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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의 개념
사진은 현대문화의 매신저로서, 예술로서, 그리고 사회, 과학, 교육, 군사, 정보, 통신 등 다방면에 걸쳐 필수불가결한 문명의 이기로 활용되어지고 있다. 이는, 결국 사진 없이는 어떤 분야도 정확한 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사진을 두고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의 '말'이라고 한다. 그것은 강렬한 형태의 시각언어이다. 사진은 문자나 말과 달라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전달 기능을 갖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강렬한 언어가 될 수 있다. 왜냐 하면 사진만큼 정확하고, 빠르고, 편리한 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진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이해가 가능한 유일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써 전 인류의 보편적인 언어가 되었다.
이와 같이 사진이 국가적, 문화적 장벽을 넘나들고 이해되어짐으로써 오늘날의 지구촌은 바야흐로 사진 없이는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 질 수 없는 「영상시대」가 도래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생활에서 사진이 많이 쓰여지는 곳은 신문이나 잡지, 광고물 등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영상에 묻혀 살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매체들은 이미 읽는 시대에서 보는 시대에로 탈바꿈 시켜 놓았다. 이 매체에서 가장 기초가 되고 그 주역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향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사진은 어느 시각매체보다 직시적 기능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세계를 이해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사진가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골목안 풍경에서부터 멀리는 아프리카 원주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전쟁과 평화와 사랑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본대로, 느낀대로 찍고 있다. 일반적인 사진의 통념은 빛의 에너지에 의한 광학적 변화를 영구적인 이미지로 기록하는 과학 또는 기술이다. 이렇듯 과학․기술이 사진에 미친 과대한 공적은 명확하다. 그러므로 사진예술은 카메라 메커니즘과 화학적 프로세스에 예술적 가치를 부가한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진은 종래의 '필름, 현상, 인화'라는 개념과는 달리 그 정의를 더 넓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컴퓨터에 의한 영상 테크놀로지와 그 주변의 디지털 시스템은 인류의 예상을 훨씬 능가하는 속도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를 향한 앞으로의 사진 또는 사진가란 개념 정의도 변해져가야 할 것이다.
2. 사진의 본질
사진의 본질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말은 이 한마디 밖에 없을 듯하다. 그러나 사물의 형태로 나타날 뿐인 사진을 "말[이야기]"로 보는 까닭은 어디 있을까 거기에는 다음의 두 가지 근거에 기초를 하고 있다.
첫째, 사진은 어느 시각 매체보다도 지시적 기능이 강하다. 사진의 구체적 지시성이 사진을 어느 시각 매체보다도 가장 말[이야기]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TV나 영화, 비디오 등도 언어없이 구체적 지시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영상이 사진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둘째, 표현된 모든것은 전부 언어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무엇인가 표현하고 전달하려는 내용을 가지고 표현되었고 전달되었다면, 그것은 표현, 전달이라고 하는 언어의 기본적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사진 역시 무엇인가 표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다른 예술 매체와 마찬가지로 언어적 기능을 그 밑에 깔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시 말하면, 넓은 의미에서의 언어적 기능으로, 결국 예술이라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의 언어행위인 것이다. 우리 생활에서 사진이 제일 많이 쓰이고 있는 곳은 신문과 잡지일 것이다.
신문 잡지에 쓰이는 곧 기사의 내용 증명과 함께 이를 구체적으로 보충,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한다. 기사의 내용이 사실임을 증명 한다거나, 구체적 사실을 설명한다는 것은 이미 언어적 역할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신문광고나 포스터 등에 쓰인 사진은 또한 무엇일까? 상품이 살 만한 것이니 사서 써 보라는 권유의 말로 쓰인 것임이 너무나 자명하다. 때문에 그런 사진은 질감이라든가 모양을 생생하게 찍어, 보는 사람이 상품을 믿고 살 수 있게 도와준다. 결코 그림으로서 감상하기 위한 대상으로 찍은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사진이 언어라고 하는 것은 위에서 말하듯, 실질적인 사진에서만이 아니라 예술로서의 사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보도사진이나 기념사진과 전혀 다른 곳에 예술사진이란 형식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부터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사진이나 기념사진이 외형상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영상 이라고 하는 똑같은 바탕 위에서 심리적 가치에 따라 예술이야 아니냐가 판단될 뿐 예술사진이라고 하는 특정 분야는 있을 수가 없다. 즉 예술적인 말[이야기], 곧 문학작품이 일상적 언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듯, 예술작품으로서의 사진 또한 일상적 사진이 그 바탕이 된다. 예술로서의 사진이건 일상적 사진이건 언어성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3. 사진의 특성
사진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진의 특성을 잘 알 필요가 있다. 각각의 예술 매체는 고유한 특성이 있어서, 그 특성을 살려 그에 맞는 작업을 할 때 그 작업은 성공하고, 반대로 특성을 살리지 못하면 헛수고가 되고 만다. 사진의 경우 사진적 특성의 체득은 매우 중요한 것이로, 사진이 쓰이는 범위가 한 없이 넓기 때문에 이렇게도 또 저렇게도 오해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느 한쪽으로 몰고가면 자칫 사진에 올가미를 씌우는 꼴이 되고, 풀어 놓으면 의미 규정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사진의 특성을 이해함이 올바른 사진 작품을 제작하는 지름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의 특성은 사진가의 의식과 이어지는 내적 특성과 사진 영상 형성의 외적 특성의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가 있다. 내적 특성은 사진의 의미를 결정지어 주는 요소로서, 현실을 잘라내어 고정시키는 것이라고 하는 사진의 특성에 따라 현실성, 우연성 그리고 고립성의 세 가지 면이며 외적 특성은 영상 형성 과정에서 생기는 메카니즘 특성으로, 복사성과 자동성의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4. 사진의 역사
가. 사진의 시작 - 카메라 옵스큐라 (Camera Obscure)
사진은 19C 수많은 발명품 가운데 하나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당시 화가의 그림에만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 그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정교한 세부묘사를 보여주는 사진은 그야말로 신기한 발명품이었다. 이러한 사진이 등장하기 까지는 두 가지 과학적 과정을 거쳐서 완성될 수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광학적 속성을 가진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e)이다. 당시 서구 예술가들에게는 좀더 사실적인 묘사와 원근법인 착시가 요구되어졌기 때문에 보다 더 가깝게 접근하기 위해 연구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사진을 등장시킨 또 하나의 요인은 화학적 속성으로서의 은염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카메라 옵스큐라에서 만들어진 생생한 장면들을 직접 따라 그리지 않고는 그대로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나 은염류를 사용하여 상을 고정시킴으로써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준 것이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카메라가 발명되기 훨씬 이전인 BC 4C.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태양의 일식을 관찰하면서 암상자의 원리에 주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암상자의 원리 즉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와도 같은데 어두운 방(어두운 상자)의 한쪽 벽 가운데에 작게 뚫린 구멍을 통하여 들어오는 빛이 방 바깥쪽 세상에서 일어나는 장면들 예를 들면 원근감, 다양한 색채, 그림자, 미세한 움직임 등이 구멍의 맞은편 벽면에 거꾸로 맺히는 것을 말한다. 이 암상자에 빛이 들어오는 구멍이 커지면 커질수록 상은 흐려지고 작아질수록 상이 선명해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지금의 카메라 조리개 역할과 같은 것으로서 그 구멍을 가르켜 '바늘구멍'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에서 바늘구멍의 크기에 의해 상의 이미지가 뚜렷해지는 것에 착안하여 어떻게 하면 좀더 사실적이고도 뚜렷한 상을 얻을 수 있을까 연구하면서 초기의 카메라 옵스큐라에서 한 단계 발전시켜 이탈리아 수학자였던 제롤라모 카르다노 (Gerolomo Cardano)가 렌즈를 부착하게 되었다. 이보다 조금 더 발달된 형태는 현대적인 반사경식 카메라를 닮은 것으로 기존의 상자 맞은편에 상이 맺혀지는 것이 아니라 상자 윗부분에 젖빛 유리가 씌워지고 그 바로 밑에 45도 각도로 거울을 위치시켜 빛이 렌즈→거울 →반사→유리를 거쳐 상을 맺게 하였다. 렌즈를 이용하면서 화질의 개선은 확실히 이루어졌으나 약간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때 쓰인 렌즈는 확대경 유리 같은 둥근 접시꼴로 깍여진 즉 볼록렌즈(Barbaro)였는데 이 렌지에 의해서 형성된 상을 평면에 그 상의 끝부분이 왜곡되어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호형으로 깍아 만든 서로 다른 반경을 지닌 두 렌즈의 조합. 즉 오목렌즈와 볼록렌즈로 왜곡되지 않은 정상적인 상을 선명히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처음 암상자 형태로 만들어진 카메라 옵스쿠라는 1657년 카스파르 쇼트에 의해서 만들어졌는데 초기에 이 카메라 옵스큐라는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가도 될 만큼 큰 방이어서 유용하게 사용되지는 못했으나 큰방 형태에서 오두막 형태로, 오두막 형태에서 가마형태로, 천막형태로 그 크기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이후 17C에 이르러 요한 찬에 의해서 운반이 가능한 암상자 형태에 이르기까지 축소되고 18C에 들어서는 다양한 형태와 규격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사진의 효시인 카메라 옵스큐라는 11C-16C의 숱한 저술에서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와 천문학을 이용한 방법이 소개되었지만 처음부터 사진을 위해 쓰이지는 않았다. 사실상 이 원리가 많이 알려지게 된 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계에 알려지면서 부터였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1519년에 카메라 옵스큐라를 드로잉(drawing)하는데 최초로 이용하기 시작하여 화가들에게 그림 그리는 도구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당시 화가들에게는 창의적 미를 추구하되 사실적인 묘사와 원근법을 기본으로 할 것이 요구되어졌는데 여기서 카메라 옵스큐라는 무엇보다도 사실적인 표현과 원근법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었기에 화가들이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카메라 옵스큐라는 비록 화가들이 아닌 일반인들이라 할지라도 그대로 따라 그리기만 하여도 그림이 완성되는 놀라운 위력을 보여주었다. 또 다른 드로잉 도구로는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라는 것이 있었는데 윌리암 울러스턴(Dr. William Wollaston)에 의해서 1807에 디자인된 것이다. 사용법이 카메라 옵스큐라보다 어려워 일반인들이 쉽게 사용할 수는 없었다. 카메라 옵스큐라와 카메라 루시다 모두 수많은 미술도구중 하나로서 평면위에 공간과 입체를 재현시키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많이 사용되어졌다. 특히 서투른 화가들에게 예술적 결함을 메워 줌으로서 현실을 포착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가능하게 해주는데 도움을 주었다.
사진이라는 것은 한 순간에 일어나는 상황을 빛의 활동에 따라 민감히 반응하는 물질위에 고착시키는 것인데 카메라 옵스큐라에서 사실재현은 가능했지만 그 상을 그대로 고정시킬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은염류에 빛을 비추면 급격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를 이용하여 상을 고정시키려는 일련의 노력으로 마침내 사진을 탄생시킬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샘이었다. 은염류에 대한 언급은 13C 알베투스 마그누스, 16C 제오르지우스 파브리쿠스 등이 그 특성에 주목한데서 시작하였지만 사실상 17C에 이르러서 은염류가 검게 변하는 현상이 관찰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검게 변화하는 원인을 잘못 파악하였다. 즉 은염류가 변하는 것이 공기나 태양열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빛의 영향에 대해서는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18C에 이탈리아의 바티스타 베카리아는 실험을 통해 은염류에 대한 빛의 작용을 밝히는데 성공하였다. 나아가서 은염류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관찰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는데 우선 연금술사인 크리스토프 아돌프 발두인(Cristoph Adoph Balduin)의 경우 발광물질의 제조를 위한 실험과정에서 탄산칼슘이 질산 속에서 용해되어 질산칼슘을 생성하여 이 화합물의 침전물을 증류시 증류기 속에 가라앉은 앙금이 가열되어 빛을 발하는 것을 발견하고 이 앙금을 '빛의 운반자'라는 이름의 포스포러스(Phosphorous)라 지칭하였다. 이후 1727년 독일의 요한 하인리히 슐체(Johann Heinnrich Schulze)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그는 발두인의 실험을 기초로 하였다. 단 발두인은 순수질산을 이용한 반면에 슐체의 경우 질산에 은을 함유하였다. 그러므로 탄산칼슘을 질산은에 용해시켜 만들어진 혼합물을 얻었는데 이 혼합물이 빛에 노출되었을 때는 진한 보라색으로 변하지만 가열했을 경우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을 관찰하고 공기나 열에 의한 것보다 빛에 의해 변한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혼합물을 '어둠의 운반자'라는 이름의 스코토포러스(Scotophorous)라 이름을 붙였다. 뒤이어 화학자들은 즉시 슐체의 실험을 반복하였고 18C 말에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상을 고정시키는 방법이 완전하지는 못했지만 잠재적인 형태로나마 존재하게 되어 사진이 탄생된 마지막 준비작업을 실상 끝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 토마스 웨지우드(Thomas Wedgwood)와 헬리오그라프
(Heliography)
영국태생의 토마스 웨지우드는 카메라 옵스큐라에 맺혀진 상을 영구히 기록해보려는 일련의 시도를 한사람 중 하나이다. 그는 도공의 아들로서 도자기 장식을 위하여 스케치를 하였는데 예술적인 소질이 부족하였기에 어떻게 하면 좀더 스케치를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그 당시 예술가들에게 미술의 도구로 이용되었던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하여 손으로 그리지 않고서 이미지를 새길 수 있었다. 따라서 카메라 옵스큐라를 능숙히 다룰 수 있었고 또한 슐체가 발견했던 은염류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응용하여 상을 고정시키는 실험을 하게 되었다. 웨지우드는 1800년이 되기 이전부터 빛에 민감히 반응하도록 질산은을 흰 종이나 가죽등의 재질에 입혀 감광성을 부여한 뒤에 사물 등을 올려놓고 광선에 노출을 시키면 그 사물의 자취가 네거티브 실루엣으로 만들어내는 실험을 하였다. 그러나 종이 등에 네거티브로 표현된 것을 밝은 곳에 놓아두면 금새 모두 검게 변하게 되어 영구적이지는 않았다. 즉 광선으로 형성된 상이 나중에 밝은데서도 변질되지 않고 이미지를 고정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흰부분이 계속 흰부분을 유지하지 못하고 검은 부분도 계속 검은 부분을 유지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처음 새겨진 이미지 상을 보존하려면 어두운 암실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빛이 있는 곳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이 정착과정이 웨지우드에게 큰 걸림돌이었고 결국 이것을 해결하지 못한 채 1805년 34세의 나이로 아무런 보람도 느끼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웨지우드의 이러한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착과정을 완성시키지는 못하여 완전한 사진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사진의 발명에 큰 틀을 만드는데 기여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 헬리오그라프 (Heliography)
본격적인 사진의 시작을 열었던 사람은 프랑스의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Joseph Nicephone Niepce)였다. 그는 프랑스에 소개된 석판기법을 접하면서 석판의 가장 큰 특징인 복제를 사람의 손으로 직접 이용하는 불편함을 해결하여 좀더 쉽게 대량으로 복제할 수 있는 기법을 생각하였다. 그는 토마스 웨지우드처럼 사람의 손이 직접 이용되지 않고 단지 태양 빛의 활동만으로 사진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끊임없는 연구를 하였고 그결과 웨지우드가 완성시키지 못한 정착과정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처음에 그는 웨지우드가 사용했던 염화은으로 실험을 하였으나 1817년에 은염류와 마찬가지로 유태의 비투먼 bitumen of judea (역청. 타르의 일종으로 빛에 민감한 아스팔트 형태의 끈끈한 물질)이 빛에 민감하다는 사실과 빛을 받은 뒤에는 기름 속에서 녹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를 이용하여 상을 정착시켰다.
그 과정을 볼 것 같으면,
라벤더 기름에 비투멘을 녹여서 백랍판(White Petroleum)에 입혀 감광성을 부여한다. 광선에 노출을 시키면 밝은 광선이 닿는 곳은 비투멘이 단단히 굳어지고 밝은 광선이 닿지 않은 나머지 부분은 부드러운 상태를 유지하여 네가티브 실루엣을 얻는다. 노출에 의해 상이 형성된 백랍판을 라벤더 기름에 다시 담그면 광선이 닿지 않은 부분의 비투멘이 부드러운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용해되고 제거되어 상을 정착시킨다. 수세 후 건조시킨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상을 정착시킬 수 있었고 이 방법을 통해서 얻어낸 사진을 '헬리오그라프'라하여 태양(Helios)+그림(Graphos)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헬리오 그라프 방법으로 완성된 세계 최초의 사진은 1826년 프랑스 중부의 작은 도시 샬롱-쉬르-손 주변의 생-루-드-바렌 소재의 그라에 있는 자신의 별장 작업실 2층 창에서 촬영한 것으로 백랍판 16.5*20cm의 크기로 제작되었다. 이 사진은 8시간이라는 긴 노출시간 끝에 얻어졌기 때문에 8시간 동안에 해가 움직여서 해가 지나간 자리만 남고 실제 해는 나타나지 않는 장면을 연출시켰다. 니엡스는 태양의 광선으로 빚어 낸 이미지를 잡아내고 정착시켜 사진을 보존 가능한 상태로까지 완성시키기는 했으나 더 나은 사진의 발전을 위하여 연구하던 중에 1829년 12월 4일에 디오라마로 유명한 루이 자끄 망데 다게르와의 동업관계를 형성하고 그와 함께 꾸준한 연구를 하였으나 4년뒤인 1833년에 니엡스는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다.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과 칼로타입(Calotype)
이 방법을 고안해낸 루이 자끄망데 다게르(Louis Jacques Mande Daguerre)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다게르라는 사람은 원래 화가로서 스위스 알프스 산과 같은 웅장한 자연을 대형의 투명한 스크린에 그린 그림과 특수한 조명을 이용해서 보여주는 디오라마(Diorama)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그 또한 디오라마의 밑그림을 그릴때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1829년 12월에 헬리오그라프를 완성시켰던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의 제안으로 동업관계를 형성하여 사진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는데 니엡스의 죽음으로 동업기간은 4년에 그치고 다게르 혼자서 연구를 계속 진행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동업관계를 맺은지 10년이 지난 1839년 12월 7일에야 비로소 최초의 실용적인 사진처리 방법을 고안해 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다게레오 타입'이라 불러지는 사진으로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발표되었는데 헬리오그라프와는 달리 인간의 눈으로도 관찰하기 힘든 세부 디테일까지도 보여주는 놀라운 사진 기법이었다.
그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은으로 도금해서 광택을 잘 낸 구리판을 사용한다.
상자에 요오드 결정체를 담아놓고 은이 도금된 면을 아래로 향하게 하여 구리판을 적신다. 그러면 [요오드 증기 + 은 -> 요오드화은]이 형성되어 구리판에 감광성을 부여한다. 광선에 노출을 시키면 광선의 강도에 따라서 요오드화은을 은으로 환원시켜 상을 형성시킨다.
상자에 가열된 수은을 담아놓고 노출시킨 구리판의 은면을 아래로 향하여 수은 증기와 반응하도록 한다. 수은 증기와 반응하면 광선에 노출된 부분은 아말감이 형성되어 상이 생성되나 광선이 닿지 않은 부분은 아말감이 형성되지 않아 화학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상이 생성된 판을 진한 식염수 속에 담근다. 이 과정을 통하면 더 이상 빛의 작용을 둔감하게 하기 때문에 태양 광선아래 다시 내어 놓아도 변하지 않고 정착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세척후 건조시킨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직접 양화방식(Positif direct)으로서 니엡스가 발명했을 당시의 희미한 이미지를 뚜렷히 드러내어 선명도를 높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다게르는 10년전의 니엡스와의 계약관계가 계속 유효하였기 때문에 니엡스와의 발명과는 별개의 발명으로 남고자하여 니세포르 니엡스의 아들 이시도르 니엡스에게 액면가격 1천프랑짜리 주식 4백매를 발매하여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므로써 다게레오 타입은 다게르만의 독창적인 발명으로 남게 되었다. 초기의 다게레오 타입은 노출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그 시간으로는 움직이는 물체나 사람들을 촬영하고 나면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주로 건축물이나 풍경등 주로 고정된 이미지를 주축으로 하여 사진 촬영에 임하였는데 일부에서는 사람들의 욕구에 따라 자신의 모습이나 가족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어하여 초상사진도 제작되었다. 그 당시 초상사진을 찍으려면 카메라 앞에 않은 사람들은 10분에서 20분 가량 처음 취한 자세와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어야만 초상사진이 완성될 수 있었기에 초상사진에 찍히는 인물들은 큰 곤욕을 치러야만 했고 이렇게 어렵게 얻어진 사진들을 보면 고통스런 표정이 가득하였다. 또는 오랜동안 카메라 앞에서 자세를 취함이 불편하여 짧은 노출시간으로 사진을 완성하고자 하여 강한 빛을 인공적인 방법으로 거울로 반사시켜 조명을 주는 방법도 채택되었으나 이 또한 조명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초상사진을 찍고자 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게르는 마지막 이 초상문제에 더 이상 혁신적인 개발을 이루지 못하고 1851년 사망하였다.
1840년 후반에는 다게레오 타입에 세가지 혁신적인 기술개발을 통하여 발전시킬 수 있었는데 그 첫번째가 비엔나의 피터 프리드리히 포히틀랜더(Peter Friedrich Voigtlander)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다게르의 렌즈보다 22배나 더 밝은 개량 렌즈를 선보였다. 이 개량 렌즈는 독일렌즈(Germn Lenses)라고도 불렀는데 이 렌즈는 빛을 많이 받아들이도록 되어있어 노출시간을 줄이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두번째 기술개발은 런던의 존 프레드릭 고다드(John Frederick Goddard)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감광판을 요오드화은으로 감광성을 입히는 대신에 할로겐으로 처리하여 빛에 대한 감광도를 한층더 높여 노출시간을 줄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세번째 기술개발은 프랑스의 이쁠리뜨 루이 피조(Hippolyte Louis Fizeau)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감광판에 금염류(도금)로 덧입혀 명암을 풍부하게 만들어 아름답게 표현되었고 부가적으로 도금을 통해서 표면손상도 덜 되어 견고해졌다. 이로써 가장 취약했던 노출시간은 1분정도로 줄어들어 초상사진이 보다 손쉬워졌고 명암도 탁월하게 표현되는 기술개발에 따라 초상사진관들이 많이 생겼고 그 생산량면에 있어서도 급증하였다. 1840년에서 1841년 사이에는 대도시 위주로 많은 사진관들이 경쟁적으로 들어섰고 따라서 시장의 원리에 따라 가격은 폭락하고 가격이 내려감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초상사진을 쉽게 찍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초기의 초상사진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에서 출발하였지만 19C에 이르러서는 소아의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심에서 가족사진 또는 초상사진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가 더욱 높아졌다.
위에서 살펴본 다게레오 타입의 큰 특징은 빛의 세부묘사가 풍부하여 선명도에 있어서 매우 탁월하고 명암의 대비가 실감나는 장면을 연출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원판이 단 한장으로 끝나서 복제가 불가능하였고 광택을 입힌 구리판을 이용했기 때문에 특정 각도로 기울일 때만 잘 보이지 다른 각도에서는 잘 안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판에 은을 입혔기 때문에 가격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인화되는 판의 두께가 얇아 쉽게 손상될 수 있었다. 물론 도금을 통하여 견고하게 만들어지는 발전이 있기는 했으나 이 또한 가격을 상승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독한 수은 증기 때문에 많은 사진사들의 건강에 매우 나쁜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단점이 많았지만 다게레오 타입만의 풍부한 세부묘사와 선명도가 훨씬 돋보여 제한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많이 쓰이게 되었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다게레오 타입은 소개된 각 나라와 지방마다의 상황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는데 특히나 미국에서 가장 크게 유행하여 많이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다게레오 타입이 제작된 것에 비하여 원판들에는 만든 작가들의 이름과 함께 현재는 거의 많은 부분이 유실되어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아마도 판화가들에 의해서 파괴되었다고 짐작하게 되는데 다게레오 타입과 같이 선명한 사진으로 인해 판화가 더이상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판화가 쓰이는 경우는 다게레오 타입이 다른 방법으로는 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복제를 위한 수단으로 한 걸음 후퇴하여 판화기법을 도입하였다. 다게레오 타입의 기술적인 특수성 때문에 또 다른 특수성. 즉 미적인 부분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다게레오 타입은 현실을 기록하는 기술적인 발명에 불과했다.
칼로타입(Calotype)은 다게레오 타입의 사진술이 발표되고 3주도 지나지 않은 1839년 1월 25일에 발표된 칼로타입은 영국의 윌리엄 헨리 폭스 탈보트(William Henry Fox Talbot)에 의해서 발명되었다. 그리스어의 '아름다운 그림'이란 뜻을 지닌 칼로타입은 감광처리된 종이를 사용하여 상이 생길 때 까지 빛에 계속 노출시키던 방법을 개선하여 짧은 노출시간으로 감광성을 띈 종이에 잠상을 맺게 하여 나중에 화학처리 과정에서 상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즉 극소수의 입자만이 직접적으로 은으로 환원되고 나머지 대부분의 입자들은 현상과정에서 증폭되어 은으로 환원되는 것을 말한다.
칼로타입의 제작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질산은과 옥화칼륨 용액속에 각각 종이를 담궈 옥화은을 형성시킨다.
몰식자 + 질산은을 혼합하여 '몰식자 질산은'이라는 혼합용액에 위에서 적시었던 종이를 담궈 감광성을 부여한다. 광선에 노출시킨다. 다시 몰식자 질산은에 종이를 세척하면 상이 서서히 떠오르게 현상된다. 초에는 취소칼륨으로 하였으나 후에는 뜨거운 하이포 용액을 사용하여 상을 정착시킨다. 현상된 종이 네가티브를 다른 감광성 종이에 밀착시켜 햇빛에 노출을 주고 인화한다. 지금의 밀착인화와 같은 원리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칼로타입은 1841년 2월 8일자에 탈보트에 의해서 특허를 취득 할 수 있었고 이어 1844년 6월과1846년 4월에 런던에 있던 롱맨 출판사와 브라운 출판사. 그린 앤드 롱맨즈 출판사가 《자연의 연필 The Pencil of Nature》이란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의 특징은 주로 건축이나 정물 등 움직임이 없는 사물이 많이 실려있으며 또한 네덜란드파 미술의 영향을 받아 일상에서의 장면들을 주제로 많이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기록위주의 다게르 사진과는 다르게 미를 주체적으로 창출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사진을 찍었다. 그의 작품중에서 <열린문 The Open Door>를 예를 들어 보면 집안의 창고문이 열린상태에서 빗자루가 세워져 있는 매우 일상적인 소재로도 미적 감각이 보이는 사진을 찍었다. 탈보트에 의해서 고안된 칼로타입을 예술적 형상으로 표현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데이비드 옥타비우스 힐(David Octavius Hill)과 로버트 아담슨(Robert Adamson)이었다. 에든버러의 화가였던 힐과 스코틀랜드의 회화 아카데미 서기였던 아담스는 1843년부터 1848년 아담슨이 사망하기 전까지 공동작업을 하였는데 이들은 사진에 대한 공동작업의 창시자로서 화가인 힐이 구도를 정하고 기술자인 아담스가 촬영을 하는 방법으로 작업을 진행시켰다. 이들이 공동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스코틀랜드자유교파 설립 시 에든버러의 집회에 참석한 457명의 집단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 힐에게 맡겨지면서 힐이 이때 사진술을 이용하기로 결심하고 당시 에든버러에서 전문 사진관을 열었던 아담슨에게 도움을 청하여 집단 초상사진을 만들게 되면서부터 이다. 이들은 6년 동안의 기간을 통하여 1500점 정도의 음화를 제작하였는데 이들의 사진에서는 회화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며 또한 사진속의 모델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특징을 잘 표현하여 단순 기록성의 사진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러한 칼로타입에도 기술적인 개선이 있어 왔는데 여기서는 세 가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우선 첫번째로 종이에 감광성을 입히기 전에 밀랍을 입혀 선명도를 높이는데 공헌 하였다. 그 과정을 볼 것 같으면 금속판에 밀랍을 입힌 뒤 금속판에 종이를 눌러 밀랍을 밀착시킨다. 습기를 제거하고 옥화칼슘과 질산은 용액에 각각 종이를 적셔 감광성을 부여한뒤 노출을 시킨다. 그리고 후에 몰식자산 용액으로 현상을 하면 깨끗한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두번째 기술적인 개선으로는 책이나 앨범 등에 사용하기 위한 복제사진의 대량 생산이라는 점이다. 블랑까르 에브라르(Louis Desire Blanquart-Evrard)는 인화시간을 단축시키는 인화지를 개발하였는데 이 인화지를 이용한 사진집에는 <사진앨범 Album Photographique>과 1852년의 <이집트.누비아.팔레스타인.시리아> 가 있다. 특히 '이집트.누비아.팔레스타인.시리아'에서의 사진은 문인이었던 막심 뒤 깡(Maxime Du Camp)이 중동지역을 여행하명서 촬영했던 음화를 인화한 사진이 들어있었는데 아마츄어였던 막심 뒤 깡이 과거의 여행을 통해 잊고싶지 않은 장면들을 남겨두고자 하는 욕망에서 제작했다고 한다.
세번째는 미국의 고고학자였던 존 그린(John B. Greene)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1854년에<나일강 : 기념비, 풍경, 사진적 탐험 Le Nil : Monumente, Paysages, Explorations Photographiques>에 나일강 연안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고대 이집트 유적들을 칼로타입으로 제작하여 사진집을 펴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칼로타입은 지금의 폴라로이드 방식처럼 은판으로 영상을 정착시키는 은판기법(PlaqueArgentee)인 다게레오타입에서음-양화기법(Processus Negatif-Positif)인 칼로타입으로 네가티브로된 몇장의 사진의 복제가 가능해져 보통사진의 기점으로 불리고 있다. 그렇다면 좀더 들어가 칼로타입의 실용적인 측면을 살펴보겠다. 영국에서의 칼로타입은 1852년이 될때까지 탈보트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칼로타입의 자격증 소지자에게만 쓰도록 허용하여 이를 어길 시에는 가차없이 고소장이 법원으로 날아갔으므로 거의 실용화되지 못하였고 미국에서의 칼로타입은 미국인들이 즐기던 다게레오 타입을 단정적으로 무시했다는 점과 칼로타입 사용시 영국과도 같은 방법으로 특허료를 지불하는데 반발이 생겨 실용화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홍보가 부족하기는 했으나 다게레오 타입처럼 번들거림이 없어 고상하게 보인다 하여 많이 애용하였다. 또한 칼로타입은 운반 면에서나 조작 면에서 살펴볼 것 같으면 그 과정이 쉬운 편이었고 색체반응에도 탁월한 특징이 있으며 완성된 사진에 색 덧칠도 가능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다게레오 타입처럼 은염류를 입힌 판을 사용하지 않고 종이를 사용하여 비용이 절감되는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라. 콜로디온 습판법 (Collodion Wet-Plate)
1851년에 개발된 콜로디온 습판법은 영국의 조각가였던 프레드릭 스코트 아처(Frederick Scott Archer)에 의해서 고안되어 1851년부터 젤라틴 건판이 나오기 시작한 1880년에 이르기까지 사진계를 장악했다. 처음에는 초상 사진가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서 칼로타입을 응용할 경우 특허료를 지불 해야만 하는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점차 콜로디온 습판 프로세서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장점들이 부각되어 인기를 누렸다. 칼로타입에서 쓰였던 종이류가 선명성 부분에서 뒤지자 종이 대신에 유리를 사용할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어 유리판에 은염류를 접착시킬 수 있는 것을 찾고 있었다. 처음에는 달팽이의 끈끈한 점액질 등과 같은 것을 사용하였으나 최초로 성공을 거둔 것은 계란 흰자위인 알부민(albumin)을 이용한 방법이었다. 이 알부민을 이용하는 방법은 1847년에 니엡스의 조카인 끌로드 펠릭스 아벨 니엡스 드 생 빅토르(Claude Felix Abel Niepce de st Victor)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한가지 단점이라면 빛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져 자연적으로 노출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이다. 또는 노출시간은 짧게 하는 대신 현상과정에서 현상시간을 늘려 줌으로써 만회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알부민은 빛에 대한 민감도가 떨어져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지는 못하고 다만 건축사진과 같이 고정된 상 앞에서 긴 노출시간을 주어 완성하는 사진에서 주로 이용되었다. 새로 발견된 것이 콜로디온 이라는 재료인데 이것은 알콜과 에테르에 니트로 셀룰로스를 녹여 만든 점액질 용제이다. 이것은 원래 인체의 손상된 피부조직을 보호할 목적으로 의학에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콜로디온은 빠른 시간 내에 건조되어 방수막을 띤 막을 형성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기에 젖은 상태에서는 점액질이지만 건조하게 되면 단단하고 투명해졌다. 따라서 유리판에 유제를 바를 때 손가락과 손목을 매우 유연하게 움직여 알맞은 시간조절로 콜로디온이 마르지 않고 골고루 퍼지도록 해야 했으며 콜로디온이 건조해지기 전 축축한 상태에서 노출과 현상과정을 끝내야만 했다. 따라서 콜로디온 습판법을 이용하여 사진을 찍으려면 완전한 암실 형태가 바로 옆에 밀착되어 있어야 했다. 특히 야외촬영을 나갈 때는 사진을 찍는 장소마다 암실 전체를 운반해야 하는 수고를 치뤄야만 하나의 사진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불편함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콜로디온 습판은 다게레오 타입에서 이룰 수 없었던 복제 가능성과 칼로타입에서 이룰 수 없었던 정밀함 이 두 가지 모두를 가지고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오랜동안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다음은 콜로디온 습판법을 이용하여 사진을 제작하는 과정이다.
이 방법으로 얻어진 콜로디온 습판은 네가티브(음각화) - 포지티브(양각화)를 만드는데 모두 사용되었다.
콜로디온에 옥화칼슘을 첨가하여 유리판에 입힌다. 유리판을 질산은 용액에 담근다. 은이온과 옥소이온이 반응하여 콜로디온 조직 내부에 옥화은이 생성되어 감광성이 부여된다. 감광판이 축축한 상태에서 카메라에 넣고 노출을 준다. 초성몰식자산 속에서 현상을 한다. 정착, 세척후 건조시킨다.
콜로디온 습판은 이후 크게 세가지로 응용되어 사용되어졌는데 우선 첫번째가 암브로 타입(Ambrotype)이다. 암브로 타입은 콜로디온 습판에 의해 형성된 상을 양화로 전환시키는 방법으로 은의 침전 상태는 밝고 그림자 부분은 투명한 음화의 상태에서 뒤쪽에 검은 종이 같은 것을 대면 양화로 보이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이 방법은 1839년에 존 허셜경이 주목하면서 연구되었고 결국 1854년이 되어 대중에게 발표되었다. 암브로 타입은 다게레오 타입과 같은 광택을 지니고 있었으며 제조가 쉬웠으나 콜로디온 습판의 또하나의 응용방식인 틴 타입에 의해서 단명하였다.
콜로디온 습판의 두번째 응용방법은 틴타입(Tintype)또는 메레노타입(Melainotype), 페로타입(Ferrotype) 이라고도 불린 방식으로서 콜로디온에서 쓰였던 유리대신 종이처럼 얇은 금속판에 감광제를 바르고 검은 색을 칠하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이 방법은 해밀턴 스미드(Hamilton L.Smith)에 의해서 고안되어 1856년에 특허를 취득하였다. 틴 타입이 인기를 끈 이유는 초상사진에서 고객이 기다리는 동안에 즉석에서 제작이 가능하였고 표면이 견고하며 다중렌즈 카메라 등으로 촬영하여 여러 장의 상들이 한번의 과정에서 나올 수 있어 가격도 저렴해갔다. 그러나 틴 타입 방식으로 찍은 사진들은 주머니에 들고 다닐 정도의 작은 크기로 제작되어 초상사진 등에서는 많이 이용되었으나 풍경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작아 풍경사진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암브로 타입이나 틴타입은 모두 콜로디온 습판을 응용한것으로 콜로디온 습판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 영향이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다게레오타입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 기술은 세번째 응용방식인 명함판 사진이었다. 명함판 사진(carte-de-vistite)은 당시 유아 사망율이 늘어나고 친구, 친지들의 단명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확산되어 그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으며 또는 서부 개척자들에게 있어서는 고향에 있는 가족, 친구들을 이어 주는 하나의 고리로서 명함판 사진을 찍었다.
명함판 사진은 1854년 프랑스의 앙드레 아돌프 으제느 디스데리(Andre Adolphe-Eugene Disderi)에 의해서 특허를 따냈는데 그는 명함판 초상사진을 대량 생산체제로 이끈 장본인으로 렌즈가 여러개 달린 카메라를 이용하여 한장의 음화에 여러개의 포즈를 찍어 인화지를 절단함으로서 여러 장의 사진을 완성하였다. 명함판사진은 말 그대로 보통 명함과 크기가 비슷하여서 붙여진 이름으로 그 크기는 4*2.5 인치로 대개 전신상이 제작되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는데 모방이 간단하여 기술자적 성향만 있으면 누구나 사진촬영이 가능했다. 사실상 명함판 사진에서는 초상사진으로서의 예술적인 심미적 가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미묘한 조명의 효과나 모델이 되는 사람의 자세나 표정 등으로 성격을 보여 주는 노력없이 단지 기록적 목적으로 사용되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진 한장 한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상업성을 바탕으로 단지 찍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명함판 사진은 1860년경에 와서는 친척, 친구, 유명인사들의 명함판 사진들을 수집하여 앨범화하는 작업으로 많이 진행되었다.
마. 초상사진 (Portraits)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남기고자 함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적 욕망으로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다. 자신의 모습을 담아 내려면 초상화가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초상화의 경우 왕실이나 귀족 등 대개 신분이 높은 사람들만의 전유물에 불과했다. 루이 마예, 에르네스트 마예 형제의 경우 채색 초상사진을 전문적으로 제작하여 사진 수정작업에 앞장섰는데 그들은 부유한 귀족이나 부유층 엘리트들 대상으로 적극적 상업전략을 펼쳐 성공을 거둔 사람들로서 후에는 황제의 전속 사진가가 되어 황실의 지원을 받아 가며 여유롭게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초상사진이 본격화되어 대중적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은 1854년 프랑스의 앙드레 아돌프-으제느 디스데리(Andre Adolphe-Eugene Disderi)에 의해서 특허를 받은 명함판 사진(Carte-de-Vistite)이 등장하면서 부터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급성장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고자 초상화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이러한 수요에 발맞추어 다량의 초상화를 그려야 했는데 공급이 따라가 주질 못했다.결국 사진을 이용하여 자신의 모습을 최단시간 내에 그려 냄으로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는데 다수의 부르주아 집단들의 초상사진을 신분 과시용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초기에 등장한 초상사진의 경우 귀족임을 드러내는 소품들 예를 들면 금장식이 되어있는 고급 의자, 커텐 등이 필수적으로 이용되었다. 평민들 중에서도 재정적으로 부유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 신분에서 한단계라도 끌어올리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초상사진의 새로운 고객으로 등장하였는데 이들을 가르켜 대중이라 지칭하였다. 이와 더불어 당시 유아 사망율이 증가하고 전쟁터에 나간 가족, 친지, 친구들과 오랜 시간 헤어져 있어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 엄습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상사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명함판 사진의 주요 고객으로 이제 대중들이 되었다. 더 이상 지식인, 예술인, 부르주아들의 장식품으로서의 명함판 사진에서 벗어나 대중으로 고객층이 바뀌었다. 따라서 명함판 사진은 여러 분야의 사진가들로 하여금 우선적으로 이익 추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처럼 명함판 사진은 단순한 개인 기록 위주의 사진이었다. 단순한 기록성 초상사진에서 벗어나 예술적, 창조적 초상사진은 대형판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는 프랑스의 나다르(Nadar)에 의해서 이룩되어졌다. 그의 본명은 가스파르 펠릭스 뚜르나숑(Gaspard Felix Tournachon)로서 본래 그의 직업은 신문 풍자 만화가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때 풍자만화가 금지되어 사진가로 전업하였다. 풍자 만화가로 활약할 당시 인물의 성격을 집약적으로 들어내는 얼굴의 특징을 포착해야 했기 때문에 풍자 만화가였던 때의 솜씨를 발휘하여 사진을 찍을 때에도 모델이 되는 사람들의 개성을 한껏 살려 창조적인 목적으로 초상사진을 제작하였다. 당시 초상사진은 자신을 과시하려는 생각에 귀족풍의 화려한 장식이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고 있었지만 나다르의 사진 스타일은 장식이 없이 모델이 무배경 앞에 서서 포즈를 잡아 깨끗하게 처리하였다. 그리고 보통의 초상사진처럼 전신상 위주가 아닌 신체의 3/4정도로 카메라에 담아 촬영하는 것이 그의 사진의 특징이었다.
다음의 글은 나다르의 사진촬영에 대한 생각이다.
"사진이론은 단 한 시간이면 배울 수 있고 기술적 기술은 단 하루면 익힐 수 있다. 그렇지만 가르쳐서 될 수 없는 것은 빛을 읽는 감각이다. 누구도 사진 찍히는 사람의 개성을 어떻게 포착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한 인간의 보다 내면적이고 심오한 차원에서 담은 사진을 제작하려면 즉시 그의 정신세계로 뛰어들어가 그의 기질을 파악해야 한다."
이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다르는 감각을 중요시 여기고 이를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중요시 하였다. 이처럼 초상사진으로 상업적 사진의 세계보다는 예술가적 기질을 바탕으로 사진관을 운영하고 자신의 작품에서도 예술적 심미감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사업상 뒤지지 않고자 많은 양의 초상사진을 제작하면서 사진의 질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당시의 사진관들과 경쟁하면서 자신의 예술성을 희생시켜 상업적 사진에 더욱 중점을 두고 육성하였다.
또한 나다르는 실험정신이 매우 강했던 사람으로 초상사진 작업에 만족하지 않고 여러 가지 새로운 것을 추구하였다. 그중에서도 초상사진에 인공 광원인 전기조명을 도입하여 촬영한 최초의 사진가들 중 하나로 남기도 했으며 또 1858년에는 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최초로 공중 촬영을 시도하여 파리를 촬영하여 공중사진의 길을 열어놓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또한 1861년에는 파리시의 지하묘지인 카타콤(Catacomb)과 하수도 사진을 촬영한 것으로 유명하다.
초상사진에 있어 또 하나의 길을 넓힌 사람은 영국의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Julia Margaret Cameron)이다. 그녀가 카메라를 처음 잡은 시기는 그녀의 나이 48세때 딸과 사위로부터 한대의 카메라를 선물 받으면서부터였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사진기를 잡는 사람들은 대부분 프로들이었는데 카메론의 경우는 아마츄어로 시작한 셈이다. 그러나 그 열정만큼은 프로들 못지않았다. 카메론 사진의 특징은 나다르와 마찬가지로 인물의 특징과 성격을 포착하여 사진에 새긴다는 점이고 또한 여성으로서 부드럽고 아름다움보다는 힘과 박력을 중심으로 사진촬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카메론의 초상사진에 모델들의 개성, 특성을 살려 촬영할 수 있는데에는 모델이 되는 인물들이 그녀의 가족이나 주변의 친구, 친지들로 이루어져 가능했던 일이었다. 카메론과 개인적으로 친분관계가 밀접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초상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모델이 되는 인물들의 성격을 평상시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깊은 애정과 이해, 통찰 등이 이루어졌으므로 사진 속에 그들의 특성이 묻어나올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찍은 초상사진을 보면 인물들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1867년에 찍은 토마스 카라이(Tomas Carlyle) 초상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역동적인 힘과 박력이 그녀 사진의 특징이다. 그리고 카메론이 추구했던 사진 기법으로는 사진에서 초점을 흐리게 하여 주변을 뿌옇게 하여 선명하지 않은 것을 도입했었는데 그것은 기술면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기대하는 효과를 어떻게 해서든지 끌어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행해진 방법이다. 이것은 초상사진 뿐만 아니라 활인화라 불렸던 시대극적 사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즉 가족이나 친구들이 카메라 앞에서 문학작품에서의 한 장면을 연출해 보이는 것을 통해 회화를 모방한 감상적 사진을 통해서 선명하게 처리하기 보다 마치 하나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도록 하였다. 카메론이 이러한 사진 기법을 도입하여 회화적 느낌을 부여한 것은 사진의 초점을 흐리게 함으로써 고상함을 불어넣어 예술적 측면으로 끌어올리려 한 것이다. 이러한 사진작업으로 카메론의 초상사진은 현존하는 초상사진들 가운데 가장 품위 있고 인상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마도 카메론에 대한 이러한 평판들은 그녀가 상업적 사진으로 생계를 유지함으로써의 사진 제작이 아니어서 돈의 제약을 떠나 사진촬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펼침으로서 가능했던 것 같다. 즉 카메론에게 있어서 사진은 수입원이 아니었고 예술적 표현수단의 하나로 밖에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바. 전쟁사진 (War Photography)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단지 귀향하는 군인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를 듣거나 시나 문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 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 간접적 경험에는 사진도 포함이 되는데 사진은 다른 장르와는 다르게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장면을 가장 생생히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사진의 가장 큰 특징인 선명함과 디테일한 세부묘사를 통하여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전쟁 상황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가장 처음 전쟁을 기록한 것은 1855년 크리미아 전쟁에서부터 출발한다. 이후 1861년 미국의 남북전쟁, 1936년의 스페인 내란과 중일전쟁, 이어서 제2차 세계대전, 1950년대의 한국전쟁, 1965년 베트남전쟁 등이 일어날 때마다 사진은 이용되어왔다. 초기에는 전쟁을 아름답게 미화하거나 낭만적인 장면으로 표현하기도 하였으나 점차 인간이 벌여놓은 가장 처참하고 잔인한 장면들, 인간의 삶과 죽음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특히 1930년대에 들어서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각종 포토저널리즘들이 생겨나면서 세계 각국의 수많은 독자들에게 전쟁 상황을 어떠한 설명이나 글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한다. 로저 펜튼은 영국 정부의 공식 사진가로 크리미아 전쟁에 파견되어 전쟁을 제일 먼저 광범위하게 사진으로 보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원래 법률에 관련된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나 사진가로 전업하여 크게 성공한 사람이다. 그가 사진가로 명성을 얻고 영국 정부의 공식 사진가로 임명받아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초기에 콜로디온 습판법을 이용하여 사진을 제작할 당시 기본 바탕은 콜로디온 습판법을 고안했던 프레드릭 스코트 아처(Frederick Scott Archer)의 방법을 지켰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수정을 가하여 감광처리 함으로써 유명해져 대영 박물관의 공식 사진가로 임명되면서 부터이다. 펜튼이 대영 박물관 사진가로 제직시 그의 탁월한 사진 솜씨가 인정받아 1855년에 발발한 크리미아 전쟁의 현장 사진을 제작하는 영국 정부의 공식 사진가로 임명되었는데 그가 영국 정부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는 전쟁터에 가족이나 친지들을 내보내고 걱정과 불안에 사로잡혀 있던 영국 국민들을 안심시키고자 함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따라서 펜튼 사진에는 흔히 전쟁사진에서 보아왔던 참혹한 시체들이나 공포스런 공격 장면보다는 광할한 평원과 치료를 받고 있는 병사, 제복 입은 사관이나 민간이의 초상사진 등이 대부분이어서 비극적인 전쟁을 표현하기 보다는 대개 낭만적인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펜튼의 크리미아 전쟁 당시의 사진들은 결코 목숨을 걸고 촬영한 사진으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평온해 보이는 전쟁터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타임즈지에서도 그를 표현하기를 「현대 군대의 뒤를 추적했던 이 사진가는 전투가 지나간 자리에 널려 있는 정물이나 병사들의 휴식을 담아내는데 만족했다.」라고 평할 정도였다. 그러나 광할한 평원에 밋밋하고 매우 단조로워 보였던 그 사진들도 사실은 목숨을 담보로 하고 제작한 사진이었다. 더욱이 펜튼이 사용한 사진법은 콜로디온 습판법이었기 때문에 모든 암실장비와 약품들, 그리고 몇백장에 이르는 유리 감광판들과 카메라를 늘 소지하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마차를 이용하여 암실을 차려놓고 폭탄이 투하되고 있는 전쟁 상황 속에서 이동하며 사진을 제작하였다. 암실 마차의 크기가 적의 목표물이 될 정도로 컸기 때문에 웬만한 열성이 아니면 사진을 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최초로 기록한 사람이 바로 매튜 브래디이다. 브래디는 당시 유명한 초상 사진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1861년에 발발한 남북전쟁에 순전히 브래디 개인의 투자에 의해서 남북전쟁에 가담하여 역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심지어 사진사까지 브래디 자신이 고용하였는데 그들이 바로 알렉산더 가드너(Alexander Gardner), 티모시 오설리반(Timothy H. O'Sullivan), 조지 바너드(George N. Barhard)였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브래디는 자신이 고용한 사진가들을 신임하지도 않고 그들이 직접 찍은 음화조차도 소지하지 못하게 하여 불화가 생겨 가드너와 오설리반은 브래디와 결별하는 등 그의 작업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브래디의 남북전쟁 사진을 보면 크리미아 전쟁에서의 로저 펜튼이 보여주었던 낭만적인 전쟁사진과는 달리 폐허가 된 전쟁터에 나뒹구는 시체들, 상처를 입은 군인들의 고통스러워 하는 장면, 폭탄이 휩쓸고 간 자리, 치열한 전투장면들을 위주로 냉혹한 전쟁터를 한껏 표현하였다. 사실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초기만 하더라도 사진가나 예술인에게 있어서 전쟁터는 하나의 좋은 소재거리를 제공해 주는 장소로 생각할 만큼 여유로웠으나 브래디의 남북전쟁 사진에서는 그럴만한 여유를 찾아보기 힘들다. 브래디의 남북전쟁 사진의 특징이라면 콜로디온 습판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선명도에 있어서 탁월했으며 명확하고 디테일한 세부묘사를 통하여 공포스러운 전쟁터의 분위기를 사진의 간접적인 경험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참혹한 전쟁에서 낭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진을 촬영해 로저 펜튼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브래디 역시 폭탄과 총소리의 괴음이 들리는 전쟁터에서 콜로디온 습판법을 이용하여 사진을 제작하였기 때문에 사진장비를 실은 마차로 전쟁터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역사적 현장을 목숨 걸고 사진으로 제작하였다. 브래디는 남북전쟁이 끝나자 자신이 제작한 전쟁사진을 판매하려 하였으나 예상 밖으로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끔찍했던 전쟁을 애써 잊으려 노력하는 상황아래 당시 전쟁 상황을 생생히 재현하고 있는 사진은 더 이상 보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브래디 자신의 입장에서는 개인적인 투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진이 상업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했으나 한 개인의 의지로 한 시대의 중요한 기록을 사진으로 남기는 작업을 이루는 공로를 세운 셈이다.
사. 19C 예술사진 (19C Art Photography)
1839년 루이 자끄 망데 다게르(Louis Jacques Mande Daguerre)에 의해서 고안된 다게레오타입이 사진으로써 최초로 실용화된 이래로 두 방향으로 나뉘어져 발전되었다. 그 하나는 실용적인 목적으로서의 기록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적인 표현으로서의 예술사진이다. 특히 예술사진에 대한 언급은 1850~1870년대에 걸쳐 활발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는데 대상과의 물리적 접촉을 통해서 얻어낸 하나의 이미지를 보고 예술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사진을 예술로 인정하는 부류는 물리적 연계가 사진예술의 특수성이라 생각하고 그런 특성을 바탕으로 어떤 예술장르보다도 디테일한 세부묘사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사진이 또 하나의 산업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부류는 작가의 손이나 정신에 의해서 직접 제작되지 못하고 기계적 자동성에 의존하여 하나의 이미지가 새겨진 사진, 그리고 인화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복제가 가능하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사진이 기록성과 예술성으로 나뉘어져 별개의 것으로 발전되는 가운데 1853년 무렵부터 사진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단순한 기록이나 회화를 위해 쓰여지는 도구로써의 사진은 인간의 이상을 표현하지 못하고 우리가 살아왔고 살아갈 시간에 대한 표현을 나타내지 못하여 더 이상 예술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그 당시 예술로서의 의미를 부각시켰던 표현은 회화적 기법을 도입하여 단순히 즐기는 것 보다 교훈적이고 정신을 맑게 순화시킬 수 있는 표현을 하기 바랬던 것이다. 즉 "전혀 사진 같지 않다."라는 평을 받는 것이 곧 예술사진으로 평가받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진의 본래 특징보다는 화가가 그린 한편의 그림 같은 사진이 유행하였다. 그림같은 사진을 제작하는 방법 중 하나는 여러 장의 음화를 따로 따로 촬영한 뒤 한 장의 인화지에 한꺼번에 조합하여 인화하는 방법인 조합인화(Combination Printing)와 이중노출을 많이 사용했다. 특히 문학작품의 한 장면을 연기자에 의해서 만들어내는 활인화(Tableaux Vivants)나 소인극(Amateur Theatricals)과 같은 것을 사진으로 제작하면서 작가가 원하는 방향대로 연출하여 여러 장의 음화들을 조합인화로 짜 맞추어 갔던 것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초점을 의도적으로 흐리게 하여 고상함을 나타낸다든지, 입자를 거칠게 하여 회화와 같은 표현을 한다든지, 톤을 변조시켜 회화를 복제한 것처럼 만드는 것을 예술로 여기고 있었다. 귀스타브 르그레 1856년 파리에서 극적인 바다풍경 사진으로 조합인화(Combination Printing)의 효시가 되었다. 이 사진은 여러 장의 음화를 중첩시켜 인화한 것으로 하늘에 노출을 맞춘 음화, 파도에 노출을 맞춘 음화, 바다에 노출을 맞춘 음화 등 완벽한 하나의 사진을 만들어냈다. 귀스타브 르그레가 조합인화의 효시였다면 오스카 G. 레일랜더(Oscar Gustave Rejlander)는 조합인화를 극대화시킨 인물이다. 레일랜더의 조합인화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이 1857년에 완성된 <인생의 갈림길 The Two Ways of Life>이란 제목의 사진인으로 내용인 즉, 중간에 현인이 서있고 양옆으로 두 청년을 주축으로 한 청년은 고요, 자비, 종교, 근면, 미덕이 표현되어 있는 길 쪽으로 향하고 있고, 다른 한 청년은 현인이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망기, 죽음, 자살, 도박, 술 등의 쾌락 쪽으로 향하고 있는 조합인화 사진이다.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사실상 30장의 음화를 따로 따로 제작하여 짜 맞추어 나간 것이다. 사실 <인생의 갈림길>은 1857년 맨체스터에서 열릴 전시회 목적으로 제작하였는데 이 전시회는 19C에 가장 중요한 기획물 중 하나였으므로 예술적 작품만이 전시가 가능하였다. 그 당시 일반 사진은 기록성 중심의 진실재현을 하거나 또는 회화를 도와주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었기 때문에 사진을 예술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부류가 많이 형성되어 있어서 일반 사진으로는 맨체스터 전시회에 출품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인생의 갈림길>에서와 같이 교훈적인 내용과 정신 순화적인 측면에서 뛰어난 작품들은 예술로 인정을 받았다. 또한 1860년에 제작한 <시련 Hard Times>은 최초의 의도적 이중노출 사진으로 남겨졌다. 시련의 내용은 얼핏보면 가난한 집안의 병든 아내와 아들 옆에서 고민하는 남편의 모습이지만 사실 남편의 머리속에는 다른 여인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사진이다. 이러한 레일랜더의 사진들은 현재에 와서야 회화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진의 예술성이 인정되는 과정에 있어서 당연히 필요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인생의 갈림길>은 영국 왕실에 판매된 최초의 사진작품이 되었고 그것은 영국인들의 사진에 대한 가치관을 아주 높여주었으며,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데 큰 몫을 하게 되었다.
화가이자 판화가였던 헨리 피치 로빈슨(Henrry Peach Robinson)은 1852년부터 사진작업을 하였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는 1858년에 제작한 <임종 Fading Ways>로 이 사진 역시 조합인화를 사용하여 제작하였다. '임종'은 총 5장의 음화로 구성된 조합인화 사진으로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한 소녀를 부모들이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연출에 의해서 표현되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사진의 기록성, 진실재현이라는 측면이 부각되어져 있어 대중들을 더욱 슬픔에 잠기도록 한 작품이다. 로빈슨이 활동했던 당시 회화를 모방한 사진만이 예술로서 인정을 받고 있는 상황이어서 로빈슨 역시 최고의 회화적 효과를 지닐 수 있도록 화면을 배치하는 방법, 고상함을 유지하기 위해 주제에 적용할 법칙 등의 중심으로 1869년에 「사진에서의 회화적 효과. Pictorial Effect in Photography」를 펴냈다. 이 책은 당시 예술사진을 제작하기 위한 길잡이 역할이 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였다. 로빈슨은 사진 제작에 있어서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이 최종구성을 위해서 미리 회화적으로 스케치하고 그 스케치한 내용에 따라 모델이 포즈를 잡고 사진을 따로 따로 촬영하여 한꺼번에 조합하는 사진. 즉 조합인화 방법을 사용하여 사진을 제작하는 것을 즐겼다.
아. 자연주의 사진 (Naturalistic Photography)
1880년대에 피터 헨리 에머슨(Peter Henry Emerson)에 의해서 새로운 운동이 펼쳐졌는데 그것이 바로 자연주의 사진이다. 당시 사진계에서는 회화적 사진만이 예술로서 인정을 받았고 대부분의 사진가들이 회화적 수법에 따라 사진을 제작(합성사진, 이중노출, 일상생활에서의 감상적 관점, 경직된 포즈의 사진관 사진 등의 작위적 사진을 말함.)되었던 상황에서 사실적 사진으로 승부수를 걸고 그때까지의 입장과는 반대되는 최초의 운동을 펼쳤다는데에 의의가 있다. 자연주의 사진은 말그대로 사진을 보았을때 매우 자연스러운 느낌을 받게 하자는 것이다. 즉 자연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야가 전적으로 고르지 않기 때문에 사진촬영에서도 사람의 시야와 같이 한 부분에 촛점이 정확히 맞으면 앞, 뒤로 어느정도 촛점이 안맞는다는 것에 기초하여 인위적으로 카메라에서 시야 주변을 다소 흐릿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희미한 초점이 사진에 있어서 전체적인 조화를 깨뜨리거나 지나치게 눈에 띌 정도면 오히려 해롭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사람의 눈에 자연적으로 맺히는 상처럼 사진도 그렇게 보이도록 하자는 에머슨식의 자연주의 사진은 오스카 G. 레일렌더(Oscar Gustave Rejlander)나 헨리 피치 로빈슨(Henery Peach Robinson)을 선두로한 '회화주의적 사진'에 적극적인 비판을 가하고 나섰다. 회화주의 사진을 단지 사진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라는 입장에서 소극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친 것이 아니라 사진을 회화로 전락시켜버리는 행위라고 간주하고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따라서 회화주의에서 흔히 쓰였던 방식들 예를들면 합성사진이나 이중노출 또는 조명과 의상 등으로 꾸며진 장면을 연출하는 것, 완벽한 사진을 만들기 위하여 수정을 가하는 것, 경직된 포즈의 사진관 사진 등의 방식을 일제히 배격하고 사람의 눈에 비치는 세상의 모습을 담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사진에 있어서 예술성과 사진의 크기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확대인화하는 것도 비난을 했다. 그렇다면 에머슨이 내세운 자연주의 사진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장비를 단순화 시키고 사진을 회화로 전락시켜 버리는 모든 방식을 거부하고 단지 사람의 눈에 맺히는 상과 같이 최대한도로 비슷하게 보이도록 카메라의 기능을 집중시켜 인위적 조작없이 정직하게 표현하자는데 있다. 이와 같이 자연주의를 대표하는 에머슨의 대표작으로는 1886년에 촬영한 <수선화 채집 Gathering Water Lilies>이 널리 알려져 있다. <수선화 채집>의 사진을 보면 1880년대 작품이라고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현재에도 너무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수선화 채집>는 자연주의 사진을 다룬 음화 가운데서도 첫번째 것이라데 의의가 있으며 또한 후의 많은 자연주의 사진보다도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토록 강력히 주장했던 에머슨의 자연주의 사진은 1891년에 가서는 사진은 더이상 예술이 아니고 '과학과 예술의 시녀'라는 쪽으로 생각의 방향을 굳혀 자연주의 사진을 철회했다. 결국 자연주의 사진을 강렬히,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것 만큼 회의를 느끼고 자신의 입장을 180도 바꿔 자연주의 사진뿐만 아니라 사진술 전체에 대한 입장을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사진술은 더이상 과거의 아름다운 예술로 여겨지지 않았고 오히려 예술가운데서도 가장 낮게 평가해 버리고 말았다. 사진은 카메라에 의해서 아주 근소한 차이로만 조정이 가능하거나 현상, 인화단계에서의 차이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작가의 개성자체를 보여주기 어렵고 매우 한정적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처럼 에머슨의 자연주의 사진은 결국 에머슨 자신의 혼동속에서 일관되지 않은 주장을 펼쳤지만 자연주의 사진은 후에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에게 영향을 주어 스트레이트 포토(순수 사진)를 탄생시키는데 공헌하게 되었다. 또한 신세대 사진가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 사진 고유의 특성에 기초한 예술로서의 사진을 탐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데 더 커다란 의의가 있다.
자. 포토 캠페인 (Photo Campaign)
전쟁으로 부터 시작된 다큐멘타리 사진은 역사적 사실성에 입각하여 다큐멘터리의 진수를 보여주었는데 전쟁이 종결되자 서부개척에 잠시 눈을 돌려 일련의 사진 활동이 있었으나 곧 일상의 사회생활을 주제로한 다큐멘터리에 역점을 두었다. 포토 캠페인도 이 중 하나로서 당시 미국의 역사에서 수많은 이민 가족들은 상당한 문제 거리로 등장하였다. 이는 정책적으로 개혁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기에 사회개혁운동의 일환으로서 시각언어인 사진을 이용하여 설득하겠다는 것이 포토 캠페인 운동이다.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람은 크게 두사람으로 꼽히는데 그들이 바로 자곱리스(Jacob Riis)와 루이스 하인(Lewis W. Hine)이었다. 이들의 사진활동은 포토 캠페인을 가장 잘 대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또한 그 결과에 있어서도 사회개혁을 일으킨 장본인들이다.
▶ 자곱 리스 (Jacob Riis) 1890~1976
19c말경 덴마크 태생의 신문 기자였던 자곱리스(Jacob Riis)는 사회개혁을 위해서 사진을 이용한최초의 사진가로 알려져 있다. 1849년 덴마크에서 태어나 1870년 미국으로 이민와 뉴욕에서 슬럼 생활을 직접 경험하면서 자랐다. 그 후 여러 신문사에서 유명 인사의 스캔들을 폭로하는 사건 신문기자로 전전하다가 1900년대로 들어서면서 자기 주변을 둘러싼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폭로하고자 하나의 도구로 카메라를 사용하였다. 원래는 이들 소름 끼치는 상태에 대해 글을 써서 도시보건성 공무원에게 호소하기도 했으나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했다. 글보다 가장 호소력을 담은 시각언어인 사진을 선택하여 마침내 빈민굴과 셋방 건물 내부의 상태들을 사진으로 제작하게 되었다.
또한 사진이외에 1890년에도 <또 다른 절반의 삶은 어떠한가 How the Other Half Lives>와 1902년의 <빈민가의 전쟁 The Battle with the Slum>이라는 제목의 저서들도 출간하여 사회개혁 운동의 지도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 그의 사진은 사회개혁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치부라고 할 수 있는 저임금 노동자와 열악한 환경의 공장, 질병이 만연한 건물, 꽉차 넘치는 학교 등을 주제로 다룬 다큐멘터리였다. 이 사진들은 사람들의 분노를 일깨우기에 충분하여 집과 교육에 관한 복지 법률과 어린이 노동금지법을 입법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행하였던 일련의 사진작업이 예술로써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기 보다는 사실적 증거에 입각한 하나의 수단으로 사진을 다루었기 때문에 뉴욕 슬럼가의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다 선명하게 보이게하고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진에는 인간적인 짙은 이해와 감동이 담겨져 있어 여론에 불길을 당겨 정책적인 변화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사진으로서 정책적 변화를 일으킨 예는 리스가 처음이었으며 그 결과 리스를 슬럼가의 해방자, 복지 향상주의자라 불리었다.
▶ 루이스 하인 (Lewis W. Hine) 미국, 1874~1940
본격적인 미국 다큐멘터리의 창시자로 불리는 루이스 하인은 1874년 위스콘신의 오슈코슈에서 태어나 시카고 대학을 나왔고 1901년에 윤리문화 학교의 과학 강의를 위해 뉴욕시로 와서 그곳에서 교재 보조자료로서 카메라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최초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엘리스 섬에 도착한 곤궁한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헤택받지 못한 사람들의 곤궁함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카메라 사용의 시작이 되었다. 이후 아동 노동 조사위원회의 의뢰에 따라 사회 복지의 시점에서 아동 노동실태를 촬영했는데 후에 그의 사진은 아동 노동법 제정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주로 사회적 상황, 특히 어린 노동자들에 대한 학대에 관해서 깊이 염려하여 20c초 미국 사회에 만연된 폐습을 개혁자들에게 사진을 증거로 제공하기 위하여 상황을 기록하였는데 그가 주로 촬영한 대상이 되는 곳은 노스캐롤라이나 면방직공장, 펜실바니아의 탄광소, 사탕무우밭과 통조림 공장의 노동자들이었다. 공업화 과정에 의해서 노동을 착취당하고 있는 아동이나 그밖의 노동자들이 위축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에서 촬영하였다.
미국내의 소년노동의 실태를 조사에 있어서의 예로서는 소년들이 서부의 석탄광산에서 노동하였으며 노동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석탄의 유독한 가스로 호흡기 질병과 철로레일에 위험이 계속되었다. 또한 남부의 목화공장에서 오전 6시경부터 호후 6시까지 힘든 일을 하였다. 안전표시판에 있는 경고문도 해독하지 못하고 위험한 기계에 의해 손이 절단되기도 하는 악조건에서 노동을 하면서 기껏해야 몇 푼의 돈으로 많은 식구들의 생활에는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연민의 정을 가지고 촬영에 임하였다. 특권에서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의 복지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일터였던 비참한 노동 착취공장, 쓰레기통 더미에서 놀고 있는 철부지, 이주민들의 주거지가 될 지저분한 주택, 뉴욕시에 흉직하게 산재되어 있는 슬럼에 전락한 사람들 속에 직접 뛰어들어 자신의 주관적입장에서 강력하고 즉각적으로 납득될 만한 비판하게 되었다. 이 사진들은 인간기록(Human Documents)으로 발행되었는데 그의 사진은 사회적 의미와 맥락을 즉각적으로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후 그의 활동은 미국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집중시켰고 1932년에는 <일하는 사람들 Men at Work>라는 사진집이 발행되었다. 이 사진집에서 가장 주목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세계 최고의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102층 빌딩 건설현장(미국 뉴욕시 33번가로 부터 38번가에 걸친 부지 1931년에 완성)을 완공하는 그날 까지 노동 현장을 추적하여 촬영했다. 도덕적, 윤리적 측면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온 사진가로서의 하인은 촬영 방법에 있어서 아주 당당했다. 자신의 카메라에 들어오는 장면들로부터 은밀히 찍지 않고 대형 뷰 카메라를 들고 일하고 있는 어린이들 속에 들어가 촬영하기도 해 고용주로부터 돌팔매질을 받기도 하고 사진기가 파손당하는 등 곤란을 겪는 등 수난을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일련의 작업들을 변함없이 행하였다.
리스와 하인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살면서 당시의 미국 사회적 현실에 눈을 돌려 그 현실에 감추어져 있는 모순의 근원, 특히 피지배자 계급으로서 국민들의 괴로운 생활 실태를 사진에 의한 캠페인으로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차. 바우하우스 ( Bauhaus, 1919 ~ 1933 )
20세기에 들어서 인류는 역사상 참혹했던 전쟁이 발발하였고, 또한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이전의 어느 시대 보다 더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린 시기이기도 하다. 이처럼 극단적인 시기를 살아오는 동안 예술가들의 감수성 역시 과거와는 다른 독특한 양식으로 발전하여 새로운 예술의 경지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성과는 바로 추상미술의 등장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20세기 전반기에 현대 추상미술을 발화시킨 작가들을 논함에 있어 바우하우스는 하나의 시발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또한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각의 다양화와 함께 실험적 시각을 중심으로 하는 부류가 등장하였는데 이에 바우하우스는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3월 20일 독일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에 의해 독일의 바이마르시(Waimar)에 국립종합조형학교(Das Staatiches Bauhaus)라는 이름으로 창립된 것이다. 바우하우스의 'Bau'는 독일어로 건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이름이 시사하듯 건축을 중심으로 모든 예술분야의 총제적 조화를 꿈꾸었던 조형예술가들의 실험장이자 교육기관으로서의 조형예술학교였다. 이처럼 바우하우스는 조합적 조형학교로서 단지 하나의 전문인을 양성하는 곳은 아니었다. 공예, 디자인, 건축, 조각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통합한 교육기관으로서 여기에 사진도 한 분야로서 자리잡게 되면서 형식주의와 만드는 사진의 근원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그로피우스가 기초한 바이마르 국립 바우하우스의 선언과 강령을 볼 것 같으면 첫째로 예술과 생활을 융합하기 위해 건축을 중축으로 하는 제예술의 통합이념. 둘째 조형활동에 있어서 수공작을 중시이며 여기에 1923년 세번째 목표인 실용성을 기초로 한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새로운 통합이 부가되었다. 수공작을 중요시한 초기의 바우하우스에서는 기계기술과의 대결을 회피했으나, 전후 산업계의 눈부신 발전과 부흥은 바우하우스로 하여금 기계 기술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크게 변혁시켜 놓았다. 이러한 과제의 새로운 해결에 대해서 기하학적인 추상미술의 합법칙성은 잘 어울렸다. 그 뿐만 아니라 추상미술은 이제 더 이상 장식이나 개성적 표현에서 해방되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전형미를 가능하게 했다. 바우하우스는 바이마르시에서 시작하여 뎃사우, 베를린으로 이사하며 결국 1933년 7월까지 14년에 걸쳐 운영되다가 독일의 Nazi에 의해서 강제로 해산되기 전까지 약 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해내었다. 폐교가 된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는 우선 대부분의 교수가 유태인을 포함한 외국인들이라는 것으로 반 독일적으로 생각하였고, 또 실험적 모더니즘의 사고는 공산주의로 간주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바우하우스가 폐교되자 이곳에 모여있었던 많은 미술가들은 프랑스, 미국, 스위스 등지로 저마다 뿔뿔히 흩어졌다. 그러나 바우하우스 남긴 발자취는 후대의 조형예술 전반에 걸쳐 오늘날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아야 할 선구적인 커다란 유산이다.
카. FSA (농업안정국, Farm Security Administration)
1935~1942
미국 제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신경제정책이었던 뉴딜정책(New Deal)의 실시를 위해 대공황기 속에 처해있는 농민의 구제와 정착화를 목적으로 한 부서의 명칭으로서 농업안정국 또는 FSA라 불렸다. 1930년대에 세계적인 경제공황이 불어닥치자 당시 농림부 차관이자 콜롬비아 대학의 정치경제학 교수였던 렉스포드 테그웰(Rexford G. Tugwell)은 곤경해 처한 농부들의 재정적 지원을 해주기 위한 임무를 띤 기구의 우두머리로 세워졌고 터그웰은 그의 제자였던 로이 스트라이커(Roy E. Stryker)를 이 기구에 가담시켜 시각매체를 활용하여 지원하고자 농업안정국 산하에 사진단을 조직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스트라이커에게는 미국 농민의 힘겨운 생활상을 심도있게 보도할 사진촬영 계획을 지휘할 임무와 역사분과의장의 임무가 주어져다. 그의 지휘아래 운영된 FSA의 사진단은 도로시어 랭(Dorothea Lange), 워커 에반스(Walker Evans), 러셀 리(Russell Lee), 아더 로드스타인(Arthur Rothstei), 벤샨(Ben Shahn) 등과 같은 뛰어난 사진가들을 채용하여 사진부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공동작업을 펼쳤다. 이 사진단들이 주로 촬영한 농민들의 모습은 대개 소작인이나 소작농, 모래폭풍과 가뭄으로 인해 황폐된 대평원 지역의 여러 주로부터 피해 나온 이주민들의 문제들과 또 영세 농민의 경제적 문제들로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1942년에 전쟁으로 인하여 FSA의 프로젝트가 종결되었을 당시 의회 도서관에는 무려 272,000점의 사진이 수집되어 방대한 다큐멘터리 컬렉션을 만들었다. 이러한 FSA 컬렉션은 당시의 사회 비평가들뿐만 아니라 문예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결국 그것은 발흥하고 있는 포토 저널리즘과 시각적 의사소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으로 주된 목표는 스트라이커가 하나의 길을 제시하였지만 본래 사진가가 아니었던 스트라이커는 장비나 기법을 비롯한 문제와 시각적 스타일 등은 각자 사진가들이 정하도록 하는 현명한 선택을 하였다. 그는 사진에 있어서 초점, 필터, 분위기 등은 사진이 영상언어로 쓰이기 위한 도구들에 불과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때의 사진은 그 주제가 특이하였고 묘사된 사건들을 담은 뉴스 사진이 거의 없었으며 질적으로나 기술적, 미학적으로나 모두 높은 수준의 사진들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여러 서적과 잡지, 영화, 텔레비전 등에서 제한없이 널리 이용되어 우리에게 감흥을 불어넣는데 현재에도 프린트를 원할 경우에는 워싱턴 미국 의회도서관 등 공적기관에 콜렉션되어 있어 소정의 비용만 내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 워커 에반스 (Walker Evans)
이 기구에 고용된 최초의 사진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약 1년6개월에 걸쳐 FSA를 위해 활동하였다. FSA에서 커다란 활약을 했던 남부를 여행하면서 토지의 조건을 기록했고 소작인의 곤궁한 처지와 그들의 가옥과 소유물, 그들이 일하는 방법, 수확한 농작물과 그들이 다니는 학교, 교회 그리고 가계들을 위주로 기록하였다. 워커 에반스가 찍은 대부분의 대상은 누추한 빈민들 이었으나 그의 해석은 항상 위엄에 넘치는 것이었다. 그는 주로 직접적인 정면시각으로 사진을 찍어 솔직하고 리얼리티한 방식으로 보여지도록 하였는데 에반스는 곤궁한 농민들의 생활상을 파악하고자 인물위주보다 그들이 생활상이 반영된 공간을 위주로 촬영에 들어갔다.
▶ 도로시어 랭 (Dorothea Lange)
다큐멘터리 사진에 한 획을 그은 랭의 사진세계는 주로 FSA에서 보여준 방식으로 끝까지 고수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녀가 맡은 FSA에서의 주제는 이주 농민들로서 이를 가장 대표하는 사진이 바로 1936년작인 <Magrant Mother 이민 노동자의 어머니>이다. 이주 농민들의 생활과 그 상태를 기록한 사진으로 이주자들이 일거리를 찾아 이 캠프에서 저 캠프로 이주하며 생활하는 불쌍한 어머니가 텐트 속에서 어린애에 둘러싸인 모습을 통하여 당시의 미국 노동자의 삶과 얼굴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사진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의 기록과 정서적 감동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정책적인 이유로 시작된 다큐멘터리 기록적 사진이기도 했지만 그 안에는 이주 노동자들의 삶의 진실을 느낄 수 있도록 감동적인 해설서였기 때문이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삶의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보여준 랭의 사진세계는 한 시대의 사건들의 기록에만 머물지 않았기에 오늘날까지도 그녀의 사진을 보면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게 해 준다.
▶ 아더 로드스타인(Arthur Rothestein)
1935년에 콜롬비아 대학을 졸업한 직후에 최초의 사진가로 고용되었다. 1936년 오클라호마의 진흙 구덩이 지역으로 여행하던 중 그가 촬영한 것은 오클라호마 주의 키마론 군으로서 바람의 침식으로 인해 심한 피해를 입은 지역으로 아마도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사진이자 가장 유명한 사진은 <모래폭풍 Dust Storm>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가 촬영한 모래폭풍 사진의 결과는 워싱턴을 설득시켜 침식과 한발이 강타한 대평원 지역에 정부의 원조를 보내도록 하는 뜻깊은 일을 한 것이다. 그는 또한 국토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면서 기억될 만한 사진들을 찍으며 보냈다. 그중 <하얀 두개골 Bleached Skull>이라는 작품이 있다. 로드스타인은 미국인의 삶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의 가치를 확고하게 믿고 과거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도록 정부가 지속적인 지원으로 그 일을 행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밖에도 벤 샨(Ben Shahn), 러셀 리(Russell Lee), 칼 마이던스(Carl Mydans), 존 베이천(John Vachon), 매리온 포스트 월코트(Marion Post Wolcott), 잭 델라노(Jack Delano), 폴 카터(Paul Carter), 디어도어 정(Theodor Jung)등의 여러 사진가들이 활동하였다.
타. 포토 저널리즘 (Photo Journalism) - Life, Look
인류는 다양한 의사소통 수단을 사용하고 있다. 이중 현대에 들어와서 미디어(매체)의 역할은 한층 중요한 영역으로 우리 생활 전반에 자리잡고 있다. 신문, TV, 영화, 통신수단을 활용한 대화 등 다양한 매체 중에서도 시각매체의 하나를 이루는 사진을 통해서 세계 각처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 문화, 논설, 미술, 교육, 영화, 연극, 과학, 스포츠, 행사 등을 접하게 됨으로서 인간의 시각을 확장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현대인들의 구미를 충족시켜 줌으로서 문자를 통하여 '읽는 것' 보다는 시각매체를 통하여 한눈에 '보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보는 것'을 통하여 느끼고 이해하므로서 그 시대나 사회나 문화를 파악하려는 경향이 짙어져 사진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그래프 저널리즘의 시대가 193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발돋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프 저널리즘의 비약적인 발전은 이처럼 '읽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바뀌는 시대적 요구와 함께 발맞추어 인쇄술과 복제술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이룩될 수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미국의 스테픈 헨리 호간이 발명한 하프톤의 제판술은 1897년에 이르러 본격적인 활자와 함께 사진을 인쇄할 수 있게되어, 이후부터 인쇄 매체를 이용하여 사진 보도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1928년을 전후해서는 독일에서 「베르리너 일루스트리르테 자이퉁」이란 주간 사진신문을 발간하였고, 프랑스에서는 사진화보잡지인 「뷰(Vue)」를 발간하였다. 이와같이 유럽에서의 사진 저널리즘의 시도는 미국을 깨우치고 자극하여 「라이프(Life)」, 「루크(Look)」등의 화보잡지가 창간되어 그야말로 그래프 저널리즘의 시대를 이룩할 수 있었다. 대개의 경우 그래프 저널리즘들은 편집자와 사진기자들과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졌는데, 주제(테마)가 결정되면 이를 면밀히 분석하여 어떠한 유형의 사진이 해당잡지에 요구되는지를 사진가에게 이해시켜, 이를 토대로 촬영이 진행된다. 사실 말이 공동작업이지 편집자의 의도데로 요구하고 또한 이에 주제에 가장 합당한 사진을 엄중히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사진가와의 의논없이 편집자 독단적으로 행하는 것이 관례처럼 행해졌다. 작품의 선택, 레이아웃, 그리고 알기 쉬운 문장으로 캡션이 붙어지는 것 까지 모두가 편집자의 손에 의해서 조직적이고 유기적으로 촬영한 듯한 관점으로 다루었다. 훗날 이러한 유통방식에 불만을 품은 사진가들은 자신들의 독창성을 인정받고자 매그넘(Magnum)이라는 새로운 사진유통체제를 형성시키기도 한다.
「라이프(Life)」는 그래프 잡지로서 1936년 11월 23일에 창간호를 발표했다. 「라이프」는 뉴욕의 타임(Time)사에서 발간된 것으로 타임사는 「라이프」가 발행되기 이전에 이미 뉴스 전문잡지인 「타임(Time)」을 1923년 3월에 발행하였고, 경제 전문지인 「포춘(Fortune)」을 1930년에 발행한 경험이 있었다. 「라이프」는 창간호에서 마가렛 버크-화이트(Margaret Bourke-White)의 몬타나주 포트맥 부근에 건설중인 거대한 인공댐 사진을 표지로 하고, 제1면에는 제왕절개로 탄생한 아기의 사진이 <라이프는 시작되었다>라는 제목을로 시작하여 최종적으로 38만부를 발행하였고, 이후 제2호는 41만 5천부, 제3부는 46만부, 제8호에 이르러서는 창간호의 두배에 이르는 76만부에 육박하는 발행부수를 기록하였다. 라이프의 창간은 참으로 시기 적절한 때에 탄생된 그래프 잡지라 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의 경제 불황과 함께 세계대전이 눈앞에 다가옴을 예감한 대중들의 위기 의식은 물론 글로 읽기도 하지만 눈으로 직접 한인하겠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이에 발맞추어 대량으로 사진인쇄도 가능케 됨으로서 주된 방향은 뉴스성에 두고 진행시켰던 것이다. 즉 세계각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사진으로 찍어 이를 해설한다는 포부아래 발행된 그래프 잡지이다. 「라이프」소속의 여러 사진가들 가운데 가장 눈부신 활약을 한 사진가는 유진 스미드(W. Eugene Smith)로 그 만의 독창성을 가지고 꾸준히 활동함으로서 세계적인 사진가로 발돋음 할 수 있었다. 유진 스미드의 대표작으로는 <시골의사>, <알버트 슈바이쳐박사>, 1951년 <스페인촌>, <조산부>, 1952년 <촬영중인 찰리 채플린>, 1624년 < 자비로운 슈바이쳐>, 1972년 <일본의 수은병> 등이 있다. 이중 <스페인촌>은 1951년 4월 9일자의 「라이프」에 17점이 게재되었는데, 이는 스페인의 작은 마을의 삶에 관한 일련의 사진으로서 그 마을의 진정한 분위기와 마을 사람들을 촬영한 것이다. 그의 사진을 보면 사회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려는 의도보다는 다만 인간의 사랑, 행복, 평화를 확신하고 자신의 애정을 곁들여서 묘사하고자 하였다. 유진스미드가 「라이프」지를 통해서 보여준 그의 독특한 스타일은 포토 스토리(Photo-Story) 형식으로 발표한데 있다. 이는 기존의 단사진으로는 복잡 다양한 인간 생활을 표현하기에 부족하다고 느껴 몇 장의 사진을 나열하고 엮어서 하나의 주제나 스토리를 표현하는 형식이다. 단지 독립된 사진들의 나열만으로 그친다면 이것은 연작사진이 될 것이나 하나의 이야기, 문장으로서의 역할을 사진이 한다는 의미에서 포토 스토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포토 스토리는 포토 저너리즘의 기본적인 형식으로 채택하고 있을 정도로 하나의 사진 표현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유진 스미드는 성격이 곧고 고집도 쎈 편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결국 이러한 성격때문에 「라이프」와 결별하게 되었다. 유진스미드의 의도와는 다르게 편집자에 의해서 자신의 작품이 곡해된다고 생각하여 마찰을 일으키다가 결국 「라이프」를 떠나 프리랜서로 활약하였다.재정상의 이유로 「라이프」는 1972년에 자진 폐간되었다. 이는 또 다른 영상매체인 TV의 등장으로 많은 광고 수입이 격감되었기도 하고, 다른 여러 복합적인 문제가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78년에 월간지로 변신하여 복간되었으나 내용이 예전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 주어 이전의 인기를 얻지는 못하였다.
「 루크(Look) 」는 1937년 1월 5일에 창간호를 발표했다. 사실 「라이프」보다는 약간 늦었지만 발표준비는 먼저 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라이프」가 발표되고 대중들의 반응을 살펴보고자 했기때문에 의도적으로 발표시기를 늦추었을 뿐이다. 「루크」는 처음에 월간으로 발행하다가 5월이후부터는 독자들의 요청으로 월2회로 격주간 발행하게 되었다. 창간호는 40만부가 발행되었으나 10일만에 매진되는 흥행을 거두어 최종적으로 83만 5천부가 발행된 셈이다. 제2호는 1백만부를 넘어섰고, 제18호에 가서는 2백만부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는 「라이프」보다 앞선 기록으로 비록 「라이프」가 주간발행에 비해서 「루크」는 격주간 발행이었지만 그래도 경이로운 기록이었다. 「라이프」의 경우 추구한 방향이 주로 뉴스성 위주였다면 <루크>에서는 뉴스성보다는 대중에게 감동을 위주로 인기거리 기사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설정에 있어서 잘 진행시켜 왔으나, 전쟁 후에는 대중들이 잠시 외면하는 터에 새로이 내셔널 홈 매거진(National home magazine)이라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이 전환점으로 인하여 다시금 활력을 되찾고 대중들의 반응도 다시금 회복될 수 있었다. 1972년 재정사어의 이유로 「루크」의 화려한 활동은 폐간을 맞았다.
「라이프(Life)」, 「루크(Look)」는 당대 최대의 그래프 저널리즘으로 자리매김하여 수많은 저널리즘이 그래프 저널리즘으로 전화하여 약 1년 동안에 Photo-History, Picture, Peak Photo, Now and then 등이 창간되어 매월 2천부가 넘는 Picture Magazine 열풍이 일어나 그래프 저널리즘 시대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파. 매그넘 (Magnum)
현대사진 발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집단이 있다. 1936년에 창간된 <라이프(Life)>와 그 보다 11년후에 1947 <매그넘(Magnum)>이 있다. 매그넘(Magunm)이란 단어는 라틴어로 '크다' 또는 '샴페인을 담는 큰 술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집단은 미국과 유럽의 뛰어난 보도사진가들로 구성된 자유 사진가 집단으로, 소속 회원들의 사진을 각 언론사에 적극적으로 판매하기 위해 창설된 국제적인 사진통신사이다. <매그넘>의 소속 보도사진가들은 대전 후 세계를 대표하는 엘리트로 꼽히고 있다. 매그넘 그룹이 1947년 5월 22일 최초로 결성될 당시의 구성원들은 로버트 카파(Robert Capa), 앙리 까르띠에 브레쏭(Henrt Cartier Bresson), 데이비드 시모어(David Seymour), 조지 로저(George Roger)등이었지만, 그 싹이 움튼 것은 이미 10년 전의 일이었다. 1936년 봄, 브레쏭, 시모어, 카파등의 무명 사진가들은 모두 신문사 사진기자 입사 시험을 치렀으나 낙망하고 말았다. 이들은 다시 만나서 신문사 간부의 사진에 대한 무지를 통탄하면서 포토 저널리즘이나 사진계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던 야심에 찬 젊은이들이었다. 포토 저널리즘 시대의 개막과 이런 상황속에서 사진가들은 개성 있는 예술작품을 창조하기는커녕 다만 직업인으로서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에 도전하여 예술가로서의 주체성과 자유를 확보하고 싶다는 것이 바로 이 세 사람의 염원이었다. 이들은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어려움도 많았지만 한번도 목표로부터 이탈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자 이들은 보도사진으로 종군하여 그들의 이름을 세상에 떨치기 시작하였고 2차 대전 중 카파는 종군 보도 사진가로, 시모어는 미국 군인으로, 브레쏭은 프랑스 군인으로 각각 활동을 전개 하였다. 종전 후 브레쏭은 미국에서 사진 활동을 재개하고 있던 시모오와 카파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가서 매그넘을 결성, 이 그룹의 주인이자 경영주가 되었다. 매그넘 그룹은 라이프지와 함께 전후 보도사진사에서 2대 지주 노릇을 하여왔지만, 라이프와 달리 사진가 소속사에 종속되어 있지 않고 자유로운 개인의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독자적으로 활영여행을 하였기 때문에 저널리즘 측면에서도 경제적이어서 이들은 라이프 <픽쳐(Picture)>, <포스트(Post)>, <헐리데이(Holiday)>등의 잡지에 특별 기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밖에도 각종 출판들의 간행, 전람회 개최, 영화의 스틸사진등의 사업을 벌여 일거리가 많아지자 1950년에 오스트리아 태상의 언스트 하스(Emest hass), 스위스 태생의 워너 비숍(Wrener Bischof)을 받아들였다. 초창기에는 6명에 불과하던 매그넘 멤버도 차차로 증가하여 1954년에는28명으로 늘었다. 일반에게는 널리 알려진 매그넘의 저명한 사진가들은 본부를 파리에 두고 세계 각처에 특파원을 두고 운영하였다. 1908년 프랑스의 노르만디에서 출생한 앙리 까르띠에 브레쏭은 처음에는 화가가 되기를 원했으나 회화를 멀리하고 사진에만 전념하였다.
2001년 세계최고의 다큐멘터리 사진가 집단으로 꼽히는 '매그넘(Magnum)'이 1989년 독일베를린 장벽붕괴 이후 10년간 역사현장과 인간의 삶을 기록한 작품으로 한국을 찾았다. 매그넘은 회원50명 전원의 작품 451점을 서울, 대구, 광주에서 차례로 전시하였다.이 단체가 한국에 온것은 1958년과 93년에 이어 세 번째로,런던과 뉴욕 등 세계순회전의 일환 이였다.
하. 인간가족전 (The Family of Man)
1955년 뉴욕 현대미술관의 25주년 기념으로 마련된 행사가『인간가족전 The Family of Man』이다. 이 대대적인 사진전의 총괄 책임을 맞은 사람은 룩셈부르크 출신의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스타이켄은 1947년에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진부장 일을 맡았는데 그가 제임 기간 중에 진행된 행사가『인간가족전』이고 행사의 총괄적 기획과 편집을 맡게 되었다.사실 제1차,2차 세계대전에서의 전쟁사진들을 대상으로 전시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으나 별로 큰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그 동안 세계대전을 두차례나 겪으면서 전쟁이라는 처참한 상황을 기억저편에서라도 떠오르지 않고 잊으려고 노력하는 상황에서 적나라하게 표현된 전쟁사진들은 외면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즉 애초에 전쟁방지 의식이 커지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전쟁상황을 잊고자 하던 시대였고 인간에 대한 불신과 회의기 팽배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를 빨리 인식하고 "인간은 하나"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사진을 만국의 언어(Universal Language), 시각적 국제어(Visual Esperanto)로 인식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인간가족전 』은 2년여 정도에 걸쳐 준비하였는데 전세계의 남녀, 아마추어, 프로, 유명사진가, 무명사진가를 막론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평가하여 200만장의 사진을 모아서 그중 1만장을 프린트하고, 최종적으로 503장을 선정하였다. 이는 68개국의 사진가 273명의 작품으로 세계각지의 사람들의 생활공간이나 환경은 각기 다양할지라도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한 가족이라는 이념에 초점을 맞추어 선별하는 과정을 거쳤서 1955년 1월 26일을 기점으로 개막되어 5월 8일까지 4개월에 걸쳐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었다. 인간이 태어나고 교육을 받고 결혼을 하고 살다가 늙어서 죽는 인간사의 반복을 「인간가족전」은 영상언어로 보여준 것이 성공의 열쇠였던 것이다. 이 전시회는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뉴욕뿐만 아니라 세계 85개 도시에 걸쳐 순회 전시회를 가져 약 7백만명이 관람했으며 이중에는 물론 한국에서도 1957년 경복궁 미술관에서 전시된바 있다.
『인간가족전 』의 내용을 볼 것 같으면, 40개의 작은 테마에 따라서 나뉘어져 우주창조, 사랑, 결혼, 출산, 육아의 순서로 발전하여, 인간과 환경과의 화해와 갈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밖에도 다양한 인간생활의 단면과 아울러 질병과 죽음의 과정을 보여준다. 평범한 인간사가 여기에서 끝나는 것 같지만 다시 고독, 종교, 전쟁, 굶주림 등을 표현하고 다음으로 수소폭탄의 폭발이 가져다 주는 엄청난 두려움을 강조면서 국제연합총회의 장면이 뒤를 잇는다. 그 다음 테마는 세계 각국 부부들의 기념사진이 반복적으로 중첩시켜 나타내고, 가장 마지막에는 아래에 제시된 유진스미스의 사진으로 스미스가 세계 제2차대전시 부상을 딛고 일어나 처음 촬영한 <낙원 뜰에 이르는 길 A Walk to Paradise Garden>을 통해서 두 아이(유진스미드의 자녀)가 숲을 빠져나가 미래의 길로 향한다는 느낌을 주는 미래지향적인 사진으로 대막을 장식한다. 따라서 「인간가족전」에서는 두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입장보다는 비록 불신과 소외 속에서도 우리의 미래에 대한 작은 소망의 불씨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있는 것이다. 제작형식에 있어서도 기존의 전시방법과는 차별화시켜 영상언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원래 종래의 사진들은 낱장사진을 기본으로 한 미적인 요소를 추구하였으나, 1930년대에 들어와서 「라이프(Life)」나 「루크(Look)」지 등을 통해서 미적인 요소 보다는 사실의 전달이라는 요소를 더욱 중점적으로 함에 따라 좀더 대중에게 충실히 전달하기 위해서 엮음사진(Series Photo)형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그래프 잡지들의 엮음사진들을 전시회에 응용한 그 첫번째가『인간가족전 』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래프 잡지들의 경우 대개 5, 6장의 사진들을 엮는 것으로 그쳤으나,『인간가족전 』에서는 하나의 테마아래 503장의 사진들을 읽어나가듯이 엮음으로써 엮음사진보다 더 큰 개념의 군사진이나 복수사진의 개념이 새로이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평면적으로 엮은 영상언어들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고자 전시방법에 있어서도 특이한 점을 보인다. 예전의 일상적인 전시회처럼 일렬로 벽에 걸어서 전시하던 고전적 방법을 한 단계 응용하여 영상적 문맥의 전개방법을 써서 하나로 통합하였다. 이 방법은 새로 시도된 전시방법으로서 벽면, 천장, 지면을 모두 이용하여 관람자로 하여금 마치 터널을 통과하면서 사진을 보는 느낌을 주어 색다른 묘미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후에「인간가족전」은 책으로도 출판되었는데 전시공간에서 보여주었던 감동만큼은 느낄게 할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입체적 효가를 살리기 위한 노력은 엿보인다. 이처럼 시각적인 효과를 계산해서 독창적인 전시를 모색한 「인간가족전」은 하나의 새로운 제작형식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 있어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대량의 사진을 전시함에 있어서 그 제작형식이나 전시방법 자체가 스타이켄 한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 개인 사진전이 아니었다. 이는 집단제작의 형식을 띄는 독특한 형태의 전시회로 참여한 사람들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진 가서부터 시작하여 무명의 아마추어까지 다양하였다. 다만 스타이켄이 이전시의 기획을 맡고 총책임자 역할을 했을 뿐이다. 전시장의 설계는 건축가 폴 루돌프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40개의 작은 테마별 전체의 서시는 시인 칼 샌드버그가 책임을 맡았다. 또한 사진의 중간마다 역사상 유명인의 명언이나 신화나 성서의 문구 등을 삽입하여 또 하나의 효과를 노린 사람은 도로디 놀맨 여사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손이 동원되어 오랜 시간에 걸친 노력 끝에 공동 제작된 전시회가 「인간가족전」이다.
5. 사진과 미술과의 관계
사진술은 흔히 말하는 바와 같이 과학인 동시에 또한 예술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반된 복합성은 사진의 예술성을 논할 때 이제까지의 예술개념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카메라의 원형인 어둠상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회화의 정확한 복제도구로 사용했었다. 회화의 복제기술로는 일찍부터 판화가 있었는데 판화기술은 18세기에 이르러 정점에 다달았다. 이는 근대 시민사회의 성립과 함께 등장한 부유층의 회화 소유열에 호응하는 풍조의 발현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풍조 속에서 보다 더 정밀하고, 다량의 복제가 가능하면서도 값이 싸게 먹히는 카메라가 등장했을 때 신흥세력인 부유층은 두 손을 들어 환영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렇듯 사진은 애당초 새로운 판화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사진이 대상을 놀랄 만큼 정확하게 재현하는 데 대하여 속으로 감탄해 마지 않으면서도 정신적인 연장으로 심신이 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계조작이라는 데에 혐오감을 가졌다. 복제의 상대개념은 오리지널(original)로서, 그것은 일품 일회성을 그 본질로 하며, 독창적인 것이다. 예술은 바로 오리지널 그 자체이다. 그러나 벤야민이 말한 대로 문명의 발달로 새롭게 등장한 복제기술은 (지금),(여기)밖에 없는 일품 일회성의 오리지널에 대한 신화를 깨뜨리고 근대사회의 시민들이 눈 뜬 평등의식과 직결되었다. 이런 점에서 사진은 현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또한 하나만의 일회성을 본질로 삼은 지금까지의 예술의 틀에 들어맞지 않는 특수성이 본디부터 있었다. 벤야민의 말대로 복제기술의 등장은 또한 대중의 예술에 대한 예배적 태도에 타격을 주었으며, 한편 L.멈포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 현대에 있어서 복제품의 범람은 오리지널에 대한 관심이 무디어지는 경향을 낳았다. 그러나 사진의 등장 이후 영화․레코드․텔레비전 등 이른바 기계예술은 모두 예술의 복제수단이면서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러한 특성 때문에 새로운 예술로 제자리를 굳혔으며, 지금은 사진이 다만 예술의 복제가 아니라 복제예술이라는 제 나름의 장르를 형성하고 있다.
사진은 또한 하나의 과학이기 때문에 그 과학적 특성은 당연히 종래의 예술에서 찾아볼 수 없는 표현상의 분야를 개척하여 새로운 표현성의 리얼리티를 확립했다. 즉, 첫째로 렌즈는 인간의 의식이 미치지 못하는 현실의 심부를 물리적 정확성으로 반영한다. 에드워드 웨스튼은 렌즈가 눈보다 더 잘 본다고 말했다. 둘째로 카메라는 인간의 고정된 시점을 해방시켰다. 카메라는 인간이 그 자리에서는 볼 수 없는 먼 공간도 끌어당긴다. 이제 공간은 렌즈 앞에 자유자재로 끌어당겨지기도 하고 늘여지게도 되었다. 셋째로 사진은 모두가 과거에 일어난 사실들의 표상이요, 현실에서 사라져간 시간이 항상 현재라는 시점에서 재생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해로운 시간개념을 일깨워 주었다. 운동은 모두 시간성을 띠게 되고, 또 운동이란 사물이 변화하는 과정이며, 시간은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재는 자인 동시에 개념인데, 스넵 사진은 눈으로 분별할 수 없는 운동하는 사물의 순간들을 다양하게 포착하는 데 성공하였다. 넷째로 카메라의 각도에 따라 대상의 모습이 무한히 변화하고, 그 변화에 따라 대상이 갖는 의미도 달라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상에서 말한 여러 가지 특성, 즉 사진적 표현의 리얼리티의 핵은 기록성이며, 이 기록성에 의해 사물의 순수 객관적 파악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또한 아직 체제화되지 않은 미분화된 현실대상이 사진의 표현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6. 카메라의 구조 및 종류
가. 카메라의 구성
우리는 흔히 카메라를 복잡한 기구계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카메라는 촬영이란 행위를 통해 필름면에 잠상을 형성시키게 하는 기구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자면 3차원의 현실적 대상물(피사체)에 대해 광학의 원리를 이용하여, 2차원의 평면에 은화상 내지는 색화상으로 재현시키기 위하여 감광유재에(필름면) 잠상 을 형성시키는 기구인 것이다.
1) 초점 조절장치(Focusing)
피사체에 대해 렌즈의 초점을 정확히 맞춰 선명한 화상으로 나타내기 위한 장치
2) 셔터(Shutter)
장치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피사체의 상을 필름면에 작용시키기 위해서 빛의 양을 시간적으로 조절하며 움직이는 피사체에 대해 선명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함께 가지고 있다.
3) 화인더(Finder)
장치 화인더는 필름면에 찍혀질 파사체의 범위를 나타내고, 피사체에 대해 적절히 화면구성을 할 수 있게 만든 장치이다. 또한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나 뷰 카메라의 경우는 화인더를 통해서 피사체에 대한 핀트의 정도, 초점의 깊이, 원근감을 확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4) 노출계(Expose Meter)장치
카메라 내부에 수광수자를 두어 파사체로부터 반사되는 빛의 양을 필름의 감도와 상호 연관시켜 조리개 값과 셔터스피드 값 등 광선 조건에 따른 정확한 노출값을 지정해 주어 필름면에 최적의 빛을 작용시키게 하는 장치이다. 노출계 장치는 카메라를 구성하는 필수장치는 아니다. 촬영행위에서 노출은 사진의 화질을 결정하는 가장 1차원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노출계 장치는 최근 카메라에서 거의 필수적으로 채택하고 있으며, 개발의 속도를 늦추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나. 카메라의 종류와 특성
카메라의 종류로 사용되는 필름의 종류, 필름의 화면 사이즈, 그리고 초점을 조절하는 방법에 따라 다양 하게 구분된다.
1) 뷰 카메라
카메라의 유형중에서 가장 단순한 구성을 하고 있는 뷰 카메라는 렌즈를 통해서 들 어온 피사체의 상을 초점면에서 직접 관찰할수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뷰 카메라는 렌즈, 벨로우즈(Ballows:주름통), 초점유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초점유리 면에 홀더(Holder)를 이용하여 필름을 장착 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는 카메라이다.
가) 장점
- 렌즈를 통해서 들어온 피사체의 상이 직접 초점면에 닿기 때문에 시차
(pallarax)가 전혀 없다.
- 피사체의 범위를 정확하게 확인하여 촬영할 수가 있다.
- 렌즈와 필름 간에 위치를 변화시켜 왜곡과 초점이 맞는 영역을 수정 내지는
보완할 수가 있다.
- 필름면의 화면 싸이즈가 크기 때문에 디테일과 톤의 그라데이션이 섬세하게
나타난다. 필름의 화면 사이즈(inch):4*5, 5*7, 8*10 혹은 그 이상 뷰 카메라
는 커트 필름을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조건에서 노출되었다고 할지라도 개
별적인 현상처리가 가능하다.
나) 단점
- 초점면에서 피사체의 상이 거꾸로 보인다.
- 촬영시에는 초점면에 필름을 장착하기 때문에 피사체를 관찰할 수가 없다.
- 부피가 크고 무거워서 삼발이(Tripod)가 필수적이다.
- 벨로우즈의 길이에 따라 필름에 작용될 빛의 밝기가 달라지기 때문에 노출
보정을 하여야 한다.
- 피사체의 상을 정확히 관찰하기 위해서는 검은 천을 쓰고 초점을 확인 하여
야 한다.
- 이러한 조건들 때문에 움직이는 피사체에 대해서는 촬영이 거의 불가능하
다.
2) 레인지 화인더 카메라(Range finder camera)
거리계 연동식 카메라이며, 촬영용 렌즈와 화인더용 렌즈가 분리되어 설계되어 있지만, 피사체에 대해 초점을 정확히 맞춰 촬영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레인지 화인더 카메라의 화인더 시스템은 뷰 화인더에 반투시 반사경(Half mirror)을 설치하고, 뷰 화인더에서 오는 파사체의 상과 레인지 화인더에서 반사되어 온 피사체의 상이 반투시 반사경에 의해 이중상을 하나로 겹치게 함으로써 초점이 맞춰지게 제작된 카메라이다. 이러한 카메라는 대부분이 35mm필름(24*36mm)을 사용하지만, 다른 크기를 사용되도록 디자인 된 것들도 있다.
가) 장점
- 초점조절이 용이하다.
- 소음과 진동이 작다.(일안 반사식 카메라와 비교했을 때)
- 촬영 속도가 빠르다. 뷰 화인더가 카메라 왼쪽 상단에 설치되어 있어서 두
눈을 뜨고 촬영이 가능하기 때문에 피사체 전반의 상황파악이 쉽고, 동체 촬
영이 용이하다.
나) 단점
- 촬영용 렌즈와 화인더용 렌즈가 분리되어 있어서 시차가 생긴다.
- 촬영시 피사계 심도를 확인할 수가 없다.
- 초점거리가 다른 렌즈를 교환하거나 렌즈 앞에 각종 필터를 끼웠을 때, 그
에 따른 시각적 효과를 관찰할 수가 없다.
- 그 밖에도 대구경 렌즈를 설치할 경우 레인지 화인더나 뷰 화인더를 가리기
때문에 피사체의 상을 관찰하기가 곤란하다.
3) 리플렉스 카메라(Reflex Camera)
리플렉스 카메라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카메라 몸통 안에 설치되어 있는 45도 반사경이다. 이것의 역할은 렌즈를 통해서 들어온 피사체의 상이 45도 반사경에 서 반사되어 초점 스크린에 상을 맺게 하고, 그것을 직접 또는 펜타프리즘(Pentaprisem)을 이용하여 화인더에서 피사체의 상을 관찰할 수 있게 만든 것이 리플렉스 카메라이다.
가)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Single Lens Reflex camera:S.L.R)
화인더용 렌즈와 촬영용 렌즈가 겸해진 방식의 카메라이다. 촬영렌즈를 통해서 들어온 피사체 상이 45도 반사경에 의해 초점 스크린에 좌우역상의 상을 맺게 하고, 펜타프리즘에 의해서 정립정상으로 상을 관찰할 수 있게 만든 카메라가 펜타프리즘식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다. 이러한 카메라는 35mm필름을 사용할 수 있게 설계된 것이 대부분이나, 마미아646, 핫셀브레드, 젠자 브로니카와 같이 120형 필름(6*4, 6*6, 6*7cm)을 사용하는 중형 카메라에도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펜타프리즘을 설치하여 정립정상으로 피사체의 상을 관찰할 수도 있다.
* 장점
- 촬영용 렌즈를 통해서 피사체의 상을 관찰하기 때문에 시차가 전혀 없다.
- 렌즈를 교환하거나 각종 필터를 부착해도 그 효과를 직접 볼 수가 있으며, 대구
경 렌즈의 사용시 보다 밝은 상태에서 화상을 관찰할 수가 있다.
- 초점이 맞는 정도를 확인하면서 촬영할 수가 있다.
* 단점
- 셔터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45도 반사경이 초점스크린에 달라붙기 때문에 촬영
하는 시간동안은 피사체의 상을 관찰할 수가 없다.
- 또한 촬영순간 45도 반사경의 움직임에 의해서 소음과 진동이 생긴다.
나) 이안 리플렉스 카메라(Twin Lens Reflex Camera)
선호도가 예전에 비해서 상당히 감소추세에 있으며, 제작이 중단된 기종도 많이 있다. 이안 리플렉스 카메라는 촬영용 렌즈와 화인더용 렌즈가 상하로 분리되어 있고, 화인더용 렌즈 바로 뒤에 45도 반사경이 설치되어 있어서 초점 스크린에 좌우 역상의 상을 맺게 한다. 또한 이 카메라는 120형 필름을 사용하며, 6*6cm의 화면 사이즈를 가지고 있다.
* 장점
- 밀러가 고정되어 있어서 진동이나 소음이 거의 없다.
- 비교적 화면 사이즈가 크기 때문에 화인더에서 피사체의 상을 관찰하기가 용이
하다.
- 필름의 화면 사이즈가 커서 디테일이 선명하게 묘사되고, 확대사진에 유리하다.
* 단점
- 촬영용 렌즈와 화인더용 렌즈가 분리되어 있어서 시차가 생긴다.
- 45도 밀러에 의해서 초점 스크린에 좌우역상의 상을 맺기 때문에 동체촬영에
어려움이 따른다.
- 대구경 렌즈의 설치가 곤란하다.
- 몇몇 기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렌즈 교환이 곤란하다.
4) 디지탈 카메라
기본적인 구조는 필름으로 촬영하는 일반적인 카메라와 동일하다. 단 필름대신 화상이 맺히는 부분에 CCD가 있어 여기에서 빛의 신호를 전기적인 신호로 바꿔서 메모리 카드에 저장한다.
가) 장점
- 이미지를 수정하고 보완할 수 있다. 이미지를 디지털화하게 되면 특정 부분
을 밝게 하거나 혹은 어둡게 하는 등의 재래식 암실작업을 이미지 편집 소프
트웨어로 똑같이 해낼 수 있다.
- 재래식 암실작업에서는 어렵고 장시간의 작업이 요구되던 두 가지 이상의 이
미지 합성이나 복잡한 합성을 훨씬 더 쉽게 할 수 있다.
- 필름이나 인화지 같은 것들은 복제하면 할수록 그 질이 떨어지게 되는데 모
든 이미지들이 전자적으로 디지털 데이터로 저장되기 때문에 많은 이미지들을
저장할 수 있고 질적 저하 없이도 이미지 파일들을 다른 곳에 저장할 수 있
다.
- 전송면에서도 일반 전화 라인을 사용하여 전 세계로 디지털 이미지를 전송할
수 있다
- 환경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지금 디지털 이미지 작업은 공해문제를 야기하는
현상 화학약품의 사용을 최소화하고 있어 환경보호에 기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 단점
- 전자 환경 안에서 작업하는데 따르는 단점은 주로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
다 . 이점 때문에 이 디지털카메라는 주로 20-30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컴퓨터 기술의 향상에 따른 가격 저하 및 보급 확대에 따라 점차적으로 해소
될 것으로 보인다.
7. 미술치료에서의 사진
가. 심리치료적 속성
사진을 즐기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사진을 찍고 의도대로 잘 나온 사진은 만들어보고 감상하면서 자기만족을 하거나 전시장에서 전시하거나 올려놓고 자기주장을 실현해 보는 것으로 요약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닌 촬영 단계 이전에 통찰․고립의 단계도 있고 그 단계도 즐겨볼 만하다. 특히 고립의 단계 Camera Eye라 하는데 사물을 관찰할 때 사진으로 찍으면 어떻게 나올까 생각하면서 주변을 제외하여 주제를 고립시키고 보는 습관이다. 즉 우리의 눈을 Camera Eye로 만드는 것 다시 말하면 카메라 없이 화인더로 들여다보는 효과로 주제를 고립시켜 보는 것이다.
많은 연습이 있으면 사진의 소재거리를 보는 순간 이미 만들어진 사진을 상상 할 수 있게 된다. 이 정도가 되면 그는 Camera Eye가 완성된 것이다. 이런 생활 그 자체가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고 무엇인가를 항상 추구하는 삶, 긍정적 삶을 살게 된다.
사진을 찍으면서 찍고 싶은 대상을 어떤 제약이나 통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움으로 만들어내면서 얻는 기쁨과 내멋대로 찍으면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혼자서 느끼는 기쁨이 있다. 또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흥분을 주고, 기쁨을 주고, 행복을 주고, 만족을 주고, 안정을 준다.
아이들에겐 신비로움과 청소년들에겐 무한한 자유와 창조 그리고 성인들에겐 스트레스 해소를 노인들에겐 심신의 피로를 잊게 해 줄수 있다.
나. 사진을 이용한 기법들
1) 포토몽타쥬
가) 표현방법 : 여러 종류의 사진을 이용해 자기가 원하는대로 자유롭게 표현해
자유롭게 붙여본다 .
나) 기대효과 : 자기가 싫어하는 또는 좋아하는 사물을 알아볼 수 있고 좋아하는 표현에서는 최대한 장식도 해보고 싫어하는 것에는 밉게 표현함으
로써 자기 감정을 표출시킨다 .
2) 꼴라쥬
여러종류의 잡지나 사진 기타 재료들을 이용해 꾸며본다.
3) 사진과 컴퓨터 (포토샵기법)
가) 표현방법 : 사진을 (디지털) 포토샵에서 마음대로 표현 빛 ,색상 ,크기를 작
게 또는 크게도 해보고 인화해서 액자에 꾸며본다 .
나) 기대효과 : 원하는 대로 그날 기분과 감정을 자유롭게 색과 빛과 크기를 맘대
로 조절해 보기도하고 또는 만족하지 않는 자기얼굴도 아주 아름
답게 표현해 봄으로 자기만족과 자기만의 카타르시를 맛볼 수 있
다.
4) 사진과 인터넷(디시인사이드, 싸이월드 등)
가) 표현방법 : 본인이 좋아하는 사진을 인터넷상에서 서로 교환하기도 하고 타인
에게 보여 주기도하고 타인사진을 본다 .
나) 기대효과 : 본인의 사진이든 타인의 사진이든 사이버 상에서 서로 공유하고
쪽지나 또는 리플로써 칭찬을 하기도 하고 받기도하며 적절한 감
정을 글로 써 주고 받으면서 자기 감정을 표출시킬 수 있다 .
5) 동영상과 컴퓨터
가) 표현방법 : 평상시 좋아하는 음악회나 전시회 또는 여행 기념일 등을 동영상
으로 찍어 컴퓨터에서 보거나 시디로 구워놓는다 .
나) 기대효과 : 잃어버렸던 기억을 찾아볼 수 있고 행복했던 또는 불안했던 순간
들을 다시 보고 그때의 감정과 지금의 감정을 정리해보며 기쁨을
찾아본다.
6) 앨범 만들기
가) 표현방법 : 자기가 좋아하는 그룹 또는 자연 등의 사진을 모아 정리하여 앨범
에 넣어 꾸며 보고 사진 찍었을 때의 감정들과 느낌 등을 적는다. 나) 기대효과 : 지난 과거나 또는 현재의 감정을 느끼고 마음에 평온을 찾을수 있
다.
7) 사진촬영
가) 표현방법 : 들로 산으로 바다로 나가서 직접 사진을 찍어보는데 어떤 형식이
나 틀에 구속받지 않고 내멋대로 자유롭게 찍어본다
나) 기대효과 :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카메라
만이 내는 찰칵 소리에 더 기분을 넣어 스트레스 해소와 자유로
움을 만끽해볼 수 있다 .
8) 사진전
가) 표현방법 : 평소에 찍어 놓았던 사진을 잘 다듬어 액자에 넣어 전시장에서
전시를 해본다 .
나) 기대효과 : 전시장 자체 공간에서 느끼는 뿌듯함과 벽에 걸어 조명과 어우
러져 한층 더 빛을 발하는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본인 스스로를
최고라는 생각과 자기 만족과 자존감을 향상시킬 수 있다 .
9) 기타
- 유리병에 (속또는 겉에) 사진 넣어 예쁘게 장식해보기
- 쇼핑백 만들기
- 기차 / 빌딩 속에 나 또는 사람들
- 액자 꾸미기
- 가족신문 만들기
8. 사진을 이용한 미술치료 기법 사례
가. 가족사진 기법 응용
1) 서로의 원하는 모습 사진 찍어주기
IP(Information Provider)는 카센터 직원인 B씨와 4년 전에 결혼했다. 친오빠같이 자상한 남편의 모습이 좋아서 결혼하였지만 결혼 후 남편은 부인이나 집안일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였다. 부인에게 따듯한 말 한마디 잘 건네지 않는 무뚝뚝한 남자였던 것이다.
남편은 부인이 해산을 앞두고 진통을 하며 병원에 있을 때에도 출근할 시간이 되자 함께 있어달라는 부인을 혼자 놔두고 일을 하러 가버렸으며 부인은 그런 남편이 야속하여 내내 울었다고 한다.
점차 둘의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성생활도 계속 되었고 둘 사이는 점점 소원해졌다. 남편은 낮에 직장으로 걸려오는 ‘밥 먹었냐, 언제 들어올 거냐? ’등의 부인의 안부 전화도 귀찮아하기만 한다.
이런 관계를 개선해보고자 부인이 대화를 해보려고 해도 결국은 싸움으로 끝나는 일이 계속되었고 둘의 대화는 점점 사라져갔다. 주위의 권유로 상담실을 찾았고 부부는 이미 서로 신뢰를 상실한 상태였고 현재의 상황에 대해 아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전의 가족사진을 가지고 오게 하였다.
- 표현방법
① 서로를 대하는 평소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봄으로서 본인이 평소 자신의 모습
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본다.
② 서로 상대방에게 원하는 모습을 연출하도록 하여 사진을 찍어봄으로써 상대가
자신에게 어떤 모습을 원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기대되는 효과
사진을 매개로 서로에게 원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다.
-적용하기 좋은 사례
적극성이 어느 정도 있는 내담자, 변화되고자하는 욕구가 강한 내담자, 상담마무리 단계에서 ‘서로에게 원하는 모습을 이야기 하고자 할 때
2) 우리가족 사진 경매
IP는 잦은 가출과 반항적인 태도로 상담실에 오게 되었다. 내담자의 문제 행동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해보니 부모의 잦은 싸움과 불화로 아이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내담자의 부모와 함께 상담을 하게 되었다.
내담자의 부모는 같은 직장에서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결혼을 하면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부인은 남편과 달리 직선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가정에서 남편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
IP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서 어머니는 보험설계사의 직업을 갖게 되었다. 활발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어머니는 보험설계사 일이 재미있었고 많은 보람을 느꼈다. 일에 더욱 매달리면서 가정의 일에는 조금씩 등한시하기 시작했고 남편보다 보수가 많아지면서 남편은 더욱더 위축되었고 자신의 일을 잘 이해해주지 않은 남편과 잦은 다툼을 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다툼 뒤에는 꼭 아들에게 하소연하면서 아버지의 흉을 보았다. 그러면서 ‘네 아버지처럼 되면 안 된다. 남자는 포부가 있어야지.’라며 아들을 부부의 싸움에 끌어들였다. 아들은 아버지가 불쌍하면서도 무능력한 아버지가 싫었고 항상 아버지 험담을 어머니도 싫었다. 그래서 잦은 가출을 하였고 가출해서 만난 친구들과 맘을 터놓고 지내면서 문제행동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서로 자기의 입장을 고수하고 다른 가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과거의 행복했었던 가족사진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을 가지고 오게 한다.
-표현방법
① 가져온 사진에 대해 가족 구성원이 설명을 하고 각 사진을 경매에 붙인다
② 준비된 하트 코인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을 사고 그 사진을 산 이유에 대해
이야기 나눈다.
-기대되는 효과
각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족상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다.
-적용하기 좋은 사례
내담자가 가져온 사진이 많은 경우,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쉽게 나오지 않을 경우
3) 가족 조각 사진
IP의 부인인 B씨가 내담자와 시아버지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상담을 의뢰해 왔다. IP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공무원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어머니의 장남으로 아래에 여동생 E가 있다.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는 아들에게 마음처럼 관심을 쏟아주지는 못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큰 기대를 가지는데 IP가 기대를 다 채워주지 못하자 점차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게 되고, 성장하면서 아버지와 IP의 골이 더욱더 깊어져만 간다. 이와 반대로 딸은 아버지에게 애교 있게 대함으로써 밀착관계가 형성된다. IP가 진로결정문제에 있어 아버지와 의견차이로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IP가 B와 결혼을 하여 분가를 하면서 거의 왕래가 없어지게 된다. IP 또한 7세인 자신의 아들에게도 따뜻하게 대하지 않는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면서 둘 사이에 대화는 점점 사라져갔고 관계 속에서 IP의 아내B씨는 가족들에게 잘하는 며느리이지만 남편이 가족과 동떨어져 있으므로 힘듦을 느끼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긍정적으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된다. 둘의 소원한 관계가 회복된다면 IP가 자신의 아들을 대하는 태도도 변화될 것이라고 믿는다. 가족간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가족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나 IP와 가족들의 관계를 볼 수 있는 사진들을 가져오도록 한다.
- 표현방법
① 사진을 찍었을 당시를 회상해보고 그 상황에 대한 느낌 이야기 나눈다.
② 그 상황에 대해 내담자기 원하는 위치나 표정을 새로 만들어 다시 사진을찍는다
③ 예전 사진과 다시 찍은 사진을 비교해 그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 나눈다.
- 기대되는 효과
예전에 가졌던 불만이나 감정이 자연스럽게 표출될 수 있고 알지 못한 예전의 관계에 대해 알 수 있다.
-적용하기 좋은 사례
상담 초기나 중반에 가족관계에 대한 보다 깊은 관찰이 필요한 경우
나. 사진앨범을 이용한 자기 관리 중재가 자폐 아동의 자
립적인 일상생활 행동에 미치는 효과
대부분의 자폐학생들은 주의집중 시간이 짧고 학습활동 중에 과제이탈 행동과 과제와 상관없는 상동행동을 보이며, 자신의 의지, 생각, 느낌에 의해 행동을 직접 조절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감독이나 통제하에서 행동하게 된다. 사회가 자폐아동의 능력에 대해 제한된 기대로 과잉보호, 자기결정을 촉진하는 경험의 부재, 타인에 대한 부적절한 요구와 같은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자폐학생들은 일반화 문제나 의존성, 연속적인 복잡한 행동 습득의 어려움을 겪는다.
자폐학생들은 아동기에서부터 다양한 선택의 기회조차 제공받지 못하고 늘 다른 사람의 지시나 결정을 따르게 된다. 자폐학생들의 의존적인 삶의 형태에서 벗어나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개인의 자기 결정력과 자발성을 촉진시키는 전략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연구자들은 자폐학생에게 복잡한 과제를 수행하거나 자립적으로 과제를 바꿀 수 있는 계열화된 변별자극으로서 그림, 사진, 선 그림과 같은 시각적 단서들을 사용하였다. Wacker와 Berg(1983)는 중등도와 중도지체인에게 18단계에서 30단계로 구성
된 복잡한 조립 과제를 선그림의 사진을 사용하여 가르쳤고, Johnson과 Cuvo(1981)는 성인 장애인에게 끓이기, 빵 굽기, 고기 굽기 등과 같은 요리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그림으로 된 요리책을 사용하였다. Sowers와 Rusch, Comming 등(1980)은 정신지체 성인에게 그림단서를 사용하여 직장에서 점심이나 휴식시간에 자립적으로 이동하고 다시 일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가르쳤다. 윤현숙(1997)은 자폐유아에게 양치질하기, 옷 갈아입기, 입실행동을 계열화된 사진 앨범을 이용하여 가르쳤다. 이 외에도 장애인에게 자립적 행동을 가르치고(Thinesen & Bryan, 1981), 컴퓨터를 사용하기(Frank, Wacker, Berg, & McMahon, 1985), 사무기와 세탁기 사용하기(Wacker, Berg, Berrie, & Swatta, 1985) 등을 가르치기 위해 시각적 단서들을 사용하였다. 그림이나 사진을 이용한 자기관리 방법은 자폐아동의 복잡한 과제수행과 독립적인 행동의 수행 및 일반화에 많은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그림책은 작고, 새로운 상황으로 쉽게 전이되고, 쉽게 소거될 수 있으며 일단 아동이 그림을 이용한 자기관리에 익숙해지면 후속적인 행동들은 교사나 부모들이 비교적 적은 노력으로 가르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또한 자폐학생들은 자기 행동을 관리함으로써 현실적으로 엄격한 감독이 불가능한 일반적인 환경에서 더 쉽게 적응할 수 있으며 자립적인 행동으로 인해 타인으로부터 긍정적인 대우를 받고, 본인 스스로 자아 존중감과 정체감이 증가될 것이다.
1) 연구문제
사진 활동 스케쥴을 이용한 자기관리 중재가 일상생활행동을 수행함에 있어서 성인의 언어적, 신체적 도움에 대한 의존과 부적절한 방해 행동들로 인해 부분적인 수행을 보이는 자폐학생들이 자립적인 수행행동을 증가시키고 부적절한 행동들을 줄이는데 효과가 있는지 살펴보고 그 효과가 다른 상황에서 일반화되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는 세 가지 목표 행동을 선정하였는데 청소기 사용하기는 12단계, 걸레질하기는 16단계, 휴지통 비우기는 9단계씩 과제 분석하였다. 각 목표 행동들은 구성된 하위 기술들을 사진으로 찍어 사진 활동 스케쥴을 만들어 중재 단계별로 사용하였다.
가) 사진 활동 스케쥴을 이용한 자기관리 중재가 자폐학생의 일상생활행동의 수행 에 있어서 자립적인 과제수행행동을 증가시키는가?
나) 사진 활동 스케쥴을 이용한 자기관리 중재가 자폐학생의 일상생활행동의 수행 에 있어서 과제이탈행동을 감소시키는가?
다) 사진 활동 스케쥴을 이용한 자기관리 중재가 자폐학생의 일상생활행동의 수행 에 있어서 자립적인 과제완수율을 증가시키는가?
라) 사진 활동 스케쥴을 이용한 자기관리 중재로 인한 자립적인 과제 수행행동 및 과제 완수율의 증가와 과제이탈행동의 감소가 다른 환경에서도 일반화되는가?
2) 대상 학생 선정 기준
대상 학생의 선정은 연구자와 담임교사의 사전 관찰과 부모의 동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상 선정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 생활연령이 14 ~ 16세인 학생.
- 감각 및 운동 장애가 없는 학생.
- 장애 관련 기관이나 병원에서 자폐로 진단 받은 학생.
- 일상생활행동( 청소기로 청소하기, 걸레질하기, 휴지통 비우기)에 필요한 하위 기술들을 성인의 언어적, 신체적 도움을 받아 수행할 수 있으며 성인의 언어 적, 신 체적 촉진이 없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자립적으로 수행하지 않는 학생.
- 교사의 언어적 지시를 이해하고 행동을 수행할 수 있는 학생.
- 사진을 보고 제시된 동작을 모방할 수 있는 학생.
3) 선정된 대상 학생의 특징
대상학생 1 (만 14세)은 자폐로 진단을 받은 중학부 남학생이었다. 체격은 날씬한 편이나 건강상태는 양호하였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며, 자신의 욕구가 이루어지지 않거나, 화가 나면 소리 내어 울고 자신의 팔뚝을 심하게 문다. 심하게 무는 행동으로 인해 팔뚝에 딱딱한 굳은 살이 생겼다. 집단 수업에 참여하기보다는 수업 중에 앞으로 나와 생각나는 단어나 먹고 싶은 과자 이름을 칠판에 적어서 교사의 확인을 받으려고 부정확한 발음으로 단어를 말하고 교사의 몸을 끄는 행동을 수시로 하여 수업 방해 행동을 하였다.
교사의 언어적 지시를 이해하고 자신의 요구를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 지시에 바로 응하지 않아서 신체적 촉진을 동반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글자를 단어 수준으로 읽으며, 칠판에 적힌 문장을 보고 쓴다. 일상생활행동에 필요한 기본적인 기술들을 수행할 수 있으나 교사의 확인이나 촉진을 받아야 만 행동을 하였다. 청소하기에 필요한 세부적인 행동, 즉 청소기 사용하여 청소하기, 걸레질하고 걸레 빨기, 휴지통 비우기 등을 수행한 경험이 부족하여 바르게 수행하지 못하며, 간단한 일상생활 행동이라도 스스로 하지 못하고 교사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다.
대상학생 2(만 10세)는 자폐로 진단을 받은 중학부 여학생이었다. 비만이나 건강상태는 양호하지만 여름엔 아토피성 피부염으로 피부상태가 좋지 않았다. 파란색 색종이 자르기 등 자신이 좋아하는 행동에 집착하여 집단 수업시 수업 방해를 많이 하였다. 상황이나 타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학습에 관심이 거의 없으며, 혼자 소리를 내어 수업을 방해하고. 교사의 간단한 지시를 이해하나 자신의 좋아하는 행동을 고집함으로써 지시따르기가 잘 되지 않는다. 대명사를 반전하여 필요한 요구를 문장으로 표현하거나(과자 사준다고 그래, 화장실 가라고 그래), 지연 반향어를 사용하였다. 글자를 읽지 못하나 시각적으로 글자를 보고 쓰기는 하였다. 일상생활행동에 필요한 기본적인 기술들을 수행할 수 있으나 교사의 확인이나 촉진을 받아야 만 행동을 하였다. 색종이 자르기 등 한 두 가지 활동에 집착하며 자리 이탈을 많이 하고 친구하고는 상호작용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청소하기에 필요한 세부적인 행동, 즉 청소기 사용하여 청소하기, 걸레질하고 걸레 빨기, 휴지통 비우기 등
을 수행한 경험이 부족하여 바르게 수행하지 못하며, 간단한 일상생활 행동이라도 스스로 하지 못하고 교사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았다.
4) 실험 장소
실험은 기초선과 유지 기간 동안에 작업실인 일상 생활실에서 실시. 일상 생활실 한 면에는 교재 교구장, 장식장, 자료 수납장이 있었고, 다른 한 면에는 작품 진열장 2개, 게시판, 칠판이 있었고 또 다른 한 면에는 재봉틀 3대와 컴퓨터 책상, 시청각 자료 보관함이 있었으며, 중앙에는 작업대 2대와 걸상 15개가 있었다. 벽에는 시계와 선풍기, 커튼이 부착되어 있고 코너에는 청소기와 청소용구 보관함, 휴지통이 있다.
5) 실험 도구
청소기로 청소하기와 걸레질하기, 휴지통 비우기의 세 가지 목표행동에 따른 세 개의 활동사진 즉 사진 활동 스케쥴은 각 목표행동을 과제 분석하여 각 단계별 하위 기술들의 사진을 찍었고 그 밑에 행동을 설명하는 글씨를 제시하여 제작하였다.
- 사진 활동 스케쥴은 14㎝ × 22㎝ 크기로 한 장씩 넘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 학생들이 각 장을 넘기면서 일련의 행동 순서를 익히고 한 장씩 넘기는데 도움 이되도록 각 사진의 하단에 노란 색 숫자 스티커를 붙였다.
- 각각의 사진 활동 스케쥴 마다 마지막 하위 기술이 끝난 뒤에는 과제가 끝났음 을 알리기 위해 스마일 스티커를 붙이고 ‘끝’ 이라는 글자를 함께 제시하였다.
- 스마일 얼굴 그림 뒤에는 활동 강화를 자연스럽게 연결하기 위해 컴퓨터실에서 오락을 하는 사진을 제시하였다.
- 세 가지 목표행동 중에서 청소기로 청소하기 행동은 12단계, 걸레질하기 행동 은 16 단계, 휴지통 비우기 행동은 9단계의 하위 기술로 구성되었다.
6) 실험 중재 전 관찰
중재를 실시하기 전 10분 동안 아동이 사진 활동 스케쥴을 사용하여 일상생활행동을 자립적으로 수행하는 모습을 비디오로 녹화하여 관찰하였다. 연구자는 학생에게 사진 활동 스케쥴을 보여주면서 사진의 행동을 모방하면서 목표행동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학생이 도움을 청하는 경우에는 언어적 촉진을 주고 나서 10초 후에 신체적 촉진을 주고 수행에 어려움을 보이나 도움을 청하지 않는 경우에는 연구자가 ‘도와줄까?’ 라는 질문으로 도움을 청하도록 유도하고 나서 단계적으로 언어적, 신체적 촉진을 주었다. 사진 활동 스케쥴을 보느라 과제를 수행하지 않는 때는 언어적, 신체적 촉진을 통해 다시 지시를 하였다. 학생이 과제수행행동을 보이지만 한 단계에서 너무 오래 머무를 경우에는 1분이 경과할 때에 언어적 촉진으로 다음 단계를 유도 이 기간 동안은 학생에게 목표 행동을 과제 분석한 각 단계의 사진들을 인식하고 변별하게 가르쳤다. 구체적인 절차는 아래와 같았다.
- 학생에게 하위 단계 사진들을 3~4가지씩 보여주면서 사진과 글자를 설명해 주고 나서 교사가 지시한 사진을 지적하거나 카드를 들게 하였다.
- 지시한 카드를 찾으면, 사진의 단서를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매 단계마다 사진을 지적하면서 각 행동에 대해 설명하게 하였다.
- 각 목표행동을 구성하는 모든 하위 기술 사진들에 대해서 한 사진마다 3번 씩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는 과정을 한 회기에 하였고 학생이 연속 3회기 동 안 이와 같은 절차를 통해 각 하위 기술의 사진들을 100% 변별할 때까지 반 복하여 실시하였다.
- 정반응을 보일 때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방법으로 칭찬과 강화물을 제공.
중재 초기에는 연구자가 학생의 행동을 신체적, 언어적 촉진을 하고 학생이
목표행동의 수행을 보이면 연구자의 촉진을 지연하거나 소거하였다. 학생의
흥미를 유지하기 위해서 각 회기마다 각 행동에 따른 사물이나 활동, 강화물
을 다르게 사용하였다. 학생이 사진 활동 스케쥴을 여러 장 넘길 경우에는 스
티커의 번호를 확인하게 하여 순서대로 한 장씩 넘기게 하였다.
<자기과제 중재 훈련절차>
1. 학생에게 사진 활동 스케쥴을 보여주면서 해야 할 목표행동의 전과정을 설명한
다.
2. 설명한 후에, 학생에게 사진을 넘기면서 목표행동을 수행하도록 지시한다.
3. 10초 동안 학생의 반응이 없으면, 연구자가 사진 활동 스케쥴을 넘기는 시범을
보인다. 교사의 신체적 도움으로 학생이 사진 활동 스케쥴을 넘기게 한다.
4. 시범 후, 학생의 반응이 없으면 연구자의 신체적 촉진으로 학생이 사진 활동 스
케쥴을 넘기게 한다.
5. 학생이 사진 활동 스케쥴을 넘기면 학생에게 사진과 같은 행동을 수행하도록 언 어적 지시를 한다.
6. 10초 동안 학생의 반응이 없으면, 적절한 시범을 보이고 신체적 촉진으로 학생의
행동을 유도한다.
7. 연구자의 시범과 촉진에 의해 학생이 활동을 시작하여 목표행동을 수행하면 숫
자 스티커를 가리키며 다음 장을 넘기면서 다음 행동을 수행하게 한다.
8. 사진 활동 스케쥴를 넘기면서 스마일 얼굴이 나오면 학생에게 과제가 끝났음을
알려 주고, 다음 장을 넘겨 컴퓨터실에서 오락하는 사진을 보여주면서 학생에게
하고 싶은 활동을 선택하게 한다.
7) 측정 행동
측정한 종속변인은 선정된 목표행동의 과제 수행행동과 과제 이탈행동 및 각 목표행동의 각 하위 기술 과제 수행률이다. 두 학생의 목표행동은 부모들이 자립적으로 수행하기를 원하고 직업교과 시간마다 요구되는 행동이며, 졸업 후 직업생활과 연계될 수 있는 일상생활행동을 고려하여 세 가지 행동들을 선정하였다.
목표 행동 |
조작적 정의 |
청소기로 청소하기 (12단계) |
청소기를 가져와서 청소기를 사용하여 청소를 하고 청소기를 정리하여 제자리에 갖다 놓는 일련의 연속적인 행동을 말한다. 청소기를 가져와서 코드를 빼어 콘센트에 꽂고, 청소기 손잡이를 잡아 청소기 전원을 켜서 바닥을 청소기로 민다, 청소기를 밀다 코드 줄이 꼬이면 코드 줄을 풀고, 구석구석 청소기로 민다, 청소가 끝나면 콘센트에서 코드를 뽑아 감고 청소기대를 세워서 꽂은 다음에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 |
걸레질하기 (16단계) |
걸레를 가져와서 걸레를 물에 적셔서 걸레질을 하고, 더러워진 걸레를 빨아 말리는 일련의 연속적인 행동을 말한다. 청소용구 함에서 걸레를 가져와서 세면대에 가서 수도물을 틀고 걸레를 물에 젖시어 손으로 짠다. 그리고 걸레를 펴서 접어 걸레질을 하고 걸레가 더러워지면 뒤집어서 접어 다시 걸레질을 하며, 세면대에 가서 물을 틀고 걸레에 비누칠을 하여 비벼서 빨고, 여러 번 물에 헹구고 짜서 말린다. |
휴지통 비우기 (9단계) |
쓰레기를 들고 휴지통에 가서 쓰레기를 분류하고, 쓰레기를 버리는 일련의 연속적인 행동을 말한다. 쓰레기를 들고 휴지통으로 가서 일반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를 분류한 후에, 일반 쓰레기를 휴지통에 넣는다, 휴지통에 씌워진 비닐 봉투를 꺼내서 규격 쓰레기 봉투에 담고 묶은 후, 휴지통에 새 비닐 봉투를 씌워 제자리에 놓고, 쓰레기가 담긴 봉투를 지정된 장소에 버린다. |
각 목표행동에 대한 과제 수행행동과 과제 이탈행동은 실험 전 사전 관찰 기간 동안에 학생을 관찰한 결과들을 토대로 조작적으로 정의하였다..
-구체적 관찰 행동
과제수행행동 |
과제이탈행동 |
․목표행동과 관련된 사물을 적절히 다룬다. ․사진을 보고 관련된 행동을 한다. ․상동행동이나 부적절한 행동을 동반하지만 과제를 수행한다. ․교사의 신체적 촉진시 관련된 행동을 같이 수행한다. ․교사의 언어적 지시 후에 목표행동과 관련된 사물이 있는 쪽으로 이동한다. ․과제수행 후 선택한 활동을 한다. ․한가지 과제를 수행 후 사진 활동 스케쥴을 본다. ․시간을 요하는 목표행동을 제외한 한단계의 행동을 30초안에 수행. |
․목표행동과 관련된 사물을 원래의 용도와 다르게 사용. ․사진을 보고 관련된 행동을 하지 않는다. ․과제를 수행하지 않고 교실을 돌아다니거나 혼잣말, 상동행동 등 부적절한 행동을 한다. ․교사의 신체적 촉진 시 다른 곳을 보거나 같이 수행하지 않는다. ․교사의 언어적 지시 후에 관련된 사물을 향하지 않고 다른 쪽으로 간다. ․과제 수행 후 좋아하는 장난감이나 활동 을 하지 않고 혼잣말이나 상동행동 등 부적절한 행동을 한다. ․과제 수행 전 사진 활동 스케쥴을 보고만 있다. ․목표행동과 관련된 사물을 손에 쥐고 있지만 다른 행동을 한다. ․시간을 요하는 목표행동을 제외한 한 단계의 행동을 30초 이상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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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논의 및 제언
사진 활동 스케쥴을 이용한 자기관리 중재를 통해 자립적인 과제수행행동이 증가되고 과제이탈행동이 감소하며, 과제 완수율이 증가하는지를 조사하였다. 그리고 그 효과가 상황이 다른 환경에서도 일반화가 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첫째, 사진활동 스케쥴을 이용한 자기관리 중재를 통해서 두학생 모두 세가지 일
상 생활 행동의 자립적인 과제수행행동이 증가하였다.
들째, 사진활동 스케쥴을 이용한 자기관리 중재를 통해서 두학생 모두 세가지 일
상 생활 행동의 과제이탈행동이 감소하였다.
셋째, 사진활동 스케쥴을 이용한 자기관리 중재를 통해서 두학생 모두 세가지 일
상 생활 행동의 과제 완수율이 증가하였다.
넷째, 사진활동 스케쥴을 이용한 자기관리 중재로 인한 과제수행행동과 과제 완수
율 증가와 과제이탈행동의 감소는 중재가 종료된 후, 다른 환경에서도 일반
화되었다.
결론적으로 사진 활동 스케쥴을 이용한 자기관리 중재는 자폐학생들이 자립적인 일상생활행동을 수행하는데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