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sgsg.hankyung.com/article/2006021567721
[심층 고전읽기] 밀란 쿤데라 '느림'
"50분마다 한 사람씩 프랑스의 도로 위에서 죽어요.
저 사람들 보세요.
주위에서 차를 굴리고 있는 저 미친 사람들.
저들은 거리에서 어떤 할머니가 털리는 걸 보면 지극히 몸사리는 바로 그들이에요.
한데 어째서 운전석에 앉으면 두려움을 모르게 되는 걸까요?"
1968년 소련의 침공 이후 사회주의 개혁 운동을 주도했다가 조국 체코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밀란 쿤데라의 장편소설 '느림'은 첫 장에서 현대인의 이중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한다.
현대인은 일상적인 위험을 경험하며,그로 인해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운전석에 앉는 순간 일상적인 두려움과 불안을 잊게 된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에게 불안을 안겨줌과 동시에 불안을 극복(?)하는 힘도 선물하였다.
쿤데라의 말에 따른다면, 그것은 '기묘한 결합'이다.
"오토바이 위에 몸을 구부리고 있는 사람은 오직 현재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과거나 미래로부터 단절된 한 조각 시간에 매달린다.
그는 시간의 연속에서 빠져나와 있다.
그는 시간의 바깥에 있다.
달리 말해서 그는 엑스터시 상태에 있다.
그런 상태에서는 자신의 나이,자신의 아내,자신의 아이들,자신의 근심거리 따윌 전혀 알지 못하며,따라서 그는 두려울 게 없다.
두려움의 원천은 미래에 있고,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아무것도 겁날 게 없는 까닭이다.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다.
오토바이 운전자와는 달리 뛰어가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육체 속에 있으며,끊임없이 자신의 물집들,가쁜 호흡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뛰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체중,자신의 나이를 느끼며,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자신과 자기 인생의 시간을 의식한다.
인간이 기계에 속도의 능력을 위임하고 나자 모든 게 변한다.
이때부터 그의 고유한 육체는 관심 밖에 있게 되고 그는 비신체적,비물질적 속도,순수한 속도,속도 그 자체,속도 엑스터시에 몰입한다."
신으로부터 자유를 얻어낸 이후 인간은 스스로의 이성에 발목이 잡혀 더욱 더 합리적으로 살 것을 스스로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처럼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속도감을 얻어낸 현대인은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다.
더 이상 자유로운 개체로서 나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다만 나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더 빠른 노동과 더 빠른 경험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과학 기술은 이성의 산물이며,이성은 인간 행복을 위해 신과의 오랜 투쟁 끝에 인간이 얻어낸 훈장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인간은 본성적 기쁨을 과학 기술의 속도감과 교환하게 된 것일까?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버렸는가? 아,어디에 있는가,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들,이 방앗간 저 방앗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들은? 시골길,초원,숲속의 빈터,자연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는가?"
현대의 기술 과학 문명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쿤데라의 개탄에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게으름뱅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그래서 과학 기술이 발전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인가?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라고 말이다.
쿤데라는 물질 문명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원시적인 삶으로 돌아가자거나 속도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게으름뱅이가 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행복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할 뿐이다.
"한 체코 격언은 그들의 그 고요한 한가로움을 하나의 은유로써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그들은 신의 창(窓)들을 관조하고 있다고.
신의 창들을 관조하는 자는 따분하지 않다.
그는 행복하다.
우리 세계에서 이 한가로움은 빈둥거림으로 변질되었는데,이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빈둥거리는 자는 낙심한 자요,따분해하며,자기에게 결여된 움직임을 끊임없이 찾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쿤데라는 '고요한 한가로움'과 '빈둥거림'을 구분한다.
바쁘게 움직이는 현대인은 하루의 '빈둥거림'을 위해 대부분의 '고요한 한가로움'을 '속도'와 맞바꾸는 어리석음을 행한다.
느긋한 사랑은 퇴물이 되고,관료제와 같은 거대한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작은 모임에서의 오랜 토론은 한낱 능력 없는 사람들의 할 일 없는 회의가 된다.
따라서 현대인의 삶 전반은 속전속결로 변하게 된다.
속전속결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고요한 한가로움'에 대한 피해의식만을 갖게 되며,그 결과 현대인의 삶은 따분하며,불완전하고,그러한 삶에 현대인은 낙심하게 된다.
현대의 소비중심적인 삶 또한 이러한 현대인의 불안한 심리를 잘 반영하고 있다.
지루함과 따분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더 강렬한 소비적 욕망만을 찾아내기에 급급한 것이 현대인의 삶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삶의 연속은 인간의 본성적 행복을 위협하는 요소가 된다.
"너무 열이 차면,묘미가 덜한 법이다.
환락을 쫓아 내닫다가 이에 선행하는 그 모든 감미로움을 흐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느림의 감미로움을 상실케 한 그 서두름.
…그에게 남은 건 오직 한 가지 욕구뿐.
어서 빨리 이 밤을,이 잡친 하룻밤을 잊어버리는 것,이를 지워버리고,말소하고,무화해 버리는 것.
그래서 지금 이 순간 그는 속도에 대한 채울 수 없는 갈증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오토바이에 대한 사랑에 충만해 있으며,이 오토바이 위에서 그는 모든 것을 잊을 것이다.
그 자신마저도 잊어버릴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근대가 출발했다면 쿤데라는 현대인에게 본질적인 물음을 다시 제기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은 서두름에서 오지 않는다.
결과를 염두에 둔 삶은 감미로움을 상실하게 된다.
현대 사회의 성과주의나 학벌주의는 과정이 주는 기쁨보다는 신속한 결과와 효율적인 처리 방식에만 관심을 기울인 삶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가 지속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인간의 정체성마저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는가? 더 이상 인간은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된 것일까? '느림'은 책을 읽어가는 내내 일상적인 책 읽기를 거부한다.
7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51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 소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하나의 스토리 라인을 따라 속도감 있게 읽어가던 기존의 소설 읽기 방식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한 장 한 장,한 구절 한 구절을 읽으면서 내면의 욕망에 귀 기울이고,쿤데라와 그의 등장인물과 소통하지 않는다면 '느림'은 귀찮고 지루한 한 권의 소설책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길 가에 핀 꽃 한 송이를 보듯이,보따리를 이고 가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듯이 읽어간다면,그 속에서 작은 따뜻함을 느낀다면,그것이 곧 우리의 '느림'이고,그것이 곧 '행복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며,우리의 희망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마차 쪽으로 천천히 가는 나의 기사를 좀 더 바라보고 싶다.
그의 걸음걸이의 리듬을 음미해 보고 싶다.
그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의 걸음걸이들은 느려진다.
저 느림 안에서,나는 행복의 어떤 징표를 알아보는 듯하다.
…제발,친구여,행복하게나.
난 행복할 수 있는 자네의 능력에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달려 있다는 막연한 느낌을 갖고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