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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4
#바예수
유대인 거짓 선지자 마술사 엘루마의 이름은 바예수인데, 이는 아마도 '예수의 아들'이란 뜻일것이다. 당시 예수의 이름이 흔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사건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특별하였으므로, 이처럼 마술 등으로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하는 자들 중에는 예수의 이름을 참칭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라고 할 수는 없었으므로, 자기를 그분의 아들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 바예수는 어쩌면 그런 자일지도 모르겠다.그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마술을 행하고 거짓 복음을 전하면서도 감히 예수의 이름을 도용하는데, 이는 마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걸고 자기 탐욕을 채우려 복음을 왜곡하는 담임목사와 유사하다. 바예수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무어라 하는가. 한마디로 모든 악을 행하는 마귀 자식이라 하며 한동안 앞을 못보는 어둠의 재앙을 내렸다. 그렇다면 바예수 같은 자기 탐욕에 사로잡힌 담임목사야 말로 멸망 당할 마귀 자식이며 적그리스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에스겔 29:1-32:32
애굽 심판 예언은 시드기야 재위 십 년 시월 십이일에 에스겔에게 임했다. 즉 바벨론에 멸망 당하기 일 년 전에 예언이 임한 것이다. 이 당시에 예언이 임한 이유는 아마도 시드기야가 9년에 바벨론을 배반하고 다음 해에 본격적으로 애굽과 화친을 맺어 군사 협력을 받고자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드기야가 바벨론을 섬기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가증히 여기시는 애굽에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정면으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을 보시고 그 행위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며 이로 인해 유다는 멸망의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임을 간접적으로 나타내시고자 함인 것 같다. 애굽은 자기 백성에게나 이웃 나라에게나 악어와 같이 포악하고 자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가 되는 갈대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였고, 자기가 다스리는 나일 강 주변의 지역을 자기 것이라 하여 하나님을 인장하지 않은 죄가 커서 이로 인해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치 애굽을 택하신 백성처럼 40년 동안 황폐하게 하신 후에는 애굽의 남은 자들을 돌려보내어 미약하나마 나라를 이루게 하실 것이라 약속하신다.
27년 째 해에 다시 나타난 애굽에 대한 예언은 그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에스겔이 환상을 보기 3년 전인지, 유다가 멸망한지 16년 후인지 에스겔은 명시하지 않고 햇수만 언급한다. 바로 앞의 예언의 후속이라고 한다면 후자에 가까울 것 같다. 여기서는 좀 더 구체화 된 심판을 예언하신다. 바벨론이 두로를 공격하여 점령했으나 거기서 만족할만한 전리품을 얻지 못하여서 대신 애굽을 공격하리라는 것이다. 비록 바벨론은 자기 욕심을 따라 정복전쟁을 하는 것이어도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주변국들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국의 역사와 정세를 주관하시므로, 우리나라에 좋은 일이건 안좋은 일이건 신자들은 그 모든 일어난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들을 생각하고 스스로 겸비하여야 한다. 바벨론이 애굽을 점령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주시는 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마도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어떤 확실한 징표가 아닐까 싶다.
애굽이 당할 심판의 참상은 이스라엘이나 예루살렘이나 다른 주변국들이 바벨론에 의해 당할 진멸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표면적으로는 바벨론의 정복 침략 전쟁이지만서도 그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당신의 크고 두려운 칼로 삼으셔서 애굽의 죄악과 우상숭배를 심판하시는 것이다. 애굽은 노아의 저주를 받은 함의 후예들이다. 함은 아버지 노아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고도 형들처럼 가리려 하지 않고 도리어 비웃음거리로 조롱하여 아버지를 욕보였다. 이로 말미암아 노아는 함의 후예 가나안, 즉 애굽을 저주하였고 함은 결국 애굽이라는 우상숭배의 절정을 달리는 나라를 세움으로써 홍수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을 정면으로 욕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애굽은 감히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첩으로 삼아 욕보이려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뻔 하기도 하였다. 야곱의 아들 요셉의 도움으로 7년 대기근을 벗어날 수 있었는데도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대하고 사내아이를 학살하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있어 애굽은 절대로 두 번 다시 상종해서도 돌아가서도 안되는 그런 죄악이 관영한 나라였던 것이다. 그 애굽의 죄악의 분량이 들어차는 때가 오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들어서 진멸하시는 심판을 행하시는 것이다.
시드기야 11년, 드디어 바벨론의 집중공격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되는 해에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대한 심판의 예언을 추가하신다. 이번 예언에서는 특별히 애굽을 대표하는 바로 왕이 바벨론 앞에서 얼마나 치욕과 굴욕을 당하는지를 보여주신다. 마치 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주변국 70명의 왕을 사로잡아다 그 손발의 엄지를 끊어 자기 상 밑에서 먹을 것을 주워먹게 했듯이, 바벨론 왕은 애굽 바로 왕을 자기 앞에서 비참한 고통을 줄 것이다. 두 달 후에 주신 또 다른 예언에서는 한 때 애굽이 얼마나 찬란했는지를 보여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두로를 하늘의 천사 그룹과 같이 영광스럽게 하셨듯이, 비록 애굽이 저주를 받은 함의 자손이라 하더라도 온갖 풍부함을 주셔서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은 존귀함을 주셨다. 그러나 두로가 자기 부유함만을 믿고 교만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노린 것처럼, 애굽은 하나님께 받은 존귀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한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얻은 것마냥 교만하였고 악어와 같이 포악히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만하고 포악한 애굽을 치셔서 교만을 꺾으시고 미약하게 하신다. 오늘날 한국의 몇몇 초대형 교회들의 행태가 마치 두로, 애굽과 같다. 그들의 재물의 풍부함과 다른 교회에 미치는 거대한 영향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지 못하고 그 교회들의 담임목사들은 자기들을 마치 두로 왕과 애굽의 바로 왕처럼 여겨 악어와 같이 포악하게 행하고 있다. 그 교회들의 세속적인 부귀영화가 얼마나 이어질지는 모르겠으나, 그 죄악의 분량이 차는 때에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바벨론과 같은 강력한 칼을 드셔서 그 대형교회들을 무너뜨리시고 설령 회복시키시더라도 더이상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미약하게 하실 것이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지 일 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애굽 심판에 대해 최후통첩을 하신다. 그 나라가 멸망을 당하여 얼마나 비참하게 되고 주변으로부터 비웃음을 당하게 되며 농락을 당하는지 신랄하게 보여주신다.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실 이방 나라에 대해 이렇게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심판을 미리 알려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비록 악인일지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이 심판을 반드시 이루시리라는 하나님의 공의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든지 아니 맏든지, 권세가 있든지 없든지간에 자기 죄를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는 자들은 각자의 분량에 따라 처절한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됨을 명심하여야 한다. 특히 교회의 규모와는 상관없이 교회를 대표하는 담임목사는 적어도 교회에서만큼은 왕과 같은 권세를 가졌으므로 그 권세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에 진력하여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포악한 악어와 같이 하나님의 갈고리에 꿰여서 끌려나와 온갖 수치를 당하고 망하게 될 것이다.
#20220824
#요한계시록 #Revelation 21:1-5
제 21 장
새 하늘과 새 땅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Then I saw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for the first heaven and the first earth had passed away, and there was no longer any sea.
Et vidi cælum novum et terram novam. Primum enim cælum, et prima terra abiit, et mare jam non est.
Καὶ εἶδον οὐρανὸν καινὸν καὶ γῆν καινήν· ὁ γὰρ πρῶτος οὐρανὸς καὶ ἡ πρώτη γῆ ἀπῆλθαν, καὶ ἡ θάλασσα οὐκ ἔστιν ἔτι.
기존의 하늘과 땅과 바다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생겨났다고 한 것으로 봐서 요한 사도가 기록한 지금의 사건은 용에게 미혹된 땅의 백성들이 성도들의 진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을 파괴하려다가 하늘에서 내리는 불에 살라지고 사탄이 불못에 던져지며 모든 악인들이 주님의 보좌앞에 모여들어 행위대로 심판을 받은 이후의 상황으로 보인다.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바다에게는 여러 생물을 내도록 명하셨기 때문에 인류가 번성하는 동안에는 바다가 반드시 존재해야 했지만,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선택된 모든 성도들의 구원이 완성되어 더이상의 생물 번성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위한 바다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처음 세상에서는 인류가 바다 항해 무역을 통해서 재물을 쌓아왔고 이 때문에 용이 세운 바다 짐승을 숭배하는 죄악을 저지르며 교회와 성도들도 적잖은 피해를 받아왔으나, 새 세상에서는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상급만으로도 차고 넘치도록 풍부하기 때문에 더이상 재물을 모을 필요도 목적도 이유도 없어지므로 바다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처음 하늘과 땅과 바다가 완전히 하늘의 불에 풀어져 소멸되고 새롭게 별도로 지어진 것인지, 아니면 성도가 부활할 때 이 땅에서 살던 몸이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변화된 것처럼 처음 하늘과 땅과 바다가 새롭게 변화된 것인지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개인적으로는 후자 쪽이 더 성경의 원리에 가깝지 않나 싶다. 처음 하늘과 땅과 바다는 비단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끝을 도저히 알 수 없는 우주 만물 전체일 것이며, 새 하늘과 새 땅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城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準備한 것이 新婦가 男便을 爲하여 丹粧한 것 같더라
I saw the Holy City, the new Jerusalem, coming down out of heaven from God, prepared as a bride beautifully dressed for her husband.
Et ego Joannes vidi sanctam civitatem Jerusalem novam descendentem de cælo a Deo, paratam sicut sponsam ornatam viro suo.
καὶ τὴν πόλιν τὴν ἁγίαν Ἱερουσαλὴμ καινὴν εἶδον καταβαίνουσαν 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 ἀπὸ τοῦ Θεοῦ, ἡτοιμασμένην ὡς νύμφην κεκοσμημένην τῷ ἀνδρὶ αὐτῆς.
주님께서는 아브라함 시대에는 살렘 왕 멜기세덱으로서 예루살렘을 통치하시며 참 제사의 기틀을 놓으셨고 이 땅에 오셨을 때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이어받으신 예수님으로서 예루살렘에서 스스로의 육신을 희생제물로 삼아 참되고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으며 다시 하늘로 오르신 후에는 궁극적인 새 예루살렘의 통치자가 되신다.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로 비유된 것으로 보아서 이는 이 땅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의 참된 신앙의 집합체를 의미하는 것 같다. 1260일 동안 황량한 광야에서 용의 온갖 공격과 짐승을 탄 음녀의 훼방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양육을 받은 여인은 이제 어린 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으로 아름답고 영화롭게 단장하게 된다.
3 내가 들으니 寶座에서 큰 音聲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帳幕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百姓이 되고 하나님은 親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And I heard a loud voice from the throne saying, "Look! God's dwelling place is now among the people, and he will dwell with them. They will be his people, and God himself will be with them and be their God.
Et audivi vocem magnam de throno dicentem : Ecce tabernaculum Dei cum hominibus, et habitabit cum eis. Et ipsi populus ejus erunt, et ipse Deus cum eis erit eorum Deus :
καὶ ἤκουσα φωνῆς μεγάλης ἐκ τοῦ θρόνου λεγούσης Ἰδοὺ ἡ σκηνὴ τοῦ Θεοῦ μετὰ τῶν ἀνθρώπων, καὶ σκηνώσει μετ’ αὐτῶν, καὶ αὐτοὶ λαοὶ αὐτοῦ ἔσονται, καὶ αὐτὸς ὁ Θεὸς μετ’ αὐτῶν ἔσται,
비록 하늘의 성도들이 영화롭게 되었다고는 해도 영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대면할 수 없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인성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당신의 장막으로 삼으셔서 하늘의 성도들을 덮어주심으로써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는 것이다.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死亡이 없고 哀痛하는 것이나 哭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He will wipe every tear from their eyes. There will be no more death' or mourning or crying or pain, for the old order of things has passed away."
et absterget Deus omnem lacrimam ab oculis eorum : et mors ultra non erit, neque luctus, neque clamor, neque dolor erit ultra, quia prima abierunt.
καὶ ἐξαλείψει πᾶν δάκρυον ἐκ τῶν ὀφθαλμῶν αὐτῶν, καὶ ὁ θάνατος οὐκ ἔσται ἔτι, οὔτε πένθος οὔτε κραυγὴ οὔτε πόνος οὐκ ἔσται ἔτι· ὅτι τὰ πρῶτα ἀπῆλθαν.
성도들의 눈물과 죽음과 애통함과 통곡함과 아픈 것은 그저 모든 사람들이 살면서 겪는 희로애락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을 믿는 믿음과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 받은 온갖 고난과 핍박의 산물들이다. 즉 주님과 복음을 위해 죽임과 고문을 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살던 곳에서 쫓겨나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동굴에서 지내며 헐벗고 굶주림을 당함으로써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신앙을 증명해 낸 산물들인 것이다. 성도들은 그런 괴로움들을 그저 무감각함이나 외면함으로 참아낸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통렬한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장렬히 참아낸 것이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복음으로 인해 극심한 고난을 당할 때에는 마치 주님께서 내버려두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당한 그 모든 괴로움을 전부 기억하시고 마지막날에 원수들에게 보복하게 하시며 그들이 흘렸던 모든 눈물들을 친히 닦아주시며 위로하신다. 그런데 이 평안의 위로의 말씀이 과연 오늘날 별다른 눈물이나 사망이나 애통함이나 통곡함이나 아픈 것 없이 너무도 편하게 신앙생활하는 우리에게도 해당이 되는 것일지 잘 모르겠다.
5 寶座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萬物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信實하고 참되니 記錄하라 하시고
He who was seated on the throne said, "I am making everything new!" Then he said, "Write this down, for these words are trustworthy and true."
Et dixit qui sedebat in throno : Ecce nova facio omnia. Et dixit mihi : Scribe, quia hæc verba fidelissima sunt, et vera.
καὶ εἶπεν ὁ καθήμενος ἐπὶ τῷ θρόνῳ Ἰδοὺ καινὰ ποιῶ πάντα. καὶ λέγει Γράψον, ὅτι οὗτοι οἱ λόγοι πιστοὶ καὶ ἀληθινοί εἰσιν.
보좌에 앉으신 분은 영원 전부터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의 지혜이자 말씀이신 본으로서 우주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성도들을 구원하시고 마귀와 귀신들과 악인들을 심판하시며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주체이시다. 주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말씀이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신 것은 그 외의 다른 말씀들은 신실하지도 참되지도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까지 하신 모든 말씀들이 신실하고 참되듯이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것 또한 반드시 이루실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20210824
#신명기 #Deuteronomy 29:18-19
18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19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이방신들을 섬길까 염려한다라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우상숭배를 염려하신다거나 이스라엘이 염려하면서도 우상숭배를 저지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든지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고 신경쓰며 경계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스스로의 심령을 주의깊게 살펴봐서 혹시나 독초와 쑥의 뿌리와도 같은 우상숭배심이 생겨나지 않도록 수시로 근절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지 않고 자기 심령의 우상숭배심을 살펴보지 않거나 살펴보고서도 제거하지 않고 내버려 두게 되면 그의 심령은 독초와 쑥의 뿌리와도 같은 우상숭배심에 점점 장악되어서 자기의 우상숭배를 합리화하기까지 이르게 된다. 그렇게 우상숭배심에 심령이 장악된 백성은 자기들은 여호와의 영원무궁하고 절대불변한 언약에 의해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이정도의 우상숭배로는 그 언약이 철폐되지 않는다고 그럴듯하게 합리화하게 된다.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한다는 것은 물이 풍부하여 비옥한 땅이 여호와의 재앙으로 물이 끊겨서 말라 비틀어진 땅이 되어버린다는 의미와, 오랫동안 술을 마시지 못해 술이 말라버린 알콜중독자가 간만에 술을 마음껏 들이키게 됨으로써 술에 거나하게 취해 환각 속을 걸어다닌다는 의미가 있다. 즉, 자기는 이미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고 완전하게 구원받은 성도라 하면서 이를 빌미로 뻔뻔하게 죄를 저지르는 자들은 오랫동안 죄를 짓지 못해 금단현상을 일으키는 죄악 중독자가 자기 몸과 영혼을 온갖 죄악으로 흠뻑 적셔놓고서도 자기는 심판도 받지 않고 멸망도 당하지 않으며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될 것이라는 환각에 빠져 살아가다가, 처음에 차고 넘치도록 흡족하고 풍족하게 받았던 성령의 신령한 은사와 유익들이 점점 메말라가서 결국에는 성령을 소멸시키고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지자 에스겔 시대에 예루살렘 제사장들은 오직 여호와만을 섬겨야 하는 성전에서 일반 백성들은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곳에 온갖 잡신들을 그려놓고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자기들은 영원히 평안을 누릴 것이라는 환각에 빠져있었었다. 당시 많은 여인들은 하늘의 일월성신을 섬기던 때에는 먹을 것이 풍부하였는데 그것을 그치고나서부터 먹을 것이 부족해졌다고 하면서 우상숭배를 위한 그럴듯한 핑계와 환각에 빠졌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를 대적한 거짓 선지자들은 자기들만의 거짓 예언이라는 환각속에 빠져서 여호와의 예언을 거부하였었다.
어떤 교회는 미증유의 불미스럽고 추악한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원리를 따라 공정하고 투명하게 대처하지 않고 어떻게든 쉬쉬하고 은폐하며 묻어두면서도 이것이 마치 주님의 교회를 위한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으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도 더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실 것이라는 망상과 환각속에 여전히 아직도 빠져있다. 어떤 목사들은 스스럼없이 성범죄를 저지르고 재정을 횡령하며 복음을 가르치지 않고 사익을 위해 교회에서 온갖 전횡을 일삼으면서도 자기들은 주님의 사역을 맡은 신령한 종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로부터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으며 구원과 상급을 받을 것이라는 환각속에 빠져있다. 어떤 교인들은 복음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분별할 능력도 의지도 없이 정부를 대적하는 정치질만 일삼는 거짓 목사를 우상을 섬기면서 그가 인도하는대로 장님처럼 따라다니며 그의 악랄한 정치질에 동원되면서도 스스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한다는 환각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다. 어떤 남자 교인들은 가족을 힘써 부양하지 않고 교회 활동에만 지나치게 전념하면서도 주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한다는 고르반의 환각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다. 어떤 여자 교인들은 집안 살림과 육아를 내팽개치기 위해서 교회를 도피처로 삼아 온갖 교회 활동에 열심을 내는 것이면서도 마치 교회를 위해 가정을 희생하는 것이라 여기는 환각속에 빠져있다. 어떤 젊은 교인들은 자기들의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해서 교회에서는 더이상 자기의 신앙을 위해 그 어떤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없는데다 참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근거를 들어 교회를 떠나서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교회무용론에 기반한 가나안교인이라는 환각속에 빠져있다. 어떤 과학자 교인들은 진화도 하나님의 창조사역이라는 유신진화론이라는 허망한 환각속에 빠져있다. 어떤 학생 교인들은 시험기간에 주일을 한두번 거르는 것은 신앙에 별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환각에 빠져있다.
#20200824
#레위기 #Leviticus 19:19
19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여호와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수많은 식물들과 동물들을 각기 종류대로 지으실 때 같은 종류끼리만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게 하셨다. 식물은 다른 종류끼리 암술과 수술이 만나더라도 꽃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동물은 다른 종류끼리는 교미 자체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과 지나친 호기심은 여호와께서 동식물에 부여하신 생육하고 번성하는 섭리와 질서를 무시하고 이것 저것을 섞어 교배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고대에는 아마도 소나 말처럼 사람에게 유용한 가축들을 다른 종류끼리 교배시키면 더 나은 새끼가 나오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의 욕심과 호기심은 여호와의 지혜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마는데, 그것은 다른 종류끼리 교배시켜서 태어난 새끼는 셍존률이 낮은데다 그다지 유용하지도 않고 생식 기능 자체가 불가하다는 것이다. 말과 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노새가 그렇고 사자와 호랑이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거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류는 과학이라는 명분으로 이런저런 생체실험과 유전자 조작 등을 그치지 않고 있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는 것도 어떻게 해서든 땅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많은 소산을 거두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당시 이방 경작법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육적으로는 이 방식이 한 종자를 뿌리는 것보다 많은 소산을 거둘 수 있을지는 모른다. 또 그런 방식이 효과가 있으니까 이방 족속에서 성행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이 방식을 금지하신 이유는 이방 족속들처럼 이 땅의 것에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말고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여호와를 의지하며 적당한 소득으로 만족하라는 뜻일 것이다. 한 종자만 뿌려도 백성들이 여호와께 순종한다면 그 땅의 소산을 차고 넘치게 거두게 해주신다는 여호와의 약속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이다. 반면에 아무리 이방 족속의 방식대로 두 종자를 섞어 뿌려도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여호와께서는 그 땅을 철과 같이 만드셔서 애굽의 7년 기근처럼 하신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기도로 가르쳐주신 바와 같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사도들이 가르친 바와 같이 빈부귀천 어떤 상황에서도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직조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 문명에서 둘 이상의 재료로 옷을 지어 입는다는 것은 그만큼 매우 고가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돈이 많은 사람은 지나치게 화려한 고가의 옷으로 사치를 할 것이고 돈이 없는 사람은 자기 분수에 맞지 않게 허영을 부릴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사람들끼리는 누가 더 화려하고 비씬 옷을 입었는가로 서로를 판단하게 되는 부작용이 발생하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백성의 무리 안에서는 부자는 입은 옷으로 자기 재력을 과시하지 말고 가난한 자는 허영과 사치를 부리지 말며 부자건 가난한 자건 가진 것으로 판단하지 말 것을 가르치신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부자라고 특별 대우 하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업신여기지 말라고 가르친다.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라는 규례는 여호와의 대제사장이 입을 예복만큼은 예외가 된다. 대제사장의 예복은 온갖 색실과 금실로 휘황찬란하게 지었는데 이는 단지 사람에게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한하신 여호와의 찬란한 영광을 대제사장의 예복으로 상징함으로써 백성들 앞에서 여호와의 영광과 권세 어떠함을 드러내고자 하는데 있는 것이다. 성소의 성막 또한 마찬가지 이유이다.
서로 다른 종류를 섞지 말라는 규례에서 오늘날 신자가 가장 중요하게 적용해야 할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인간의 생각을 섞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류라도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려고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기들의 지적 활동으로 문명과 문화와 과학과 기술 등을 익히고 발전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적지 않은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이 이를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눈으로 바라보고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무신론적인 인류 문명과 과학과 이념 등을 가지고 복음을 바라보고 왜곡하고 변질시킨다는 것이다. 그래놓고도 자기들은 복음대로 믿고 순종한다며 근거없는 정신승리만 하고 있다. 오늘날 가장 심각한 복음 변질은 진화론에 입각한 창조론과 국가 이념에 입각한 복음 해석이 그것들이다. 전자는 주로 기독교인 과학자들에게서 드러나는데 그들은 신앙을 부정하지도 못하고 자기들이 추구해 온 과학적 업적 또한 부정하지 못하므로 어떻게든 둘을 섞어보려고 하는데 그러다보니 과학도 아니고 복음도 아닌 유신진화론이라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괴물을 생육시키고 말았다. 후자는 특히 기독교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진영에서 나타나는데 그들은 소위 자유민주주의라는 것과 자본주의를 성경이 인정한 유일한 이념과 체제라는 얼토당토 않은 주장을 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보수라는 것은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특정 통치체제나 경제체제를 유지하는데 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의 진리보다도 자기들의 이념에 반하는 것들은 전부 악으로 간주하여 배척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민폐스럽고 불법적인 행위도 불사한다. 이런 기독교 보수주의라는 이념에 오염된 한국 교회의 토양에서 전광훈이라는 적그리스도와 그를 추종하는 거짓 선지자들과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아 미혹된 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다보니 한국 교회는 전광훈은 신천지 이만희와 같은 이단 교주라고 명백하고 확실하게 선포하지도 못하고 술에 물탄듯 물에 술탄듯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고 있고 이로 인해 교인들도 그에 대한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