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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하늘
 
 
 
카페 게시글
^^---산행 사진---^^ 스크랩 뛰어난 주암호의 전망대 모후산(`14.8.10)
가을하늘 추천 0 조회 63 14.08.18 05: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모후산(母后山, 918.8m)

 

산행일 : ‘14. 8. 10()

소재지 : 전남 화순군 남면과 순천시 주암면·송광면의 경계

산행코스 : 유마사 주차장집게봉갈림길중봉갈림길용문재모후산중봉집계봉집게봉갈림길유마사 주차장(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전남권에서 광양의 백운산과 광주의 무등산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지리산에 포함된 봉우리들을 제외했음은 물론이다.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산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산꾼들까지도 그 이름이 생소할 정도로 그동안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오지(奧地)에 위치한 탓에 접근이 어려웠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을 유인할만한 볼거리가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쉽게 말해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이다. 산줄기의 선도 묵직하고 단순해 안정된 모습이다. 그러던 것이 주암호()가 만들어지면서 서서히 사람들이 찾기 시작하더니 요즘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주암댐 조망(眺望)이 산꾼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 오랜 역사와 전설을 간직한 유마사까지 끼고 있으니 한번쯤은 다녀와야 할 산임에 분명하다.

  

산행들머리는 유마사입구 주차장(화순군 남면 유마리)

호남고속도로 북광주 I.C에서 내려와 외곽순환도로와 22번 국도를 이용해서 화순까지 온다. 화순읍에서도 계속해서 22번 국도를 따라 순천방면으로 달리다가 구암교차로(交叉路 : 화순군 동면 복암리)에서 우회전, 15번 국도를 이용하여 벌교방면으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남계삼거리(화순군 남면 복교리)가 나온다. 이곳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4Km정도 들어가면 산행들머리인 유마사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주차장의 한쪽 귀퉁이에 있는 모후산(유마사) 관광안내센터의 왼편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산행이 시작되자마자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두 길은 유마사의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되나, 난 왼편에 보이는 일주문(一柱門) 코스를 권하고 싶다. 그래야만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傳說) 한 가닥을 추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유마사에 들어가기 전에 보안부터 만나보자. 보안은 유마사를 세웠다는 유마운(維摩雲)의 딸이다. 그녀가 놓았다는 다리인 보안교(: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30)가 바로 일주문의 왼편에 있기 때문이다. 개울로 다가가보면 거대한 바위 하나가 하천의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보안이 놓았다는 다리인데 바위는 모후산에서 옮겨왔다 전한다. 그것도 치마에 싸서 말이다. 대단한 여자이다. 그러나 보안은 유마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의 치명적인 행태를 보이는 여자이니 그냥 믿고 넘어가보도록 보자. 여기서 보안에 대한 전설(傳說) 한 토막을 끄집어 내보자. 유마사를 세운 유마운이 죽자, 절에는 그의 딸인 보안보살과 부전이라는 스님, 이렇게 둘만 남았단다. 젊은 남녀가 오래 같이 있다 보면 정분이 나게 마련인 법, 둘 사이에도 정분이 났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정분이 부전스님만의 짝사랑(unrequited love)이었던 게 문제였다. 부전의 사랑을 알아차린 보안의 아이디어(idea)는 내기에서 이겨서 사랑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내기는 뜰채로 물 위에 떠있는 달을 건져 올리는 것이었고, 다들 짐작하겠지만 부전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보안은 건져 올렸단다. 같은 채인데도 그녀가 건질 때는 물이 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에서 부전스님이 나가떨어진다면 어찌 짝사랑이라 할 수 있겠는가. 상심한 스님은 결국 몸져눕게 되었고, 이를 안 보안의 처방이 걸작이다. 어느 날 보안이 아파 누워있는 부전을 찾았다. 그리고 보안은 법당 안에 모셔진 탱화(幀畵)를 뚝 떼어 마룻바닥에 깔고 옷을 벗었단다. 그러나 부전은 차마 옷을 벗지 못했다.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스님이 어찌 부처님을 깔고 누울 수 있겠는가. 그러자 보안이 노하며 말했단다. ‘너는 만들어 놓는 그림에 불과한 부처는 무섭고, 진짜 살아있는 부처는 무섭지 않느냐?’ 그리고는 백의관세음보살로 변해 하늘로 날아갔다는 것이다.

 

 

슬픈 사랑의 이야기를 뒤로 하며 일주문을 통과하면 주변정리 작업이 한창인 부도 한 기()를 만나게 된다. 선이 아름다운 이 부도는 보물 제1116호로 지정된 유마사해련부도(維摩寺海蓮浮屠). 보안의 아버지 유마운의 것으로 전해지는데 상륜부는 세월 아래로 사라지고 없다. 부도를 지나면 아까 헤어졌던 차도로 다시 올라서게 된다. 그런데 쉽게 올라서지를 못하고 자꾸만 고개를 돌리게 된다. 부전의 아픈 사랑이 나에게까지 전해진 것이 아닐까? 평범한 중생인 난 부처님의 도력보다는 인간적인 부전의 사랑이 더 마음에 끌리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유마사해련부도(維摩寺海蓮浮屠)는 도굴범들에 의해 훼손되어 구조물이 흩어져 있던 것을, 1981년 화순군에서 복원한 것이다. 기단부의 모습이나, 탑신에 새긴 여러 조각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유마사는 한때 호남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귀정암(歸靜庵), 금릉암(金陵庵), 운성암(雲城庵), 사자암(獅子庵), 오미암(五味庵), 은적암(隱寂庵), 남굴암(南窟庵), 동암(東庵) 등 수많은 부속 암자(庵子)를 거느릴 정도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버려졌던 탓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거의 없다. 오래된 것이라곤 그저 조금 전에 들어오는 길에 보았던 보안교와 유마사해련부도(維摩寺海蓮浮屠)가 다라고 생각하면 된다. 구태여 하나 더 들라고 한다면 경헌대로사리탑(敬軒大老舍利塔)도 있다. 해련부도와 함께 1981년에 복원된 사리탑의 대석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동물들이 새겨져 있다. 사찰은 몇 번의 중수과정이 있었으나 6.25때 전소(全燒)되었고, 현재의 건물들은 모두 근래에 새로 지은 것들이다. 그러나 너무 서운해 할 것까지는 없다. 비록 건물들은 새것이지만 대신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傳說)들이 절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여자,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던 여자, 그러니까 본디 관세음보살이었던 여자인 보안에 관한 전설이다. 보안의 아버지 유마운은 요동의 태수였다고 한다. 그는 재물을 많이 챙긴 탐관오리(貪官汚吏)였었나 보다. 그러나 딸인 보안의 청에 의해 과거를 뉘우쳤고, 거두어들인 재물들을 모두 가난한 백성들에게 내놓고 길을 떠난다. 두 부녀(父女)는 걷고 걸어 국경을 넘었고, 모후산 아래까지 왔다. 그리고 모후산의 산자락에 절을 지었고, 그 절을 지킬 스님을 한명 구했는데 그가 바로 아까 보안교를 지나면서 이야기 했던 부전스님이었단다.

 

 

유마사는 현재 선학승가대학원(禪學僧伽大學院)’을 운영하고 있다. 호남에서 유일한 비구니(比丘尼) 교육도량이다. 그러니 남정네들은 당연히 언행에 조심을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내려오는 길에 물가로 못 내려가게 하는 보살님이 보였다. 말은 상수도원(上水道源) 보호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어쩌면 수행정진(修行精進) 중인 비구니들의 수행에 방해를 막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유마사로 들어가는 다리(白雲橋)를 건너기 전에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이다. 차량이 다녀도 될 것 같이 널따란 임도는 깔끔하게 잘 다듬어져 있다. 이곳 화순군에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등산로를 정비하고 있는 지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유마교에서 5, 그러니까 산행을 시작한지 10분쯤 되면 이정표(용문재 2.9Km/ 주차장/ 유마사)가 하나 나타난다. 유마사를 들르지 않을 경우에는 주차장에서 곧바로 이곳으로 오게 되는 모양이다.

 

 

첫 번째 이정표를 지나면 곧이어 본격적인 계곡길이 펼쳐진다. 요즘 연달아 남해안을 지나가는 태풍의 영향 탓인지 계곡을 흐르는 물의 양이 제법 많다. 그 덕분에 물 흐르는 소리가 경쾌하다. 평지처럼 수더분한 계곡길을 따라 5분쯤 걸으면 집게봉갈림길(이정표 : 정상 3.9Km/ 집계봉 1.8Km)이 나온다. 오른편 집게봉 방향으로 난 길은 내려올 때 하산길로 이용될 것이다. 이정표 기둥에 이곳의 위치를 정량암으로 표시해 놓은 것을 보면 옛날 이 부근에 정량암이라는 암자(庵子)가 있었나 보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올 때 보니 조금 위에 암자가 들어앉아도 될 만큼 널따란 분지(盆地)가 있었다.

 

 

 

용문재로 향하다보면 좀 특이한 게 하나 눈에 띈다. 등산로 양편에 심어 놓은 나무들이 어딘가 눈에 익은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차()나무들이 아니겠는가. 농원(農園)에서나 재배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차나무들을 그 흔한 정원수 마냥 길가에다 죽 심어 놓은 것이다. 심혈을 기울여 등산로를 정비한 화순군청 관계자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다. 아무튼 작설차(雀舌茶)라도 한 모금 마시고 싶은 사람들은 이른 봄에 이곳을 찾아오면 제격이 아닐까 싶다. 여린 잎 한 웅큼 따다가 우려먹으면 그게 바로 작설차가 아니겠는가.

 

 

이어서 10분 조금 못되게 더 걸으면 나무데크로 만들어진 계단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데크의 중간쯤에 오른편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하나 놓여있다. 중봉으로 가는 길(이정표 : 용문재 2.0Km, 정상 3.4Km/ 철철바위 0.9Km, 중봉 1.9Km/ 유마사 1.3Km, 주차장 1.4Km)이다. 뱀골을 거쳐 중봉과 정상에 이르게 되지만 보통 하산길로 이용되기 때문에 무시하고 곧장 용문재로 향한다.

 

 

 

중봉갈림길에서 12분 정도 더 오르면 원두막(園頭幕)을 닮은 정자(亭子) 하나가 나타난다. 정자 뒤로 갈림길(이정표 : 용문재 0.6Km. 정상 2.0Km/ 숯가마터 1.2Km, 철철바위 1.5Km/ 유마사 2.7Km)이 보이지만 무시하고 그냥 직진한다. 모후산을 오를 때에는 산막골 계곡길을 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정자를 지나면서 산길은 험해진다. 그렇다고 경사(傾斜)가 가파르다거나 바윗길이 나타난다는 의미는 아니다. 최근 남해안(南海岸)을 연달아 지나가고 있는 태풍(颱風)의 영향으로 산길이 온통 파헤쳐져 있다는 얘기이다. 사람들의 통행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깊은 상흔을 낸 것을 보면 이 지역에 얼마나 많은 양의 폭우(暴雨)가 내렸을지 금방 짐작이 간다.

 

 

 

원두막 갈림길에서 20분 정도 더 오르다가 막바지에서 잠깐 가파르게 치고 오르면 용문재에 올라서게 된다. 용문재는 온통 상처투성이다. 정상에 있는 강우레이더관측소까지 삭도(索道)를 놓는 공사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고개에는 등산안내도와 이정표 (정상 1.4Km/ 동복면 유천리 2.9Km/ 도원사 4.8Km, 남계리 11.6Km/ 유마사 3.3Km)외에 다른 안내판 하나가 더 세워져 있는데, 이것이 보는 이들의 눈길을 끈다. ‘모후산 삼나무 숲길에 대한 설명인데, 2008년에 열린 9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장려상인 어울림상을 탔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름답다는 이 길은 산행을 마칠 때까지 만날 수 없었다.

 

 

용문재에서는 오른편 능선을 탄다. 반대편은 남계리로 이어지는 종주길이기 때문이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강우레이더관측소로 올라가는 삭도(索道)와 나란히 나있다. 그렇다고 삭도의 오른편으로 난 널찍한 임도(林道)를 따른다는 얘기는 아니다. 삭도의 왼편으로 산길이 나있는 것이다. 정상으로 향하는 산길은 제법 가파르다. 아니 많이 가파르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제까지 완만(緩慢)하게 올라왔던 것을 만회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그 길가는 온통 조릿대의 천국이다. 길가 양편에 늘어선 조릿대들이 마치 담장을 쌓아 놓은 것 같은 풍경을 연출할 정도로 울창하다.

 

 

 

 

 

 

산길을 걷다보면 심심찮게 오른편으로 조망(眺望)이 트인다. 삭도를 설치하느라 나무들을 베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동북면 유천리와 한천리 일대를 비롯해 동북댐으로 이어지는 물줄기까지도 보일 정도이다. 그리고 고도(高度)를 높여갈수록 주변의 경관은 더욱 세세히 드러난다.

 

 

 

산길은 가끔 바위지대를 지나가기도 한다. 한두 번은 안전로프에 매달려야만 하는 곳도 나타난다. 그러다가 시야(視野)가 뻥 뚫린 전망바위에 올라서게 된다. 용문재에서 30분 정도가 걸리는 지점이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사위가 갑자기 구름으로 뒤덮여버린 탓이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정상으로 향하는데 길가에 곱게 핀 나리꽃이 밝게 웃고 있다. 조금 후에는 날씨가 다시 맑아질 것이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말라면서 말이다.

 

 

 

 

 

 

전망대에서 잠깐 내려섰다가 다시 한 번 맞은편 능선을 치고 오르면 강우(降雨)레이더관측소가 나온다. 유마사 쪽 들머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眺望) 좋은 곳이다. 이 관측소(觀測所)는 국토건설부에서 설치한 시설물로 여름철에는 강우, 겨울철에는 강설량(降雪量)을 관측한다. 특히 원거리 태풍감시 등 종합적인 기상관측 레이더와는 달리 반경 100이내의 강우를 집중 관측하며, 최대 3시간까지 국지적(局地的)인 강우를 빠르게 선행 예보할 수 있어 폭우로 인한 홍수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한다. 참고로 강우레이더관측소는 비슬산과 소백산, 그리고 이곳 모후산 외에도, 추가로 검단산과 가리산, 서대산에 추가로 설치할 계획이라고 한다.

 

 

 

 

 

강우레이더관측소의 담장 아래를 통과하여 반대편으로 오르면 드디어 모후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45분이 지났다. 모후산 정상은 엄청나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닐 정도로 널따란 헬기장을 겸하고 있다. 정상에는 어른 키만큼 커다란 정상표지석 외에도 이정표 아래에 앙증맞을 정도로 작은 정상표지석 하나가 더 있다. 화순군에서 새로운 정상석을 세우면서 외로워하지 말라며 그대로 놓아둔 모양이다. 참고로 모후산의 원래 이름은 나복산(羅山)이었단다. 그러던 것이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왕비와 태후를 모시고 내려와 가궁을 짓고 환궁할 때까지 1년 남짓 머물렀다고 해서 모후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후(母后)는 공민왕의 어머니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산세(山勢)가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리고 모후산은 한때 모호산(母護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부근에 있는 동복현의 현감(縣監)을 지냈던 서하당 김성원이 정유재란 때 68세의 나이로 90세 노모를 구하기 위해 맨몸으로 싸우다 전사(戰死)한 곳이 바로 이 산이었기 때문이다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일망무제(一望無題)로 탁 트인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주암호(), 리아스식 해안에 갇혀있는 호수의 물이 유난히도 푸르고, 그 너머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은 어쩌면 득량만()일 것이다. 호수와 바다를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함께 어우러지는 풍광(風光)이 가히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개라도 들라치면 남도의 산들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온다. 우선 날카로운 산줄기로 이루어진 백아산과 육중한 몸매의 무등산은 물론이고, 광양의 백운산과 11시 방향의 지리산까지 남도의 명산들이 파노라마(panorama)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꽤 오랜 시간을 정상에 머무르다 하산을 시작한다. 물론 중봉과 집게봉이 있는 남릉 방향이다. 하산길은 한마디 가파르다. 비록 허접하기는 하지만 안전로프까지 매달아 놓았을 정도이니 주의가 요구된다. 참고로 내려가는 길의 반대방향에는 고려(개성)인삼의 시배지(始培地)가 있다. 이왕에 다녀올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냥 포기하기로 한다. 오늘 같이 무더운 여름날 다녀오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참고로 인삼시배지에 대한 기록은 사도세자의 장인이었던 홍봉한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개성부 유수(留守)를 지냈던 김이재의 '중경지(中京志)'에 나와 있다. 그래선지 몰라도 몇 년 전 이곳에선 120년 된 25000만 원 상당의 천종산삼 8뿌리가 발견됐다고 한다.

 

 

 

내려가는 길이 비록 험해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내 눈은 결코 멈출 줄을 모른다. 잘만 하면 로또복권(Lotto福券)에라도 당첨되는 셈이니 어찌 멈출 수 있겠는가. 그만큼 이곳 모후산의 산삼(山蔘)은 유명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동복 삼복(三福)'이란 말까지 생겨났겠는가. 예로부터 모후산은 동복현(同福縣)의 관내였다. 그런데 이곳에 부임한 현감(縣監)들은 하나같이 진상품 때문에 골머리를 썩혔다고 한다. 앞에서 말한 '동복 삼복(三福)'을 구하는 게 만만찮았기 때문이다. 복청(福淸 : 모후산 토종꿀)과 복천어(福川魚 : 동복천의 민물고기)외에 '동복 삼복(三福)'의 나머지 하나가 바로 내가 지금 찾고 있는 복삼(福蔘 : 천종산삼)인 것이다.

 

 

모후산 정상에서 가파르게 내려섰다가 조릿대와 잡목(雜木)이 늘어선 능선길을 따라 작은 오르내림을 몇 번 반복하다보면 중봉에 이르게 된다. 물론 가끔이기는 하지만 주암호의 멋진 풍광을 몇 번 감상했음은 물론이다. 정상에서 26분쯤 걸렸다. 중봉 정상에서 뱀골로 내려가는 길(이정표 : 집게봉 1.0Km/ 유마사 2.3Km/ 정상 1.1Km)이 나뉜다. 뱀골은 여름철에 뱀이 많이 나타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유독 뱀을 싫어하는 성격 탓도 있겠지만 주어진 하산시간도 넉넉해서 집게봉까지 들렀다가 하산하기로 한다  

 

 

산길은 중봉에서 제법 가파르게 떨어졌다가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조릿대와 잡목(雜木)으로 둘러싸인 산길을 따라 24분 정도 걷다보면 집게봉(이정표 : 유마사 2.6Km/ 말걸이재 1.4Km/ 정상 2.1Km)이다. 잡목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풍경이 미안했던지 산길은 집게봉의 정상에 올라서기 바로 직전에 잠깐이나마 숲을 연다.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트이면서 주암호가 그 화려한 자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참고로 집게봉은 산봉우리의 생김새가 집게가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집게봉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선다. 곧장 가게 될 경우 말걸이재로 가게 되기 때문이집다. 산길은 바위지대를 살짝 우회(迂廻)한 후에 급경사(急傾斜)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산길은 한마디로 엄청나게 가파르다. 그러나 굵직굵직한 바위들이 심심찮게 나타나기 때문에 지루하지는 않다. 그 대신 바닥은 너덜길, 한 발짝 내려서는 것도 여의치가 않다. 한마디로 엄청나게 험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6.25때 남로당(南勞黨)이 이곳에다 전남도당위원회를 설치했었나 보다. 토벌군(討伐軍)의 접근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말이다. 집게봉 9부 능선에는 지금도 빨치산(partisan)이 파놓은 참호(塹壕)가 남아 있다고 한다. 산행 중에 그 흔적이라도 찾아볼까 했지만 아쉽게도 눈에 띄지 않았다. 모후산은 분단의 아픈 현실을 간직한 비운(悲運)의 현장인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유마사주차장(원점회귀)

가파른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기 짝이 없다. 조심조심 내려서보지만 조심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결국 엉덩방아를 찧고 난 뒤에야 아까 산행을 시작하면서 지나갔던 유마사 위의 갈림길에 이르게 되었으니 말이다. 집게봉에서 40분 조금 넘게 걸렸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자세한 구경을 뒤로 미루었던 유마사에 들렀다. 그리고 경내(境內)를 둘러본 뒤 길을 나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유마사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15분이 걸렸다. 막걸리를 마시느라 정상에서 쉰 30분을 감안할 경우 3시간45분이 걸린 셈이다. 산악회에서 준비한 음식을 먹은 후에 옷을 챙겨들고 주차장 옆의 냇가로 내려간다. 물론 내려가는 것을 막고 있는 보살님의 눈을 피해서이다. 물가에 앉아 발을 씻고 있는데 건너편에 민가(民家)에서 계곡으로 늘어뜨린 계단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곳 주민들은 자유로이 계곡에 드나들 수 있다는 얘기이다. 아까 유마사의 승가대학원을 설명하면서 내가 내렸던 결론이 맞은 셈이다. 상수도원(上水道源) 보호보다는 비구니들의 수행에 방해를 받지 않으려는 것이 더 큰 이유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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