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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_프란치스코_신부님
2022.12.6.대림 제2주간 화요일 이사40,1-11 마태18,12-14
<착한 목자 영성>
- 하느님 닮기 -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의 궁극의 목표는 하느님을 닮아 참나의 실현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닮아감으로 참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이 그 전형적 모범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착한 목자 영성-하느님 닮기-’로 정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바로 이런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이요 예수님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위로의 하느님입니다.
위로의 책이라는 제2이사야서는 “위로하여라”로 시작합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이사40,1) 고린토 2서에서 주님은 바오로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이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는 위로도 우리에게 넘칩니다.”(2코린1,3-5)
위로의 하느님입니다. 궁극의 위로는 하느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느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위로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충고나 조언보다는 위로나 격려이겠습니다. 어제 절식을 중단한 저에게 도반 형제의 따뜻한 위로도 잊지 못합니다. 말한마디 천량빚을 갚는다 했습니다.
“몸에 안맞는 단식하느라고 생고생만 하셨네요. 예, 쉬시고 내일부터 영양식사로 기운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정의의 하느님입니다.
정의의 하느님께서 평화롭고 차별없는 공정한 사회를 이루라고 우리 모두를 격려하십니다. 다음 말씀은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상징합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이사40,3-5)
얼마나 고무적인 격려인지요. 대림시기 주어진 과제가 이처럼 “정의의 사람”입니다.
셋째, 연민의 하느님입니다.
언젠가 사라져갈 불쌍하고 측은하고 가엾은, 짧고도 슬픈 인생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지닌 “연민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시편 말씀도 기억할 것입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 버리나이다.”(시편90,10)
어제 수원에 사는 어는 모르는 자매님의 부탁도 참 안타까웠습니다. “친척 오빠의 갑작스러운 비보 소식에 미사신청합니다. 56세로 비신자이며 외아들이고 정말 착한 오빠입니다.”
다음 이사야서의 말씀에서 연상되는 바 연민입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40,6-8)
풀같이 덧없는 인생임을 생각하노라면 저절로 겸허해지고 동료 인간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지닐 것입니다. 60대 부부가 불쌍해서 살고 70대 부부가 고마워서 산다는 것도 이런 연민의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풀같은 우리 존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하느님의 말씀인 파스카 예수님과의 일치뿐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와 무의미,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말씀뿐입니다.
넷째,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되찾은 양의 비유가 참으로 디테일에 강한 주님의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를 놔두고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기어히 찾아나서는 하느님입니다. 길을 잃었다는 것은 길이신 예수님을 잃었다는 것이나 이보다 큰 재앙도 없을 것입니다.
혹시 살다보면 때로 길을 잃고 방황할 때가 있을 때 마다 우리를 찾아나신 주님을 생각할 때 정신이 번쩍 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이 참 단호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기뻐한다.”(마태18,13)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어 주님은 모두에 대한, 특히 작은 이들 하나하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강조하십니다.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18,14)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에 정통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심전심”이 아니라 “하심예심:입니다. 하느님 마음이 예수님 마음입니다. 교회만 아니라 모든 공동체의 지도자들 특히 대통령은 이런 사랑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후반부 이사야서 말씀도 착한목자 하느님의 사랑이 잘 드러납니다. 역시 하느님의 기쁨은 길잃은 양 하나도 없는 일치와 평화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40,11)
참으로 기쁨 가득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대로 대림시기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사랑의 주님을 상징합니다. 이런 임마누엘 사랑의 파스카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 뿐이 없습니다.
착한목자 영성은 비단 공동체 지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착한목자 하느님을 닮아갈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유의 참나의 실현이며 이것이 참행복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닮아 위로의 사람, 정의의 사람, 연민의 사랑,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평생 깨어 분투의 노력을 다하고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아멘.
(성베네딕도수도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