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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노래
시편 18:1~19
오늘 읽은 시편 18편에는 ‘건져낸다’, ‘구원한다’는 말이 여섯 차례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2절에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17절에 “저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 센 연고로다.”
19절에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
43절에 “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48절에 “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주께서 실로 나를 대적하는 자의 위에 나를 드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나이다.”
50절에는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영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시편은 말하자면 구원을 노래한 시입니다.
1절에 보면 구원 얻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2절에 보면 구원 얻는 자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했습니다.
6절에 보면 구원 얻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28절에 구원 얻는 자에게는 빛을 주시고, 32, 34절에는 구원 얻는 자에게 힘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35절에 보면 구원 얻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보호가 있고,
38절에는 구원 얻는 자에게 승리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오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피조물을 통하여 기적을 행하시지 아니하시지만 고통의 심연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깊은 죄의 구덩이에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보장하시는 일에는 적극적으로 관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저희를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데서 도로 나오게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사건에 기적적으로 관여하심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혹 어떤 분은 이 세상에서 비극적인 사실이 일어날 때 “어떻게 선하신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만물을 주관하시는 보좌에 앉아 계시는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하나의 수수께끼로 옛날부터 내려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악을 없애버리지 아니하시고 이런 불행을 맛보게 합니까?” 이 문제 역시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누가 완벽한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어리석은 사람은 한 시간 안에 대답하겠다고 나서겠지만, 지혜 있는 사람은 세기를 기다리면서도 그 문제에 대한 답변을 유보할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여기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는 도덕적 악이 존재하고 하나님도 존재한다는 사실과, 이 세상에는 자연 악이 존재하나 사랑이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불도 있게 하시고 물도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불에 타 죽는 사람도 있고 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부족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만일에 사사건건 하나님의 기적적인 관여하심이 개입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문제는 상당히 복잡해질 것입니다.
가령 기차는 철로 위로만 달려야 됩니다. 철로를 벗어났을 때 전복을 면치 못하며 탄 사람들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그런 사고를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백 명을 태운 기선이 침몰하려 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면 침몰 직전에 그 기선을 구출할 수 있습니다. 많은 손님을 실은 여객기가 엔진 고장으로 추락하여 비참하게 세상을 떠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것도 방지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이 일에 관여하지 아니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연 법칙을 주어서 이 법칙에 따라서 세계가 진행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몇몇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자연 법칙과 하나님의 법칙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모든 법칙은 하나님의 장중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고정된 법칙에 의해서 주권을 수행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러한 법칙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유보하실 수도 있습니다. 사자의 입을 막으실 수도 있고 불의 화형을 끄실 수도 있으며 물을 가로막아 멈추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일을 자주 하시지는 않으시고 최근에는 이러한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러한 기적으로 관여하시는 일을 반복하시게 되면 그것은 현실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왜 비극이 일어납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죄 때문입니다. 죄가 없다면 고통도 죽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죄가 없었다면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범죄하기 전에 살던 것과 마찬가지로 걱정도 근심도 두려움도 죽음도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배가 바다에서 파선하여 침몰하는 일도, 땅에서는 교통 사고도, 공중에서 비행기 추락 같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모든 돌발 사태는 죄 때문입니다. 죄의 결실입니다. 죄의 결과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의 관여하심이 경건한 사람의 구원만을 위해서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의 장소로 만드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가 아닙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심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 많고 가증된 죄를 범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을 보시면서도 심판을 유보하고 계십니다.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질 때에도 죄인만 죽은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에 의해서 갈릴리 사람들이 희생을 당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혹 어떤 사람이 갑자기 사고로 세상을 떠나거나 불치의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개인에게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불의의 사고가 발생했을 때 많은 사람이 죽는 가운데 몇 사람이 살았다면 살아 남은 사람이 죽은 사람보다 더 경건해서 살아남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제가 작년 9월에 교회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해서 일본 오사카를 중심해서 도요하시, 고오베, 그리고 히로시마에 다녀왔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히로시마는 세계 제 2차 대전 때 원자폭탄의 폭격을 받아 결국 일본이 항복하게 만든 도시입니다. 일본 목사님들의 안내를 받아 2차 세계대전을 기념하는 공원에 가 보았습니다.
물론 본래부터의 공원은 아니고 원자폭탄이 떨어져 히로시마가 몽땅 잿더미가 되어서 처음부터 다시 건설될 수밖에 없었을 때, 도시 중앙의 넓은 지역을 택해서 다시금 이런 비극이 이 세상에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평화 공원’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졌고 거기에는 원폭 박물관이 있는데 그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타 버린 것이 아니라 녹아버리고 말았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느낀 것은 그 당시에 히로시마 안에 교회가 여럿이 있었는데 차별없이 모두 녹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함께 죽어 갔습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히로시마가 원자폭탄에 의해 잿더미로 화할 때 하나님의 백성만을 건지셨다면 히로시마는 심판의 장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있을 수도 없고 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심판은 이 세대에 하는 것이 아니고 다음 세대로 유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천군과 천사와 같이 재림하셔서 그의 보좌에 앉으신 후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시겠지만 지금은 같이 있게 놓아두십니다.
그때에는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놓아두시겠지만 지금은 같은 초장에서 풀을 뜯게 놓아두십니다. 사건은 악인이나 성인의 구별이 없이 모든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심판의 땅이 아니라 오래 참아야 할 땅이고,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 장소가 아니라 인내로써 기다리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이런 것이 심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심판을 하실 때도 있지마는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것이고 마지막 심판 때까지 하나님은 우리의 심판을 유보하고 계십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재난에 관여하시게 되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가령, 어떤 농부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거름을 주고 곡식을 가꾸어야겠는데, 이 일을 전혀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그 밭에는 잡초만 우거지게 되었습니다. 이 농부는 먹을 것이 없이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관여하셔서 기적으로 갑자기 그 밭의 곡식이 자라고 가을에 추수하게 하셨다면 그 가정이 기근에서 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농사하는 사람은 게으름뱅이가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므로 우리가 굶주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니 농사짓느라고 수고하고 땀흘리며 고생할 것 없이 춤이나 추며 술이나 마시고 놀며 살자”고 타락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십니다.
어떤 지역에 전염병이 발생했는데 하나님이 능력으로 막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인이 인간의 부주의로 인해서 생긴 것이었다면 사람들은 정결한 생활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도시는 더러워지고 거리는 쓰레기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재난과 역경은 좋은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고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합니다. 보세요. 해마다 비가 오면 홍수가 나고 홍수로 인해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의 손해를 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수해를 피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이런 재난이 없으면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자동차는 차선을 따라 달리고 교통 신호를 준수해야 하는데 사고가 나도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관여해서 우리를 지켜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큰 혼란이 생기리라 믿습니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주의심도 필요가 없고 생명의 존엄성도 무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법칙에 따라서 매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간섭도 하시고 유보도 하시는데, 이 모든 것은 어떤 중대한 교육의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만드신 법칙을 변경시키는 것보다는 그 법칙에 맡겨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것도 지혜롭고 유익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기적적인 인도하심이 너무 자주 나타나게 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적의 관념이 건전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악인에게는 고통을 가하시고 의인은 모든 위험 중에서도 구출해 주신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킬 때의 경우를 보세요. 애굽 사람들에게는 암흑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 집에는 빛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바로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의 마음이 점점 더 완악해졌습니다.
광야 생활을 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불만을 가지고 범죄할 때, 그들 가운데 얼마가 벌로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 일 후에 얼마되지 않아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그가 하나님의 백성을 이 광야에서 죽게 하려 한다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매사를 자연 법칙에 맡기는 것이 타당한 것이고 때로는 그 법칙에 따라 어떤 희생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오히려 옳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사를 주관하십니다. 자기 백성의 사는 것을 주관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해야 될 일을 하는데 어느 곳에 가서 그 일을 수행하든지 두려움 없이 갈 수가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부르실 때는 지체할 필요가 없이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관여하심이 그 백성 가운데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하였습니다. 예측할 수 없었던 재난 속에서 우리를 건져주신 일이 그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항상 자기 백성이 안전케 되는 방법을 마련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새롭고 놀라운 지혜로서 우리로 하여금 위기의 순간을 면하게 하기도 하십니다.
때로는 악한 하만이 유대인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했던 것과 같이 하실 때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일을 종종 체험하곤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만을 교수형에 처하게 하셨습니다. 모르드개는 왕의 문전에 왕궁으로 인도함을 받았고 하만은 왕의 식탁에서 교수형장으로 내쫓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평탄한 길로 인도하신 사실을 일일이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 온 인생의 발자취는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집시다. 하나님은 ‘위에서 보내사’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모세가 물에서 건짐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구원을 받을 때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의 영혼을 구원하시면서도 하나님의 법칙을 범하지 아니하십니다.
“범죄한 영혼은 죽으리니” 한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모든 사람은 선악간에 심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이 두 가지 일을 조화시킬 수 있습니까?
메대나 파사 나라의 법은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날짜까지 정해서 온 유대인을 모아 죽이려는 입법 조치를 취한 일이 있습니다. 하만은 이 법률을 방방곡곡에 선포하였습니다. 왕도 그 법률이 일단 발표된 후로는 변경할 수 없는 것이 그 당시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만의 음모가 발각이 되었을 때 왕은 예외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에도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죄인을 벌해야 한다는 것을 엄격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류의 대표자인 첫 사람에 의해서 범죄한 죄는 그 후손에게 유전되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이 형벌을 받아야 되겠지만 하나님의 경륜은 그것을 유보했습니다. 유대인이 구원을 받는 것이나 죄인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나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저가 위에서 보내사” 했습니다. 모든 인류는 저들의 죄로 말미암아 파선된 배에 있는 사람들처럼 침몰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멸망의 길을 향해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위에서 보내사 인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위에서 보냄을 받은 분이 누구십니까?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분이 메시아였습니다. 그는 보내심을 받은 분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나를 취하심이여”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상실했을 때, 축복의 구세주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은사로 생각하고 용납하셨고, 그 아버지가 그에게 준 사람들을 지키시고 보살펴 주셨습니다.
그는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 되시므로 아브라함의 후손의 위치에서 탄생되셨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고 나사렛에서 장성하셨으며 겟세마네에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인간의 형상을 취하셔서 생사고락을 인간과 같이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한 그대로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건져 주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우리를 건져 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이 세상에 뛰어드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고난과 죽음을 겪으심으로 허다한 위험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기도 했습니다.
물에 빠져 떠내려가며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님께서 친히 내려오셔서 그 절망적인 물에 뛰어들어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건져서 반석 위에 올려놓아 새로운 찬송을 부르게 하신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라고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절망적인 심연에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취하셨고 그가 우리를 많은 물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성호를 찬송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만 합니다.
우리는 무모한 근심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신의 긍휼 안에서 우리에게 소망을 안겨주셨습니다.
문자 그대로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습니다. 우리가 지극히 어려운 가운데 처했을 때 건짐을 받아야 하나님의 도우심인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군대를 300명으로 해서 적군을 물리치게 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많은 군대를 가지고 이기면 자기들의 힘으로 이긴 것으로 착각할 것 같아서 그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 이하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감격이요 하나님만 의지할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만 의지합시다. 그리하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어떤 환경과 처지에 이르러도 절대로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마태 헨리는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 우리가 찬양하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하나님의 자비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스펄전은 “기도는 적에게 엄하게 포위되었을 때 도망할 수 있도록 열린 문과 같다. 기도는 그에게 몰려오는 홍수에 대하여 영적 날개로 위로 올라가게 한다.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심금을 울리게 하며 하나님의 손을 펴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구원을 찬양하십시다. 그럴 때 우리에게 더 은총을 베푸시며 힘을 더하셔서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성경 본문 : 시편 18: 1~19(1절) / 찬송 93장-예수는 나의 힘이요
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3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4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5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6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7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8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9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10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로 높이 뜨셨도다
11 저가 흑암으로 그 숨는 곳을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12 그 앞에 광채로 인하여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고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14 그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파하셨도다
15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16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 내셨도다
17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18 저희가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19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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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며 묵상하며: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18:1-19)
본시는 애매한 고난과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이겨낸 다윗의 노래입니다. 자신이 처한 삶의 현장에서 체험한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고백과 그의 기도는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삶의 현장에서 체험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랑하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는 자신의 힘이 되신 여호와를 사랑하였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는 고백은 항상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줍니다.
그는 원수들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줄이 옭아매고 불의한 자들이 홍수처럼 두렵게 하였으나 절망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하여, "여호와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라고 한 것은 상상이나 이론 속에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난 감격을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은 삶의 다양한 현장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기에 그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었고, 그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아뢰고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통로였고, 모든 환난과 원수를 물리칠 수 있는 승리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절대 절망이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뢰와 기도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처한 다양한 삶의 상황을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경험하는 기회로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간절한 기도입니다.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죽음이라는 절대 위기 상황을 완전히 역전시켜 승리의 발판을 구축하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르짖는 기도가 하나님께 들려지고 응답되어질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힐 정도로 확실히 응답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하늘 위에서 인생들의 행사를 살펴보시는데 그치시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울부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친히 강림하신 것입니다. 7~15절은 하나님의 임재 시에 나타난 초자연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영이시기 때문에 결코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임재하심을 뚜렷이 부여주시기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땅을 진동시키시고, 빽빽한 구름과 어둠가운데 강림하시는 것을 보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황홀경에 들어가고 감정이 뜨거워지는 것을 하나님의 임재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느낌이 없어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며 살 수 있는 길은 확신 있는 기도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일용할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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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방법
<이현채 칼럼>
1. 예수님만 바라보라! 죄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을 하지 않도록 자신을 잘 지켜야 한다.
2.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라! 영혼의 시선을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라. 귀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청하라.
3. 예수님만 사랑하라!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이나 뒤에 잠간이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싶다면 하나님을 생각하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4. 예수님이 피로 사신 교회를 사랑하며 충성하라! 내 마음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 달라고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온전히 굴복하라.
5. 예수님을 닮아 가기를 힘쓰라! 이렇게 신실하게 연습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에 놀라운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6.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섬기라!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에 자신을 열어간다면 그 분의 임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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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며 적용하며
1. 여호와께 대한 시인의 고백이 무엇이며(1, 2절), 죽음의 위기 때에 어떻게 합니까(3~6절)?
2. 시인의 기도에 대한 여호와의 위엄(7~15절)과 여호와의 응답이 어떠합니까(16~19절)?
3. 당신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환난 날에 어떤 도움을 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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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하며 간구하며:
하나님,
위기 때에 언약의 말씀을 붙잡고 집중기도하여 응답를 주시며
현장을 살리고 정복하는 전도자의 축복을 누리게 하소서
문제를 축복으로 바꾸며
문제를 복음전파의 기회로 붙잡으며
문제를 통한 사단공격에 속지 않으며
문제를 기도제목으로 삼으며
위기 때 집중기도하여
문제를 축복으로 능력으로 바꾸는
기도의 비밀을 누리게 하옵소서
위기 핍박 어려울 때에 믿음을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며
일심 전심 집중기도하며
언약적 기도는 반드시 응답 되기에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바라보고
미리 기도하는 하나님 자녀가 되어지게 하옵소서
평상시 기도 응답 속에서
임마누엘로 전도로 정시,무시 기도로 말씀묵상으로
인생 행복의 맛을 보는 성공자가 되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