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은 현재 우리가 쓰는 ‘한글’의 옛 이름이자, 우리글의 창제 목적과 글자를 만든 원리, 글자 쓰는 법을 해설한 책의 이름이기도 해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가진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집현전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고, 세종 28년(1446)에 우리 민족이 쓸 글임을 세상에 정식으로 알렸어요.
세종 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기 때문이에요. ≪훈민정음≫ 원본을 보면,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우리나라 말은 중국 말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에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다.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백성들은 이 글자를 배워 누구나 문자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해라.”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쉽게 쓸 수 있는 글자를 만들었으니, 열심히 배워 백성 모두가 문자 생활을 하라는 것이죠. 현재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훈민정음≫ 원본은 세종 28년 9월에 출판된 것으로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어요.
앞부분에는 세종 대왕이 ≪훈민정음≫을 발행한 목적과 새로 만든 글자 28자를 소개하고 이를 결합하여 표기하는 방법을 적어 놓았어요. 뒷부분에는 세종의 명으로 집현전 학자 8명이 쓴 ≪훈민정음≫ 해례본(해설서)과 집현전 학자들을 대표하여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머리말)이 적혀 있어요.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한글을 만든 원리와 글자를 합하여 쓰는 것에 대한 풀이가 적혀 있지요.
| 훈민정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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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기록 유산 등재 | 199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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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시기 | 조선(144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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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문화재 지정 종목 | 국보 제7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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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곳 | 간송 미술관(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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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돋보기로 살펴보는 훈민정음
세종 때 만든 ≪훈민정음≫ 원본이 어떻게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나요?
세종 때 만든 ≪훈민정음≫ 원본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데는 일제 강점기 때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크게 노력했던 간송 전형필 할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간송 할아버지 집은 무척 부자였는데,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재산을 일본 사람들이 탐내는 우리 문화재를 사들이는 데 썼어요.
≪훈민정음≫ 원본도 마찬가지예요. 하루는 간송 할아버지가 자신이 운영하던 한림서림 앞으로 골동품을 사고파는 중간 상인이 바삐 걸어가는 것을 보았어요. 할아버지는 황급히 지나가는 상인의 모습이 이상해서 큰 소리로 불러 세우고 물었어요.
“어디를 그리 서둘러 가시오?”
“≪훈민정음≫ 원본이 안동에 나와서 급히 갑니다.”
간송 할아버지는 깜짝 놀랐어요. 세종 때 만들어진 우리글 ≪훈민정음≫을 기록한 책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그때까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간송 할아버지가 얼른 물었어요.
간송 할아버지는 금고에서 돈을 꺼내어 ≪훈민정음≫ 원본을 꼭 사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때 상인에게 준 돈은 모두 만천 원이었어요. ≪훈민정음≫ 원본이 일본 사람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주인이 매겨 놓은 가격보다 열 배나 되는 돈을 책 사는 값으로 쓰고, 천 원은 중간 상인에게 수고비로 주는 돈이었어요.
결국 ≪훈민정음≫ 원본은 간송 할아버지의 손에 들어왔고, 이 덕분에 우리나라는 우리글 한글의 창제 사실을 상세히 기록한 ≪훈민정음≫ 원본을 찾을 수 있었어요. 당시 서울의 기와집 한 채 값이 천 원이었다니, 간송 할아버지는 기와집 열 채 값을 주고 ≪훈민정음≫ 원본을 산 것이죠.
그 후 간송 할아버지는 이 책을 무척 애지중지해서 6·25 전쟁이 터져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될 때도 다른 문화재들은 모두 놔두고 오직 이 책 하나만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피란지로 가지고 다니며 잃어버리지 않도록 힘썼다고 해요.
알쏭이의 궁금증 ≪훈민정음≫은 별명이 많다고 하던데, 정말 그래요?
그래요. ≪훈민정음≫을 줄여서 ‘정음(正音)’이라했지요. 또한 ≪훈민정음≫을 비하하여 언문(諺文)·언서(諺書)·반절(反切)·암클·아햇글이라고도 했어요. ≪훈민정음≫이 만들어질 당시부터 조선 말기까지 조선의 지식인들인 유학자들은 문명 대국의 글자인 한자를 놔두고 ≪훈민정음≫을 쓴다는 데 매우 불만이 많았어요.
그래서 그들은 ≪훈민정음≫을 상것들이나 쓰는 글이라 하여 언문 또는 언서라고 했고, 아녀자들이 주로 쓰는 글이라 하여 암클, 반토막 글이라 하여 반절, 아이들이나 쓰는 글이라 하여 아햇글이라고 비하했지요. ≪훈민정음≫은 조선 최고의 명군주 세종 대왕이 만든 글자지만, 조선 시대 내내 지식인들에게 수모를 당했어요.
≪훈민정음≫을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좋아했나요?
세종 대왕은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의 문자 생활을 위하여 ≪훈민정음≫을 만들었지만, 지배층인 양반들은 대부분 한글 창제에 반대했어요. 그 이유는 문화의 선진국이자 아버지 나라로 모셨던 중국의 글자인 한자를 무시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집현전의 부제학으로 있던 최만리 같은 학자는 “큰 나라인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가 되려 하는 것.”이라며 긴 글의 상소문을 올려 한글 사용을 비난했지요.
그러나 세종 대왕은 반대하는 양반들의 상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글 창제에 힘을 쏟아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 한글을 세상에 내놓았어요.
≪훈민정음≫은 언제부터 우리글로 인식되기 시작했나요?
일제 강점기 때 민족의식의 성장과 함께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살린 우리글을 쓰자는 운동이 시작되었어요. 이때부터 ≪훈민정음≫을 국가의 글자라는 의미에서 ‘국문’이라 했으며,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은 1913년 어린이 잡지 〈아이들보이〉에 글을 쓰면서 ‘한글’이라는 이름을 최초로 사용하여 ≪훈민정음≫의 현재 이름인 ‘한글’을 탄생시켰어요.
‘한글’이 널리 퍼진 것은 조선어학회가 중심이 되어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이 되던 해인 1926년에, 우리글 반포 기념일인 ‘가갸날’을 정하여 기념하면서부터였어요. 그 후 가갸날은 ‘한글날’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죠. 한글은 ‘한(韓)나라의 글’, ‘큰 글’, ‘세상에서 첫째가는 글’을 의미해요.
한글의 우수성을 외국에서도 인정하고 있다던데요?
맞아요. 유네스코는 세계적으로 문맹 퇴치에 기여한 사람에게 ‘세종 대왕’의 이름을 붙인 상을 주고 있으며, 독일의 언어학자 하스펠 마트는 한글날인 10월 9일을 세계 언어학의 날로 기념하자고 제안하기도 했어요. 또한 영국의 저명한 언어학자인 샘프슨 교수는 한글이 매우 과학적인 글자임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한글이 과학적으로 볼 때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글은 일정한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문자라는 점에서 세계에 그 유례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한글은 발성 기관의 소리 나는 모습에 따라 체계적으로 창제된 과학적인 문자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문자 자체가 소리의 특질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영어의 T와 N이라는 글자는 소리는 갖고 있지만, 그 소리는 발성 기관의 모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나 N에 해당하는 한글의 ㄴ은 혀가 잇몸에 닿는 모습을 본떠 만들었고, T에 해당하는 ㄷ은 ㄴ에 한 획을 더하여 같은 자리에서 소리 내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글의 각 글자는 이런 방식으로 발성 기관의 모양을 따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사례를 보았을 때, 한글 과학성과 독창성을 외국의 언어학자들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세종 대왕 초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