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솥과 함께한 추억
어릴 적 시골에서의 겨울은 유난히도 깊고 따뜻했다. 아침이면 눈이 소복이 쌓인 마당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그 시절 우리 집의 부엌 한편에는 크고 묵직한 가마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솥이 아니라, 가족의 끼니를 책임
지고, 소중한 추억을 담아낸 도구였다.
겨울철이면 소를 위한 여물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마당 한가운데 작두를 놓고 짚을 썰었다. 우리는
그 곁에서 가마솥에 물을 붓고, 썬 짚과 쌀겨를 넣어 소 죽을 끓였다. 솥뚜껑을 열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부엌 가득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불을 지피면, 타닥타닥 타는 소리가 정겨웠다. 그렇게 배내기 소를 위해 정성껏
끓인 소 죽을 여물통에 담아 주면, 배고픈 소가 고개를 들이밀고 허겁지겁 먹어치우곤 했다.
아궁이 속 불길이 사그라지면, 남은 숯 속에 고구마를 묻어 두었다. 한참을 기다려 꺼내 보면, 뜨끈뜨끈한 김이 올라오며
속은 촉촉하고 달콤했다. 손에 들고 호호 불어 먹던 그 고구마 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가족들은 아궁이 곁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장작불에 손을 녹이며 웃음을 나누었다.
그 시절 아이들은 천자문을 익힐 때 '하늘천 따지 가마솥에 누른밥…'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동네를 뛰어다녔다. 가마솥에서
지은 밥은 유난히 찰지고 구수했다. 밥을 뜨고 나면 솥 바닥에 남은 누룽지를 긁어내어 뜨거운 물을 부어 후룩 마시곤 했다.
그 따뜻한 누룽지 물 한 사발은 겨울 추위를 잊게 해주는 특별한 간식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주방에서 가마솥을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 검고 둥근 가마솥이
남아 있다.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던 연기, 정겨운 가족의 목소리, 그리고 따뜻한 고구마와 누룽지의 맛까지. 가마솥은 단순한
조리도구가 아니라, 그 시절 우리의 삶과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낸 추억의 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