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마트 문학상 수상작★
[나의 어머니]
- 박덕은(낭만대통령)
나의 어머니 고향은 함평이다.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중학교를 목포로 다녔다. 그래서 어머니 집에 하숙을 했다. 외갓집은 전통 있는 선비 집안이었다. 집안의 규율이 엄격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규수로서의 모든 훈련을 다 받았다. 특히 바느질과 재봉질과 한복 짓기는 거의 달인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매우 성실하고 성적이 우수했던 아버지는 일찌감치 장인어른의 눈에 들게 되었고, 이는 결혼에 이르게 해주었다. 아버지는 꿈에도 그리던 양반집 딸을 아내로 얻게 되어 무척이나 행복해 했다. 아버지는 선비 집안의 아리따운 처녀를 화순 골짜기로 데리고 와 신혼살림을 차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 받아 남해안 섬의 초등학교로 가야 했다. 자연스레 어머니는 화순 집에 남아, 밭 3마지기, 논 12마지기 농사를 맡게 되었다.
아버지는 일요일 오후에 남해안 학교로 갔다가 토요일 오후에나 돌아왔기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는 주말 부부로 살아가야 했다. 아버지가 없는 집안 살림은 몽땅 어머니 차지가 되었다. 처녀 때까지 주로 바느질과 재봉틀과만 친했던 어머니는 농삿일이 서툴러 처음에는 힘들어했으나, 점차 익숙하게 되자 머슴 못지 않은 몸놀림 손놀림으로 궂은 일들을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메고 묵묵히 밭일 논일을 해내는 그 모습이 어린 시절의 내 눈에 매우 신비로워 보였다. 어머니는 일할 때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뭔가 생각할 게 있다는 표정으로 오로지 일만 했다.
하지만, 하루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밥을 짓는 동안 연신 노래를 불렀다. 상차림이 끝날 때까지 그 노랫소리는 은은히 밥내음과 함께 어우러져 집안의 분위기를 훈훈하게 해주었다.
엄마의 진가는 반찬 솜씨로 더욱 빛났다. 어쩌면 그리도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 반찬을 준비하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된장찌개의 그 감칠맛은 단연 일품이었다. 김치찌개 솜씨, 부추전, 파전, 두부조림, 특히 미역국은 그 맛이 기가 막혔다.
하루 일과가 거의 끝났을 무렵, 어머니는 재봉틀 앞에 앉아 새 세상을 개척해 나갔다. 어머니의 재봉틀 솜씨와 바느질 솜씨는 동네 아낙네들이 모두 인정할 정도의 달인 수준이었다. 어머니는 동네 아낙네들이 모아다 준 헝겊들로 감탄을 자아낼 만한 창조품들을 선보였다. 어머니가 드르륵 드르륵 몇 번 하면, 상보, 앞치마, 조끼, 웃도리, 치마 등이 척척 완성되어 나왔다. 그것은 우리집 마루에 종류별로 줄줄이 늘어 놓이게 되고, 그것들을 동네 아낙네들이 공짜로 가져갔다. 어머니의 재봉틀 작품들은 우리 동네 집집마다 선물로 주워져 행복한 미소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우리집 농사였다. 우리집 농사는 논에 벼를 심고 거두어 집안 창고에 쌓아둔다. 또 밭 농사에서 거둔 참외, 수박,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도 일단 마당으로 들어와 쌓인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걸 단 하나도 팔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마을 사람들의 간식거리가 되었다. 참외, 수박, 옥수수, 감자는 각기 그 계절의 동네 간식거리였고, 고구마는 큰방 작은방 사랑채의 벽 따라 빙 둘러 저장했다가, 겨울 내내 동치미와 함께 동네사람들의 대화 속에 끼어드는 간식거리가 되어 주었다. 그 덕분에 우리집은 동네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사랑채엔 마을 남정네들이, 안방엔 아낙네들이 각각 차지하고 앉아 밤새도록 웃음보따리를 풀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교사 봉급으로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어서, 농삿물은 모두 동네 사람들에게 골고루 분배하려 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렇게 하고도, 충분히 저축하며 살 수 있다는 인생 철학을 어머니는 가슴에 안고 살아간 듯하다.
지금도 또렷한 기억 중 하나는 어머니의 젖이 너무나 풍부하여, 내 동생들을 먹이고도 남아, 동네 갓난아이들에게도 골고루 나눠 주었다는 것이다. 퉁퉁 불은 어머니의 젓가슴은 젖이 부족한 동네 아낙네들의 부탁으로 어느새 동네 공유물이 되었다. 모유가 부족해 우는 갓난애들은 다들 우리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러고 보니, 우리집은 모유 나눔터가 되어, 동네 미래 청년들의 건강원이 되었던 같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 저기 찾아 보았으나, 어머니의 흔적이 없었다. 작은방에도 사랑채에도 헛간이나 곳간에도 없었다. 밭에서 아직 일하고 있다 보다 하고, 뒤안으로 가서 꽃밭에 물을 주려고 했다. 그 당시 내가 꽃밭에 물 주는 당번을 맡고 있었다. 뜻밖에도 어머니는 거기 있었다. 뒤안 마루에 앉아 뭔가를 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도 어머니는 미소만 지을 뿐 하던 일에만 열중했다. 조롱박이었다. 8자 모양의 조롱박, 그 볼록한 부분을 빼빠로 문지르고 있었다. 빤질빤질한 조롱박의 겉부분이 밀려나면, 거기엔 하얗고 보드라운 면이 드러났다. 어느 정도 작업이 끝난 뒤에, 어머니는 그 동그라미 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달밤도 그리고, 그네도 그리고, 나팔꽃도 그리고, 채송화도 그렸고, 벌나비도 그렸다. 그 모습이 참으로 이쁘고 멋스러워 보였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서울에 무역업을 하고 있는 남동생 사무실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서 신기한 정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남동생이 조롱박 한가운데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깜짝 놀란 내가 물었다.
"너 혹시 엄마가 조롱박에 그림 그리는 걸 본 적 있니?"
"아니!"
"엄마가 조롱박에 그림 그리는 걸 본 적 없다구?"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그럼, 무슨 이유로 이렇게?"
"아, 이거? 어느 단골 손님이 내게 조롱박을 선물해 줬는데, 오늘 한가한 김에 여기에 그림 그려 보고 싶었어. 그런데, 왜?"
나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가 조롱박에 그림 그리던 그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올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머니의 노후는 당뇨병과 그 합병증 때문에, 병석에 누워 지내야만 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늘 당당했다. 아버지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늘 카랑카랑했다.
"내 몸 좀 일으켜 봐."
"살살 일으켜, 내 몸이 짐짝이야?"
"콩나물은 정성껏 다듬어야 해."
"아니, 콩나물 끓일 땐 김이 폭폭 날 때까지 뚜껑을 열지 마. 그래야 비린내가 안 나."
"참기름은 조금만 쳐. 너무 많이 치면 느끼하니까."
"미역을 먼저 볶아야 해. 그래야 제 맛이 나."
지금도 어머니의 목소리가 선명히 귀에 남아 있다. 뭐를 해도 선녀처럼 당당했던 어머니. 그립다.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이면, 더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