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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지명설화》14편
#한국의지명설화
얇은 돌이 깔려 있던 서울시 신수동의 박석거리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에 ‘박석거리’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박석(薄石)’은 넓적하고 얇은 돌을 가리키는 말이다. 옛날 박석거리에 노인 내외와 아들 며느리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들은 남들보다 기운이 세고 신통력(神通力)까지 가지고 있었던 장사(壯士)였다. 하루는 노인 부부가 노들강변에서 큰 굿판이 벌어진다는 소리를 듣고 구경을 하러 가기로 하였다. 집에는 며느리만 남게 되었다. 장사는 신통력으로 부인을 노들강변으로 데리고 가 굿 구경을 함께 하였다. 남편의 신통력을 알게 된 부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자랑하였고, 장사는 관가로 끌려가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다. 그 후 용마가 하늘로 올라가면서 말굽으로 바위들을 부수어 땅에는 돌조각들이 잔뜩 깔리게 되었다고 한다.
마포구 신수동에 소재한 박석거리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에 ‘박석거리’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신수동주민센터 뒤편에 해당한다. 이곳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지역민들이 ‘박석거리’라고 부른다. 신수동은 마포구의 남쪽 끝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수철리(水鐵里)’라 부르기도 하였다. ‘수철’은 흔히 ‘무쇠’로 알려진 것이다. 옛날 신수동 일대에 무쇠로 솥과 농기구 등을 만들던 대장간이 있어서 ‘무쇠막’ 또는 ‘무수막’이라고 불렀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바로 ‘수철리’다. 후에 ‘신수철리’와 ‘구수철리’로 분리되었다가 1946년에 신수철리가 신수동이 되었다. 이곳 신수동 일대에서 ‘잔돌’이 많은 곳을 ‘박석거리’, ‘박석고개(薄石峴)’ 등으로 불렀다.
노들 큰 굿을 구경 시켜준 장사
‘박석(薄石)’은 넓적하고 얇은 돌을 가리키는 말이다. 옛날 박석거리에 노인 내외와 아들 며느리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들은 남들보다 기운이 세고 신통력(神通力)까지 가지고 있었던 장사(壯士)였다. 아들이 얼마나 힘이 센지 바위를 살짝만 건드려도 바위에 손자국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아들과 함께 사는 노인 부부와 심지어 장사의 아내도 그가 남들보다 힘이 세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신통력까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하루는 노인 부부가 노들(현재의 노량진)’에서 큰 굿판이 벌어진다는 소리를 듣고 구경을 하러 가기로 하였다. “며늘아! 집 잘 보고 있어라. 노들에 굿판이 있어서 잠시 다녀오마.”, “예, 잘 다녀오세요.” 그렇게 해서 집에는 며느리만 남게 되었다. 한편으로 며느리는 시부모님들만 큰 굿 구경을 하러 가는 것이 몹시 서운했다. 노인 부부가 노들로 큰 굿 구경가고 나서, 얼마 있다가 장사가 집으로 돌아왔다. 장사의 눈에 부인이 굿 구경을 가지 못해 서운해하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장사는 “당신도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굿 구경 가고 싶지 않소?”라고 물어보았다. 이에 부인이 “가보고는 싶지만 어떻게 따라나서겠어요? 서운해도 할 수 없지요.”라고 하였다. 장사는 “그럼, 내가 구경을 시켜 줄 테니. 그 대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시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행주치마로 부인의 머리 위에 뒤집어씌워 눈을 가렸다. “자! 눈을 감고, 내가 말하기 전에는 행주치마를 절대 벗지 말고 눈도 뜨지 마시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그리고는 장사는 부인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부인은 갑자기 몸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하더니, 귓가에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잠시 시간이 지나 후, 부인의 두 발이 땅에 내려지자, 장사가 부인에게 씌었던 행주치마를 벗기며 말했다. “자! 이제 됐소. 눈을 뜨시오.” 장사의 말을 듣고 부인은 눈을 떴다.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바로 노들강변이었다. 자신이 어느 사이에 노들강변 굿판에 와 있는 것이었다. 아내는 장사와 함께 굿 구경을 마음껏 하였다.
관가 사람들에게 붙잡혀 죽은 장사
장사 부부가 굿 구경을 하는 사이에 어느덧 저녁 무렵이 되었다. 그래서 시부모님들보다 먼저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장사는 이번에도 노들로 왔던 방법과 마찬가지로 부인을 집에 데려다주었다. 부인은 장사 남편이 고마우면서 신통력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신기해하였다. “남편의 신통력이 대단하구나!” 집으로 돌아온 부인은 그날부터 이웃에 사는 사람들에게 굿 구경한 이야기, 남편의 신통력 이야기 등을 모두 하였다. 시간이 흘러, 장사와 관련한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었다. 급기야는 관가까지도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그 당시는 “신통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국가에 반란을 일으킨다.”라고 해서 붙잡아 죽이던 시절이었다. 관가에서는 장사를 잡으러 사람들을 보냈다. 결국, 장사는 관가로 끌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만다. 모든 일이 부인의 가벼운 입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부인은 후회하였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장사의 시체는 신수동 고갯마루에 버려졌다. 그런데 그날 밤, 고갯마루에 용마가 나타나 큰 소리로 울더니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이때 용마가 하늘로 올라가기 전 말굽으로 바위들을 부수어 땅에는 돌조각들이 잔뜩 깔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곳을 ‘박석거리’, ‘박석고개’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돌이 많이 깔려 있던 박석거리
한편, 박석거리 지명과 관련해서 다른 유래도 전해진다. 옛날에 박석거리 마을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부자는 비가 내리는 날이면 짜증을 많아 내었다. “젠장, 비가 오면 땅이 질퍽거려서 제대로 다닐 수가 있나!” 하루는 외출했다가 돌아온 부자는 가죽신에 묻은 흙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바닥에 돌을 깔아 놓을까? 그러면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땅이 질퍽거리지 않겠지?” 부자는 하인들을 시켜 자신이 주로 다니는 길에 돌을 깔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박석거리에 얇은 돌이 많았다고도 한다. 또한, 옛날 박석거리에는 구들장을 만들던 곳이 많았다. 구들장을 만들다 남은 돌을 바닥에 깔아서 박석거리가 되었다고도 한다. 신수동은 사대문 밖에 위치하는 곳이다. 그래서 그곳에는 무쇠솥을 만들던 대장간도 있었고, 구들장을 만들던 곳도 있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길에 돌들이 많았을 것이다. 결국 「얇은 돌이 깔려 있던 서울시 신수동의 박석거리」는 마을 거리 모습과 당시 민중들의 꿈을 담은 ‘장사 이야기’와 결부해 전해지는 지명유래담이라고 할 수 있다.
ㅡ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