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일으키는 힘
부스스 눈을 뜬 일요일 아침, 어머니가 서랍 속 옷가지들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자는 척하며 어머니를 지켜보면서도 왜 그랬는지 어머니를 붙잡을 수 없었다. 돌아올 거라 믿었던 어머니는 그렇게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 세 자매는 아빠와 남겨졌다. 막내는 초등학교 4학년, 나는 6학년, 언니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어머니가 떠난 빈 부엌에서 아버지가 어린 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요리라곤 콩나물국 과 김국뿐이었다. 등굣길, 동네 슈퍼에서 작은 참치 통조림 하나와 양반김을 도시락 반 찬으로 매일 사 갔다. 친구들은 나를 양반김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점심시간이면 친구의 어머니가 싸 준, 말갛게 씻은 빨간 방울토마토가 눈에 어른거렸 다. 단란해 보이는 친구들의 가정이 사무치게 부러웠다. 나의 어린 시절은 꽃피울 때인 지도 모르는 봄 같았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점에서 일했다. 우리가 하교하는 오후에 출근했다가 담배와 술 냄새에 흠뻑 전 채 다음 날 새벽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자신보다 나이 어린 손님들이 주는 술을 받아 마시며, 홀로 사춘기 세 딸을 키워야 했다. 아버지는 열심히 일했지만 우리는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인 집을 벗어나지 못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수학책을 풀며 혼자 끙끙대다 눈치 없이 과외를 시켜 달라 고 했다. 아버지는 어려운 형편에 대해 내게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서울 종로에 서 경양식집을 하는 동창 아주머니를 통해 서울 대학교에 다니는 과외 선생님을 구해 주었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 반지하 우리 집에 선생님이 찾아왔다. 과외를 하다가 쥐를 본 선생 님은 태연한 체했으나 나의 귀는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부끄러움은 잠시였다. 날 믿고 지원해 준 아버지를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해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 졸 업 후 나도 가족들도 간절히 바랐던 윤리 교사의 꿈을 이뤘다. 학교에서 나의 봄처럼 서글픈 꽃을 피워 내는 아이들을 만났다. 나의 상처가 누군가의 뾰족한 마음을 둥글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누군가를 이해하고 품을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많지 않은 월급이지만 착실히 적금을 부으며 희망을 쌓아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어렴 풋이 알고 있던 아버지의 빚과 직면했다. 우리를 키우며 뒷바라지한 비용이 모두 빚으 로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빚이 얼마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아버지는 이제 빚을 갚을 능력이 없으며, 남은 채무를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마치고 컴컴한 밤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만기된 적금으로 빚 2 천만 원을 갚은 날이었다. 학교에서 아등바등 버텨 온 이삼 년의 노력마저 순식간에 사 라진 듯했다. 나와 동생은 이후로도 꽤 오랜 시간 빚을 갚아야 했다. 아버지가 이곳저곳 손 벌리며 우리를 키워 낸 돈이니 도로 갚는 것이라 생각하며 공허한 마음을 채웠다. 60대 중반에 치매 진단을 받은 아버지는 돈도 없는 지갑을 누가 훔쳐간다며 숨기고는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는 기본적인 의식주를 혼자 힘으로 해 결할 수 없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치매 약을 복용하기 시작하며 기록한 아버지의 일기 속에는 사랑하는 딸들을 위해 자 신의 병을 꼭 극복해야 한다는 다짐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치매는 아버지의 그 간절한 다짐을 꺾어 버렸다. 딸들을 보는 아버지는 참 슬프게도 웃는다. 아버지를 간병하는 것이 육체적으로나 정신 적으로 한계에 부딪힐 때도 있다. 하지만 가진 것 하나 없는 아버지가 고단한 삶을 감내 하며 우리를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우리 세 자매는 살 수 없었다.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애면글면 딸들 의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아버지는 기억을 잃었어도, 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긴 기억들 이 우리를 붙들어 다시 일으킨다. 우리도 아버지의 곁을 끝까지 지킬 것이다. 서로의 작은 손을 꼭 붙잡고.
박순영 | 서울시 영등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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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안녕하세요
동트는 새벽 님 !
고운 걸음으로
다녀가신 흔적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오곡이 익어가는
결실의 계절
보람과 기쁨이 늘
함께하는 행복한
연휴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