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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9. 묵상글 들 ( 2022년 12월 19일. - 인간의 소원을 구원의 기회로 삼으시는 하느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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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9. 2022년 12월 19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인간의 소원을 구원의 기회로 삼으시는 하느님
오늘 복음은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을 낳아 줄 즈카르야와 그의 아내가 등장합니다.
이 둘은 삼손의 부모와 같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신세인데
오늘 즈카르야는 아이가 생길 거라는 천사의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천사의 말이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입니다.
그러니까 즈카르야가 아이를 달라고 빌었다는 얘기인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게 합니다.
자기 아내가 돌계집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얘기인지,
젊었을 때의 청원이 이제 받아들여졌다는 얘기인지,
아니면 늘그막에도 아이를 달라고 빌었다는 얘기인지.
돌계집이라는 것을 알고도 아이를 달라고 했다면
진짜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도 늘그막에 청했다면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데 뒤에 보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의심합니다.
그러므로 즈카르야의 청원은 아내가 돌계집인 줄 모르고
청한 것이고, 젊었을 때 청한 것이 거의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탄생이 733년 전 아하즈에게 한 약속이 이루어진 것처럼
요한의 탄생은 즈카르야의 오랜 소원이 뒤늦게 이루어진 겁니다.
이제 다음으로 생각게 되는 것은, 요한의 탄생이 즈카르야의 청원의 결과인지,
하느님의 앞선 계획 그러니까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의한 것인지, 그 점입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요한의 탄생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의한 것이지,
한낱 즈카르야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불임은 하느님 구원계획의 일환이었고,
하느님께서는 즈카르야의 인간적인 소망도 구원의 기회로 삼으신 겁니다.
개인의 소망을 인류 구원의 기회로 삼으시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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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9. 2022년 12월 19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7)
우리는 어제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대한 말씀을 들었고,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에 대한 말씀을 듣습니다. 곧 어제는 “의로운 사람”(마태 1,19) 요셉의 이야기였고, 오늘도 역시 “하느님 앞에 의로운 이들”(루카 1,6)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이야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예고는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고 너무 늙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서 거룩한 인물이 태어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사실, 성경에는 여러 거룩한 여인들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창세 11,30), 이사악의 아내 레베카(창세 25,21), 야곱의 아내 라헬(창세 29,31),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1사무 1,2), 그리고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삼손의 어머니인 마노아의 아내(판관 13,2), 그리고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루카 1,7)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거룩한 인물들을 낳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장소와 시간은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곧 오늘 <복음>의 장소인 성전의 ‘두 제단’은 두 계약을, 그리고 옛 계약에 따라 ‘제사를 드리는 시간’에 벌어진 이 일은 구약 시대와 신약을 연결해줍니다. 따라서 요한의 출현은 옛 계약의 율법과 사제직이 끝났음을 알려줍니다. 이는 경계가 무너지는 일입니다. 벽이 무너지고 막힌 것이 없어집니다. 이는 우리를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사실, 요한은 불임인 늙은 여인에게서 태어나고, 그리스도는 동정인 젊은 여인에게서 태어납니다. 여기에는 어떤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막시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약의 인물인 요한은 늙은 여인의 식어버린 피에서 태어나야 했고, 장차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주님은 꽃처럼 피어나는 처녀의 몸에서 피어나셔야 했던 것입니다.~그리고 즈카르야는 의심했기 때문에 목소리를 잃었고, 마리아는 곧바로 믿었기에 세상을 구하는 ‘말씀’을 잉태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아기의 잉태를 알려주면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줍니다. 요한이란 이름은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다’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명이 주어집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7)
이처럼, 요한의 사명은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을 드러냅니다. 곧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루카 1,17)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의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안에 혹은 우리가 만나는 이 안에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탄생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미 자비를 입었으니, 기뻐하며 자비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1,24)
주님!
당신께서는 저의 무능과 허약 안에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피하고 도망쳐도 보물을 찾듯 찾아오시고,
거부하고 배신해도 목숨처럼 아끼시며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 지금 지체치 마시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소서.
제가 응답하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를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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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9. 2022년 12월 19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늘의 별은 여전히 있다
밤하늘이 유난히 빛났습니다. 별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기온은 뚝 떨어졌지만 바람 한 점 없는 하늘에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어서 상쾌했습니다. 가끔은 아름다운 하늘을 보고 주님을 찬미할 수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먹구름에 가려져 별을 볼 수 없지만 그래도 그 별은 별의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어둠이 아무리 깊어도 내가 별을 볼 수 없는 것이지, 별이 아주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은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항상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내가 그분의 은총을 느끼든 그렇지 않든 풍요로움으로 여전히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흔들비쭉입니다. 기대하는 바가 채워지면 호들갑을 떨고, 그렇지 않다고 여겨지면, 투덜대기 일쑤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넉넉함으로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은총이 왜 꼭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주어져야 하나요? 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심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최선을 다한 다음에는 손을 털고 주님께 맡긴다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어주신”(요한3,16). 그분께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을까요?
즈카르야는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면서도 기도가 꼭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였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루카1,13). 고 하였지만,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1,18). 하며 보이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천사가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벙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루카1,20). 하느님 앞에서 의롭고 흠 없이 살아온 즈카르야, 엘리사벳에게도 시련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우리에게 시련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 아닐까요?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고 그분의 은총은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시건만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왜 그리 힘이 든지요! 간절히 청하고는 그저 그분의 처분을 바라는 삶, 그리고 그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둠에 갇힌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별이 없는 것이 아니듯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은총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일깨움이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엘리사벳이 잉태한 후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고백합니다.“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1,25). 은총은 언제나 넉넉히 우리를 기다립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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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9. 2022년 12월 19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부분의 성당에는 그동안 있었던 신부님들의 사진이 액자로 걸려있습니다. 제가 미사를 도와주는 퀸즈 정하상 바오로 성당에도 신부님들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정욱진 토마스 신부님, 안상인 요셉 신부님, 김인성 요한 비안네 신부님, 서상봉 다니엘 신부님, 이가별 가브리엘 신부님’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지금은 김문수 엔듀류 신부님이 있습니다. 내년이면 본당 설립 50주년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초대 신부님은 공동체의 씨를 뿌렸습니다. 서울교구 신부님들은 공동체에 물을 주었습니다. 잠시 머물렀던 예수회 신부님은 공동체에 거름을 주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 신부님들은 공동체가 꽃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를 이끄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제가 있는 신문사에도 사진이 걸려있지는 않지만 홈페이지에는 역대 신부님들의 명단이 있습니다. 신부님들이 모두 헌신적으로 신문사를 위해서 일하셨고 신문사는 창립 35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문사를 이끄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세종대왕은 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다른데 글은 중국 글자를 사용하니 백성들의 고충이 많다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말을 우리의 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글’을 창제하였습니다. 그것을 ‘여민락(與民樂)’이라고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 또한 ‘여민락’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던 마노아의 아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삼손’이며 태양의 힘을 가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이는 그 힘으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절망과 좌절 중인 여인에게 희망을 주었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즈카리야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가질 수 없던 아내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질 거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요한’이며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많은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새로운 길을 준비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자라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고, 주님보다 앞서서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성탄 무렵에 많이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천사라는 뜻입니다. 저는 저의 세례명을 참 좋아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왕이면 좋은 뜻을 전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때로 날개 잃은 천사가 되어서 방황하기도 하지만 저의 세례명처럼 주님의 뜻을 전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미주 가톨릭평화신문에서의 일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저의 세례명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이 이룬 일로 정해지는 이름도 있습니다. ‘독재자’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과 욕망에 따라서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독재자의 폭력에 의해서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선구자’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이름입니다. 밤을 새워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류는 그런 사람들이 밝힌 길을 따라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며 살았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목적은 세상의 명예와 세상의 성공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길은 바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초는 자신을 태울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듯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를 태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이 또한 ‘여민락’의 삶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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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9. 2022년 12월 19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0년 전, 남미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남미 선교사 모임에 참석하기 위함이었지요. 3박 4일의 모임 일정을 마치고, 힘들게 이곳에서 언제 다시 올지 몰라서 같이 갔던 신부들과 페루 관광을 갔습니다. 수도인 리마로 갔다가 다시 쿠스코까지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쿠스코는 잉카 문명의 고대도시인 마추픽추에 가려면 반드시 들려야 할 곳입니다.
쿠스코 공항에 내리는 순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습니다. 머리가 아파서 아무것도 생각하기 힘들었습니다. 오로지 힘들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고산병 증세였습니다. 며칠에 걸쳐 천천히 올라와야 하는 길을 비행기로 단숨에 3,399m 높이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이때 산소의 중요함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평상시에는 산소를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이 어렵지 않아 그 고마움을 전혀 모릅니다. 하지만 산소량이 부족한 곳에 오니 평상시에 느끼지 못했던 ‘산소’가 얼마나 중요하고 감사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 산소가 바로 하느님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평상시에는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하느님께 대해 감사의 마음을 잘 갖지 않습니다. 또 자기에게 중요한 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어렵고 힘든 시간을 겪는 순간 하느님의 부재를 체험하면서 힘든 시간을 겪게 됩니다. 불평불만을 외칩니다. 하느님을 불합리한 분이고, 차별하시는 하느님이시고, 질투의 하느님이라며 원망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 순간이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할 때였습니다. 하느님 없이는 도저히 혼자 살 수 없음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즈카르야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세례자 요한 잉태 소식을 듣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감사하면서 받아들이기보다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라면서 하느님의 능력이 세상의 기준보다 높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보다 세상을 더 믿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즈카르야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믿음 없는 상태에서는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제대로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산소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처럼, 하느님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분입니다. 이렇게 꼭 필요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면서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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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상황에 처했을 때 부정적 결정을 내리지 마라. 침울할 때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마라. 기다려라. 폭풍은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봄이 올 것이다(로버트 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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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9. 2022년 12월 19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사랑의 ‘신비가神祕家’로 삽시다-
“내 입은 님의 찬미로 가득 차 있고,
진종일 당신께 영광을 드리나이다.”(시편71,8)
오늘은 대림2부, 셋째날인 12월19일입니다. 주님 오실날도 하루하루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오! 옛세의 뿌리여(O Radix Jesse)”로 시작되는 간절한 M후렴도 반갑고 고맙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해야 겠다는, 하루하루 사랑의 신비가로 살아야 하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오 옛세의 뿌리여, 만민의 표징이 되셨나이다. 주앞에 임금들이 잠잠하고 백성들은 간구하오리니, 더디 마옵시고 어서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요즘 성탄에 임박하여 많은 분들이 고백성사차 수도원 제 집무실을 찾습니다. 보속으로 다음 똑같은 말씀 처방전을 써드리며 충고하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사랑하는 – 형제님(필립4,4)” 성구를 써드린후 꼭 당부하는 충고입니다.
“주님 오실 날이 꼭 일주일 남았습니다. 일주일만은 화내지 않고, 짜증내지 않고, 큰소리치지 않고,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기쁘고, 평화롭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시다 주님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비상한 신비가가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 일상의 기쁨과 감사의 신비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불행과 비극은 삶의 중심인 하느님을 잊은 데에 기인합니다. 하느님을 잃었는지, 잊었는지 구별이 애매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잃어, 잊어, 삶의 중심과 삶의 의미를 잃고, 삶의 길을 잃고 방황하며 표류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오소서, 주 예수님!”을 뜻하는 “마라나타”를 호흡에 맞춰 되뇌이며 바치기를 권하는 명상기도 제 강의록중 한부분을 소개합니다. 이 명상기도 또한 깨어 늘 주님의 신비가로, 관상가로 살기위한 영성 훈련입니다. 30년전에 쓴 내용인데 오늘날도 여전히 새롭게 읽힙니다. 신비가로 불림받은 우리 신자들에게 적절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명상기도는 수도승 영성이 보편화하는 시대에 깊은 영적 삶을 추구하는 자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단순하고 평범한 기도로서 결코 신비롭고 유별난 기도가 아니라 참사람眞人’으로 살아가기 위한 단순하고 평범한 수행의 한 방법이며 순간순간 소중히 지내며 하느님의 현존인 사랑 안에서 깨어 살기 위한 기도이다. ‘행함의 기쁨(the joy of doing)’을 누리는 시간이 아니라, 존재의 기쁨(the joy of being), 관상의 기쁨(the joy of contemplation)을 누리는 시간이며, 생각을 멈추고 사랑의 침묵안에 머무는 시간이다.
신비가는 소수의 영적 엘리트에게 해당된 명칭이 아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도달해야 할 본래 모습이요 모두가 그리로 불리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저명한 신학자 칼 라너는 '21세기의 문턱에 선 현대는 새 문명이 잉태되기 위한 다 전환기로서, 머지 않아 영성을 요구하는 시대가 열릴 것이며 그때가 오면 신자들은 신비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말한다.
물질주의, 금전만능주의 시대인 오늘날, 많은 이들은 외적 풍요와 편리함에 비례하여 극심한 영적 갈증을 겪고 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이 영혼의 갈증을 해갈시켜 주지 못한다. 명상기도는 생명의 샘이신 주님 안에 머물러(요한15,4) 생명수를 흡수하여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는 기도이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같은 현실입니다. 오히려 영적 갈증은 날로 심각해집니다. 얼마전 친애하는 도반인 신부가 본당 신자들이 너무 좋아한다 하여 판공시 보속으로 나눠주겠다며 수백장의 행복기도문을 가져갔습니다.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는 주님의 사랑의 신비가가 되고 싶은 깊은 갈망이 잠재해 있음을 봅니다. ‘행복기도’ 혹은 ‘예닮기도’로 일컫는, 신비가의 고백처럼 생각되는 기도문 전문을 다시 소개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2018.10.16.
참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는 기도문입니다. 대림 2부, 주님 오실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매일 바치며 주님을 닮은 사랑의 신비가로 사시기 바랍니다. 성서의 인물들 평범한 듯 하나 실상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했던 비범한 신비가들이었습니다.
제가 볼 때 어제 복음의 주인공인 성 요셉이 주님을 만난 신비가였고,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출생에 관계된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부 역시 주님을 만난 신비가들입니다. 또 제1독서 판관기의 참 소박한 마노아와 그 아내 역시 주님을 만난 신비가들이었습니다.
제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중심의 수덕생활에 한결같이 지극히 충실할 때, 때가 되면 주님은 이들을 찾습니다. 수덕신비생활입니다. 수덕의 기반위에 비로소 꽃처럼 피어나는 신비생활입니다. 복음의 노부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에 대한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
바로 때가 되자 이들 신비가인 노부부를 방문한 주님의 가브리엘 천사였고 세례자 요한 아기의 출생이 예고되고 마침내 엘리사벳은 아기를 잉태하고 감격에 벅차 고백합니다. 요한은 ‘주님은 자비로우시다’를 뜻합니다. 자비로우신 주님의 선물이 바로 요한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일을 해주셨구나.”
그러니 태교는 물론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잘 키우기 위해 최선의 노력과 정성을 다했을 신비가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부입니다. 판관기에서 마노아 부부를 통해 삼손의 출생도 신비스럽습니다. 이들 부부의 충실한 삶을 눈여겨 보신 주님의 개입임이 분명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많은 부분이 생략됐는데 이를 읽어보면 두 부부가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기도의 사람이자 신비가였던지 잘 알아챌수 있습니다. 성서의 인물들에게 하느님 체험은 아주 일상적이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얼마나 하느님을 잊고, 잃고 사는 지, 경종이 되는 성서의 가난한 신비가들입니다. 마노아의 아내 역시 임신할 수 없는 몸이어서 자식을 낳지 못했는데 마침내 주님의 천사가 아들의 출생을 예고합니다.
“보라, 너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어서 자식을 낳지 못하였지만,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마침내 마노아의 아내는 아들을 낳고 삼손이라 하였고, 아이는 자라나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삼손은 태양을 뜻하는 히브리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느님은 이 부부에게 태양같은 아들 삼손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삼손의 출생,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통해 새삼 우연한 존재는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과연 나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의 신비가로 잘 살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주여, 내 믿는 데 당신이시고
어려서부터 나의 희망 주님이외다
어미의 품안에서부터 님은 나의 힘,
모태에서부터 님은 내 의지시오니
나는 언제나 당신을 믿었나이다.”(시편71,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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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9. 2022년 12월 19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 앞서 한 사람>
홀로 오실 수 있는
주님이시지만
홀로 오시지 않는
주님이시기에
오시는 주님 앞서
한 사람 늘 있답니다
주님께서 앞서 보내신
주님 모신 사람 말이에요
그러니 주님을 모신 내가
주님 앞서 그대에게
그러니 주님을 모신 그대가
주님 앞서 나에게
오시는 주님 맞이할
설레는 마중길 되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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