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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조금 늦게 시작하였지만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한 주 지나면 겨울을 문턱에 모셔야 합니다. 그래서 더 열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도 심심치 않게 내립니다. 재촉하는 모양입니다. 아무튼 맑고 파란 하늘을 보며 아침을 맞는 것은 매우 기분 좋은 일입니다. 서서히 산과 나무들도 색을 변해가고 있습니다. 설악산 오대산까지 내려온 단풍대열이 한 주 지나면 여기까지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구태여 먼 산까지 갈 것 있겠습니까? 근처에도 가로수 공원 그리고 산들이 널려있는데 말입니다. 하기야 가는 재미 오는 재미도 있기는 합니다. 더불어 오가며 떠드는 재미도 보태야지요. 그리고 먹는 재미도. ㅎㅎ 괜스레 근질근질해집니다.
근데 왜 자꾸 전쟁 이야기로 분위기 망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약발이 먹히지 않으니 이판사판 두들겨패보자는 심보인가요? 정작 터지면 제일 먼저 줄행랑칠 사람들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이 좁은 땅덩이 안에서 날로 새로워진 포탄 실험하자면 너나할 것 없이 다 가는 것 아닙니까? 위기 속에서 스릴을 맛보려는지 모르겠지만 ‘똥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 식으로 우리 국민도 자기 갈 길 갈 것입니다. 언제는 나라를 지들이 지켰나? 백성이 지켰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입만 살아가지고. 누군가 그랬지요. 몸의 지체 중에서 입이 제일 먼저 지옥에 갈 것이라고요. 명언입니다. 그느무 입값이 참 비싸기도 합니다. 국민이 무슨 죄가 있어서 저 입들을 먹여살려야 하는지 ----
아무튼 아름다운 가을, 좋은 주말의 아침입니다. 건강하게 행복하게, 즐거운 주말을 빕니다. ^)^
2024년 10월 26일 김종우 목사 드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디모데전서 6 : 10)
<더러운 돈에 손 대지 마라>
돈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인생들이 더러운 것이지요.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세상 돈 싫어하는 사람 없습니다. 하물며 성직자들도 돈 좋아합니다.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데 그것을 마다합니까? 바로 사용하기에 따라 더러울 수도 성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돈을 구하는 방법에 따라 더 명확하게 구별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용하기보다는 버는 것이 먼저입니다. 어떻게 얻었느냐 하는 점에서 더러운 돈인지 깨끗한 돈인지 구분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씀도 있습니다.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신 23 : 18)
이왕 성경 말씀이 나왔으니 한 마디 더 보탭니다.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응용되느니라”(전 10 : 19) 그렇습니다. 돈이 세상사를 두루 살펴주는 것입니다. 아직도 후진국에서는 여기저기 돈으로 길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공항 출입하는데도 어떤 구실이라도 만들어서 억류하고 돈을 요구하는 직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간단한 예로 팁을 조금 더 높게 주면 그 뒤로 대접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만한 대가를 상쇄해야 하니까요. 세상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습니다. 일일이 물건을 건네주기도 힘들지요. 돈이 사용됩니다.
혼자서 무인도에 거주하면서 자가생산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디에 살든 돈이 필요합니다. 속된 말로 돈 없이 외출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냥 집 밖을 산책하다 돌아오는 길이 아니라면 운송수단을 이용하려고 해도 돈이 사용됩니다. 돈 없이 움직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요. 어디에나 응용되는 돈이니 누구나 필요하고 누구나 가지려고 하고 좀 더 많이 벌려고 노력합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보다 쉽게, 보다 빠르게, 보다 많이 얻으려고 딴 생각을 하는데 있습니다. 때문에 일상적인 방법이 아닌 정상을 벗어난 방법을 찾으려고 합니다. 세상에 사랑 이야기가 많듯이 역시 돈으로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많은 이유입니다.
잘만 하면 이 거액의 돈을 남모르게 우리 차지로 만들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소위 공개되지 않은 돈입니다. 마땅히 압류퓸으로 분류하여 신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고, 또 알아서도 안 되고, 아무도 모르게 들어온 돈입니다. 우리 둘만 알고 몰래 처리하면 그만일 수 있겠다 싶었지요. 그래서 빼돌렸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주인 없는 돈이 있겠습니까? 그것이 경찰서에 압류 보관되어 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 숨기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찾아나설 것입니다. 더구나 돈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있다면 이놈저놈이 기를 쓰고 달려들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잘 알고 있듯이 돈은 목숨을 요구합니다.
불행하게도 돈을 빼돌리는 과정에서 잠복근무하던 형사가 살해되고 동료 형사가 희생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쉽게 풀려나갈 줄 알고 시작한 일이 꼬이게 됩니다. 선후배 사이인 ‘명득’과 ‘동혁’ 두 형사는 꼬인 사태를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애쓰면서 돈을 은닉합니다. 그러나 돈을 전달받으려 했던 무리가 가만있지 않습니다. 그만큼 거액입니다. 맞습니다. 두 형사가 직장 그만두고라도 팔자 고칠만한 돈입니다. 그래서 목숨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명득은 어린 딸의 수술비가 간절하게 필요합니다. 어쩌겠습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싶기도 합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자리를 피하지만 사태는 점점 어렵게 꼬여갑니다.
일련의 사태를 주시하면서 관장하던 팀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결국 명득을 따로 불러 사태를 인지시킵니다. 그 모든 진행에 어떻게 개입되었는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이미 명득의 중요 활동상황 중 중요대화를 녹음해두었던 것입니다. 동혁은 악한 무리의 조직에 잡혀서 위험에 처해있고 명득은 수사팀장의 올무에 걸렸습니다. 빠져나가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 검은 돈의 시발점이 수사팀장이었다니 놀랍지요. 아무튼 돈 때문에 목숨이 날아갈 위험에 놓였습니다. 명득은 일단 일부 빼돌려 딸의 수술을 진행하도록 조처합니다. 그리고 위험 속으로 뛰쳐들어갑니다. 일단 조직폭력배들을 처리하지만 팀장이 와서 마무리하려 합니다.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지요. 부패경찰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만든 경우는 많습니다. 그것을 조금 합리화하기 위해 생계의 어려움을 껴줍니다. 그러나 개인의 어려운 형편이 공익을 눈감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개인이 아무리 특별한 사정을 지니고 있다 해도 공의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도대체 개인사정이 없는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흔히 하는 말로 공동묘지에 가면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들 하지요. 공무를 수행함에 있어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의 사정은 잊어야 합니다. 그것은 핑계도 합리화도 안 됩니다. 누구라도 양보해줄 수 없는 사항입니다. 공익을 위해서, 사회질서를 위해서 말입니다. 영화 ‘더러운 돈에 손 대지 마라’(DIRTY MONEY)를 보았습니다.
당신은 누구의 집입니까?
생명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자랍니다. 그리고 자라기 위해서는 양식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모태에 있을 때는 엄마로부터 공급됩니다. 태어나면 스스로 먹어야 합니다. 그 몸에 공급되는 것이 있어야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가 도무지 먹지를 않는데 자랄 수 있습니까? 먹어도 조금만 먹으면 조금만 자랍니다. 어려서는 먹는 만큼 자라는 겁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잘 자라기를 원한다면 부지런히 먹어야 합니다. 부모 된 우리가 자식이 자라지 않으면 마음이 어때요? 얼마 전 키를 크게 하는 방법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늘리고 당겨도 그만한 영양이 공급되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지요. 우리 자식 자라지 않으면 속이 탑니다. 그런데 우리 하늘 아버지의 마음은 왜 몰라줍니까? 때가 되면 자라야지요. 하늘 아버지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탄식하십니다. 부지런히 먹고 잘 자라기를 바랍니다. 엄마의 즐거움이 뭐지요? 자식들이 잘 먹고 잘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도 마찬가지 마음인 줄 믿습니다.
얼마 전에 두 개의 세계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자 두 개의 세계가 무엇입니까?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곧 우리가 살고 있는 보이는 육의 세상과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입니다. 영의 세계에 있는 영이 세상에 어떻게 영향을 준다고요? 우리 육체 가운데 들어와서 뭘 한답니까? 말을 합니다. 물론 귀신이 들어와서 별짓 다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몸에 들어와서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 문제가 생겨서 이 영의 세계가 둘로 나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의 영계가 있고 사단 마귀 편에 있는 영계가 생겼습니다. 우리 2천 년대 초반에 기독교계에 한창 유행처럼 떠돈 말이 있었습니다. 무슨 세미나나 부흥회 아니면 어떤 집회를 열어도 앞에 무슨 말이 감초처럼 붙어 있어야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게 뭐였지요? ‘영적’ 아니면 ‘영성’이란 말입니다. 뭘 알고 사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깨닫고 보니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이었는지 가슴이 철렁합니다.
‘영적 해석’이라는 둥, ‘영적인 능력’이라는 둥, ‘영성 회복’이나 ‘영적 치유 세미나’ 또는 ‘기독교 영성 운동’이라는 말 등등, 얼마나 ‘영’을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물론 저도 3년에 걸쳐 기독교영성교육 배우느라 돈 쳐 들여가며 열심히 다닌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모르고 날뛴 셈이지요. 그 투자한 돈이 정말 아깝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기는 그런 과정을 거쳐서 여기까지 온 셈이지요. 결코 헛된 시간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라 믿습니다. 아무튼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 좋아하는 ‘영’이 도대체 어느 편의 영인지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영이라면 무작정 하나님께 속한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이미 경고의 말씀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요일 4 :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하랍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영도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 것을 감안하고 따라다녔는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영의 세계라고 해서 바로 하나님께 속한 것은 아니로구나 이해가 되지요? 영의 세계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줄 믿습니다. 그 영의 세계에 하나님만 홀로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많은 영들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영들과 함께 계시고 함께 역사하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독불장군처럼 혼자 다하시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때로는 회의도 하시고 의논도 하십니다. 그리고 하늘의 영 곧 천사들을 시켜서 당신의 일을 행하십니다. 성경 말씀 속에 무엇이 나오느냐 하면 귀신이 나옵니다. 우리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주신 사건이 있었지요.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뭐라고 비방합니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냈다고 합니다. 귀신이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요? 예수님이 바로 잡아주셨습니다. 마 12 : 25 - 26 “예수께서 저희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쫓아내신 줄 믿습니다. 그리고 덧붙이신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 성령의 역사를 비난하면 죄 사함이 있다, 없다? 없습니다.(31절)
이어서 보겠습니다. 마 12 : 38 “그 때에” 그러지요? 그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그 귀신 사건 있었던 때입니다. 예수님에게 귀신 들렸다고 말한 유대인들에게 폭탄선언을 합니다. 마 12 :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다른 말로 하면 ‘뱀의 자식들아’ 그 말입니다. 성경에서 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요? 마귀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마귀 새끼들아’하고 말씀하신 겁니다. 사실 예수님은 서기관 바리새인들, 그들의 아비를 마귀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자기네 아버지를 하나님이라고 우기니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너희 아비가 누구다? 마귀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마귀 새끼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이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요구합니까? 마 12 :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표적을 보여 달랍니다. 한 마디로 기적을 행해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적을 본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때뿐입니다.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믿으려하지 않고 또 다른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거부하십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뭐라고 하십니까? 3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무슨 세대라고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입니다. 기적을 바라는 것은 악한 세대가 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적을 구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니 이상하지요? 그런데 앞에서 보았습니다. 저들의 아버지가 누구라고요? 마귀랍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아버지를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그들의 아버지를 마귀라고 말씀합니다. 누구 말이 맞을까요?
우리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분명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이 제사 드리는데 누구에게 드렸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께 드렸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희가 제사 드리는 건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에게 드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믿고 예배드리겠지요. 그런데 혹시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다는 겁니다. 얘들아 너희가 예배드리는 건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에게 하는 거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기막힐 일입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게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그러니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영이 우리 몸에 들어와서 무엇을 한다고요? 말을 합니다. 다시 읽습니다. 마 12 :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합니다. 37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말이 기준입니다.
당시 하나님 백성을 가르치던 자들이 대표적으로 서기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뱀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다시 읽습니다.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진리가 없습니다. 거짓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제 것으로 말한답니다. 하나님 것 전한다고 하면서 딴 짓 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말하면서 마귀와 놀아나는 겁니다. 그래서 음란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입으로는 하나님 타령하면서 마귀와 놀아나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가 그것을 알까요, 모를까요? 당연히 모릅니다. 자기 안에 어느 영이 들어와 있는지 모르는 겁니다. 알고서야 그 짓을 하겠습니까? 그것을 깨달으면 참으로 다행이지요.
표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바로 구약의 사건들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두 가지 사건이 등장하지요. 하나는 요나의 사건이고 하나는 솔로몬을 찾아온 남방 여왕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 ‘요나’를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 요나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하나님의 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요나가 왜 이방 놈들을 회개시켜서 살려주려고 하십니까? 하고는 딴 길로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를 큰 고기 뱃속에 가두고 사흘 있다가 놓아줍니다. 결국 명을 받들고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 명령을 수행합니다. 그 요나가 고기 뱃속에 사흘 있던 사실을 빗대어 장차 예수님이 무덤에 사흘 있을 것을 예언하시는 겁니다.
또 하나, 왕상 10장에 보면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 싶어서 먼 길을 찾아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솔로몬을 연모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마 12 :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운 말씀을 들으려고 온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하나님 말씀이 그리워서 교회 나온 줄 믿습니다. 여기 친구 만나려고 온 것 아니지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말씀을 들으려고 온 것입니다. 혹 점심 먹으려고 온 것도 아니지요? 아는 성도를 만나고 점심을 같이 먹고 하는 것들은 그냥 곁들이 보너스일 뿐입니다. 우리가 교회 나오는 목적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여 예배드리고 하늘 양식을 먹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의 사건을 예로 들며 이야기하시다가 좀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다시 귀신 이야기로 돌아가신 겁니다. 왜 귀신 이야기로 돌아가셨을까요? 질문하는 이 유대인들, 곧 서기관 바리새인들 속에 지금 누가 있다는 겁니까? 마귀, 귀신이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본인들이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습니다. 마치 귀신 이야기의 결론과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자, 보겠습니다. 마 12 : 43 - 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쉴 곳을 찾지 못하니까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 집이 어디입니까? 사람이지요. 그 집으로 돌아가니 소제되고 수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의 형편이 더 나빠졌다고 합니다. 잘 보세요. 그러니까 귀신이 들어가서 사는 집은 곧 무엇이다? 사람이란 말입니다.
잘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르고 살지만 우리 안에 영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 영이 내 몸을 집 삼고 거주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각자 알아서 사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마귀의 영이 들어와서 사는 것입니다. 누가 들어와 있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야 당연이 하나님의 영이 들어와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된다, 안 된다? 그걸 우리 뜻대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알 필요가 있다, 없다? 하늘의 영의 세계가 둘로 나뉘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영이 이 육체의 세계에서 활동합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까요? 히 1 : 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하나님이 누구를 보내신답니까? 천사를 보내십니다. 왜요? 구원을 이루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시려 누구를 보내신다고요? 하나님의 영 곧 천사를 보내주십니다. 그러면 마귀가 가만 지켜보고만 있겠습니까? 예수님까지 유혹하려고 했던 마귀가 가만있겠습니까? 그건 우리의 희망사항이고 자, 보겠습니다. 벧전 5 :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예, 두루 다니고 있습니다. 뭐 하려고요? 삼킬 자를 찾는 것입니다. 자기 집을 찾아다닌다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기에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정신 차립시다.
예수님이 결론으로 말씀하신 것은 45절 끝에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하신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된다는 말이지요?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기에 귀신이 안 되겠다 싶으니까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편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귀신이 처음에 왜 집을 나갔을까요? 나와서 어디를 찾아다녔는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물 없는 곳을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물은 무엇을 뜻합니까? 요 4장에 보면 예수님과 수가 성 여인의 대화가 나옵니다. 똑같이 물 가지고 이야기하지요. 여자는 육체가 먹는 물을 이야기하고 예수님은 영생수 곧 하나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물이 무엇이라고요? 하나님 말씀입니다. 귀신이 들어있던 사람에게 하나님 말씀이 들어가니까 귀신이 에이 못 살겠다 하고 나갑니다. 돌아다니다 있을 만한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조금 변해 있습니다. 어찌 되었다고요? 소제되고 수리되었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강한 응원군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결국 처음보다 더 형편이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집이 왜 비었을까요? 생각해봅시다.
아무튼 귀신이 어디를 찾아다닙니까? 물 없는 곳입니다. 말씀이 없는 곳이란 뜻입니다. 이 사람도 비어있지 않고 말씀으로 채워지고 있었다면 결코 다시 들어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채우지 아니하면 누가 들어온다고요? 귀신이 들어옵니다. 조금 들었다 싶으니까 괜찮은 것 같이 느껴집니다. 아니면 세상 것으로 바빠서 자꾸 빠집니다. 그러면 다시 비게 됩니다. 말씀으로 소제되고 수리는 된 것 같지만 비게 됩니다. 그러면 누가 다시 옵니다. 그렇게 되지 맙시다. 선무당 사람 잡듯이 어설프게 알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고 더 엉망이 될 수 있습니다. 무질서는 귀신이 가장 좋아하는 안식처입니다. 똑바로 배우고 확실하게 알고 신앙하기 바랍니다. 우리 자녀들 똑똑하기 원하듯 우리 자신도 아버지 하나님 앞에 똑똑한 자녀들이 되기 바랍니다.
정리합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여왕이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두 이방 사람들입니다. 이 세대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입니다. 왜 하나님 백성을 심판합니까?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니 이상하지요?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란 말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니 더 악하지요. 깨달으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예수님을 더욱 핍박합니다. 사실은 요나 선지자보다도, 솔로몬 왕보다도 더 크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겉모습만 보고 예수님을 물리칩니다. 자기네가 훨씬 잘났답니다. 이것이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누가 하나님 백성입니까?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우리가 하나님 백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라면 그 아버지의 씨가 우리에게 있는지 확인해봐야 하겠지요? 그 씨가 무엇인지도 모른다면 어떻게 확인합니까? 무엇으로 믿고 신앙합니까? 그렇게 되면 귀신이 들어옵니다. 마귀 자식이 되는 겁니다. 귀신이 얼씬도 못하게 말씀으로 채웁시다.
우리의 육체가 하루 세끼를 먹으면서 영은 얼마를 먹습니까? 생각해보셨습니까? 육체의 식사는 때를 따라 잘 챙기는데 영을 위해서는 얼마나 신경 쓰고 지냅니까? 히 5 : 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때가 오래 되었습니다. 신앙한지 얼마나 됩니까? 교회 다니신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5년, 10년 뭐 그 이상 다니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평생 신앙생활 해오신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영의 양식을 먹었습니까? 육의 양식은 열심히 챙기면서 영의 양식은 그저 교회 출석하는 것으로 족합니까? 일주일에 한두 번 교회 나오는 것으로 족합니까? 그러면서 자라기를 바라십니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탄식하십니다.
물론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영의 세계가 두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영의 양식 또한 두 가지로 나뉩니다. 그 먹는 양식에 따라 우리가 누구의 집이 되느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식을 먹는다면 하나님의 영의 집이 됩니다. 그러나 마귀의 양식을 먹는다면 마귀의 집이 되겠지요. 그러니 분별하여 먹어야 합니다. 초림 때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는 묵은 포도주를 버리고 새 포도주를 먹으라 하셨습니다. 재림 때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새 언약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마 26 :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참고 눅 22 : 16 - 20) 그 때에도 새 것을 먹게된다는 말씀입니다. 누구의 집이 되느냐 하는 것은 어떤 양식을 먹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집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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