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2군단의 해체
신병이 많았던 국군 7사단
전쟁에서의 패배는 아주 깊은 후유증으로 부대의 장병에게 남는다. 격렬한 공방(攻防)을 벌이다가 지는 전투는 나름대로 괜찮다. 전비(戰備)의 상황이야 각기 다르겠지만 적에게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았다면 저 자신의 실력을 우선 알고, 상대의 상황도 대강 알기 때문이다.
단지 싸움에서의 패배로 받아들이면서 다음의 기회를 노릴 수 있어서 그렇다. 참혹하게 무너지는 경우가 문제다. 깊게 파인 상처는 좀체 아물지 않는다. 심리적인 공황은 더 심각하다. 적의 실체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처참하게 얻어맞아 무너졌을 때는 두려움이 매우 커진다. 따라서 부대 전체는 적에게 다시 밀리는 상황에 도달하면 공포감이 급증해 제풀에 꺾인 채 등을 보이면서 마구 무너진다.
1950년 11월 말 평안남북도 묘향산 일대에서 중공군에게 무너진 7사단의 형편이 그와 무관치 않다. 7사단은 김일성 군대가 그 해 6월25일 전면적인 남침을 벌일 때 서울 북방의 동두천과 의정부 일대를 막았던 사단이다. 국군은 김일성의 기습적인 남침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분투한 사단이 있었지만 국군은 전반적으로 김일성의 기습에 당황했고 대다수 전선에서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7사단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들은 비교적 빨리 김일성 군대에게 등을 보였다. 적의 주공(主攻)에 해당했던 병력이 동두천~의정부를 공략했고, 7사단이 빠르게 무너지는 바람에 수도 서울은 곧 인민군의 발길에 놓이고 말았다.
낙동강 전선에서 적의 공세를 막아내던 무렵, 그리고 아군의 모든 부대가 북진 대열에 뛰어들던 시점에 7사단은 후방인 대구에서 급히 모집한 신규 병력으로 채워지면서 재편성을 마쳤다. 따라서 11월 말에 접어들어 중공군과의 대규모 접전을 벌일 무렵이라고 해도 7사단의 많은 병력은 전기(戰技)가 충분치 않은 인원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에 앞서 10월 말에 벌어진 전투 상황에서도 7사단을 비롯한 국군 2군단 예하 6사단, 8사단은 모두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 앞에 전선으로부터 급히 물러나야 했다. 전투의 속성을 잘 알지 못한 채 급히 재편성을 위해 끌어모았던 병력이 많았던 7사단은 따라서 적 앞에 설 때의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아울러 사단이 위기에 처했을 때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을지 모른다.
앞에서도 자주 거론했던 내용이다. 부대의 후퇴는 엄연한 작전에 속한다. 대오를 정렬하면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축차적으로 물러선다면 아군의 피해는 최대로 줄일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바로 분산(分散)이다. 이리저리 나뉘고 쪼개진 상태로 어지러이 뒤로 빠지는 경우다. 일정하게 적의 공격에 대응하면서 물러나는 일은 이런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
신병이 많았던 국군 7사단
전쟁에서의 패배는 아주 깊은 후유증으로 부대의 장병에게 남는다. 격렬한 공방(攻防)을 벌이다가 지는 전투는 나름대로 괜찮다. 전비(戰備)의 상황이야 각기 다르겠지만 적에게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았다면 저 자신의 실력을 우선 알고, 상대의 상황도 대강 알기 때문이다.
단지 싸움에서의 패배로 받아들이면서 다음의 기회를 노릴 수 있어서 그렇다. 참혹하게 무너지는 경우가 문제다. 깊게 파인 상처는 좀체 아물지 않는다. 심리적인 공황은 더 심각하다. 적의 실체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처참하게 얻어맞아 무너졌을 때는 두려움이 매우 커진다. 따라서 부대 전체는 적에게 다시 밀리는 상황에 도달하면 공포감이 급증해 제풀에 꺾인 채 등을 보이면서 마구 무너진다.
1950년 11월 말 평안남북도 묘향산 일대에서 중공군에게 무너진 7사단의 형편이 그와 무관치 않다. 7사단은 김일성 군대가 그 해 6월25일 전면적인 남침을 벌일 때 서울 북방의 동두천과 의정부 일대를 막았던 사단이다. 국군은 김일성의 기습적인 남침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분투한 사단이 있었지만 국군은 전반적으로 김일성의 기습에 당황했고 대다수 전선에서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7사단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들은 비교적 빨리 김일성 군대에게 등을 보였다. 적의 주공(主攻)에 해당했던 병력이 동두천~의정부를 공략했고, 7사단이 빠르게 무너지는 바람에 수도 서울은 곧 인민군의 발길에 놓이고 말았다.
낙동강 전선에서 적의 공세를 막아내던 무렵, 그리고 아군의 모든 부대가 북진 대열에 뛰어들던 시점에 7사단은 후방인 대구에서 급히 모집한 신규 병력으로 채워지면서 재편성을 마쳤다. 따라서 11월 말에 접어들어 중공군과의 대규모 접전을 벌일 무렵이라고 해도 7사단의 많은 병력은 전기(戰技)가 충분치 않은 인원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에 앞서 10월 말에 벌어진 전투 상황에서도 7사단을 비롯한 국군 2군단 예하 6사단, 8사단은 모두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 앞에 전선으로부터 급히 물러나야 했다. 전투의 속성을 잘 알지 못한 채 급히 재편성을 위해 끌어모았던 병력이 많았던 7사단은 따라서 적 앞에 설 때의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아울러 사단이 위기에 처했을 때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을지 모른다.
앞에서도 자주 거론했던 내용이다. 부대의 후퇴는 엄연한 작전에 속한다. 대오를 정렬하면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축차적으로 물러선다면 아군의 피해는 최대로 줄일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바로 분산(分散)이다. 이리저리 나뉘고 쪼개진 상태로 어지러이 뒤로 빠지는 경우다. 일정하게 적의 공격에 대응하면서 물러나는 일은 이런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
- 6.25전쟁에 참전한 중공군 포병대의 모습이다. 미군에 비해 떨어지는 화력이었으나 중공군은 우회와 매복을 반복하며 참전 초반 승세를 이어갔다.
당시의 7사단 후퇴 상황은 분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었다. 먼저 전선 동쪽을 맡았던 5연대와 8연대는 중공군 군단 병력이 몰려들면서 급격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사단본부와 연대 본부가 적의 공세에 직접 노출되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사단과의 통신은 모두 끊겼고, 덕천의 퇴로(退路)에는 이미 중공군이 서 있었다. 앞과 뒤에서 적을 맞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일종의 포위 상태였다고 볼 수 있었다.
사단 전체의 분산은 더 심각해지고 있었으며, 후방으로 진입해 포위망을 구축한 중공군의 공세는 더욱 맹렬해지고 있었다. 5연대와 8연대가 무너지는 상황을 알았던 3연대는 급기야 군단 전투지경선을 넘어 미군 2사단 38연대로 후퇴했다.
결국 3연대는 미 2사단 38연대와 함께 움직여야 했다. 미 2사단의 상황도 물론 좋지 않았다. 앞서 소개한 그대로다. 그들은 순천 지역으로 후퇴하면서 좁은 협곡 지형에 몰려들다가 중공군의 가혹한 공격을 받아야 했다. 아무튼 국군 7사단 3연대는 그나마 미군의 연대와 함께 후퇴하면서 7사단 3개 연대 중에서는 가장 적은 피해를 기록할 수 있었다.
이들은 결국 평양의 동쪽인 강동군 승호리라는 곳에 집결한 뒤 재편성에 들어갔다. 후퇴 뒤의 재집결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나 부대가 심각하게 분산의 상황을 맞아 후퇴했던 바람에 재편성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전선 지휘관이 해야 했을 단계별 조치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던 까닭이다.
같은 2군단 예하의 국군 8사단의 상황도 그와 다를 바 없었다. 2군단은 6, 7, 8사단을 거느리고 있던 부대였다. 6사단은 일찌감치 벌어진 압록강 초산진 전투로 인해 예비로 머물렀다. 이들은 10월 말 신속한 기동으로 압록강 바로 앞인 초산에 먼저 진출했었다. 그러나 이미 압록강을 넘어들어와 적유령, 강남산맥 등에 몸을 숨긴 중공군의 매복과 포위에 걸려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6사단은 재편성을 시도했지만 약 한 달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시간에 작업을 마무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11월 말에 벌어진 ‘크리스마스 대공세’ 때는 군단의 예비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전선에는 지금까지 소개한 7사단과 8사단이 섰다. 7사단은 덕천, 8사단은 영원과 맹산을 향해 나아갔다. 역시 묘향산 일대의 지명들이다.
8사단은 원리(院里)라는 곳에 사단 전방지휘소를 만든 뒤 11월 23일부터 공격에 들어갔다. 묘향산 동쪽에 있는 영원과 맹산을 발판으로 진출해 압록강이 흐르는 만포진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8사단이 진출을 시작할 무렵의 중공군은 이미 야간을 이용한 산악 이동으로 11월 20일경 이미 빽빽한 삼림이 우거진 지역 일대에서 병력을 산개(散開)해 놓은 채 아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 한반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출정식에 선 중공군 병력. 압도적인 병력수를 내세워 중공군은 참전 초반 강력한 공세를 벌였다.
8사단이 맞이하는 상황은 대개 7사단과 거의 비슷했다. 11월 24일 전선의 모든 유엔군과 국군에게 공격명령이 떨어졌고, 초반에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24일 당일에는 당초의 공격목표인 덕천과 영원, 맹산으로의 진출이 쾌조(快調)였다. 그러나 25일에 접어들면서 아군은 적인 중공군의 대부대와 조우(遭遇)하기 시작했다. 그저 만나서 싸우는 정도는 아니었다. 중공군의 출현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전선 어딘가가 뚫려 그 틈으로 적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오는 낌새였다. 25일은 도처에서 아군의 분산에 이은 마구잡이 후퇴가 벌어졌던 듯하다. 연대는 연대의 대오를 갖추지 못했고, 대대 또한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적의 기습에 당황한 아군은 부대가 대오를 갖추지 못한 분산으로 이리저리 나뉘면서 마구 밀렸다고 한다. 연대장과 각급 대대장 등이 그런 상황을 돌이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적은 이미 아군의 후방에까지 내달아 포위와 기습을 반복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벌어진 전투는 대개 ‘덕천~영원 전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당시 전력과 정신력 등 모든 전쟁준비에서 미군과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던 한국군 군단 차원의 싸움이었는데, 패배는 아주 컸다. 먼저 소개했듯이 2군단은 미 8군 예하의 서부전선 가장 동쪽을 맡았다.
따라서 서부전선을 총괄하는 미 8군과 동부전선을 담당했던 미 10군단의 경계 지점에 섰던 군대가 바로 국군 2군단이었다. 크게 이르자면, 미 8군과 미 10군단의 전투지경선에 국군 2군단이 섰던 셈이었다. 이 경계선이 국군 2군단의 급속한 후퇴로 무너지면서 생긴 결과는 자못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미 8군의 오른쪽 견부(肩部)가 빨리 무너지면서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이 그 틈으로 전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아군 전체의 전선을 강력하게 위협하는 날카로운 칼과 다름이 없었다. 7, 8사단의 연대장 두 명은 이 전투에서 적에게 포로로 잡혔다.
연대장이 적에게 잡힐 정도였다면 당시 국군 7, 8사단의 후퇴상황이 도대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승호리 등에서 재집결 뒤 재편성을 했다고는 하지만 병력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정황도 여러 증언을 통해 드러난다. 국군 7, 8사단에 파견 나와 있던 미군 군사고문 등은 국군의 급속한 와해에 상당히 경악했던 모양이다. 급기야 11월 28일에는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가 아군 전체에 후퇴명령을 내린다.
이는 국군 2군단의 급속한 와해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었다. 미 8군 전선의 오른쪽 견부가 급격하게 무너져 내리자 맥아더 사령부는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국군에 대한 미군의 시선이 아주 싸늘해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