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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종교 개혁(Reformation, 1517년)
왕위지상권
1533년 9월 앤이 공주 엘리자베스를 낳았으며, 1534년에는 왕위지상권(Royal Supremacy, 흔히 수장령이라고 잘못 말한다.)이 잉글랜드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왕위지상권은 잉글랜드 종교개혁이 루터사상의 영향에 따라 진행되었음을 말해준다. 국가권력을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신성한 것으로 이해한 루터의 영향이 잉글랜드 교회가 왕위지상권으로써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왕위지상권은 "신앙상의 권위 또는 잉글랜드 성공회 교구가 개혁 또는 수정을 시도할 경우, 그 과오, 이단, 죄악을 검열하고 개혁과 수정을 가하여 근절한다"는 권리가 왕권에 있다는 선언이며, 민주주의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교회가 세속 정치권력을 갖고 있거나 정치인들과 곁탁한 당시 유럽교회에서 왕위지상권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으므로, 민주주의에 익숙한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를 비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수도원 해산
1536년에는 부패의 온상이던 수도원을 해산시키는 수도원 해산법을 통과시킴으로써 6세기이후 로마교회의 지배를 받던 잉글랜드 성공회는 로마교회에서 독립하였다.이에 교황청은 격노하여 헨리 8세를 비롯해 앤 볼린, 크랜머 등을 파문하였다.
왕위계승법
앤의 두 번째 임신과 더불어서 왕위 계승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누구든지 왕자를 낳으면 계승권을 가지고 그 다음으로는 메리,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엘리자베스라고 명기하였다.
1536년 앤이 두 번째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헨리 8세는 간통죄를 적용해서 처형시키고 그의 눈길은 세 번째 여인인 제인 시무어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낳고서 죽고 만다. 그 후 헨리 8세는 클리브즈의 앤과 결혼하였으나 이혼한다.
그러자 보수파에서 캐서린 하워즈를 왕비로 내세우면서 로마 가톨릭 6개 조항을 발표시켰다. 그러나 보수파도 얼마가지 못하여 헨리 8세는 캐서린 하워즈를 간통 혐의로 처형하고서 마지막이자 여섯 번째 부인인 캐서린 파아와 결혼하였다. 1547년 헨리 8세가 죽음으로써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오른다.
중도노선
헨리 8세는 6번을 결혼하면서 각 권력의 암투에 휘말리면서 개혁보다는 권력 유지에 부심했다. 즉 개혁을 향한 의지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해서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래서 영국 성공회는 신앙적 극단을 피하는 중용(Via Media)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지금도 성공회는 신앙적 극단을 피하는 중용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에드워드 6세
1596년판 성공회 기도서
개신교 노선의 종교개혁
에드워드 6세는 너무도 어린 나이인 10세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히 외척이 힘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삼촌이었던 헤르포드의 백작은 섭정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서머셋 공작으로 승진 하여서 국가의 총사령관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실권을 장악한 서머셋은 프로테스탄트 추종자였다. 따라서 잉글랜드 성공회는 프로테스탄트 사상에 따라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진행하였는데, 당시 개혁방향은 다음과 같다.
로마 가톨릭 6개 조항을 파기시킴과 더불어서 로마 가톨릭과 관련된 모든 법을 파기했다.
국회는 성만찬 집전시 보혈과 성체(聖體)의 분배를 허용하였으며, 성직자의 결혼을 금하는 법령을 무효화 시켰다.
에드워드 제1기도서가 작성되었다.
금서로 지정되어 있던 영문성서의 출판과 판매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에드워드 제2기도서가 마련되었다.
잉글랜드 성공회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42개 조항이 발표되었다. 이 헌장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절에 영국 성공회 39개조 신조로 대체되기는 하였으나, 영국 성공회의 근본적인 신앙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헌금법을 발동하여서 교황청으로 가던 모든 헌금을 국왕의 수입으로 돌려 놓았다.
유럽 종교개혁자들의 영향
이상과 같은 변화가 영국에서 일어나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탄압을 피해 유럽으로 피난 갔던 개혁추진파들이 급거 귀국하였으며 동시에 유럽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영국으로 망명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대륙으로 피난하였던 사람들이 새로운 학문과 개혁적 전통을 영국 교회에 소개하기 시작함으로써 영국의 대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메리 1세의 반동
토마스 크랜머
에드워드 6세의 사망은 영국의 왕위 계승 문제를 야기했다. 일부의 귀족들이 독실한 성공회 신자인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왕으로 올렸으나 영국인들의 민심은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 메리에게 있었기에 제인은 9일 만에 왕위에서 쫓겨났다. 왕위에 오른 메리는 수 많은 귀족 및 성직자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영국의 로마 가톨릭화를 재추진하였고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 때 제정된 법령을 상당 수 번복하였다. 또한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은 적법한 것이었으며, 메리 자신은 적법한 왕위 계승자라고 선포하였다.
메리는 에드워드의 6세의 모든 신앙적 법안을 폐기시켰고, 헨리 8세 시절의 반-교황적인 법을 무효화했으며 성공회의 감사성찬례가 아닌 로마 가톨릭 미사를 다시금 실시하게 했다.
메리가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와 결혼함으로써 잉글랜드를 떠난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들이 속속 복귀하였으며, 교황청 사절이 공식적으로 다시 파견되었다. 교황청 사절은 순종법을 발동시킴과 동시에 이단 규제법도 발동시켰다. 이때부터 개신교 신자와 성공회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메리 1세는 피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과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 휴 래티머 주교 등의 성공회 성직자들을 처형하였다. 역사학자 앙드레 모로아의 《영국사》에 따르면, 휴 래티머 주교는 순교를 앞두고 "오늘 영국은 하느님의 빛, 영원히 꺼지지 않을 영원한 빛으로 밝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는 성공회 전례와 성사의 기준인 성공회 기도서를 1549년 작성한개혁자였다. 그는 휴 래티머 대주교가 순교한 뒤에 순교하였는데, 정부의 공작에 의해 한때 성공회 신앙을 버렸다. 하지만 자신의 비겁함을 부끄럽게 여기고 신앙을 버리지 않았음을 공언하였으며, 화형으로 순교하였다. 순교 당시 크랜머 대주교는 신앙철회서에 서명한 자신의 오른손을 불태웠다.
엘리자베스 1세의 수습
엘리자베스 1세
중도노선
엘리자베스 1세(1559년- 1603년)의 즉위 이전부터 영국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개신교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1559년 1월 15일 대관식을 거행하고서 왕위에 올랐다. 엘리자베스1세는 매우 지혜로운 여왕이었다. 그녀는 1603년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영국 성공회를 프로테스탄트쪽으로 이끌어 갔으나 어느 한 쪽으로도 과도하게 흐르지 않았다. 종교 개혁 이후의 대립을 막기 위해 엘리자베스 1세는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간의 극단을 피하는 중용노선(Via Media)을 걷기 시작했다.
청교도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이에 불만을 가졌는데, 이들을 청교도라고 한다. 청교도들은 장 칼뱅의 개혁 사상을 따르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잉글랜드 성공회의 로마 가톨릭 잔재들을 청산하기를 바랐으며, 청아에서 만든 역사책인 영국사에 따르면 성공회 교회 안에서 활동한 청교도들과 성공회 교회 밖에서 활동한 청교도들이 있었다.
통일법
엘리자베스 1세는 여러 번의 반대를 물리치고서 4월 29일 여왕의 영국 교회 지존법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해서 모든 성직은 여왕에 종속되었다. 이 권한을 바탕으로 영국 교회 통일법을 통과시켜, 사제나 주교등의 영국 성공회 성직자들의 예복과 교회의 장식을 비롯한 모든 것을 통일시켰다.
칼뱅주의 사상의 영향
엘리자베스 1세는 1563년 두 번째 의회 소집으로써 제2차 통일령을 통과시켰는데 이번에는 훨씬 더 개혁을 강하게 추진하였으며, 많은 점에서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는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1556년 매슈 파커 캔터베리 대주교에 의해, 에드워드 6세의 42개 조항을 영국 성공회 39개조 신조로 개정하였는데,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받아서 로마 가톨릭의 교리에 대해서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분열
그러나 1563년 두 번째 의회는 영국 성공회의 통일법을 놓고 분열을 초래하였으며, 통일법에 저항한 청교도 측의 패배로 끝났다. 교황청은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시켰으며 여기에 맞선 엘리자베스 1세는 반 교황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1585년 예수회 사람들을 영국에서 강제로 추방하였다.
중도노선
엘리자베스 1세는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무찌름으로써 교황권과 로마 가톨릭주의로부터 영국을 보호하였으며, 동시에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써 화려한 대영제국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 종교 개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실천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종교분쟁을 해결하고자 노력한 지혜로운 정책이었다고 생각된다.
급진 개혁
종교개혁은 루터회, 장로회, 그리고 성공회로 대변되는 3대 보수적 개혁과 재세례파, 성령주의파, 그리고 반 삼위일체파로 이어지는 3대 급진적 종교개혁이 있다. 후자에 속하는 종교개혁을 흔히 과격파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전자가 이룬 개혁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지며, 성서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 뿐만 아니라 보수파들에게도 배척을 받았다. 그래서 이들은 한시적인 운동에 불과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온건한 보수파들에게서 볼 수 없는 신선함이 있었고, 이들은 집단적인 공동체를 거점으로 해서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운동이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재세례파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개혁의 분파를 지칭하며, 유아세례를 받은 이는 재세례를 통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교회와 국가 사이에 상호 긴장 관계 수립, 정치 참여 금지 등을 설교하여 국가를 신뢰하지 않았다.
재세례파의 주요 분파는 다음과 같다.
스위스 형제단
재세례파의 활동의 시작은 스위스로부터 일어났다. 콘라도 그레벨은 츠빙글리의 개혁안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형제단을 조직하여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그들은 예배와 신학과 교회 행정에서는 초대교회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라는 용어를 배제하고 공동체라는 용어로 대체하였고, 찬송가도 성서적 근거가 없다고 반대하였다. 이들은 유아세례의 반대, 세속적인 직업 거부, 정치 참여 금지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다보니 로마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회 그리고 스위스의 개혁교회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들은 모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비폭력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죄 회개,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그리고 거듭난 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했다.
뮌스터의 은거자들
멜키오프 호프만은 본래 루터교회에 입문했다가 츠빙글리를 거쳐 재세례파로 옮겼다. 그는 초대교회의 영지주위에 가까운 이론을 가르쳤다.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론과 묵시적인 종말론을 가르쳤다. 그리고 예수는 스트라스부르에 재림해서 새 예루살렘을 건설한다고 하였다. 이런 소문이 네덜란드까지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 당국은 멜기호프를 감금하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리고 그를 처형하자 이제는 장소를 뮌스터로 옮겨서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설교하였다. 이렇게 전개되자 도시 밖의 재세례파들을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도시 내의 재세례파 종말론자는 로마 가톨릭 전통의 모든 유산들을 파괴하고 소각하고 도시 내의 비 재세례파 사람들을 축출하였다. 급기야는 전쟁으로 번져서 남자들의 죽음으로 일부다처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불만을 품은 내부 반동자들이 교황청에서 파견한 군대와 내통하고서 성문을 열어 주었으며, 결국 그들은 무참히 살해되어 갔다.
메노나이트
메노 시몬스는 네덜란드 출신의 로마 가톨릭 사제로 일하다가 재세례파에 가담한 사람으로서 『기독교 교리의 기초』라는 일종의 변증서를 저술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과격파가 부르짖었던 칼(폭력), 일부다처제도 등을 반대하면서 재세례파의 새로운 신학을 정립하였다. 뒤에 메노 시몬스의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을 메노나이트(영어: Mennonite) 즉, 메노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스위스형제단과 관점이 유사하며 원하는 자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교인들의 성서 중심적인 훈련을 강조하였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며, 비신자와는 결별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도록 했고 공직을 거부하게 했다. 특히 그리스도의 사랑과 고행을 실천하는 길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위해서 부름을 받았으므로, 폭력이외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기독교 평화주의에 근거, 전쟁과 폭력에 반대했다. 그래서 메노나이트는 병역을 사회봉사로 대신하는 양심적 병역거부로 평화주의를 실천해오고 있다. 유아세례를 반대함으로써 재세례 금지법을 어겼으며,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교회와 세상을 분리했다. 메노나이트에서 자의적인 세례를 통해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오해이다. 교회역사속의 메노나이트는 인간의 공로가 아닌 믿음을 강조했으며, 세례를 베푼 것도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유아세례에 반대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성령주의자
아시시의 성(聖) 프란체스코로부터 종교 개혁이 한창 무르익을 때까지 개인적인 영적생활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교권적인 기도문에 의한 형식적인 기도보다는 하느님과의 직접적으로 영적인 교제를 바람으로써 자연적으로 반(反) 교회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종교 개혁의 대원리인 성서와 은총과 믿음을 거부하고서 대중 속에 파고들어서 조용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신령주의자가 토마스 뮌처이다. 토마스 뮌처는 루터의 오직 성서(라틴어: Sola Scriptura)를 비판하며, 그리스도인이 직접 성령을 경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면,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직접 경험하면 충분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 토마스 뮌처의 견해였다.
이들은 성서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에서 얻은 영감 즉, 주관적 종교경험을 더욱 권위 있는 것으로 보면서 기록된 성서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오직 각 개인이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는 주관적 종교경험을 가장 가치 있게 보았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므로 삼위일체와 성육신을 부인하는 쪽으로 흐르기 쉽다. 어떤 면에서는 이들은 합리주의적인 면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로서 캐스타슈벵크펠트(1489년-1561년), 세바스티안 프랑크(1499년-1542년), 후안 데 발데스(1490년-1541년)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체계적인 교권을 부인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신비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내면적인 영적인 교제는 언제나 가장 합리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었으므로 어떠한 면에서는 이들이 19세기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자유주의 신학의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다.
반삼위일체파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겠다고 처음부터 부르짖은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면에서 루터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와 예전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시행되고 있는 면을 바로잡자고 외쳤을 뿐이다. 그런데 루터로부터 시작된 개혁의 바람을 타고서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기본 교리를 부인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탈리아와 에스파냐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유럽의 자유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폴란드, 모라비아 지역으로 도피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를 거쳐서 영국으로까지 퍼졌으며,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미국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이들의 신학적인 이론은 "라코비안 요리문답"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들의 신학적 구조는 속죄론에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속죄설을 부인하는 틀 안에서 삼위일체를 부인한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의 대속적인 희생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을 반대하고, 예수가 도덕적인 스승으로 뛰어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신적인 능력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는 도덕적 스승으로서의 예수의 삶의 모범을 따라서 거룩한 생활을 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배제하였기 때문에 삼위일체론자가 아니라 일위일체론자였다. 흔히 유니테리언이라고 부른다.
반삼위일체론자들은 인격적으로 매우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높은 학식과 지식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도덕적으로 칭찬 받을 만하였다. 이런 도덕적인 윤리관 덕택에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이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전락시켜 초대교회의 에비온주의와 비슷한 면이 있다는 비판도 있다. 여기서 에비온주의는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며, 하느님께서 그를 양자로 삼음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본 고대교회의 이단종파를 뜻한다.
개혁 반대파, 천주교회의 대응(반종교 개혁)
서방교회 개혁 반대파인 교황청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잃어버린 권위를 회복해야만 했다. 이러한 절대적인 필요성에서 기존 서방교회의 신학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하여 개혁찬성파와 다른 방법으로 16세기 이전의 서방교회와 다른 서방교회의 방향을 설정하고자 하였다. 긍적으로는 16세기 이전의 서방교회의 틀을 종교개혁 찬성파와 다른 방법으로 구축하고, 현재의 천주교회의 틀을 구성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새롭게 조직된 예수회라는 종단의 창설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신학 이론과 교리적 변화, 일부 제도 변경 이외에 실제적인 쇄신 운동은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시도에 그쳤다. 그것은 개혁 찬성파를 추방하고 그들과 분리를 이룬 이후이기에, 교황청 안에서 실천적 개혁을 주도할 중심 세력도 잃었고, 주도권을 지닌 교황이 교회 문제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세속 문제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오스만 제국 등 이슬람 세력의 유럽 침공에 반격하기 위해 십자군을 조직해야 했고 유럽 각 나라들의 정치적 분쟁에 일일이 개입하여 중재해야만 했다.
게다가 교황중심주의자들의 개혁 찬성파(개신교도) 살해와 공격을 복수하기 위해 1572년에 신성로마제국의 개혁 찬성파 용병들이 교황령에 쳐들어 와 로마를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의 일로 교황청도 그에 따라 종교개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오히려 태도가 강경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천주교회는 자유주의가 절정에 이르렀던 1869년-1870년의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더욱 더 보호망을 강하게 하였다. 개신교회가 가톨릭교회의 종교개혁 찬성가들인 종교개혁자들의 살해와 약탈을 용서하고, 동방정교회가 교황청이 주도한 십자군이 정교회 사제 살해와 약탈을 용서한 이후인 1962년-1965년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보호막을 벗어 버리고 개방을 허락함으로써 비로소 종교 개혁에 도전장을 던졌다고 말할 수 있다.
천주교회의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막식에서 참관인으로 참석한 개신교회와 동방정교회의 종교자들에게 천주교회가 기독교 분열의 책임을 함께 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
1545년 12월 13일에 교회 개혁을 수행하려는 강한 의지를 지닌 교황 바오로 3세의 주최 아래 트리엔트에서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18년 동안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는 세 시기 즉, 교황 바오로 3세 치세에 속하는 제1기(1545년-1547년), 교황 율리오 3세가 속개한 제2기(1551년-1552년), 교황 비오 4세 치세 때 열린 제3기(1562년-1563년)로 구분된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목적은 개혁찬성파, 즉 개신교가 점차적으로 강성해 가는 것과 교회 내부의 부패상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주교들의 태만으로부터 야기되었다고 밝히며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교회의 증가하는 부패는 영적 이상의 상실, 교리 문제에 관한 신학적인 불명확성, 그리고 교황청의 타락에 그 원인이 있었다. 따라서 회의에서 교회 개혁에 관한 중요 안건으로는 교회의 무능, 성직자 중임제, 그리고 감독 소홀 등이었다. 교리 문제에서는 불가타판 성서를 정경으로 재확인하였다.
그런데 1552년 1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주선으로 회의장에 도착한 개혁찬성파인 개신교측 사절들은 새로운 공의회 소집, 이미 결의된 신앙 교리의 취소, 교황 수위권 거부, 공의회 우위사상의 인정과 같은 요구사항을 내놓았다. 게다가 루터교회를 신봉하는 독일인 기사들이 갑자기 회의장 안으로 난입해 난동을 일으키자 교황은 공의회를 서둘러 중단하였고 더 이상 천주교회와 개신교의 대화는 있을 수 없게 되었으며 기독교 세계의 분열만 두드러졌다.
결국 트리엔트 공의회는 서방교회의 통합이 아니라 서방교회의 분리를 결정 내렸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개신교를 이단으로 규정짓고 예수회를 앞세워 개신교를 수백년 간 가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예수회의 창설
영성가 로욜라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피레네 산맥에 접한 로욜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문의 출세와 명예를 위하여 일찍부터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해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하고나서 그는 성서와 여러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영적 지도자로서의 꿈을 키웠다. 그리고 영성 훈련과 은둔 생활, 고행, 대학에서의 공부, 신학 공부를 하였다.
수도회
1541년 4월 14일 예수회는 로욜라를 공식적인 대표자로 선출하고 4월 22일 새로운 수도회로 출발하였다. 예수회의 창설 목적은 분명했다. 헌장에서 밝히는 대로 종교 개혁으로 인해서 실추된 교황의 절대권 회복을 위해서 싸우는 군대 교단이 될 것과 해양 개척으로 인해서 발견된 신대륙에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을 전하는 선교 집단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붙인다면 학문을 발달시킴으로서 선교의 사명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군대적인 절대 복종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지혜로운 선교방식
예수회는 신앙의 토착화라는 새로운 선교 방법을 개발하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 지방의 관습과 생활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고, 원주민들과 의식주를 함께하면서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올바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언어로 교리서를 번역하거나 저술하였다.예수회의 토착화 선교는 선교지역의 전통을 존중함으로써 원주민들의 반발을 줄이는 방향으로 전도하였다
종교재판
한때 중세 유럽에 유행했었던 종교재판을 16세기에 자신들의 전제적 통치에 일대 위협을 느낀 교황청이 강경일로로 돌아서서 개신교 박멸의 수단으로 부활시켰다. 용의자로 지목되기만 하면 교황청에서 파견된 심문관의 철저한 고문으로 강요한 고백이 강요된 후 정죄되면 세속 정권에 의하여 형이 집행되었다. 재산 몰수, 투옥, 유배 및 사형 등의 형이 내려졌다. 교황 바오로 4세의 영도 아래 소위 '거룩한 이단심문소(Sanctum Officium Sanctissimae)'라 불리는 악명 높은 신앙교리성성이 모든 나라들의 종교재판 중심기관으로 설립되어 수많은 이단심문관들을 양성하여 전 유럽의 개신교 탄압의 기수로 삼았다.
이러한 종교재판의 폐습은 소위 개혁교회조차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논란의 여지가 없잖아 있지만, 쟝 칼뱅이 정적인 미카엘 세베르투스를 처형하는데 요긴한 도구로 쓰였으며, 재세례파를 비롯한 소수파를 박멸하기 위하여 종교재판이 열렸다. 이러한 종교재판의 악습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떠나간 아메리카의 식민지에서도 반복되었다.
기독교 교파들
종교 개혁가들의 신학 운동의 결과로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 비칼케돈파인 오리엔트 정교회와 개신교로 불리는 루터교, 침례교, 성공회, 개혁교회(장로회) 등의 교파로 태동되었다.
평가
종교개혁은 서방 유럽의 중세를 벗어나는 분수령이었다. 단순하게 부패한 서방 교회의 개혁에만 그치지 않았다. 유럽의 역사, 문화와 문명을 온통 뒤바꿔 버린 분기점이었다. 유럽의 각 나라들이 왕권과 이해관계에 결탁한 교황청의 제국주의적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얻었으며, 예술에서도 인문주의와 더불어서 신앙적인 주제를 떠나서 인간과 이성을 중심으로 삼았으며, 과학에서도 신앙적인 면에서 벗어나서 합리적인 요구를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종교 개혁은 각 나라의 경제적 자립을 확보해 줌으로서 교황청의 재정적 압박과 더불어서 정치적 권위를 상실케 하였다.
1517년 10월 31일을 계기로 일어난 유럽의 종교개혁 운동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일들 중 하나다. 이러한 운동은 긍정적 시각에서 보는 이들도 있는 반면, 부정적 시각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 중에서도 위클리프, 틴데일, 후스를 위시하여 교황청의 권위에 대한 신학적 도전은 중세 기독교의 기초에 균열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신비주의 개혁자들의 집단적 운동은 점차 하나의 범시민 운동으로 번져서 교황청의 단일 체제에 커다란 위협을 주었다. 거기에다 교회의 위신은 교황청의 분열로 이어져 땅에 떨어졌으며, 교황청의 지나친 과세는 일반 시민들의 원망을 자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부조리는 16세기 유럽 대륙 중에서 독일의 경우가 제일 심했다. 또한 독일은 연방제이므로 교황의 세력이 왕권을 통하여 직접 미치기가 힘들었으며, 르네상스를 통한 인문주의의 영향이 지성인들 사이에 컸기 때문에 어느 곳보다도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종교개혁의 최고의 선물은 성경의 권위의 회복과 믿음으로 칭의를 얻게된 것이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예수, 오직 성경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오늘날 루터의 개혁운동을 보다 폭넓은 동기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루터 개인의 입장에서는 종교적 관심에서 출발했던 교회 개혁 운동으로만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스위스에는 츠빙글리와 칼뱅에 의해서 종교 개혁이 더욱더 완성되었다. 종교 개혁은 여러나라에서 종교와 정치, 사회와 문화, 그리고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종교 개혁의 진정한 교훈은 지상의 어떤 교회도 완전하지 않으며 만일 교리와 삶이 부패되었다면 언제나 오직 성경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표현이 바로 개혁되는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est reformand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