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있었던 일을 쓴다
친한 지인을 만나고 오는 길
횡단보도 앞에서 두 노인이 다투는 걸 보았다
자세히 보니 진짜 미워서 다투는 게 아니라
사랑싸움을 하는 것 같다
할아버지는 마트에서 사 온 물건을
다 자신이 혼자 들고 가시겠다 하시고
할머니는 괜찮으니까
달걀은 할머니가 들고 가시겠다고 하시는데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힘들까 봐 걱정이 돼서인 지
고집을 꺽지 않으셨다
아무래도 계속 싸우실 것 같아
할아버지 제가 댁까지 달걀 들어다 드릴까요?
했더니 처음에는 괜찮다고 하시더니
새댁이 정말 들어주실라우? 하신다
어! 저, 헌 댁인데요...중년이에요, 했더니
내 나이에 비해선 새댁이지, 하신다
그렇다고 내가 헌 댁이라고 부를 순 없잖우
이왕이면 듣기 좋은 말로 해야 하지 않겠수?
보통 배달 시키는데
오늘은 물건을 많이 사지 않아
그냥 들고 가는 거라 한다
내가 보기에도 물건이 많지는 않았는데
서로 힘들까 봐 그러는 것 같다
이왕 들어주는 거
달걀과 다른 물건까지 다 들고 오는데
제법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느라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생각보다 지대가 높아서 진짜 힘들었다
운동부족인가? 숨이 차고 꽤 힘이 들어
비척 비척대다 할아버지 집에 도착했다
우리 집 같았으면 편하게 퍼질러 앉았을 텐데...
남의 집이라 힘든데 내색할 수도 없고
땀을 닦으며 물건을 내려놓고
인사를 하고 가려는데 할아버지께서
여기까지 힘들게 오셨는데
식혜라도 한 잔 하고 가라며 붙잡는다
괜찮다고 하는데도 계속 붙잡아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어
예의상 식혜를 한 잔 마시면서 집안을 둘러보니
곳곳에 그림들이 보인다
동양화와 서양화도 보이고 멋진 병풍도 보인다
이탈리아의 나폴리에서
직접 그렸다고 하신 그림은
노란색과 주황색이 주는 밝은 색채감으로
기분을 업시켜 줄 만큼 생동감이 있었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직접 붓글씨로 쓴
명언과 자작시였는데 아주 감각적이고
잘 다듬어진 조각품처럼 완성도가 높아 보였다
음료수 잔과 찻 잔 하나에도
주인의 정성과 기품이 느껴지고
모든 물건 하나하나가 마치 사람처럼
주인의 관리와 사랑을 받고 있는 느낌이 들어
따뜻함이 느껴졌다
노인들 특유의 자질구레한 짐은 찾아볼 수 없고
흡사 미술관에 온 것처럼 군더더기 하나 없이
모든 물건들이 먼지 하나 없이 윤기가 나고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어 감탄을 자아 나게 했다
젊은 사람도
저렇게 깔끔하게 해 놓고 살기 쉽지 않은데...
더 놀라운 것은 두 분의 나이였다
많이 드셔 봤자 70대 중반쯤일 걸로 예상했는데
두 분의 나이는 놀랍게도
90대 후반이라고 하신다
치아도 틀니가 아니라고 하신다
할아버지는 취미 삼아 직접 그림도 그리고
글씨도 쓰시고, 노래도 하시고
기타도 연주하시고, 재능 기부도 하시고
운동도 열심히 하신다고 한다
할아버지
집안이 미술관처럼 정말 깨끗하고 멋져요
라고 말하니
아니, 할아버지가 뭐예요?
오빠라고 불러주면 안 될까요?
아이고! 제가 어떻게 건방지게...했더니
그냥 웃자고 한 말이랍니다
너무 당황해하시니 내가 오히려 미안하네요
새댁
우리는 매일매일 무엇을 버릴까, 연구하면서
사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 되어버렸답니다
우리는 버리는 재미로 살아요
언제 죽을지 몰라서
죽은 다음에도 유품 처리하는 것 때문에
자식들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면서
늘 버리고 또 버리며 깔끔하게 사시려고
노력하신단다
더 웃긴 건 어느 날 갑자기 죽을지 몰라
혹시 죽은 다음에 자식들이 볼까 봐 핸드폰에도
야동이나 야한 사진이나 야한 글은
절대로 저장해 놓지 않는다는
할아버지의 솔직한 말씀에
빵 터져서 웃고 있는데
할머니께서 눈을 흘기며 주책바가지처럼
왜? 그런 말을 처음 본 사람
그것도 여성분한테 하냐며 면박을 준다
사실 좀 당황스러웠다
할아버지는 결례를 했다면 미안하다고
바로 사과하셨다
할아버지는 정리하는 습관이
마음을 참 편하게 해 주신다고 하시며
불필요한 물건들은 이웃들에게
나눠주신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혹시 갖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보신다
두 분의 건강한 삶의 비결이
'버리는 훈련' 이라는 말에
정말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리는 훈련은 인간만의 특권이므로
버려야 할 건 과감하게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는
할아버지의 말씀은 정말 진리였다
그렇구나!
동물은 소유한 게 없으니 버릴 것도 없다
물론 나도 오래전부터 익히 알고 있고
입버릇처럼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두 노인의 집에 뜻밖에 초대 돼서 얻은 건
수 백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더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다 아는 얘기지만
직접 행동으로 실천하시는 노부부의 삶을 보니
더 가슴에 와닿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이제껏 내가 그렇게도 힘들었던 게
버리지 못해서 그런 거였구나, 라는 생각에
신세계를 만난 듯 정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다 아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노부부의 삶을 보며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생의 의지와 열정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아프고 바쁘다는 핑계로 소홀했던
많은 일들을 잘 해내야겠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친한 지인의 집 근처라서
나중에 이곳에 올 기회가 있다면
쌀가루로 직접 부드러운 쿠키를 만들고
감자전을 부쳐서 고마움을 표현해야겠다
나의 미래의 노년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나는 과연 저 노부부처럼 나이 들어도 저렇게
명료한 의식과 취미 생활로 남부러울 것 없이
잘 살 수 있을까
더구나 저 나이까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아프지 않고 끝까지 잘 살 수 있을까
어쨌든 저 노부부의 건강 비결이
'버리는 훈련' 이라 했으니
나도 과감하게 버려야겠다
버려야 할 물건, 버려야 할 기억
버려야 할 나쁜 습관, 리스트를 만들어
하나씩 하나씩 버리다 보면 왠지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만 같다
버리고 자유로워지는 그 황홀한 느낌은
어쩌면 여행을 하면서 느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레임보다
더 황홀하고 가슴 벅찰지도 모른다
그래... 내일이 없는 것처럼 뜨거운 열정으로
오늘 하루에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보자
내게 주어지는 하루하루가 신이 주신
고귀한 선물이라 생각하면 시간을 더 값지고
알차게 보낼 것 같다
할아버지의 말씀 중
이제 내 자식들도 노인이랍니다
우리 애들은 우리 부부가 아프면
직접 자신들이 번갈아가며
두 늙은이들을 돌봐준다고 하며
늘 같이 살자고 말하지만
노인이 노인을 돌본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건강 관리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는 말씀이
마음에 깊이 와닿는다
그저 잠을 자듯 조용히
하늘나라로 여행을 가고 싶다면서
누구나 한 번쯤 가는 피할 수 없고
돌아올 수 없는 인생의 편도 여행이 되겠지만
두려움 따윈 없다고 하신다
이만큼 잘 살아왔고 하고 싶은 것 다 해봤으나
마지막으로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자신을 떠나보낸 후 외로움에 눈물 흘리는
아내의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울 것 같아서
아내보다 조금 더 살고 싶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할아버지의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간곡히 바란다
오빠! 파이팅!!!
첫댓글 감동이예요!
김도숙 님
반갑습니다
감동이라니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질 좋은
인생을 사신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을 보고
아름다운 삶이라는 글로 옮기심도
빈틈이 없습니다.
때로는 허전한 구석도 있으면,
삶의 참됨이 더 돋보이거던요.
인간이기에...
글 잘 읽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정말 잘 살아 오신 것
같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걸 배우고
느꼈습니다
버리는 훈련이 나이든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새겨 잘 읽었습니다.
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동입니다.
노년의 삶이 그렇기만 하다면
그렇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말 아름다운
노년의 삶을
알차게 보내시는
노부부가
존경스러웠답니다
90대후반에 대단하십니다
90대 후반의
인생 대선배와
나눈 대화에서
정말 많은 걸
배우고 느꼈답니다
할머니,할아버지의 삶을
닮아가고자 시도하는
저의 작은 마음이
마무리까지
잘 이어지길 바랄 다름입니다.
좋은 글..
잘 보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좋은 글
잘 보고 있다니
감사합니다
아름답습니다.
겪으신 이야기와
전해주신 이야기로
가슴 뭉클해지고
버리는 일의 교훈에는
크게 공감합니다.
먼길 나서는 마음이
따뜻한 기운으로 가득 차오릅니다.
감사합니다
먼길 나서는
마음이
따뜻한 기운으로
가득
차오르셨다니
저도 기쁘네요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버리지 못해 힘들어 하지요
오늘은 무얼 버릴까..이건 또 누굴 줄까?
살아서 나누면 선물이 되고..
죽어서 남기면 유품이 될텐데..
늘 집안을 두루 살펴보게 되더군요
버리고 간소하게 사는게
나의 첫 버킷리스트이기도 하네요
노 부부의 삶의 지혜가 돋보이는
글에 공감하며 잘 보았습니다
수국화 님
저도 수국화 님과
같은 마음이랍니다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것을
버리는데도
결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노부부의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서
집에까지
가져다 드리면서
아름답게 익어가는
노부부의 삶이
가을 햇살처럼
눈부시게 느껴졌답니다
나의 노년도
저 노부부의 삶처럼
눈부시길 바래봅니다
노년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고 부럽군요.
노부부가
서로를 챙기며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부러웠답니다
감동입니다.
좋은글 올려 주셔서 참 감사해요.
90대 후반이신데
사고가 명료하시고
배우자의 짐을 가볍게 해주려고
사랑 싸움 하셨던 노부부 정말 멋지십니다.
그런데
더 멋진 분이 지혜님이시라는거 아세요?
그분들 짐을 들어드리는 것도
정말 훌륭한 인품인데
기본적으로 노인에 대한 공경심을 가지셨잖아요.
저는
지혜님의 좋은 성품을
많이 칭찬해드리고 싶어요.
제라 님
과찬의 말씀에
부끄럽사옵니다
사랑싸움이
끝나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할머니를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젊은이들 못지않게
애틋해서
정말 부러웠답니다
부족한 글에
공감해 주시고
고운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동입니다ㆍ
버리는 연습을 너무 일찍 시작해서
자칫
염세주의자란 소리를 들을까
조심스럽기도 하던차에
정립이 되었습니다ㆍ
물건
재물
사람 마음조차도요
잘 읽었습니다ㆍ
참고로
휴대폰에 남친 전번도 다 지웠어요 ㅎ
정립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정리하고
버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더군요
공감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즐거운 수요일
되시길 바랍니다
살아 온 날보다 살아 갈 날이 적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넘나 큰
이야기였어요.
닉네임이 삶의지혜 이시잖아요.
닉네임처럼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보통 닉네임에
자신의 철학과 소망을
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무랑 님 닉네임도
참 좋은 것 같습니다
공감해주셔서
감사드리고 활기찬
수요일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