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영안이 감겼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여자와 뱀의 대화 장면이 나옵니다.
우선 뱀이 여자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대답합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이야기를 듣고 여자가 나무를 보니까 이상합니다.
그동안은 그렇게 느껴 본적이 없는데 왜 그날따라
그 나무의 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먹으면 굉장히 머리가 좋아질 것 같이
탐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단어 “본즉” 이라는 말은
그녀의 마음이 움직여지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표현입니다. 히브리어 ‘와테레’ 는 ‘본다’.
‘감찰한다’는 뜻도 있지만 본문에서는 ‘다시 본다’ 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날따라 다시 보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아담과 하와는
영안이 열려있었습니다.
그동안은 하나님의 말씀이 여자를 지배하고
있어서 그 나무를 잘 보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먹지 말라고 하셨기에 못 먹는 것이기에,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뱀이 유혹을
하니까 다시 보게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자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까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별것 아닌 줄 알았는데 먹음직합니다.
보암직합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습니다.
천주교와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에는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줄 것 같아서“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냥 본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쳐다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결국 하와는 영안이 감기어지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육안이 열렸습니다.
그 열매를 따먹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분별력이 약해졌습니다.
사랑도 식어졌습니다.
이 3가지는 영안이 닫힌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거들입니다.
열왕기하 6장에서도 엘리사의 사환이나
이스라엘 왕, 아람의 군사들이 모두 영안이
닫혀있을 때 두렵고, 분별력도 사라지고,
사랑도 식어지고 용서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려있던 엘리사는 두려움보다는
평강이, 지혜와 사랑이 그를 지배했었습니다.
영안이 열려 에덴동산에서 살 때는 한 번도
두려움이 없었는데 영안이 닫히고 육체의 눈이
열려버린 후로 두려움 생겼고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 숨게 되었습니다.
영안이 열렸을 때는 한 번도 유혹의 대상이
아니었던 선악과가 영안이 닫히고 육체의
눈이 열리니 먹어도 되는 나무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분별력이 없어졌습니다.
영안이 열렸을 때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 이었던 사랑과 관계가 깨어지고,
책임을 전가시켜야 하는 그저 그런 사이가
되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하와를 고발하고,
하와는 뱀을 고발하게 되었습니다.
두렵지 않던 날은 없었습니다.
단지 그 두려움을 어느정도 느끼냐의 문제입니다.
믿음이 사람, 소망의 사람, 인내의
사람에게는 영안이 필요합니다.
영안이 열리면 육체의 소욕앞에서
감긴눈이 되어버려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혹 앞에 영안이 닫히면 동시에
육체의 모든 것들이 살아납니다.
나는 오늘 영안이 열려있는 사람입니까?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