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봉은 허난설헌이나 황진이 못지않은 빼어난 시를 지었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다. 시를 온 몸에 칭칭 감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던 이옥봉의 드라마틱한 삶이 연거푸 소설과 시집으로 출간 되었다. 올봄에는 중견작가 은미희씨가 장편소설 ‘나비야 나비야’(문학의 문학)를, 이번에는 소설가 조두진씨가 다른 버전의 장편소설 ‘몽혼’(휴먼앤북스)을 펴냈고 여기에다 문학평론가 하응백씨는 전해 내려오는 옥봉의 시들을 추려서 33편을 정선해 해제까지 달아놓은 ‘이옥봉의 몽혼’을 덧붙였다. 은미희씨의 옥봉 이야기는 결 고운 문체에 서정이 돋보이는 편이고, 조두진씨의 ‘몽혼’은 조선시대 한 가련한 여성시인의 삶을 강건한 문체로 육박해 들어가는 소설이다.
요사이 어찌 지내시는지요 (近來安否問如何)
창문에 달 비치니 이 몸의 한은 끝이 없습니다 (月到紗窓妾恨多)
제 꿈의 혼이 발자취를 낸다면 (若使夢魂行有跡)
임의 문 앞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것을 (門前石路半成沙)
넋이 되어서라도 임을 찾아가겠다는 애절한 사랑의 마음을 노래한 7언 한시 '홀로 읊노니(自述)' 일명 몽혼(夢魂)은 이렇게 흐르는데, 그리움이 얼마나 깊었으면 꿈속에서 오가는 길마저 닳고 닳아 모래가 되었을까.
옥봉은 옥천군수를 지낸 이봉의 서녀였다. 관기를 어미로 두고 태어난 옥봉은 대를 이어 관기가 될 운명이었으나 그녀의 타고난 재주를 높이 산 군수가 글을 가르쳐서 열일곱살에 반가에 시집보냈다. 그러나 남편이 일년도 되지 않아 죽었고, 그 집안마저 쇠락해 친정으로 돌아왔다. 이후 한양으로 올라온 옥봉은 주점을 내고 시를 지을 줄 아는 과객들과 더불어 시연을 즐기다가 장안의 소문난 여류문사로 각광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옥봉은 조원이라는 조선 제일의 문장가를 연모하게 되었고 그 사나이가 자신을 소실로 받아들이는 대신 내건 조건을 수락했다. 시를 더 이상 짓지 않고 여인네의 본분에 충실하겠다는 서약이 그것이었는데, 잘 참고 참다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을 돕느라 시 한편 썼고, 그 일이 빌미가 되어 소박을 맞았다. 남정네는 첩이 시를 지어 장안의 구설에 오르내리는 게 싫었고, 자칫 자신의 정치적 입지까지 흔들릴까봐 여인의 시심을 구속해버렸던 것이다.
이번 소설에서 조두진씨는 옥봉의 시와 삶 그 자체에 매달리기보다는 시인과 일상인의 불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는 시인은 바람을 따라 끊임없이 흐르는 모래이고, 일상인은 그 모래밭에 뿌리내려야 하는 풀이라며 한자리에서 만난 풀과 모래의 불행이 안타깝다고 서두에 밝혔다. 옥봉은 한스러운 시를 스스로 염을 하듯 온몸에 휘어 감고 물에 빠져 죽었다. 조두진은 소설 속 사내가 뒤늦게 발설하는 회한 어린 발언으로 옥봉의 넋을 위무한다.
“나는 찰나의 것에 집착하느라 영원한 것을 알지 못했다. 손에 잡히는 것을 좇느라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의 귀함을 몰랐다. 개 짖는 소리에 놀란 나는 도둑이 내 집 담을 넘을까 염려했을 뿐, 눈 내린 겨울날 홀로 집을 떠나야 했던 옥봉의 슬픈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했다.”(289쪽)
하응백씨가 엮은 이옥봉 시집은 조원의 후손들이 편찬한 조원 문집 ‘가림세고’의 부록에 담겨 있는 이옥봉의 시들 가운데에서 진위를 가려내고 흩어져 전하는 시들을 찾아 완성했다. 그는 이옥봉은 허난설헌과 황진이에 버금가는 뛰어난 시인이었다며 호방할 때는 호방하고 섬세할 때는 섬세했으며 아름다울 때는 아름답고 슬픔은 찬연했다고 평가했다. 행려자로 거리를 떠돌다가 죽어간 이옥봉. 그녀가 찬바람 속에서 노숙하던 시절 썼음 직한 시 한 편은 이렇게 흐른다.
문을 닫으니 누가 숨어 사는 사람을 방해하리
거적 옷 걸치고 눈물을 흘리지만 돌아갈 곳 없는 몸
구름이 산길 덮어 바람 따라 물결치더니
바람, 하늘에 몰아쳐 눈송이 먼지처럼 자욱하네
-<눈을 노래함>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