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시 풍기읍 ①"금선정[錦仙亭], ②비로사[毘盧寺]" ,순흥면 ③ "성혈사[聖穴寺], ④초암사(草庵寺)
① 금선정(錦仙亭)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풍기읍행정복지센터 정문에서 풍기로를 따라 약 550m 이동 후, 왼쪽 금계로를 타고 2.1㎞ 정도를 가면 오른쪽에 금선정이 금계천 변의 풍치 좋은 기암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금선정(錦仙亭)은 풍기군수 이한일(李漢一)[1723~?]이 건립한 정자이다. 금선정 일대는 황준량(黃俊良)[1517~1563]이 자주 소요하던 곳으로, 수려한 경치를 자랑한다.
황준량은 금선계곡 일대를 자주 소요하였다. 황준량은 이곳에 있는 널찍한 바위를 ‘금선대(錦仙臺)’라 이름하였는데, 1756년(영조32) 군수 송징계(宋徵啓)가 바위벽에 ‘금선대’라 새기기도 하였다.
금선정은 바로 그 위에 있다. 1781년(정조5) 풍기군수 이한일이 황준량의 후손들과 함께 금선정을 건립하였다. 1785년 군수 이대영(李大永)이 목사 조윤형(曹允亨)의 글씨로 새겨 현판을 만들었다. 1989년 풍기향교 유림에서 영풍군의 지원을 받아 보수하였다.
금선정은 방형 정자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4칸통에 사방으로 벽체 없이 개방시킨 입면이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설치하였다. 전면 전체와 양 측면 앞 칸의 측면으로는 헌함을 설치했다. 구조는 자연석 초석 또는 기단 없이 기암절벽 위에 두리기둥을 바로 세우고 우물마루를 깔았다. 주상부는 굴도리 장혀수장집으로 꾸몄다. 금선정의 특징은 지붕 가구가 독특한 점이다. 즉 전·후 주상으로 대량을 걸고, 양 측면에는 곡재의 충량을 대량과 결구시켰다. 충량과 대량 위에 정자형(井字形)의 지붕틀을 가구하여 추녀와 선자연 서까래를 받도록 하였다.
② 비로사(毘盧寺)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 산13 (삼가로 661-29)
비로사(毘盧寺)는 소백산 비로봉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산사이다. 680년(문무왕 20)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신라 고찰로서 불상, 당간지주 등의 유물이 남아 있어 이 절의 깊은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 맨 먼저 비로사 입구 좌측 위에는 영주삼가등 당간지주가 세워져 있다.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4.8m 높이에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양 지주의 내측면은 평평하고, 전 후면에는 가장자리와 중심부를 따라 띠가 조각되어 있다. 또, 간을 받치는 간대석과 간을 삽입하는 구멍이 있어 전체적으로 치밀한 구조를 보여준다. 비로사 경내에 들어서면, 거북받침 위에 비신을 세운 비석이 하나 눈에 띈다. 바로 진공대사 보법탑비이다.
③성혈사(聖穴寺)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덕현리 277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본사 고운사의 말사이다. 신라때 의상(義湘:625∼701)이 창건하였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의상은 왕명으로 소백산 기슭에 초암사(草庵寺)를 짓고 있었는데, 매일 지붕의 서까레가 없어졌다. 의아하게 여긴 의상이 찾아보니 서까래가 인근 숲속에 쌓여 있었다.
이에 주위의 풀을 뜯어 초막을 지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본래 초암사가 있었으며, 초암사에서 수도하던 의상이 이 절을 창건했다고도 한다.
절 이름은 근처의 바위굴에서 성승(聖僧)이 나왔다고 해서 붙여졌다. 바위굴은 절 아래 30m지점에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나한전·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보물 제832호로 지정된 성혈사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 건물로 배흘림기둥과 꽃창호문이 매우 아름답다. 1980년대 나한전을 보수할 때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1553년(조선 명종 8)에 세우고 1634년(인조12)에 중창했다. 유물로는 대웅전 앞에 석조비로자나 불상이 전한다. 흰색으로 덧칠한 상태이며,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양식을 지녀 절의 창건 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밖에 나한전 앞 좌우에 석등2기가 전한다.
④ 초암사(草庵寺)
소재지 : 경북 영주시 순흥면 배점리 525-3
초암사(草庵寺)는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인 소백산 국망봉 남쪽의 죽계구곡(竹溪九曲)에 있다. 신라의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첫째는 676년(문무왕 16)에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기 위해 절터를 보러 다닐 때 이곳에 임시로 초막을 지어 수도하며 기거하던 곳이라는 설이다.
둘째는 의상이 지금의 부석사 터를 찾아서 불사를 시작했는데, 서까래가 없어져 도력(道力)으로 살펴보니 이 절터에 떨어져 있었다. 의상은 이것이 부처님의 뜻이라 믿고 여기에 초암을 짓고 한동안 수행한 뒤 부석사를 건립했다고 한다. 사찰의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지만 『순흥지(順興誌)』에 따르면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 승려 김상호가 지었다는 토굴은 1950년 6.25전쟁으로 전소하였다. 승려 이영우와 민덕기가 연이어 이 사찰에 거처하였고, 이후 승려가 없어 폐사 직전에 있던 것을 1970년대 초반 비구니 보원이 주석하면서 사찰을 다시 일으켰다.
1981년에는 대웅전 등의 전각을 중수하였다. 사찰 건물로는 대적광전과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염불당, 안심당 등이 있다. 대적광전에는 삼신불을 봉안하였는데,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양쪽에 아미타불, 석가모니불이 있다. 대웅전에는 석가여래와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을 봉안하였다. 또한 3층석탑과 동·서부도가 있는데, 모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석탑과 부도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