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전주
결론은 중국에도 전주가 있고 우리나라의 전주와 지형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아래 글은 참고하세요^^
중국 전주지도에 나타난 완산
1) 완산, 기린산 등 동일지명의 존재
중국 전주에 존재하고 있는 지명중 주목되는 것은 완산(完山)의 존재이다. 이는 전주(全州)앞을 흐르는 상천강 건너편에 존재한 산으로 지표표고 약 50m 정도의 높지않은 산으로 전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산이다. 또한 더욱 주목되는 것은 전주에서 완산을 바라볼 때 좌측에 전주를 완벽하게 조망하고 감제할 수 있는 기린산이 존재하고 있는 점이다. 이 산정상에는 진상탑이 세워져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데 한국 전주의 양상과 거의 동일한 상황이다.
이같은 내용은 청대에 만들어진 전주 풍수관련 지도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전주를 둘러싸듯이 강이 흐르고 있으며 강 건너편에 완산이 존재하고 완산 바로 위의 산이 기린산으로서 특히, 이산은
전주와 관련되어 홍수 등 자연재해를 막기 위해 지역민들이 모여 기원하는 제사처로서 기능하는곳이었다. 이를 계승한 것이 현재 산 정상에 존재하고 있는 鎭湘塔으로 한국 전주의 기린봉이 갖는 종교적 기능과 매우 흡사함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한국 전주의 기린봉은 과거 성황사가 그 곳에 위치하여 전주지역민들의 안녕과 개인적 기원사항을 빌던 곳으로 전주를 감제하는 진산적 성격의 산으로 중국 전주의 양상과 매우 흡사하다.
2) 금산사(金山寺)의 존재
한편그림 중국 전주지도에 나타난 완산
중국 전주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금산사의 존재이다. 금산사는 한국의 경우 전주와 관련되어 가장 중요한 사찰로 특히, 眞表에 의해 미륵 점찰도량으로 성장한 호남 최대의 사찰중 하나이며 후백제시기 견훤왕의 원찰과 같은 사찰이었다. 특히,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유폐되기도 하였던 사찰로 후백제를 상징하는 사찰로서 전주와 함께 기억될 존재였다.
그림 중국 금산사유지 전경
이같은 금산사의 명칭이 중국 전주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우선 청대에 제작된 고지도에 나타난 금산사를 보면 金山寺와 金山寺官이란 명칭이 두군데에서 확인되고 있다. 한편, 금산사에 대한 현재의 기록은 全州縣 유지가 존재함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중국의 전주총도에 보이는 금산사
중국의 금산사는 中國 桂林市 全州縣 ?塘鄕 金山村에 존재하고 있는 데 1930년대 국민당 군대의 군 주둔지와 병원으로 사용되었고 문화혁명시기에 훼파되어 최근까지 학교로 사용되었다가 현재는 방치되고 있다. 주목되는 점은 사찰관련 비석들이 파손되어 학교건물 건축자재로 사용되고 있는 점이다. 또한 사찰영역 초입에 우리의 석장승 형태의 석조물이 “南無阿彌陀佛”이란 명문을 몸체 돌에 새긴 채 길옆에 세워져 있어 매우 흥미로웠다. 그 지역민들은 이것의 용도와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어 아쉬웠지만 金山寺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검토해야할 자료로 이해된다. 또한 사찰관련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금산사의 내력과 연혁을 추론할 수 있는 몇가지 단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사찰 뒤의 부도탑에서 “臨濟正宗 37世 嗣祖 沙門 金山歸一和尙”이란 명문의 비석을 확인한 점이다. 또한 파손된 비문중 ‘千載之後’라는 표현을 찾아내어 적어도 이 사찰의 연원이 천년이상을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즉, 금산사의 연원이 천년정도의 내력을 갖는다면 이는 후백제가 붕괴되고 이 지역에 전주라는 지명이 사용되기 시작한 939년의 연대와 같은 시점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따라서 이 문제는 차후 보다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자료검토와 조사가 요청되는 부분이다.
중국 금산사 유지 전경 또한 직접 조사하지 못한 또 다른 ‘金山寺官’이란 지명이 보이는 곳도 큰 사찰유지였다는 현지인의 언급을 감안할 때 이들 사찰의 성격에 대한 체계적 조사가 시급한 상황이다. 이상의 자료에서 확인하였듯이 중국 계림시 전주현은 우연히 명칭이 동일한 지명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전주와 상당한 관련성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지역임을 확인할수 있었다.
즉, 지명에 있어 전주뿐만 아니라 전주현에 완산, 기린산 등 한국 전주에 존재한 대표적인 산의 명칭뿐만 아니라 이곳 지세와 유사한 배치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금산사라는 사찰까지 그 명칭이 동일하게 존재하고 있다. 또한 민속신앙과 관련하여 우리의 전통적인 솟대신앙이 동일한 형태의 신앙과 조형물로 남아있으며 제사에 사용되는 가장 중요한 구리북에 남겨진 문양의 경우 우리의 청동기시대 이래의 일광경 모습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이같은 관련성을 더욱 강화시켜준다.
이같은 연관성은 결국 주민이동이란 상황을 설정하게 되는 데 주목되는 사실이 중국 전주명칭이 939년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후백제가 붕괴된후 3년뒤의 상황으로 이 지역이 후백제가 가장 밀접하게 대외교류를 진행하였던 오월, 후당지역과 바로 연결된 지역이란 사실이다. 이는 후백제가 붕괴되기전 이미 활발한 해상교류가 현재의 절강성 해안지역 등에서 진행되었고 과거 신라방 등과 같은 거점이 유지되다가 후백제 붕괴이후 체류민 및 후백제 유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들 중 일부가 당시 그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던 초왕 마희범과 연결되어 ‘전주’ 명칭이 연결되었고 이후 이 지역에 상기한 것과 같은 여러 명칭과 잔영을 남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파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