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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下의 名勝地 영보정(永保亭), 성도(成都) 수령(守令) [제2편]
낙전당집(樂全堂集) [신익성(申翊聖) 1,588(宣祖21)∼1,644(仁祖22)]
2024년 06월 02일
○ 옛 「조선(朝鮮)의 사대부(士大夫)」들이 남겨 놓은 기록(記錄)들은 왜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땅을 설명(說明)하고 또한 그 땅을 노래하며, 찬사(讚辭)하고 있는 것일까?
► 일만(一萬) 년, 또는 반만년(半萬年) 이어져 온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열심히 설명(說明)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옛 선인(先人)들의 발자취를 발굴(發掘)하고, 한글 해설서(解說書)를 만들려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역사학자(歷史學者)들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다.
「한반도(韓半島)와 대륙(大陸)」의 형태(形態)가 오늘날의 것처럼 만들어 진지는 이미 “수백(數百) 또는 수십(數十) 만년(萬年)” 전(前)의 일일 것이며, 자연환경적(自然環境的) 요소(要素)들인 산하(山河)와 특이지형(特異地形)인 호수(湖水), 택(澤), 사막(沙漠), 황토고원(黃土高原) 등의 여러 요소(要素), 기후대(氣候帶)인 사계절(四季節)이나 아열대(亞熱帶) 또는 열대지방(熱帶地方), 동토(凍土)의 땅 등 역시(亦是)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한반도(韓半島)를 지배(支配)하고 있는 모든 자연환경(自然環境)과 지형지세(地形地勢)」는 :
〈➊ 단군조선(檀君朝鮮) 때나, 기자조선(箕子朝鮮) 때나, 위만조선(衛滿朝鮮) 때나 다름이 없어야 하고, ➋ 삼한(三韓)【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때나, 삼국(三國)【고구려(高駒驪)•백제(百濟)•신라(新羅)】때나, 후삼국(後三國) 때나 ➌ 천하통일(天下統一)과 태평만세(太平萬歲)와 천하태평(天下泰平)을 노래했던 고려(高麗) 때나, 고황제(高皇帝) 이단(李旦)의 조선(朝鮮) 때나, ➍ AD 1,910년의 일제(日帝)에 의한 강제합병(强制合倂) 때나, AD 1,948년(年)이나 오늘 2024년(年)이나 다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지극(至極)히 상식적(常識的)인 일로,
「➊+➋+➌+➍」의 형태(形態)가 바로 “한반도(韓半島) 땅이 되어야 한다.” 아주 간단(簡單)한 예(例)를 하나 들어보자. 삼국사기는 삼국(三國)【고구려(高駒驪)•백제(百濟)•신라(新羅)】의 역사서(歷史書)다. 이곳에 미상지명(未詳地名)은 과연(果然) 몇 개나 될까?
“수백(數百) 개” 이상(以上)의 미상(未詳) 지명(地名)이 있고, 한반도(韓半島) 남부(南部)에 있었다는 ‘가야(伽倻) 여러 나라’ 또한 마찬가지다.
이건 “미상(未詳)” 지명(地名)만을 놓고 보았을 때의 이야기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등장(登場)하는 모든 지명(地名)이 “미상(未詳)”일 정도(程度)로 지명(地名)의 근원(根源)이 없다.
고전(古典) 원전(原典)【원문(原文) 역사서(歷史書)】을 번역(飜譯)한 번역자(飜譯者) 또는 그것을 주해(注解)한 학자(學者)들에 의한 “추정(推定)과 추측(推測)”으로 만들어진 것이 전부(全部)다.
➠ 「한반도(韓半島) 땅에는 과거(過去) 일제(日帝)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와 해방(解放) 이후(以後) 미군정(美軍政)이 있었을 뿐이고,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이 있을 뿐이다.」
‘원전(原典) 역사서(歷史書)’는 ‘역사서(歷史書)’ 홀로 놀고, ‘한글 해설서(解說書)’는 ‘한글 해설서(解說書)’대로 ‘지’들의 놀이터에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뿐이다.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한반도(韓半島)에 없었다”」이게 사실(史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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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영보정(永保亭), 천하(天下)의 명승지(名勝地)로 손색이 없다.」
「其將領多江南人。皆以爲形勝勝於岳陽。然則亦可謂天下之勝也 : 그때 장수들은 대부분 강남(江南) 사람이었는데, 모두 이곳의 경관이 악양루(岳陽樓)보다 뛰어나고 하였다. 그렇다면 또한 천하(天下)의 명승지(名勝地)라고 이를 만하다.」라고 하였다.
➨ 악양루(岳陽樓) [維基百科, 중국 위키백과] : 〈岳陽樓是一座位於中國湖南省岳陽市古城西門之上的古城樓,下臨洞庭,前望君山,北倚長江,: 악양루(岳陽樓)는 호남성(湖南省) 악양시(岳陽市)의 옛 성(城) 서문(西門) 위에 있는 옛 성루(城樓)인데, 아래에는 동정호(洞庭湖)에 임하고, 앞에는 군산(君山)이 바라보이며, 북(北)쪽으로는 장강(長江)에 기대어 있다. 主要因范仲淹《岳陽樓記》而聞名,有「洞庭天下水,岳陽天下樓」的盛譽。: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를 보면 : ‘동정(洞庭)에 천하(天下)의 물이 있고, 악양(岳陽)에는 천하(天下)의 정자(亭子)가 있다’라고 하여 몹시 칭찬(稱讚)하고 있다. 岳陽樓始建於公元220年前後,其前身相傳為三國時期東吳大將魯肅的「閱軍樓」,西晉南北朝時稱「巴陵城樓」,中唐始稱「岳陽樓」。: 악양루(岳陽樓)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AD 220년 전후(前後)다. 대대로 전해져 온 바에 따르면 그 전신(前身)은 삼국시대의 동오(東吳) 장수(將帥) 노숙(魯肅)의 열군루(閱軍樓)이다. 서진(西晉)과 남북조(南北朝) 때는 파릉성루(巴陵城樓)라 불렸고, 당(唐) 때에 처음으로 악양루(岳陽樓)라 하였다. 岳陽樓是江南三大名樓中唯一的一座保持原貌的古建築。: 악양루(岳陽樓)는 강남지방(江南地方)의 3대 명루(名樓)로 그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갖추고 있는 옛 건축물이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호북성(湖北省) 무한(武漢)의 무창(武昌) 사산(蛇山) 위에 있는 ‘황학루(黃鶴樓)’와 호남(湖南) 악양(岳陽)의 ‘악양루(岳陽樓)’ 및 강서(江西)의 ‘등왕각(滕王閣)’과 함께 “강남(江南)의 3대 명루(名樓)”라고 한다.
※ 악양루(岳陽樓) : 근대(近代)에 재건(再建)된 모습 [출처 : 위키백과]
※ 명(明) 대 안정문(安正文)의 악양루(岳陽樓) [출처 : 위키백과]
※ 보령(保寧)의 영보정(永保亭) [현대(現代)에 재건(再建)된 모습이다] [출처 : 네이버 이미지]
► 낙전당집(樂全堂集) 7권 記 永保亭重修記(영보정 중수기)
〈永保亭重修記 : 湖西之近海郡縣。謂之內浦。內浦一帶。山勢澶漫。委爲裔落。而獨烏棲山奇拔馳驟。勢若渴龍赴海。: 호서(湖西)의 바다 가까이에 있는 군현(郡縣)이 있다. 내포(內浦)라고 한다. 내포(內浦) 일대는, 산세가 펑퍼짐하여, 완만하게 떨어지지만, 오서산(烏栖山)만은 특출나게 내달려서, 그 기세가 마치 목마른 용(龍)이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듯하다. 於其所止。昴然擧頭。千尋蒼壁。突入水中。自成城塹。周遭數里。: 산세가 멈추는 곳에서 고개를 우뚝 쳐들어 천장 푸른 절벽을 이루다가, 물 가운데로 갑자기 들어가서 절로 성(城)과 해자를 이루는데 주변이 몇 리나 된다. 因其天險。縈以粉堞。刱爲麗譙者。水軍節度使之營也。: 그 천연의 험지를 이용해 성곽을 둘러 세우고 화려한 누대를 지은 곳이 수군절도사의 영(營)이다.
安眠圓山孤巒諸島。扞蔽如屛障。比衆結已寺浦洪陽新邑諸山。環拱如簪笏。: 안면(安眠), 원산(圓山) 등 하나의 봉우리로 된 섬들이 병풍과 장막처럼 가로막고 있고, 비중(比衆), 결기(結己), 사포(寺浦), 홍양(洪陽) 등 새로 설치한 고을의 산들이 신하처럼 빙 둘러서서 향하고 있다. 海潮從島嶼間奔涌而入。與上流通。滙爲萬頃之湖。: 조수가 섬 사이로 쏟아져 들어와 상류(上流)와 통하는데, 이것이 모여서 아주 넓은 호수를 이룬다. 据城之高。壓湖之廣。冠以飛閣者。永保亭也。: 높은 성에 자리하여 넓은 호수를 내려다보며 날아갈 듯한 누각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이 영보정(永保亭)이다.
湖心雙島。對峙如畫。泛浮於煙波杳靄之中。若丸若彈。: 호수 한가운데 두 섬이 마치 그림처럼 마주 솟아 있는데, 안개 낀 파도와 아스라한 아지랑이 속에 떠 있는 모습이 마치 구슬이나 탄환 같다. 龍馬有時而出。噴雪騰空。若眩若幻。 : 용마(龍馬)가 이따금 나타나 눈보라를 뿜으며 허공으로 솟구치는데 마치 신기루나 환영 같다. 登斯亭者。飄飄然有凌雲之想。殆非埃壒之境也。以是亭之名聞於國中。: 이 정자에 오르면 훨훨 구름 위로 오르는 기분이 드니, 거의 인간세상의 경치가 아니다. 이로 인해 정자의 이름이 나라 안에 알려지게 되었다. 征倭之役。天朝舟師來泊亭前。: 왜적을 정벌할 때 중국의 수군이 이 정자 앞에 와서 정박하였다. 其將領多江南人。皆以爲形勝勝於岳陽。: 그때 장수들은 대부분 강남 사람이었는데, 모두 이곳의 경관이 악양루(岳陽樓)보다 뛰어나고 하였다. 然則亦可謂天下之勝也。: 그렇다면 또한 천하(天下)의 명승지(名勝地)라고 이를 만하다.
余於庚辰秋。乞恩休沐。留憩斯亭。日夕徘徊。心甚樂之。亦不能無慨然者矣。: 나는 경진년(1640, 인조18) 가을에 휴가를 얻어 이 정자에서 머물러 쉬면서 밤낮으로 배회하며 마음으로 매우 즐거워하였는데, 또한 감개가 없을 수 없었다. 不變者天險也。易毀者人功也。海山之奇觀如新。甍桷之丹雘已故。雨簷霧棟。又將傾而圮也。興廢而重新之者。必有其人也。: 변하지 않는 것은 천연의 험지이고 쉽게 훼손되는 것은 사람의 공력인지라 바다와 산의 빼어난 경관은 새 것 같은데 용마루와 서까래의 단청은 이미 낡았고, 비 맞은 처마와 안개에 젖은 마룻대는 또 기울어지고 무너지려 하니, 필시 무너진 것을 일으켜 다시 새롭게 할 사람이 따로 있을 것이라 여겼다.
其明年夏。湖西水閫馳使者修辭。謁余以永保亭重修記。: 이듬해 가을, 호서 수군절도사가 급히 사람을 보내 글을 전하여 나에게 영보정 중수기를 부탁하였다. 余進其使者問之。曰。亭之建久矣。弘治甲子。咸川君李公良來莅此鎭。輟廢館而亭之。始揭扁焉。蓮軒李公宜茂爲之記。: 내가 심부름 온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영보정이 지어진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홍치(弘治) 갑자년【1,504, 燕山君 10】에 함천군(咸川君) 이양(李良) 공이 이 진(鎭)에 부임하여 낡은 건물을 허물고 정자를 세워 처음 편액을 걸었고, 연헌(蓮軒) 이의무(李宜茂)가 기문을 지었습니다. 七十年而爲萬曆甲戌。李公昕因其舊而修之。于今六十有八年矣。: 70년이 지나 만력(萬曆) 갑술년【1,574, 宣祖 7】에 이흔(李昕) 공이 옛 건물을 보수하여 지금까지 68년이 되었습니다. 柱椽之朽者易之。欄檻之壞者改之。瓦縫甎鋪門扉庋閣。罔不整飾。㯀題板刻。燦然增彩。: 썩은 기둥과 서까래를 바꾸고 무너진 난간을 고치며, 기와를 잇고 벽돌을 올리며 문(門)과 시렁을 모두 정비하고 꾸미며 현판을 바꾸어 거니 찬란히 광채가 더합니다.”하였다.
余問其費。曰皆出於節帥之損俸。未嘗煩一卒力也。: 내가 그 비용을 물으니 답하기를, “모두 절도사의 봉급을 덜어 비용을 대었지 병졸 한 명의 힘도 쓴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余乃莞爾曰。余固知興廢而重新之者有其人也。余曾入湖西界。稔聞水閫之爲治。自律甚莊。不畏強禦。體統之所當持者持之如法。軍政之所當申者申之如令。: 나는 마침내 빙그레 웃으며 아래와 같이 말한다. 나는 무너진 것을 일으켜 거듭 새롭게 할 사람이 따로 있을 줄 알고 있었다. 내가 예전에 호서(湖西) 지방에 들어갔을 때 수군절도사의 다스림에 대해 익히 들었는데, 자신의 몸가짐이 매우 엄숙하고 권세가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마땅히 지켜야 할 체통을 법처럼 지키고 마땅히 시행해야 할 군정을 명령처럼 시행하였다. 入其營。樓船截海。懍若對壘。褊裨交藝。技窮穿楊。凡隷於鎭者。莫不趨令。樂爲之用。: 그 영(營)에 들어가 보니, 누선(樓船)이 바다를 가로지르는 모습이 마치 성루처럼 엄정하였고 무예를 겨루는 비장(裨將)은 재주가 매우 뛰어났다. 진(鎭)에 소속된 모든 이들이 명령을 따르며 부림받는 것을 즐겁게 여겼다. 余已識其爲治能知後先輕重。亭之不治。非不能也。: 나는 이미 그가 선후와 경중을 알고서 다스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정자를 수리하지 않는 것은 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夫爲將之道。體統立軍令肅。器利而士勇。然後事多暇。暇則亭榭可治也。賓旅可館也。: 장수의 도리는 체통을 세우고 군령을 엄격히 하여 병기가 날카롭고 병사가 용감해진 뒤에야 일에 여유가 많아진다. 여유가 있어야 정자를 수리할 수 있고 빈객을 재울 수 있다. 此周書之所以謹著也。其爲治也。豈不井井有條哉。足徵其政之成也。: 이 점에 대해서는 주서(周書)에서 경계하여 적어 놓았다. 그의 다스림이 질서정연하게 조리가 있지 않은가. 그 정사의 성공을 충분히 증명할 만하다. 治之如是。則天險可保也。人和可保也。亭觀之樂亦可保也。: 다스림이 이와 같다면 천연의 험지를 지킬 수 있고 사람들 사이의 화합을 지킬 수 있으며 정자에서 감상하는 즐거움도 지킬 수 있다. 後之爲治者。如帥之治。則可以永保其樂於無窮矣。: 나중에 다스리는 자가 절도사처럼 다스린다면 그 즐거움을 길이 무궁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이다.
節帥名震益。驪興人。丙子之亂。以宣傳官奉符徵勤王兵於湖西。冒萬死超長圍。入南漢城中。復齎檄出城。遍諭元帥諸軍。復命不踰時。: 수군절도사의 이름은 진익(震益)으로 여흥(驪興) 사람이다. 병자호란 때 선전관으로 부절을 받들고 호서의 근왕병(勤王兵)을 징발하였으며, 죽음을 무릅쓰고 넓은 포위를 뚫고서 남한산성에 들어왔다가 다시 격문을 가지고 성을 나가 원수의 여러 군사를 두루 효유(曉諭)한 다음 때를 넘기지 않고 복명하였다. 時余摠禁旅。侍上左右。見上奬其忠勇。進秩賜緋。: 당시 나는 금군(禁軍)을 총괄하여 좌우에서 성상을 모셨는데, 성상께서 그의 충성과 용맹을 장려하고 품계를 올려주어 당상관에 제수하는 것을 보았다.未數年。自郡守躐躋節鎭。不世之遇也。知帥事之終始者。宜莫如余。而余嘗登斯亭。以興廢重新之責。有所期望焉。則敍列顚末。不敢以不文辭。是爲記。: 몇 년 지나지 않아 군수에서 절도사로 승진하였으니 세상에 드문 지우이다. 절도사에 관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사람으로는 나만한 사람이 없고, 내가 예전에 이 정자에 올라 무너진 것을 일으켜 거듭 새롭게 하는 책임을 기대한 적이 있으니, 그 전말을 차례로 기록하며 감히 글재주가 부족하다고 사양하지 않고 이것을 기문으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주-D001 / 영보정 중수기 : 이 글은 저자가 1,641년(仁祖 19)에 당시 충청 수사로 있던 민진익(閔震益)의 요청으로 지은 것이다. 영보정은 충청남도 보령의 수영(水營) 안에 있던 정자로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디,
➊ 〈湖西之近海郡縣。謂之內浦。內浦一帶。: 호서(湖西)의 바다 가까이에 있는 군현(郡縣)이 있다. 내포(內浦)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위의 주무대(主舞臺)는 “호서(湖西)”땅이고, 이곳 중에서도 바다 또는 큰 호수(湖水) 가까이에 있는 군현(郡縣)이요, 바로 내포(內浦)라는 곳이다.
핵심(核心)은 “호서(湖西 : 湖右)”라는 땅의 이름이다. 말 그대로 보면 : 「호수(湖水)의 서(西)쪽 땅」을 말하는 것이니, 한반도(韓半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땅임을 알 수 있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충북(忠北) 제천(堤川)’에 있는 의림지(義林池)를 호수(湖水)라 빙자(憑藉)하고는 그곳의 서(西)쪽을 호서(湖西)라고 했다고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능숙(能熟)하게 해댄다.
그렇다면 “호동(湖東)인 호좌(湖左)”는, “제천(堤川) 의림지(義林池)” 동(東)쪽의 “영월, 평창, 정선, 태백, 영주. 봉화 등지”를 말하는 것인가?
그럼 「“호남(湖南)” 땅은, 바로 경상북도(慶尙北道) 땅을 말하는 것이 된다. 바로 의림지(義林池) 남(南)쪽 땅이기 때문이다.」 맞는 말인가? 허무맹랑(虛無孟浪)한 말인가?
또 “전라남북도(全羅南北道)” 땅의 별칭(別稱)이 뭔가? “이곳은 차령산맥(車嶺山脈) 이남(以南)이라서 영남지방(嶺南地方)인가?”
「호서(湖西)란 호우(湖右)」와 같은 말이고 : 「동정호(洞庭湖) 서(西)쪽 땅」을 말하는 것이고, 사천성(泗川省)의 옛 촉(蜀) 땅을 지칭(指稱)하는 말이다. 전편(全篇)에서 설명(說明)했던 “회좌(淮左)=회동(淮東)”의 대칭(對稱)되는 “회우(淮右)=회서(淮西)”땅이 바로 사천성(泗川省) 땅을 말하는 이치(理致)와 같은 것이다.
➋ “보령(保寧)” 땅의 ‘영보정(永保亭)’에 대해서는 우리 카페(Cafe)에 ‘몇 회(回)’에 걸쳐 게재(揭載), 아주 자세(仔細)한 설명(說明)을 했기 때문에 간략(簡略)하게 말하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신익성(申翊聖) 왈(曰) : 余於庚辰秋。乞恩休沐。留憩斯亭。日夕徘徊。心甚樂之。亦不能無慨然者矣。: 나는 경진년【1,640, 인조(仁祖) 18年】가을에 휴가를 얻어 이 정자에서 머물러 쉬면서 밤낮으로 배회하며 마음으로 매우 즐거워하였는데, 또한 감개가 없을 수 없었다〉라고 한 것이다.
「천하(天下)」란 「하늘 아래의 온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곧 한반도(韓半島) 땅에서 “천하(天下)”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한반도(韓半島) 땅에 존재(存在)하는 많은 자연환경(自然環境) 요소(要素)에서 “천하(天下)의 ∼ ∼”라고 불리는 것이 있느냐? 하는 반문(反問)이다.
「천하(天下)의 명승지(名勝地)라고 해도 손색(遜色)이 없다」라고 하였다.
또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저자(著者)는 말하기를 : 〈世之論湖石亭樓之勝者,必以永保亭爲冠冕 : 세상에서 호우(湖右)의 누정의 뛰어난 경치를 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보정(永保亭)을 으뜸으로 꼽는다〉라고 하였다.
► ‘정말 안타깝고 미안(未安)’한 말씀이지만 : ‘보령(保寧)의 일반(一般) 시민(市民)’들 대다수(大多數)조차 ‘영보정(永保亭)’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어디에 있는지, 그것이 그렇게 유명(有名)한 것인지조차 모르고 지내는 경우(境遇)가 허다(許多)하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황학루(黃鶴樓)는 중국(中國)에 있다”라는 것을 모르는 분이 별로 없다.
➌ 무슨 말인가 하면 : 「천하(天下)의 명승지(名勝地)요, ‘호서(湖西)=호우(湖右)’ 땅의 으뜸 명승지(名勝地)라고 세상(世上)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 그곳에 사는 분들조차도 이걸 모르고 있다」라는 것이다. 이걸 누가 믿겠는가?
또 “보령(保寧)의 영보정(永保亭)”과 그 주변(周邊)을 보면 : 「그게 천하(天下)의 명승지(名勝地)냐? 그게 ‘호서(湖西)=호우(湖右)’ 땅의 명승지(名勝地)냐?」 할 정도(程度)로 특이(特異)하다거나 자랑할만한 그 어떤 지형지세(地形地勢)도 없다는 것이고,
「천하(天下)의 명승지(名勝地)로 손색(遜色)이 없다거나 황학루(黃鶴樓)보다 뛰어나다거나 호우(湖右) 땅의 영보정(永保亭)을 으뜸으로 친다」라고 했다면 : 「보령(保寧)의 내포(內浦) 땅은, 천하(天下)의 형승지지(形勝之地)였다」라는 말이자, 「호우(湖右) 땅의 뛰어난 형승지지(形勝之地)였다」라는 말과 같다. 과연 그럴까?
이곳 땅이 “천하(天下)의 형승지지(形勝之地)”라서 견학(見學)차 왔다는 관광객(觀光客)은 모르면 몰라도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평범(平凡)한 특출(特出)나지 않는 보통(普通)의 그저 그런 땅으로 바닷가의 땅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유명(有名)했던 ‘천하(天下)의 명승지(名勝地)’였던 “영보정(永保亭)”을 왜 보존(保存)하지 않고 버려두어 없어졌는가? 하는 질문(質問)이다. “본래(本來) 이곳에 영보정(永保亭)이라는 정자(亭子)는 없었다”라는 말이 올바른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 【지금 그곳에 있는 영보정(永保亭)은 최근(最近)에 향토(鄕土)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조그만 단층(單層) 정자(亭子)를, 무엇을 근거(根據)로 만들었는지조차 모른다.】
➠ 곧 〈천하(天下)의 명승지(名勝地), 호서(湖西 : 湖右)의 으뜸 명승지(名勝地)라는 말은 올바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땅은, 그 땅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 땅은 삼국시대(三國時代) “백제(百濟)의 땅”이었다고 거품을 물며 설명(說明)한다.
역사서(歷史書)에서는 말하기를 : 백제(百濟)를 가리켜 “물 많은 나라(澤國)”라고 했고, 또는 “남국(南國)”이라고도 했으며, “백성(百姓)들은 지대(地帶)가 낮고 습하며 더워 산(山)에 집을 짓고 산다”라고 하였다. 이런 옛 기록(記錄)을 생각하면 그곳이 어딘지는 다 알 수 있다.
즉(卽) “반도(半島) 땅 보령(保寧)이 천하(天下)의 명승지(名勝地)가 될 수 없고, 그곳 땅이 호서(湖西 : 湖右) 땅이 될 수 없다”라는 것이다. 이게 핵심(核心)이다.
「호서(湖西 : 湖右)」는, 동정호(洞庭湖)의 서(西)쪽 땅을,
「호좌(湖左)」는, 동정호(洞庭湖)의 동(東)쪽 땅을,
「호남(湖南)」은, 동정호(洞庭湖)의 남(南)쪽 땅을,
「호북(湖北)」은, 동정호(洞庭湖)의 북(北)쪽 땅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곳 동정호(洞庭湖)와 함께 어우러져 함께 있는 장강(長江)을 놓고는 : 강남(江南)【호남(湖南)】땅이니, 강북(江北)【호북(湖北)】 땅이니, 강우(江右)【호서(湖西 : 湖右)】 땅이니, 강좌(江左 : 江東)【호좌(湖左)】 땅이니 하고도 부른 것이다. 동정호(洞庭湖)를 기준(基準)한 것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이다.
백제(百濟)가 고구려(高駒驪)에 밀려 남(南)쪽으로 밀려난 시기(時期)의 역사서(歷史書)에서는 : 「백제(百濟)는 강좌(江左)【강동(江東)이자 호좌(湖左) 땅을 말한다】에 걸터앉아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충청도(忠淸道)가 호서(湖西 : 湖右) 땅’이라고 하면 : ‘경기도(京畿道)는 호북(湖北) 땅’이어야 맞는 말이다. 그럼 경기도(京畿道)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 것일까?
천하(天下)의 명승지(名勝地) 영보정(永保亭)과 호서(湖西) 으뜸 명승지(名勝地) “보령(保寧)” 땅은 동정호(洞庭湖)의 서(西)쪽 땅에서 찾으면 될 일이다. 그곳은 사천성(泗川省) 땅으로 네 개의 하천(河川)이 있다고 해서 사천(泗川)이 아니었던가! 이곳 ‘사천(四川)=사천(泗川)’ 땅에 시대(時代)에 따라「보령부(保寧府)도, 보령군(保寧郡)도, 보령현(保寧縣)도, 절도(節度)」 등도 있었으며, 청(淸) 때도 보령부(保寧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고 하였다.
정약용(丁若鏞)의 경세유표(經世遺表) 3권 / 천관 수제(天官修制) 군현분예(郡縣分隸)를 보면 : 「경기(京畿)를 봉천성(奉天省)이라 하고, 다음 남(南)쪽은 사천성(泗川省), 그다음 남쪽은 완남성(完南省), 또 남쪽은 무남성(武南省)이라 한다.」라고 하였을까?
경기(京畿)의 남(南)쪽은 충청도(忠淸道)다. 그러나 「정약용(丁若鏞)은 이곳을 “사천성(泗川省)”이라고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天官修制, 郡縣分縣 : 京畿曰奉天省。次南曰泗川省。次南曰完南省。又南曰武南省。東南曰嶺南省。其西曰潢西省。自京而東曰洌東省。自京而西曰松海省。又西曰浿西省。又西曰淸西省。自京而北曰玄菟省。又北曰滿河省。總之爲十二省也】
사천성(四川省 : 泗川省) : [중국어 위키백과] : 〈有天府之國之稱。位於長江上游,由四川盆地和川西高原山地兩大部分組成.有種說法認為四川得名於境內有長江、岷江、沱江、嘉陵江四條大川,但這僅僅是巧合,且不準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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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전서(定本 與猶堂全書) / 文集 卷十四 / 記 永保亭宴游記[영보정 연유기] :
〈世之論湖石亭樓之勝者,必以永保亭爲冠冕,昔余謫海美,嘗有意而未至焉。: 세상에서 호우(湖右)의 누정의 뛰어난 경치를 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보정(永保亭)을 으뜸으로 꼽는다. 옛날에 내가 해미(海美)에 귀양갔을 때, 마음은 있었지만 가보지 못했다. 乙卯秋,始從金井獲登斯亭,豈於亭有分哉? : 을묘년 가을에 나는 비로소 금정(金井)으로부터 이 정자(亭子)에 오를 수 있었으니, 어찌 정자와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余方以好奇遭貶。然凡天下之物,不奇不能顯,觀乎永保之亭,知其然也。: 나는 그때 기이한 것을 좋아함으로 인해 좌천되었었다. 그러나 천하의 사물이 기이하지 않으면 드러날 수 없다는 것을 영보정을 보고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山之在平陸者,非尖削峻截,不能爲名,唯突然入水如島,則雖培塿之隆,亦奇也。: 산이 육지에 있는 것은 깎아 세운 듯 뾰족하고 잘라 놓은 듯 우뚝하지 않으면 이름이 날 수 없으나, 갑자기 물 가운데로 들어가 섬처럼 되어 있으면 작은 언덕[培塿]처럼 조그맣게 솟아오른 것이라도 기이하게 보인다. 水之由江河而達于海,勢也,雖泓渟演漾,不足稱。唯自海突然入山爲湖,則不待波瀾之興,而知其奇也。: 물이 강하(江河)에서부터 바다로 흐르는 것은 부득이한 사세이므로, 비록 깊은 물이 넘실넘실 흘러가더라도 칭찬하기에 부족하나, 갑자기 바다에서 산속으로 들어가 호수가 되면, 그 물결치는 흥취는 기대할 수 없지만 그것이 기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姑麻之山,西馳數十里,蜿蜒赴海中,如鶴之引頸而飮水,此所謂山之突然入水而如島者也。: 고마산(姑麻山)이 서쪽으로 몇십 리를 내달아 꿈틀거리며 바다 가운데에 다다랐는데, 마치 학(鶴)이 목을 길게 빼고 물을 마시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이른바 갑자기 물 가운데로 들어가 섬처럼 된 것이요. 姑麻之湖,東匯數十里,環以諸山,若龍之矯首而戲珠,此所謂水突然入山而爲湖者也。: 고마호(姑麻湖)는 동쪽으로 돌아서 수십 리를 흘러나가는데, 여러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용(龍)이 머리를 들고 여의주(如意珠)를 희롱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이른바 물이 갑자기 산속으로 들어가 호수가 된 것이다. 永保之亭,據是山而臨是水,以之爲一路之冠冤,則曩所謂物不奇不能顯者非邪? : 영보정은 이 산에 의지하고, 이 호수에 임해 있기 때문에 이 지방의 으뜸이 된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사물(事物)은 기이하지 않으면 이름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時節度使柳公,【心源】 爲余具酒醴,而太學生申公,【宗洙】 詩人也。値中秋月夜,汎舟姑麻之湖,轉泊寒山寺下. : 그때 절도사(節度使) 유공 심원(柳公心源)이 나를 위해 술을 준비했고, 태학생(太學生) 신공 종수(申公宗洙)는 시인인데, 그와 함께 가을 달밤을 맞아 고마호에 배를 띄웠다가 길을 바꾸어 한산사(寒山寺) 아래에 배를 대었다. 復有歌者簫者,與登寺樓,令作流商刻羽之音. : 여기에는 또 노래하는 사람과 피리 부는 사람이 있어 그들과 더불어 절의 누대에 올라 좋은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余遷客也,愀然有望美人天一方之思。竝書此以爲永保亭記。나는 귀양온 사람이므로, 근심스러운 모습으로 저 하늘 한쪽에 계시는 임금[美人]을 우러러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이 마음 또한 여기에 같이 기록하여 영보정기(永保亭記)로 한다〉라고 기록(記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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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云 是 成 都 新 進 封 : 성도(成都) 수령이 새로이 진상한 것이라네」
► 낙전당집(樂全堂集) 4권 詩 七言絶句 宮詞 :
(一) 五步池塘十步樓 : 다섯 걸음 연못 열 걸음 누대. 金輿分日作春遊 : 금수레는 한낮에 봄나들이 한다 千行粉黛迎仚蹕 : 천 줄로 선 미녀들이 신선의 행차를 맞이하는데 特許昭容壓上頭 : 다만 맨 앞에 소용을 허락하네.
(其二) 中使朝朝魚鑰開 : 내시가 아침마다 궁궐 문을 열면 御筵還壓瑞蔥臺 : 서총대에서 어연이 성대히 베풀어지네 須臾天樂隨風便 : 잠시 동안 궁정 음악이 바람 따라 들려오면 知是三媛進餠來 : 바로 세 미인이 떡을 내오는 것이라네.
(其三) 雙鶴翩躚步輦回 : 두 마리 학 보련을 돌며 춤을 추고 春塘臺上綺筵開 : 춘당대 위로 화려한 연회가 열리네 宮娃引出處容舞 : 궁녀가 나와서 처용무를 추니 催賜纏頭金帛來 : 금과 비단 내와 전두를 서둘러 내리네.
(其四) 閶闔初開日映墀 : 창합이 처음 열려 궁전 뜰에 해 비추는데 別監催喚問安兒 : 별감이 심부름하는 아이를 재촉해 부르네. 相公沈菜尙書麪 : 상공에게는 김치를 상서에게는 면을 須及宮中水剌時 : 궁중의 수라 시간에 맞추어야만 하기에
(其五) 瑤函十襲紫絲籠 : 옥함을 열 겹 싸고 자색 실로 묶었으니 ➨ 云是成都新進封 : 성도(成都) 수령이 새로이 진상한 것이라네 錯落明珠大如栗 : 여기저기 박힌 진주가 밤알만큼 크고 黑貂被上綉盤龍 : 흑초피 위로 서린 용이 수놓아져 있네. [이하(以下) 중략(中略)]
➨ 〈云 是 成 都 新 進 封 : 성도(成都) 수령이 새로이 진상(進封)한 것이라고 하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성도(成都)”란 어느 곳을 말하는 것일까?
반만년(半萬年) 유구(悠久)한 한반도(韓半島)의 조선왕조(朝鮮王朝), 삼천리(三千里) 화려(華麗)한 금수강산(錦繡江山) 땅에서 “성도(成都)”란 도회지(都會地)는 없다.
그러나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은 성천도호부(成川都護府)를 줄여서 “성도(成都)”라고 불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게 정상적(正常的)인 역사해설(歷史解說)일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편의 도호부(都護府)를 보면 :
〈이천도호부(利川都護府),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장단도호부(長湍都護府), 강화도호부(江華都護府),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선산도호부(善山都護府),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 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 담양도호부(潭陽都護府), 순천도호부(順天都護府),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 서흥도호부(瑞興都護府),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 풍천도호부(豐川都護府),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 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 회양도호부(淮陽都護府), 철원도호부(鐵原都護府), 영흥대도호부(永興大都護府), 정평도호부(定平都護府),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덕원도호부(德源都護府), 북청도호부(北靑都護府), 갑산도호부(甲山都護府), 경성도호부(鏡城都護府), 경원도호부(慶源都護府), 회령도호부(會寧都護府), 종성도호부(鍾城都護府), 온성도호부(穩城都護府),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 부령도호부(富寧都護府), 숙천도호부(肅川都護府), 창성도호부(昌城都護府), 삭주도호부(朔州都護府), 귀성도호부(龜城都護府), 영변대도호부(寧邊大都護府), 강계도호부(江界都護府)〉들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그렇다면 위의 도호부(都護府)들도 성천도호부(成川都護府)처럼 ‘성도(成都)’라고 불렀을까? 그럼 강계도호부(江界都護府)는 ‘강도(江都)’요, 귀성도호부(龜城都護府)는 ‘귀도(龜都)’라는 식으로 불렀을까? 이건 ‘한글 해설서’에서 등장(登場)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➊ 新增東國輿地勝覽 54권 / 평안도(平安道) / 성천도호부(成川都護府)
建置沿革 : 〈本沸流王松讓故都。高句麗始祖東明王自北扶餘來,都卒本川,松讓以其國降,遂置多勿都,封松讓爲多勿侯。麗語謂復舊土爲多勿。高麗太祖十四年,置剛德鎭。顯宗九年,改成州防禦使,後爲知郡事。本朝太宗十五年,改今名,例陞爲都護府。世祖朝置鎭。: 본래 비류(沸流)와 송양(松讓)의 옛 서울이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東明王)이 북부여(北扶餘)로부터 와서 졸본천(卒本川)에 도읍할 때 송양이 그 나라를 바치고 투항하였으므로 드디어 다물도(多勿都)를 설치하고 송양을 봉하여 다물후(多勿侯)로 하였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복구하는 것을 다물(多勿)이라고 하였다. 고려 태종 14년에 강덕진(剛德鎭)을 두었고, 현종 9년에 성주 방어사(成州防禦使)로 오다가 뒤에 지군사(知軍事)로 하였다. 본조 태종 1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지금 예에 따라 도호부로 승격하였으며, 세조 때에 진을 두었다.〉
鎭管 : 〈郡五。德川,价川,慈山,順川,祥原。縣五 : 陽德,孟山,三登,江東,殷山。: 군(郡)5 : 덕천(德川)ㆍ개천(价川)ㆍ자산(慈山)ㆍ순천(順川)ㆍ상원(祥原) / 현(縣)5 : 양덕(陽德)ㆍ맹산(孟山)ㆍ삼등(三登)ㆍ강동(江東)ㆍ은산(殷山)〉
郡名 : 〈沸流,多勿,卒本扶餘,剛德鎭,松讓,成州。: 비류(沸流)ㆍ다물(多勿)ㆍ졸본부여(卒本扶餘)ㆍ강덕진(剛德鎭)ㆍ송양(松讓)ㆍ성주(城州)〉
形勝 : 〈土壤肥美,山河險固。[三國史] : 땅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천이 험하고 견고하다. [삼국사(三國史)에 있다]〉
題詠 : 〈江山猶是馬韓天。張脩詩:院宇雖非松讓日,江山猶是馬韓天。云云 : 강산은 오히려 마한의 하늘이로다. 장수(張脩)의 시에, “원우(院宇)는 비록 송양(松讓)의 시대 아니지만, 강산은 오히려 마한의 때로다.” 하였다〉
이곳은 비류(沸流)와 송양(松壤)의 고향(故鄕)인데, 송양(松壤)이 항복(降伏)하니 다물도(多勿都)라 하고, 송양(松壤)을 다물후(多勿侯)로 봉(封)했다고 했으니, 당시의 고구려(高駒驪) 동명왕(東明王)은 태왕(太王) 또는 천자(天子)였다는 뜻과 같다.
이곳은, 〈郡五。德川,价川,慈山,順川,祥原。縣五 : 陽德,孟山,三登,江東,殷山。: 군(郡) 5 : 덕천(德川)ㆍ개천(价川)ㆍ자산(慈山)ㆍ순천(順川)ㆍ상원(祥原) / 현(縣) 5 : 양덕(陽德)ㆍ맹산(孟山)ㆍ삼등(三登)ㆍ강동(江東)ㆍ은산(殷山)〉이 있었고,
가장 중요(重要)한 하나는 : 이곳의 하늘(天)은, 마한(馬韓)의 것이라는 것이니, 그 아래는 “마한(馬韓)의 땅이었다”라는 것이다. “마한(馬韓)”의 하늘(天)은, 평안도(平安道) 성천(成川)에 있고, 마한(馬韓) 땅은, 충청(忠淸)과 전라(全羅) 땅에 있을 수 있다면 : 당시(當時)의 삼한(三韓)의 “한국(韓國)”은, ‘천상계(天上界)의 나라(國)’였다는 뜻과 같다.
곧 「“한반도(韓半島)” 땅에서는 불가능(不可能)한 구도(構圖)다」
【천상계(天上界) : 십계(十界)의 하나. 십선(十善)을 닦으면 간다고 하는 하늘 위의 세계(世界)를 이르는 말이다. ➨십선(十善) : 십악(十惡)을 저지르지 아니하고 십계(十戒)를 지키는 일. 전세(前世)에 십선(十善)을 행(行)한 과보(果報)로 현세(現世)에 받는다는 천자(天子)의 지위(地位) ➨십악(十惡) : 열 가지 악(惡)한 행위(行爲) :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망어(妄語), 기어(綺語), 악구(惡口), 양설(兩舌), 탐욕(貪慾), 진에(瞋恚), 사견(邪見)이다】
〈沸流,多勿,卒本扶餘,剛德鎭,松讓,成州。: 비류(沸流)ㆍ다물(多勿)ㆍ졸본부여(卒本扶餘)ㆍ강덕진(剛德鎭)ㆍ송양(松讓)ㆍ성주(城州)〉라고 하였음에도 “성천(成川)”이라고 했다는, 어떤 연유(緣由)나 구전(口傳)되는 이야기, 지명(地名)과 관계(關係)되는 고증(考證)이 없다. 이곳에는 ‘성천(成川)’이 아닌 ‘비류강(沸流江)’이 있는데, 대동강(大同江) 지류(支流)라고 한다.
➋ 대동지지(大東地志) 성천(成川) 조를 보면 : 이곳을 가리켜 “세상(世上)에서는 무산 12봉(峯)이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紇骨山。 西北二里。 有攢峯十二, 狀如劍戟。 世稱巫山十二峯, 名曰: 碧玉, 金爐, 天柱, 夢仙, 高唐, 陽臺, 神女, 朝雲, 暮雨, 笙鶴, 紫芝, 火柱, 次第列立。】
➌ 「성도(成都)」는 말 그대로 「사천성(泗川省)의 성도(成都)」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성천도호부(成川都護府)”를 줄여서 “성도(成都)”라고 한다면? “기막힌 이야기”가 되어 T.V 드라마 제목(題目)이 되는 것이다.
○ 사대부(士大夫)들의 글을 보며 하나하나 모두를 설명(說明)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 엄청난 분량(分量)을 과연(果然) 누가 그걸… …오늘날의 현실(現實)을 생각해 보면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다.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를 “한반도(韓半島) 왕조(王朝)”라고 한다면 : 그 땅의 지형지세(地形地勢)나 자연환경(自然環境) 대부분(大部分)은, 반만년(半萬年) 이어 똑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 ‘천지(天地)간의 이치(理致)’다.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천지(天地)간의 이치(理致)를 벗어난 천상계(天上界)에 존재(存在)했던 왕조(王朝)였다면 가능(可能)한 일일까? 이건 그저 일장춘몽(一場春夢)이요, 인간(人間)이 도(道)를 닦으면 죽지 않는다(不死)는 말과 같은 허무맹랑(虛無孟浪)힌 얘기일 뿐이다.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한반도(韓半島) 땅에 없었다. 그러나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반도(半島) 땅에 있다. ►►►「이건 고토(故土)를 빼앗기고, 쫓겨난 것이다. 다른 건 다 잊어도 이것만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2024년 06월 02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다음 게재물은,
"松都(송도)와 成都(성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보기로 할까 합니다.
사대부들이 남겨 놓은 문제집에서 말하는 내용에 따라
"송도와 성도"가 같은 곳인가?
아니면 "전혀 관계없는 별도의 도회지"인가?
하는 문제제기를 해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