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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4일 [부활 제3주일]
루카 24,35-48
나에게 새겨진 부활의 증거: 사명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처럼 당신을 믿지 못하는 사도들에게 여러 방법으로 당신의 실제
부활을 증명해내십니다.
부활을 믿는 사도들은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도록 그들을 파견하십니다. 이는 ‘사명’이란 것이 예수님의 부활과 별개가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꿈이나 목적, 사명이 없이 살 수 있을까요? 사명이 없으면 생존이 목적이 되고 그러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 결국 인생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사명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빅터 프랭클도 지옥과 같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가 자신이 연구한 것을 책으로 내겠다는 신념 하나였다고 말했습니다.
찰스 두히그의 『습관의 힘』에는 리자 앨런의 사례가 소개되었습니다.
그녀는 16세부터 술과 담배를 시작했고 항상 비만에 시달렸습니다.
어떤 직장에서도 1년 이상 버틴 적이 없고 항상 빚에 쪼들려야 했습니다.
수치와 무기력감에 걸핏하면 심하게 화를 냈고 침대에 누워 눈물만 흘렸습니다.
급기야 남편도 더 이상 그녀와 살 수 없다며 이혼하자고 하여 절망에 빠졌습니다.
남편의 이혼 통보를 받고 리자는 마지막 통장을 털어 이집트 카이로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피라미드를 직접 보고 죽는 게 소원이었기 때문입니다.
호텔을 나온 리자는 택시를 타고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로 이어지는 비포장도로를 달렸습니다. 이때 광활한 사막을 보며 묘한 욕망이 솟구쳤습니다.
사막을 한번 횡단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녀는 1년 뒤 사막을 걸어서 횡단할 결심을 합니다.
그 후 6개월 동안 리자는 담배를 끊고 조깅에 매달렸습니다.
덕분에 식습관이 바뀌었고 일을 대하는 자세와 잠을 자는 방법도 달라졌습니다.
덩달아 통장에는 돈이 쌓여갔습니다.
다시 학교에 돌아가 공부를 시작했고 집을 마련했으며 다른 남자를 만나 약혼까지 하였습니다.
리자 앨런이 걸어서 사막을 횡단하였을까요? 아닙니다.
11개월 후 다시 돌아온 리자는 6명의 여행객과 함께 에어컨은 물론이고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잔뜩 싣고, 천막과 지도, GPS와 송수신 겸용 무전기까지 설치된 대형 자동차로 즐거운 마음으로 사막을 횡단하였습니다.
리자 엘런을 통해 우리는 삶의 목표가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자세를 결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막을 횡단하겠다는 욕구는 자기 안에서 저절로 생겨난 것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 생존 욕구 외에 자기를 이기고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욕구는 결코 저절로 생겨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도, 직장에 취직하고 싶은 마음도 다 나에게 사랑을 준 누군가에게서 그 욕구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감사해서 그 욕구를 대신 충족시켜주며 사는 게 인간입니다.
따라서 내가 그러한 목표나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보답하고 칭찬받을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모든 노력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가 되고 그래서 또 의미를 잃습니다.
김미경 강사가 그런 예입니다.
김미경 강사가 일 년에 수십억을 벌고 TV쇼까지 하며 가장 잘 나갈 때 가장 심한 우울증과 불안증에 시달렸습니다.
논문표절 의혹으로 강의가 없어져서 무작정 걷기만 할 때 자기 내면에서 “괜찮다, 사랑한다!”라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이후 그녀의 삶은 같지 않았습니다.
같은 고생을 하지만, 자기를 위한 고생이 아니라
사랑하는 목소리 주인공을 위한 고생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NBA 2013~2014시즌 MVP를 차지한 케빈 듀런트의 수상소감을 들어봅시다.
“아무도 우리가 성공하리라고 믿지 않을 때도 엄마는 끊임없이 믿음을 주셨고 길거리에 노숙자가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따뜻한 옷을 입혀주시고, 식탁에 음식을 차려주시고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을 때도 엄마는 배부르다며 너희들 먹으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굶주린 배로 잠이 드셨죠.
어머니는 저희를 위해 항상 희생하셨어요. 어머니가 MVP이십니다.
”[출처: 포크포크, 세계를 감동시킨 어느 MVP 선수의 레전드 수상소감]
케빈 듀런트처럼, 축구선수 메시도 골을 넣은 다음에 자신을 믿어주었던 할머니에게 기도를
올립니다.
그에겐 할머니가 살아있습니다.
그의 사명이 곧 할머니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목적이 있으면 그것을 주신 분도 계십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수행할 때 그는 이미 부활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14일 [부활 제3주일]
루카 24,35-48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요 불신자이며, 먼지요 티끌인 우리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우선 먹고살아야 했으므로, 다시금 전에 종사하던 생업으로 복귀했습니다.
한 바탕 꿈이었나, 생각하며 다시금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고기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강렬했던 예수님과의 만남, 그분과 동고동락했던 공생활 기간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작업이 끝나면 제자들은 호숫가에 둘러앉아 생선을 구워먹으며, 스승님에 대한 걱정, 죄책감, 송구함을 주제로 두런두런 대화를 이어갔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전해집니다.
엠마오 길에서 그분을 만난 두 제자는 신명이 난 나머지, 목소리를 높여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었습니다.
다들 엠마오 제자들의 목격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 때, 누군가가 슬그머니 제자들 등 뒤에 나타났습니다.
돌아보던 제자들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세상에!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온화한 표정의 예수님께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며 더 가까이 다가서십니다.
의혹으로 가득한 제자들과 직접 접촉하십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그래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청하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제자들이 그분께 큼지막한 생선 소금구이 한 토막을 건네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맛있게 잡수셨습니다.
참으로 자상하고 친절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하느님,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실 부활 예수님께서, 한 인간이 건네시는 구운 물고기 한토막을 드셨습니다.
아직도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전하기 위해, 한 인간과 마주앉아 인간의 음식을 드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이요 크나큰 자기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부활 이전의 예수님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시고, 육의 세계를 넘어서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길이 먼 제자들, 신앙의 깊이가 얕은 제자들을 영적동반하시기 위해 또 다시 자신을 낮추십니다.
인간들 사이로 육화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인간들과 친히 접촉하시고 소통하십니다.
그들이 건네는 하찮은 물고기 한 토막을 맛있게 받아 드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요 불신자이며, 먼지요 티끌인 우리 인간 존재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고 지극정성으로 사랑하십니다.
또 다시 우리를 당신 구원 사업의 파트너로 선택하십니다.
그런 그분의 뜨거운 사랑은 불신과 의혹 투성이인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들의 나약함을 강건함으로 바꾸십니다. 마침내 그들을 주님 부활의 당당한 증인으로 서게 하십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날 때 더 이상 우리 안에 어둠이 머물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낙담하거나 슬퍼하지 않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활기찬 사랑에 힘입어 담대해지고 당당해집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고 뜨거운 마음으로 예수님 부활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 모든 변화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에 끼어드실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될 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3주일 강론>
(2024. 4. 14.)(루카 24,35-48)
<왜 증인이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4-48)”
여기서 “......을 해야 한다.” 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라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의 계획’대로 된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리 정해져 있었던 어떤 시나리오대로 진행된 일이라는 뜻은 아니고,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뜻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다고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이 일의 증인이다.”는 “이 일을 증언하여라.”입니다.
신앙인은 메시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증언하는 증인입니다.
그 증언이 곧 복음 선포(‘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신 것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증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마태오복음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마태 28,20).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과 예수님에 관해서 ‘가르치는 일’은 사실상 하나의 일입니다.>
1) 왜 증언해야 하는가?
“그냥 조용히 성당에 다니면서, 나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되는가?” 안 됩니다.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나 하나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벅차고, 나 하나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힘들다. 다른 사람들의 구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과 사목자들이 ‘증언해야 한다. 증인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만 하고, ‘증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와 ‘증언을 해야 하는 이유’는 말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증언을 해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지나쳐서 압박과 강요로 보일 때도 있는데, 그것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마태 23,4) 바리사이들 같은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 덕분에 ‘모든 멍에와 짐’에서 해방되는 생활입니다(마태 11,28-30).
예수님 때문에 무거운 멍에에 묶이고 힘든 짐을 지는 생활이 아니라......
이유도, 목적도 모르면서 증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증언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세상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증인이 되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니까, 내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눔’은 곧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은 신앙의 핵심이고 본질입니다.
따라서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일은(선교활동은)
모든 신앙인이 당연히 실행해야 하는 본분입니다.
<사랑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만일에 의무감으로(억지로)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 없이 하는 것이라면 신앙생활이든 선교활동이든 무엇이든 모든 일이 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 사랑으로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해야 합니다.>
3) ‘예수님의 증인’이 되려면, 우선 먼저 자기 자신 안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과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고 있어야 하고, 자기 자신의 부활도 믿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것을 증언할 수는 없습니다.
<믿는다고 생각하는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 인생 전부와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려면, ‘기쁨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의무감만으로는 선교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기쁜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그 소식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자기는 기뻐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은 ‘빈말’을 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살다 보면 고난과 시련을 겪을 수도 있는데, 그럴 때에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믿음과 사랑과 기쁨이 한결같이 유지되는 모습 자체가 ‘신앙의 증언’이 됩니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변하고 흔들린다면,
아무것도 증언하지 못합니다.
‘신앙의 증언’은 말로 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해야 합니다.
‘말’과 ‘삶’이 다르면 거짓 증언이 되어버립니다.
<남에게 신앙을 권고하면서 내 믿음이 더욱 단단해지고, ‘신앙의 기쁨’을 나누면서 내 기쁨도 더욱 커지고, 주님의 사랑을 나눌 때 내가 더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선교활동은 남을 위한 일이면서도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고, 자기 자신에게 먼저 공로가 되는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