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토요일 밤 12시 인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시청앞까지 버스타고 와
친구 차를 기다렸습니다.
서울 시청앞까지 간다고 했는데
그 친구는 의정부 시청이라고 생각 ㅎㅎㅎㅎ
의정부 시청에서 서울시청까지 30분 만에 오더군요
포천시까지 데려다 주고 덕정의 자기 집으로 가고 포천시에 세워두었던 차를 타고 집에 오니 새벽 3시 30분!
어젠 저녁에 잠들어 12시간을 잤습니다.
지난 주 월요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다섯시 삼십분 포천 터미널에서 인천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이러저러하고 뱅기를 탔습니다.
중국 텐진 상공에서 안개가 짙어 40분을 떠 있다가 인천으로 회항했습니다.
ㅋ 다시 짐을 찾아 나오고
오후 7시 북경으로 가는 뱅기에 다시 태워줍디다.
점심을 뱅기에서 먹었는데 다시 저녁을 뱅기에서 먹었습니다.
여권에 중국행 도장이 하루에 두개 찍혔습니다.
중국 북경에 가는데 하루종일 걸렸습니다.
다음날 북경에 첫눈이 온 것이랍니다. 그래서 참 좋은 날 왔다고 합디다.
북경 장애인 직업훈련원 제 2기 졸업식이 금요일에 있어 여차저차 겸사겸사 간 것입니다.
물론 우리 한국 사람들이 세운것입니다. 숙식제공하고 모두 무료지요 당근
졸업식도 있고 졸업 발표회도 했습니다.
컴퓨터 반과 피아노 반 30 여명이 일년간 훈련하고 졸업 발표회를 했지요
왕복 뱅기 값으로
여행사 패키지 상품을 인터넷에서 찾아 삼박사일 북경을 구경했습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인데
첫날은 뱅기타고 오고 가고 오느라 다 까먹고
목요일은 아침에 일어나 뱅기타는게 일과 전부이니
사실 이틀간 귀경시켜줍디다.
그래도 가 볼데는 다갔습니다.
만리장성 귀경하고=눈이 와서 다 녹지 않아 엄청 미끄러봐서 난간을 잡고 오르고 내리오면서 미끄럼 탔습니다.
천안문, 자금성 귀경하고 -엄청 넓어서리 혓바닥만 내밀고 수박을 돌렸습니다. 마침 일부 공사중이라 대충봤습니다.
인력거-자전거에 두사람 앉는 수레 달아논 것- 타고 400년된 옛날집 뒷골목돌고 전통가옥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집주인이 장씨라서 반갑게 악수-종친이라서리 ㅎ- 장삼이사 라고 중국에 7500만명이 장씨이죠
세째날 저녁은 옥류관에서 먹었습니다, 북한 식당에서 한정식으루다- 마침 버스 두대로온 관광객덕에 많은 노래 들었죠
-휘파람을 비롯해서 반갑습네다등등 -우리 패키지 여행팀은 10명뿐이었죠
목요일 여행팀이 돌아가고 공항에서 직업훈련원 사람을 만나 한국사람이 많이 사는 왕징 (望京)의 아파트에 짐을 풀고
외곽에 위치한 직업훈련원을 둘러 보았습니다.
대부분 장애를 가진 아이들입니다.
중국 각지에서 온 아이들이죠
소아마비인 아이, 눈이 안보이는 아이, 약시, 몸이 뒤틀린 아이--아이??ㅎㅎ 16 세~ 24세 입니다.
눈이 안보여도 피아노를 열심히 배운 아이도 있습니다.
악보, 콩나물 대가리를 평생 귀경 못한 아이들인데 숫자로 1.2.3.4.5.6. 숫자로 표기해서 배웠답니다.
무조건 외운거지요
컴퓨터도 난생 처음 대한 아이들이 파워포인트를 사용하고 동영상을 띄우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다음날 오전 11시 졸업식을 감격스럽게 치루었습니다.
30여명의 학생들 부모들이 보통 기차를 읿박이일 타고 와서 참석했습니다.
한 학생만이 부모가 못왔답니다.
기차로 삼박사일 와야 하는데 경비가 없어서 못온거이지요- 그 학생은 계속 훈련원에서 다음기수에 조교로 일하기로 했답니다
더 컴퓨터를 배워야 하기도 하고 실력과 열성도 있다네요 졸업식후 한달간 집에 가서 구정을 쇠고 오라했다네요
혼자만 부모님이 못와서 안쓰러워 차비에보태라고 얼마간 선생님께 전해주라고 드렸더니
저녁시간 졸업 발표회 후에 촉촉히 젖은 눈으로 고맙다고 인사를 하더군요
넉넉히 주지 못해미안했는데---
1회 졸업식땐 하지 않았던 졸업연주회겸 발표회를 저녁에 호텔에서 열었습니다.
현지의 엘지 사장 ,삼성의 부장 시당국의 간부,등등 한국인 출판사 사장님, 제과점 사장님-이 제과점 사장님은 그날 팔고 남은
빵들을 전부 이 아이들에게 가져다 줍니다.-
엘지와 삼성에선 훈련원에 에어컨, 히타를 방마다 기증해 주셨습니다.
한인교회에선 저녁 뷔페를 직접 만들어와서 주셧구여
한국 사람들이 현지의 장애인들을 위해 애쓰는 것을 중국 당국도 인정해주어서 여러면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의수족 공장을 하는 회사에서도 졸업 발표회를 보고 돕겠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손에 흥건히 땀이 나도록 긴장하여 피아노를 연주하고 끝나면 입술을 깨물며 잘못한 것을 부끄러워 하면서도
수많은 사람 앞에서 연주했다는 자랑스러움이 묻어나더군요
다음날 훈련원의 자급자족을 위한 농장을 둘러 보았습니다.
아직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여기저기 벽돌을 쌓고 정리 중이었죠 인력이 부족한 상태거든요
맘에는 여기서 몇달 일하며 있고픈 생각이 들었지만- ㅎㅎ 핑게가 많네요
부실한 몸이 생각만 앞서네요
한국에 돌아가면 젊은 사람들을 모집해서 와야겠다는 생각이 나더군요
여기 직업훈련원이나 농장에 일하시는 분들은 거의 자비량으로 와서 일합니다.
그래서 거의 60세 전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