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꽃 서른아홉 송이
황량한 바람이 휩쓸고 간 길 위에 무수히 쌓인 낙엽을 밟으며, 산길을 홀로 오르는 마음이다. 태곳적 바람이 이랬을까? 솔바람 소리 고요히 들려오는 백설 쌓인 산봉우리에 홀로선 나목(裸木)이 내 마음인양 을씨년스럽게 흔들린다. 고성(孤城)은 북풍한설(北風寒雪)에 몸을 맡긴 채 덩그러니 서있고, 고색(古色)이 짙은 저 달은 무얼 찾으려 함인가? 한적한 밤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삶을 시적으로 표현해 본 것이다.
딸과 아들이 꽃 한 번 피워보지 못하고 연이어 죽음으로 인하여 그녀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단장의 아픔을 고스란히 끌어안은 채 눈물로 점철된 시를 남겼는데, 애끓는 속내를 그 누가 헤아려 줄 수 있으랴? 임이 그리운 밤 낙화(洛花) 두 송이 동토(凍土)에 묻은 슬픔은 얼마나 컸을까?
허난설헌은 시대의 제약과 개인의 불행을 딛고 수많은 작품을 남기고 스물일곱의 나이로 저문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시인이다. 그러나 그녀의 한은 끓임 없이 이어졌다. 남편의 방탕은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그리고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친정집에도 풍파가 이어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상주에서 객사했고, 이어 오라버니 허봉은 이이의 잘못을 들어 탄핵했다가 갑산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허봉은 2년 뒤 풀려나서는 백운산, 금강산 등지로 방량생활을 하며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런 끝에 병이 들어 서울로 돌아오다가 금화 생창 역에서 아버지처럼 객사하고 말았다.
이런 친정의 슬픔은 그녀를 더욱 외롭고 혼란스럽게 했으며, 그녀의 시제를 알아준 인물이 하나씩 사라지는 데에 더욱 가슴이 메어졌다. 그녀는 삶의 의욕을 잃었다. 그리하여 더욱 감상과 한으로 흘렀다. 어느 때인지 그녀는 '삼한(三 恨 )' 곧 '세 가지 한탄'을 노래했다.
첫째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남편과 금실이 좋지 못한 것이라 한다. 첫째는 그녀가 시재를 널리 뽐낼 수 없는 좁은 풍토를 안타까워한 것이고, 둘째는 남성으로 태어나 마음껏 삶을 노래하지 못한 것을 뜻하는 것이다. 셋째는 그녀의 남편이 나이가 들어가는 데 더욱 방탕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말한다.
그녀의 시 중에 유명한 규원(閨 怨)이 있다. 이 시 제목은 '규방의 원망'이라는 뜻이다.
비단 띠 겹저고리 적신 눈물 자국
여린 방초 입 그리운 한이외다,
거문고 띁어 한 가락 풀고 나니
배꽃도 비 맞아 문에 떨어집니다.
달빛 비친 다락에 가을 깊은데 울안은 비고
서리 쌓인 살밭에 기러기 내려앉네
거문고 한 곡조 임 보이지 않고
연꽃만 들못 위에 떨어지네
지아비의 버림을 받고 규방에서 눈물로 지새우는 나날, 버려져 있는 처지를 시로 대신했던 것이다. 그런 나날 속에서도 딸과 아들을 뒀다. 이제 남편에 대한 애정을 딸과 아들에게 옮겨 정성을 쏟았고 어린 남매가 자라는 모습을 보고 인생의 재미를 느꼈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딸과 아들이 채 봉우리를 맺기도 전에 해를 이어 잃은 것이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애달픈 심정을 어디에 견줄 수 있을까. 이를 어쩌랴. 그녀는 슬픈 시를 쓸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에 곡자(哭子)라는 시를 남겼다. 그 애닮픈 한 구절을 보면 그녀의 심정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작년에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올해에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슬프고 슾프도다. 광릉 땅에
한 쌍의 무덤이 서로 마주하고 일어섰네
백양나무에 쓸쓸히 바람불고
귀신붙은 소나무와 오동나무를 밝히네
종이돈으로 너희들 혼을 부르고
맹물을 너희들 무덤에 따르네
알고말고, 너희 자매의 혼이
방마다 서로 따라 노니는 것을
비록 배 속에 아이가 있은들
어찌 장성하기를 발랄 수 있으랴
헛되이 (황대사)을 읊조리니 목메네
딸과 아들이 꽃 한 번 피워보지 못하고 연이어 죽음으로 인하여 그녀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임이 그리운 밤 낙화(洛花) 두 송이 동토(凍土)에 묻은 슬픔은 얼마나 컸을까? 그녀는 단장의 아픔을 고스란히 끌어안은 채 눈물로 점철된 시를 남겼는데, 애끓는 속내를 그 누가 헤아려 줄 수 있으랴?
그녀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 딸과 아들의 무덤을 광릉 땅 양지바른 언덕에 나란히 만들고 나서 낮은 봉분에 잔디를 심고 어루만졌다.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두 아이의 무덤 뒷자리에 묘를 쓰라고 했다. 그리하여 세 무덤은 광주 지월리에 밤이면 달빛이 풍경처럼 일렁이는 그 자리에서 '규원‘을 노래하고 있다.
그녀가 스물세 살적에 어머니의 초상(初喪)을 당해 친정에 가 있을 때 꿈을 꾸게 되는데 그녀는 꿈속에서 신선이 사는 곳에 올라 노닐면서 온갖 구경을 하다가 한 줄기 붉은 꽃이 구름을 따라 난아가 아래로 떨어지는 모양을 보았다고 한다. 꿈에서 개어나 시를 지었다. “붉은 부용꽃 서른아홉 송이가 달(月)에 떨어졌네.”라고 읊었다. 이는 그녀가 다가올 죽음을 앞두고 읊조린 것이다.
그녀는 끓임 없이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살았고, 그 죽음의 형상은 늘 신선의 세계와 이어지곤 했다. 결국 그녀는 한 많은 삶에 대한 원망을 가슴 가득히 안고 스물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은 분명 슬픈 것이고, 한 천재가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했기에 아쉬움을 더한다.
그녀의 시는 강렬한 대결의식 또는 시사를 풍자하기보다 원망과 한탄을 주로 노래했지만 풍부한 시어(詩語)및 언어의 구사력과 표현력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당시 흔한 충효(忠孝)나 음풍농월(吟風弄月)의 주제를 뛰어넘어 인간의 내면세계를 노래했다는 것으로 시가 갖는 값어치가 높다. 만약 그녀가 좀 더 자유분방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면 아마 훨씬 아름다운 시를 많이 남겼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녀의 말처럼 한 천재 여인이 봉건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해 재주를 마음껏 뽐내지 못한 것은 한국 한시(漢詩)문학사의 불행이 아닌가싶다.
후에 허균은 ‘부용꽃 서른아홉 송이는 곧 스물일곱 번 째 삶을 살다 간 누이의 죽음을 장엄한 것’이라고 했다. 또 서른아홉의 의미는 죽은 아이들 나이까지 합친 숫자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녀는 갔지만 남기고 간 혼백(魂魄)의 글은 우리들에게 깊은 울림으로 남아 그녀를 아끼는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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