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자호自號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의 땅 이름―동명洞名이거나 강, 산, 돌 이름에서 따오는 경우가 많다.
강일순姜一淳은 자기가 살았던 마을 뒷산(시루봉)을 따 '증산'이라 하고, 김성수는 제 고향 마을 이름을 따 '인촌仁村'이라 하였다. 김영삼도 자기가 태어나고 오래 살았던 고향 거제도와 부산의 지명을 따 '거산巨山'이라 하였고, 김대중도 자기의 고향 이름을 따 '후광後廣'이라 하였다. 이것은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는 조상 전래의 풍수사상風水思想이 은연중 그들의 의식에 깃들어져 있는 데서 기인한다.
대종사는 고향에서 대각하고 여기서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경제적 정신적 기초를 다지지만, 여기서 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한다. 옥녀봉 정상에서 법성포를 향해 서면, 눈 아래 두 개의 섬이 보인다. 와탄천이 길룡리 앞을 지나 구수리로 굽어돌며 산태극 수태극을 이루는 물 구비에 두 개의 작은 섬이 있는데 섬 이름이 '큰소드랑섬' '작은소드랑섬'이다. 이 지형을 두고 태극 속의 단장과 중앙을 뜻하는 것이라 한다. '소드랑'은 솥뚜껑의 사투리로 한학자들은 이 섬을 '정도鼎島'라 일컫고, 대정5년도(1916)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에서 낸 20만대:1의 지도3)에서도 '鼎島'로 표기되어 있다. '소태'는 발음 그대로 솥을 말한다. '솥의산'을 한자로 음사音寫하면 '少太山'이 된다.
시창4년(1919년) 2백일 산상기도 해제식을 마치고 십여일 뒤 대종사는 서른 해 동안 정들었던 고향과 따르는 제자들을 뒤로하고 고향을 떠났다. 스승님이 고향을 떠나 산으로 들어간다고 하자 제자들은 목이 매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내가 아주 산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얼마 동안 준비할 것이 있다. 내가 절에 몸을 의지하고 있더라도 상투를 틀고 거사로 있을 것이며, 산에서 내려와 새 회상을 펼 때는 상투를 짜를 것이다"
대종사는 훨훨 나는 듯이 이튿날만에 12월12일 부안 변산반도 월명암에 당도하였다. 명안 스님과 백학명 주지가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러나 대종사는 월명암에 얼마 있지 못하였다. 증산교 신도들이, 금산사에서 대종사가 죽은 사람을 살린 사건으로 하여 증산천사의 재림으로 알고 소리 없이 사라져버린 그를 수소문하여 떼를 지어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증산교 신도들은 비용을 마련하여 산아래 실상동에 집을 마련하여 대종사를 모셨다. 그들은 금산사에 그가 온 것을 증산천사가 재림한 것으로 알았다. 천사님과 같이 그가 위력을 베풀어 바람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게 하여 병든 사람을 낫게 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아 새 세상― 지상 선경을 건설하여 저희들을 부귀 영달케 하여 주길 열망하였다.
"나를 시루(甑山)로 보지 마라. 나는 솥이다. 내가 어릴 때 철모르고 산으로 기도하러 다닐 때 우리 모친께서 시루에 떡을 쪄주어서 매일 공을 드리기는 하였으나, 이제 나는 시루가 필요 없다. 나는 만생령을 먹여 살릴 밥을 짓는 솥이 되겠다"
대종사는 왜 자신을 솥이라 하였는가. 시루마저 포용하여 솥은 완성계 차원을 의미한다. 구천상제九天上帝라 자칭한 증산에 대해, 대종사는 9인 단원과 구수산 산상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하늘을 상징하는 방위 '十'이라 하였다.
강증산은 정읍 덕천면 두승산 시루봉 아래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태어난 손바래기 마을 뒷산 이름을 따 스스로 호를 증산甑山(시루봉)이라 하였다.4) 그러나 대종사는 자신이 태어난 영촌 마을 뒷산 이름을 따 옥녀봉이라 하지 않았다. 대종사는 "나는 시루봉이 아니다. 나는 섬이다"라고 하였다. 옥녀봉은 구수산 아흔아홉 봉우리 가운데 하나요, 그 아흔아홉 골짜기의 물은 모두 칠산바다로 흘러든다. 대종사는 칠산바다의 칠뫼 섬 이름을 따 아홉 제자들에게 호를 하나씩 주었다.
솥은 중국 고대 왕실의 덕을 상징5)하는 것으로 새 회상의 덕과 법통을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상수 제자이며 수위단 중앙인 송규에게 솥 정짜 '정산鼎山'이란 호를 주고 그가 후일 2대 종법사가 된다. 정산은 자신의 법호에 대해 이렇게 설하였다.
'이 솥 정鼎짜는 뜻이 깊다. 모든 곡식이 솥을 거쳐 나와야 먹을 수 있는 밥이 되듯이, 모든 법도와 공부인의 언동이 법주法主의 감정을 맡아 나와야 새 기운을 빌어 쓰는 것'6)이라 하였다.
시루7)는 일상생활에 곧잘 쓰이는 기구가 아니다. 특별한 행사 때 고사나 제사를 지낼 때 쓰이는 기구다. 시루는 제 혼자 능력을 다할 수 없다. 반드시 솥 위에 걸려야 그 구실을 다할 수 있다. 솥을 통하여 우리에게 일용 세끼의 밥을 제공해주지만 시루는 특별한 제의祭儀 때 그 구실을 한다. 대종사는 어쩌다 무슨 행사 때나 쓰는 시루가 아니라 모든 생령들에게 주식을 제공하는 일상에 유용한 솥이 되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 3) 조선총독부 간행 대정5년판 조선지도 4) 증산도는 《증산도전》 주해에서 시루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였다; 시루는 푹 익히는 성숙의 정신을 상징한다. 하느님이 왜 인간의 몸을 쓰고 오심에 그 어려운 시루 甑자의 호를 쓰시어 甑山이라 하셨는가. 여기에 인류 구원과 세계개벽의 근본이 되는 깊은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가을은 생명이 열매를 맺는 성숙의 시간이다.(《증산도전》 4-7:3 주해. 초판) 5) 黃帝때 구리를 캐어 세 발과 두 귀가 있는 솥을 만들어 그 겉면에 만세의 교훈과 법칙을 새겼고, 夏나라 禹임금은 9개의 솥을 만들때 三德을 의미하여 발을 세 개 달았다. 이 솥으로 신께 제사 지내고 왕실의 보물, 천자의 표적으로 삼았다. 후에 夏??殷??周 세 왕조에 차례로 전해져 傳國의 보배로서 王位의 증거물이 되었다. 그리고 天子의 德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6) ①이공전, 앞의 책. ②박정훈, 앞의 책 6-25 7) 시루: 우리나라 고유의 찜기[蒸熟具: 찜통]의 하나. 떡이나 쌀 등을 찔 때 쓰는데, 바닥에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어 물솥에 올려 놓고 불을 때면 뜨거운 수증기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며 익게 되어 있다. 또한 김이 잘 오르고 가루가 구멍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칡덩쿨 등을 요철 모양으로 엮어서 만든 것을 시루밑에 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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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은 "소태산少太山 법호는 양시대 선절 후절 시대先絶後絶時代의 법호"라고 하였다.8) 양시대의 전무후무한 법호라는 말이다.
'솥의산'이라 자호自號한 대종사의 원대한 경륜을 원불교 3대 종법사 대산은 이렇게 보았다.
"솥은 밥을 삶아내고, 법은 대도인을 삶고, 삼학은 세계인을 삶는다. 삼학 솥은 무량수無量壽를 무한히 삶을 수 있다"9)
9인 제자들에게 '산'자 항렬의 법호를 주고 스스로를 '솥의산'이라 한 대종사는 시창5년에 원정 교강元定敎綱 3강령(三學)을 발표하였는데, 대산은 이 교법이야말로 세계인을 구제하고 대도인을 삶아내는 '삼학 솥'이라 하였다.
대산은 말하였다. "선천의 끝 성인으로 증산선생이요, 후천의 첫 성인으로 대종사님이시다. 선천은 첫 수가 주장하는 운수요, 후천은 끝 수가 주장하는 운수이다. 종성終聖과 시성始聖은 같으시다. 큰 기운을 보고 알아야 회상을 짠다"10)
대산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끝수가 드러나는 운수이다. 기운도 아래가 크다. 민주民主가 그런 뜻이다. 정치도 아래를 돕고 생활도 못난 데를 먼저 살핀다. 못난 듯하고 밑으로 내려감이 당연하다. 대종사는 10, 정산종사는 굴대 축軸, 증산선생은 일一이다" 대산은 자신을 '사士'라고 하며11) '十一'을 함의하는 경륜을 나타내었다. 十一은 완전 수(十)에서 일양一陽의 시생始生을 의미한다.
대종사는 금산사에 다녀 온 뒤 내변산에 입산하여 자호를 소태산이라 한 데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었다. 증산은 죽기 전에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너라"12)고 하였고 박중빈이 올 줄 예견하였음인지 "솥이 들썩임은 미륵불이 출세함이로다"13)라 하였다.
금산사 미륵전에는 가마솥 위에 선 미륵불이 서 있다. 솥이란 무엇인가. 솥은 도가에서 단전의 이칭異稱으로14) 정로鼎爐, 화로火爐, 언월로偃月爐, 주사정朱砂鼎, 연로鉛爐, 5행로五行爐, 단정丹鼎, 옥로玉爐 등으로 일컬어진다. 배꼽 아래 석문石門(경혈)을 단전으로 볼 때 대종사는 게송 '돌이 서야 물소리를 듣는다'(石立聽水聲)라 하였고, 열반을 앞두고 펴낸 《정전》 수행편에서 <단전주의 필요>를 역설하였다. 대종사는 오는 세상 후천 개벽 시대에는 단전주(禪)를 하지 않고는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없다고 자신의 호로써 강변하였다. 그래서 단전주에 의하지 않고 ― 솥에 공력을 들이지 않고는 ― 살 수 없다는 뜻에서 '솥에 산'이라 하였다. 대산의 법어처럼 솥은 삼학솥을 말하는바, 정신수양의 대명사격인 참선은 단전자리 잡는 공부에서부터 삼학공부가 시작되는 것이다. '솥의 산'이란 삼학 공부를 해야 산다는 말이다. 삼대력을 가져야 참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 8) ①이공전, 《범범록》 534쪽, 1954. 11.14 법설 ②박정훈, 《정산종사 법문과 일화》 6-25 9) 이병은, 대산종법사 법문과 일화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194쪽. 1964년도 법설 10) 이병은 편저 《대산종법사 법문과 일화》 182쪽, 원기50년 법문. 11) 앞의 책. 181쪽, 1964년 법문 12) 《대순전경》 9-11, 증산교본부, 1979. 8판 13) 《대순전경》 4-2, 증산교본부, 1979. 8판 14) 《中國傳統氣功學詞典》(張文江·常近 편저)에는 상중하 3 단전을 망라하여 단전에 대한 이칭으로 770여개의 용어를 게재하고 있는 사실만 보더라도 단전의 이칭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박병수, <원불교 단전에 관한 연구> 《원불교학》창간호 136쪽. 원불교학회, 1996)
정산은 '대종사의 해중산 법호는 음시대陰時代의 법호'라고 하였다.15)
바다에 드러난 섬은 겨우 빙산의 일각일 뿐 물 속의 그 뿌리깊은 바탕은 뿌리뽑을 수 없는 저력이요 법력이다.
산은 양계에 자신 만만하게 위력을 나타낸 힘의 상징이다. 물 위의 이 산을 아주 멀리서 보면 보이지 않는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면 하나의 까만 점으로 보일 것이다. 이것이 무극이요 태극이다. 태초太初 이전과 이후가 여기서 갈린다. 이것을 '소태산'이라 한다.
가장 적은 것의 표현이 '少'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적은 것을 콩(太)이라 한다. 그래서 적을 小에다 'ノ'16)을 붙여 더 적은 것을 표현하였다. 반대로 큰 大에다 ' `'17)을 붙여 더 큰 것을 太라 하였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을 태산(太山=泰山)이라 하였다. 小와 大는 정 반대의 뜻으로 하나는 붓을 왼쪽으로 한번 삐쳤고 또 하나는 붓을 오른쪽으로 그냥 한번 대고 말았다. 少와 太는 서로 정반대이면서도 직통한다. 똑같은 대상이나 산을 아주 멀리서 보면 처음엔 보이지 않다가, 그 다음에 하나의 점으로 보이고, 가장 가까이 다가설 때는 끝이 보이지 않는 태산 준령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자 뜻으로 새기면 '少太山'을 이렇게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o 많지 않은(少) 큰(太) 山= 희귀, 최고
o 능히 작기도 하고 크기도한 山= 能小能大 자유자재
o 젊고(少) 큰(太) 산= 큰 경륜, 자신감
o 작지만 큰산= 저력, 단합
o 점(콩:太)보다 더 적은(少) 山= 무극, 진리 세계
지푸라기 하나에도 우주의 오묘한 이치가 갊아 있는 법이다. 콩 한 알에서도 우주의 기운이 어려 있는 것이다. 작은 콩 한 알에서도 삼재三才를 찾아 볼 수 있다. 콩은 두 쪽인데 위쪽 하나는 天이고 다른 한쪽은 地이고 가운데 싹 터 나오는 것은 人이다. 人은 천지天地의 힘으로 드러나는 山이다.
少는 한없이 클 수 있는 젊음을 뜻하는 것으로 양양한 앞날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고 太는 그 포부와 힘을 뜻한다. 대종사는 인류문화사에 유례 없이 드물게 젊은 나이로 큰 깨달음을 터득하고 전만고 후만고한 대회상을 펼칠 경륜을 품었다.
산은 올연히 높은 것이 산이랄 수 있다. 그래서 대종사는 스스로 해중산海中山이라 하였다. 자신을 망망 대해 가운데 올연히 솟은 산으로 비유했다. 이 산은 무한동력無限動力의 힘의 상징으로 영력靈力과 도력道力과 법력法力 三大力을 갖춘 법사法師로서 사바 세계에 제도문을 열고 고해苦海에 반야선을 띄울 수 있는 근원이다.
대종사는 젊고 큰 포부와 역량을 신룡벌에 법륜을 굴릴 앞날을 예지하고 그렇게 자호 해중산海中山이라 하지 않았나 사료된다.
'해중산海中山'은 구전에 익산총부 근방에 있는 배산을 말한다고 하였다. 옛날에 신룡벌까지 바다물이 들어 와 배산에다 배를 매어 놓았다는데 그런다면 그야말로 바다 가운데 산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신룡동 원불교총부의 바로 인근부락인 구릉지대의 지명이 '내곶리' '신곶리'이다. 이 '곶[串]'이란, 반도형의 지명 아래 붙는 말로서, 바다 쪽으로 길게 내민 부리 모양으로 생긴 갑岬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이 근방의 구릉지대의 밭을 일구다 보면 더러 오래된 조개 껍질이 발견되기도 한다.
정산종사 열반하고 대산이 종법사에 승계하고 바로 배산으로 가던 길에 말하였다.
"만고에 활기 찬 이 배산이 우리 회상을 이루었다. 남조선 뱃머리라 한 곳이 이곳이요, 이곳에 열릴 회상이 배 도수度數를 차지한 회상이라, 중류中流할 때는 세상을 지배하게 되고 세상 인심이 물 밀 듯하리라"18)
대산은 "삼학 팔조와 사은사요는 도덕의 배(舟)이다. 배산은 만국 만민을 건질 돛대이다. 그리고 조선장造船場은 총부이다"19)라고 하였다. 익산총부는 무량 중생을 제도할 반야용선을 만드는 곳이라는 것이다.
대종사는 섬을 산에 빗대어 스스로 '바다 가운데 섬'(海中山)이라고 하였다. 이는 아홉 단원들에게 칠산바다(구수산 앞바다)에 있는 일곱개의 섬 이름을 준 데서도 확인된다.
대종사는 생전에 여성제자들에게 '陀圓'이라는 법호를 줄 것을 내정하였다. 이 '陀'자는 뒷날 여제자들에게 주는 법호로 내정되며, 海中山과 동의어이다. 陀의 자의字意는 보타해중산普陀海中山으로 '바다 가운데 완만한 산 즉 섬'을 뜻한다.
대종사의 경륜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교강 가운데 '남녀권리 동일 사상'을 주창하여 여권신장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는 점이다. 유사이래 모계사회 이후 처음으로 인류의 지도자로 여자들에게도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 이는 대종사 외에 그 전례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는 주역의 지천태地天泰 괘, 후천개벽의 첫 종을 울린 것이다.
대종사는 여성 제자들에게 나이순에 따라 방위를 주고 방위 따라 '타원'이란 법호를 내렸다.
'타'라 하면 먼저 떠오르는 주문이 있다. 불교 신자들이 자주 암송하는 '나무아미타불', 대종사가 구도과정중에 우연히 떠올랐다는 주문 '일타동공일타래'를 떠올릴 게다.
'타陀'는 깨달음의 한 표현이다. 산스크리트로 타타타(tathatâ)는 진여眞如란 뜻이다. 그냥 그대로의 사물의 존재와 실상을 '그와 같은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진여는 또 '그렇고 그렇다'는 뜻의 여여如如라 표현되기도 한다. 그 타타타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인격체로 타타가타(tathâgata) 즉 여래如來라고도 한다. 여래란 여래여거如來如去의 준말이요 진리세계에 도달했기에 여거如去라 하고 그 세계로부터 중생을 구제하러 이 세상에 왔기 때문에 여래라고 한다.
원圓은 우주를 의미한다. 글자 모양을 보면 우주(○= □) 속에 사람이 팔짱을 끼고 버티고 있는 (員)형상이다. 사람이 우주의 주인이다. 우주는 있으나 깨달음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원'과 '타'가 아울러 하나가 되야 비로소 생명력을 갖게 된다.
'타원陀圓'이란, 원만하게 경사진 구릉을 말하며 남자 법사들의 올연히 솟아오른 산에 비해 부드러운 언덕 또는 바다 가운데 섬을 뜻한다. 대종사는 음양을 갖춘 완전한 사람으로 두 개의 호를 가졌다. 양성 성향의 호는 '소태산', 여성 성향의 호는 '해중산海中山'이다.
-------------------------------------------------------------------------------- 15) ①이공전, 《범범록》 534쪽, 1954. 11.14 법설 ②박정훈, 《정산종사 법문과 일화》 6-25 16) ノ : 삐칠 별. 목을 바로하여 몸을 바로 펼 별. 17) ` : 귀절 칠, 표할, 불똥(燈中火) 주. 18) 대산종사 법문과 일화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원기47년도 법문, 100쪽 19) 앞의 책, 115쪽, 원기47년도 법문
대종사는 9인 제자에게 一山, 二山, 三山, 四山, 五山, 六山, 七山, 八山, 鼎山(九)이라 법호를 주었다.
남녀수위단의 단장은 1인으로 그의 방위는 상위上位요 하늘을 뜻하며 10인 1단의 十에 해당한다. 대종사는 자신을 '십十'이라 하였다.20) 정산의 방위 수는 땅과 중앙을 뜻하는 九이다. 그래서 정산에게 九를 시사하는 '규'라는 법명을, 부친에게 '구산'이란 법호를 주었다. 그의 부친 송벽조는 正九가 아니므로 久山이라 하였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대종사는 시창3년 새로 맞이하는 중앙단원 송도군을 두고 최초로 '규'라는 법명을 주고 다시 '추樞'라는 이름을 주며 "너는 추이고 나는 十이다'라 하였다 한다. 대종사는 부친 열반 기념문에 '小子 十은????'이라고 스스로 칭하였다 한다. 시방의 대표이니 단장은 십일 수밖에 없으나 이 호를 널리 쓰지 않은 것은 발음상으로 욕(씹) 같아서 거북한 점이 있어 널리 불리우지 않았다. 이는 여자 수위단을 내정할 때 부인 양씨를 '십타원十陀圓'이라 한 것을 보아도 '십'은 대종사(단장)를 상징하는 고유의 숫자임을 알 수 있다.
'十'은 만남을 뜻하고 완성을 의미한다. 十은 가로(―)와 세로(|)의 만남, 여자와 남자의 만남, 하늘과 땅의 만남, 해와 달의 만남, 물과 불의 만남을 통한 완성과 종합을 뜻한다. ―와 |의 만남은 음과 양의 만남을 의미함이요 남과 여의 결합을 의미한다. 음과 양, 남과 여는 十을 통해서 완전함을 이룬다.
이 음양 이론은 우리의 생활과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의 생활 자체가 음양의 조화를 통해 이루어져 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자와 남자의 육체관계를 우리나라에선 '씹'이라고 표현해 왔다. 지금은 주로 욕설로 쓰여지고 있는 이 '씹'은 十에서 나온 말이다. 다시 말해 여자(음)와 남자(양)의 만남을 十 즉 완성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21) 十은 一의 시생始生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산은 이렇게 말하였다. "합장合掌을 합십合十이라고도 하고 화합和合이라고도 한다"22) 서로 다른 두 손을, 오른 손과 왼손을 가슴 한가운데에 모으고 머리 숙여 공손히 합장하는 것을 합십이라 하며 이것은 화합하는 마음 자세이다.
음과 양이, 남과 녀가, 좌와 우의 이데올로기가, 물질과 정신이, 상하, 좌우, 팔방이 상응하여 둘이 아닌 하나로 합칠 때 위대한 대화합이 이루어지게 된다.
대종사의 10인1단 단조직은 단결과 화합을 상징하는 메시지이다. 만사 만리의 성공의 비결은 단결과 화합을 전제로 할 때 그 일의 완성을 기약하는 것이다.(이 글은 초기교단사 2권에 일부가, 근간 초기교단사 4권 《금강산의 주인되라》의 <명칭을 통해 본 소태산>에서 따온 것입니다)
-------------------------------------------------------------------------------- 《불법연구회 요람》 '연혁' 소화19년(1944)
21) ①이승헌, 《丹學人》 132쪽. 유림. 1990.7. ②15c 《석보상절》 《동국정운》에 나오는 씹(十)은 오늘날같이 우리식 된소리 'ㅆ'이 아니고 이른바 동국정운식 표기로서 중국 한자음 표기의 기호이었다. ③앞의 주장과 다른 견해로, 씨(種)가 입(入口)에 들어간다는 뜻으로 '씹>씹'이라는 설도 있다.
22) 대산종법사 법문 '합장하는 마음' 《원광》232호 199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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