마을이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마을로 변했다. 수몰이라는 엄청난 충격을 변화의 원동력이라는 에너지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저수지 주변은 자전거 타기에도 좋은 길이다. 박 위원장은 저수지를 중심으로 어떤 행사를 기획할지 이것저것 아이디어를 많이 내놓는다. 전부 그럴 듯해 보인다. 몇 년 뒤 다시 한 번 더 찾아오면 정말 상전벽해가 돼 있을 것만 같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대나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옛날 집터 주변엔 꼭 대나무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나무 군락이 나오면서 박 위원장은 “이곳은 대나무골이며, 2가구가 거주했다”고 안내한다.
곧이어 마을 전설을 간직한 굴뚝바위가 나온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마을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구걸이나 부탁하는 사람들이 너무 찾아와 귀찮게 하자 부자는 “이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게 하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탁발 나온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뒷산의 바위가 이 집에 사람들을 들끓게 합니다. 저 바위를 떨어뜨리면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질 것입니다”고 말했다. 인부 수십 명을 동원해서 그 바위를 땅으로 떨어뜨렸다. 그때부터 그 집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게 아니라 아예 망해 버렸다. 자신의 안위만 좇던 ‘부자의 말로’를 굴뚝바위의 전설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끼리 도우며 살라는 우리 전래의 이야기다.
굴뚝바위를 지나면 성곡저수지 비석이 나온다. 도로와 저수지 사이 좁은 길을 내서 사람이 다닐 수 있게 조성했다. 차가 많이 다니지 않아 다행이다. 물이 조금 빠진 저수지엔 텐트를 치고 낚시하는 사람이 간혹 보인다. 박 위원장은 “고기가 많이 잡힌다”며 “낚시꾼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 때문에 골치”라고 말한다. 몇 개의 텐트가 있지만 바람만 날리는 빈 텐트도 있다.
도로 옆에 백안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싸움소를 키우는 마을 이장집이 바로 그 옆에 있다. 싸움소 몇 마리가 집 밖에 앉아 한가로이 되새김질 하고 있다. 우람한 모습이다. 이 싸움소가 청도 소싸움축제 때 출전한다고 한다.
마을 공동묘지가 있는 조그만 동산이 저수지로 뻗어 있다. 아직 몇 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쭉 뻗은 동산의 모습이 마치 자라의 목과 같다. 이 동산을 제비동산이라고 한다. 제비가 많이 날아와서 앉는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주민들은 이곳을 안산이라고도 한다.
제비동산을 돌아서면 자칭 코미디시장 ‘전유성의 코미디철가방극장’이 나온다. 정말 코미디도 배달해 주는 양 공연극장을 철가방 형태로 만들었다. 주 7회 정기공연을 하고, 20명 이상 60명 이하 단체예약을 받아 예약공연도 한다. 예약공연이 훨씬 많다고 한다. 그래서 ‘코미디도 배달됩니다’란 말이 생겼다. 1회 공연시간은 약 70분.
코미디극장에서 출발지인 그린투어센터까지는 불과 50여 m. 바로 눈앞에 보인다. 아픔과 슬픔을 가슴에 묻어 두고 웃음과 해학으로 승화시켜, 사라진 마을과 잊혀진 과거의 역사를 찾아 걷는 길이 청도 몰래길이다.
- 몰래길 출발지 청도 성수월마을
수몰 마을이 연 10만여 명 찾는 명품마을로 변신…
미나리 따기 체험행사도 마련
한적했던 시골마을이 수몰되면서 탄생한 성수월마을은 연 10만~15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 북적거리는 마을로 거듭났다. 그린투어센터 내 농산물과 식당 수입도 연 2억8,000만 원가량 된다. 보통 농촌마을에서 상상도 못 할 규모다. 물론 웃음공작소 전유성의 스타 마케팅이 있긴 하겠지만 마을 주민들의 단합과 박성기 위원장의 봉사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성수월마을은 각종 농산물과 농촌체험으로 전유성의 코미디철가방극장을 찾는 방문객들이 마을에 머무르게 할 전략을 만들고 있다. 청도의 대표적인 농산물 중 하나가 청도미나리다. 청도미나리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브랜드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경매시장을 거치지 않고 생산자가 가격을 결정하는 미나리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올해 나는 kg당 1만2,000원을 받겠다”고 하면 그만한 상품성을 지닌 미나리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소비자도 그 가격에 만족하고 사먹는다. 불만이 있었으면 이미 청도미나리는 브랜드로서의 가치가 무너졌을 것이다. 박 위원장은 “이른 봄 삼겹살과 함께 먹는 청도미나리는 방문객들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과 함께 맛을 선사한다”고 자랑한다.
이외에 성수월마을에서 생산하는 복숭아와 사과, 씨 없는 청도감으로 만든 반시 등은 전국에서 주문이 쇄도할 정도다.
성수월마을에서는 계절마다 제철 음식을 방문객에게 제공한다. 1월 조랭이떡국, 2월 오곡밥과 시래기국, 3월 냉이국, 4월 미나리비빔밥, 5월 샌드위치와 샐러드, 6월 복숭아조림과 부추전, 7월 보리밥과 깻잎찜, 8월 주먹밥과 오이냉채국, 9월 호박잎된장국과 고들빼기김치, 10월 삼겹살장작구이, 11월 샌드위치와 샐러드, 12월 팥죽 등으로 식단이 짜여 있다.
박 위원장은 “전유성씨를 비롯한 유명 인사들을 귀촌시켜 함께 살면서 방문객을 대상으로 재능기부 차원에서 강연을 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대구의 앙드레 김 최복호씨가 마을 건너 각북면에 이미 정착했고, 조각가 박종태씨 외에 건축가, 화가, 천연염색 등 예술인 10여 명이 합류한 상태다.
이에 따라서 각종 마을 체험프로그램도 더욱 다양화할 방침이다. 미나리 따기 체험, 사과 따기 체험뿐만 아니라 자전거투어 체험, 고구마 캐기 체험과 자연미술학교, 자연푸드학교, 자연음악학교, 자연농민학교 등으로 더욱 많은 방문객이 찾도록 할 계획이다. 이를 수용할 펜션시설도 확장하고 있다. 현재 그린투어센터 내 대형룸과 중형룸, 인근 펜션에 총 200명 가까이 수용 가능한 상태다.
박 위원장은 “성곡저수지를 활용해서 레저시설을 유치할 계획으로 있으나 아직 투자자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며 “이곳저곳 의사를 타진하고 있으며 머지않아 좋은 소식을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곧 조그만 산골마을이 연매출 10억 원 이상을 올리는 대박을 칠 것 같은 예감이다.
문의 054-371-1170 또는 010-3527-8082. 홈페이지 www.sunggo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