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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예산 문인
김창배
예산은 충남의 북서쪽에 위치한다. 조선시대 동서남북으로 공주, 홍성, 서산, 아산과 당진을 경계로 중앙이다. 예산은 넓은 예당평야와 가야산 등 명산이 아름답다.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이 늘 왕래하며 시를 읊었다. 예산은 문향의 고장이다. 조선시대 예산, 덕산, 대흥 지역의 문인으로 활동했던 인물은 많다. 그 중 김구, 이산해, 이경전, 신계영, 조익, 박두세, 이남규, 여주이씨가문, 윤봉구, 현상벽, 한홍조, 김정희, 남정일헌, 이담, 조극선 등을 들 수 있다.
자암 김구〔金絿, 1488 ∼1534〕는
김굉필(金宏弼)[1454~1504]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의 학문은 도학을 주로 하는 경학의 연구가 극에 달했다. 시문에 능숙하였다. 조선 전기 서예계의 4대가로 손꼽힐 정도로 글씨에도 뛰어났다. 인수체라는 독특한 필체를 남겼다. 1533년(중종 28)그의 나이 46세 때 14년의 유배에서 풀려 예산 신암면 종경리로 돌아왔다. 신암면 종경리에 4대손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분묘유적으로 가치가 있다. 사후에 예산 덕잠서원에 배향되었다.
그의 저서는 『자암집(自庵集)』,화전별곡(花田別曲)』과『자암필첩(自庵筆帖)』,『우주영허첩(宇宙盈虛帖)』,『이겸묘지(李謙墓誌)』필첩이다.
그의 한시 『석류』와 『배꽃』소개 한다. 석류는 여섯살 때 지은 시조이다
석류
보물을 아끼면서 몸을 아낄줄 몰랐다니
고호의 어리석음이 가소롭구나
어쩌다가 스스로를 아끼지 못하여
몸을 갈라 밝은 진주를 숨겼단 말인가?
배꽃
飛舞翩翩去却回 倒吹還欲上枝開
無端一黏絲網網 時見蜘蛛捕蝶來
펄펄 날던 춤사위 갔다간 돌아오고
거꾸로 불어가선 위 가지에 피려하네.
어쩌다 한 조각이 거미줄에 걸리자
거미가 나빈 줄 알고 잡으려고 오더라.
이담〔李湛, 1510 ∼1574〕는
아호는 정존재이다. 김광필의 문인이다. 현 북쪽 고산면(高山)에 살았다. 지금의 고덕면 지곡리이다. 화암서원 배향되었다.
그의 저서는 『독서연주(讀書鉛朱)』, 『정존수필(靜尊隨筆)』, 『정존재집(靜存齋集)』이다.
아계 이산해〔李山海, 1539∼1609〕는
선조 때 8대 문장가 이다.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가 대술면 방산리에 묘소를 정한 후 자손들이 대술면에 세거하였다.
그의 저서는 『아계유고』, 문집 『아계유고(鵝溪遺稿)』이다.
이산해의 한시 ‘포구의 풍경’ 『즉시」소개한다.
卽事/생각나는 대로
晩潮初長沒汀洲 / 저녁 조수 밀려들어 백사장은 잠겼는데
島嶼微茫霧未收/ 섬들은 아스라이 안개 속에 숨어 있네.
白雨滿船歸悼急/ 소낙비 배에 가득 노 젓기 바빠지고
數村門掩豆花秋/ 마을마다 문 닫아건 콩 꽃핀 가을 날
이경전〔李慶全, 1567∼1644〕는
전라도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석루유고(石樓遺稿)』 목판본은 대술면 방산리에 있는 아버지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사당에 소장되어 있다. 당대 문필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저서는『석루유고(石樓遺稿)』이다.
밤새 폭풍우가 휘몰아쳐 관역의 객관에 든 나그네의 잠을 설친 이경전의 한시「비바람」소개한다.
大風終夜雨(비바람)
終宵風雨撼寒扉 / 비바람 밤새도록 찬 사립문 흔들고
客館孤燈照壁微 / 객관의 외론 등불 희미하게 벽 비춘다.
却到天明難早發 / 날 밝아도 일찌감치 출발키는 어려우니
郵僮相語怕霑衣 / 역말 하인 옷 젖을까 겁난다고 말들 하네.
신석 신계영〔辛啓榮, 1557∼1649〕는
정헌(靖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조선 중기 예산의 모습과 생활상을 시로 표현했다. 「월선헌 십육경가」는 1655년 벼슬에서 물러나 예산으로 내려온 후 같은 해 10월에 지은 가사로, 그의 거처 월선헌에서 누린 예산의 사계절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의 저서는 『선석유고(仙石遺稿)』, 『선석유고』에 수록된 시조 「연군가(戀君歌)」·「탄로가(歎老歌)」·「전원사시가(轉園四時歌)」이다.
「전원사시가(轉園四時歌)」소개한다
봄날이 점점 길어지니 남은 눈이 다 녹았다.
매화는 벌써 지고 버들가지 누르렀다.
아이야 울타리 잘 고치고 채소밭 갈게 하여라
볕든 둑에 풀이 기니 봄빛이 늦어 있다.
작은 정원 매화는 밤비예 다 피었구나
아이야 소 좋게 먹여 논밭 갈게 하여라
남은 꽃 다 진 후에 녹음이 깊어 간다.
대낮의 외따로 떨어진 마을에 닭이 우는구나.
아이야 계면조 불러라 긴 졸음 깨우자.
정원 숲이 적막한데 북창에 비꼈으니
거문고 놀아라 낮잠을 깨우는구나
(종장 빠짐)
흰 이슬 서리 되니 가을이 늦었구나.
긴 들판의 곡식들은 누런 빛이 되었구나.
아이야 빚은 술 걸러라 추흥겨워 하노라.
동쪽 울에 국화 피니 중양절이 거의로다
자채로 빚은 술이 아직 아니 익었느냐
아이야 대게와 닭으로 안주 장만하여라
북풍이 높이 부니 앞 산에 눈이 내린다.
처마의 찬 빛을 보니 석양이 거의 되었구나.
아이야 콩죽 익었느냐 먹고 자려 하노라
어제 놓은 구들 오늘에야 채 따뜻하니
긴 잠 겨우 깨니 아직 날이 높아 있다
아이야 서리 녹았느냐 깨고 자고 하노라
이봐라 아이들아 새해 온다고 즐거워 마라.
야단스러운 세월이 젊은 시절을 앗아 가느니라.
우리도 새해 즐거워 하다가 이렇게 백발이 되었노라.
이봐 아이들아 날 샌다 기뻐 마라
자고 새고 자고 새니 세월이 며칠 가리
백년이 급하게 지나니 나는 심란하노라
조극선〔趙克善, 1595 ∼1658〕은
1595년(선조 28) 예산군 봉산면 효교리에서 태어났다.
조선시대 「輿地圖書』에 ‘禮山縣’ 〔인물(人物)〕편에 나온 문인이다.
그의 저서는『야곡집(冶谷集)』, 일기저술『삼관기』,『인재일록(忍齋日錄)』, 『야곡일록(冶谷日錄)이다.
포저 조익〔趙翼, 1579 ∼1655〕는
신양면 신양리 117에 묘가 있다. 시문에 능하며 풍양인(豐壤人)이다. 예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가 현실정치의 부패 앞에서 정치세계를 포기하고 운둔의 길을 택했을 때와 영면의 세계로 운동을 달리한 이후 평가가 높다.
그의 저서는 『곤지록(困知錄)』·『중용주해(中庸註解)』·『대학주해(大學註解)』·『서경천설(書經淺說)』,『포저집(浦渚集)』 , 『역상개략(易象槪略)』이다.
동암 박두세〔朴斗世, 1654∼1733)〕은
성장기에 예산군 대흥면 금곡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1678년(숙종4)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집필을 하였다. 1682년(숙종 8)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의금부도사, 진주목사, 지충추부사 지냄. 문장에 능하였으며 운학(韻學)에도 매우 밝았다. 묘소는 대흥면 갈신리에 있다.
그의 저서는「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삼운보유(三韻補遺)」, 「증보삼운통고(增補三韻通考)」이다.
이용휴〔李用休, 1708∼1782〕는
고덕면 상장리에서 태어났다. 학자이면서 동시문학인이며 시인이다. 그는 목민관으로 해야 할 직무와 백성을 다스리는 방도를 시와 현실을 직시하며 백성의 애환을 노래와 목민관의 소임을 읊은 작품이 많다. 묘소는 고덕면 상장리에 있었다. 후손이 1987년강원도 원주시 매지리 매산묘원으로 이장해 갔다.
그의 저서는 『탄만집』,『혜환시초(惠寰詩鈔)』, 『혜환잡저(惠寰雜著)』, 『혜환시집(惠寰詩集)』, 「송신사군광수지임연천(送申使君光洙之任漣川)」이다.
젊은 엄마가 맛있는 것 사 달라고 앙앙 우는 아이를 달래는 그림을 보고 그 여백에 적은 이용휴 한시 제미인희영도(題美人戱嬰圖) 소개 한다.
제미인희영도(題美人戱嬰圖)
玉指尖頭擧示之 / 옥같은 손끝을 들어서 보여주니
銅錢兩箇貫靑絲 / 동전 두 닢 푸른 실에 꿰어져 달랑대네.
買飴買餠隨兒願 / 엿 사 먹든 떡 사 먹든 네 원대로 할 터이니
更勿啼呼惱阿彌 / 자꾸 울어 네 어미 속 썩게 하지 마려무나.
이병휴〔李秉休,1710∼1776〕은
덕산현 장천리 출생했다, 평생선비로 살아가면서 한시 작품을 남겼다. 그의 묘는 고덕면 상장리에 있었으나 후손이 강원도로 이장하였다.
그의 저서는 시집 「정산시고(貞山詩稿)」,「관혼례(冠婚禮) 상제례보(喪祭禮補)」,「잡기(雜記)」,「성호선생예설(星湖先生禮說)」, 「대학심해」이다.
이삼환〔李森煥, 1729∼1813〕은
벼슬길에는 오르지 못했다. 예산지역에서 문학적 명성은 높았다. 그는 이병휴의 호적에 입양되면서 덕산의 장천으로 이사 왔다. 주변의 승경지를 유람하며 시를 읊어 다수 작품을 남겼다.
그의 저서는 문집『소미산방장(少眉山房藏)』, 『소미산방급고경(少眉山房汲古經)』,『목재영언(木齋詅言)』,『금삼품(金三品)』, 『백가의(百家衣)』이다.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은
조선조 영조, 순조 연간의 문인이며 천주교도 인이다.
그의 저서는 『금대관집(錦帶館集)』, 『시문초(詩文艸)』, 『시문초』, 『시문(詩文)』, 『금대시문초(錦帶詩文抄)』, 『금대전책(錦帶殿策)』,『금대집(錦帶集)』이다.
병계 윤봉구〔尹鳳九, 1683∼1767〕은
덕산 사람으로 호론파(湖論派)인 한원진과 함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전개하며 호락논쟁에 참여한 중심인물이다. 그가 덕산면 상가리 일대의 가야산 계곡에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빗댄 지명을 붙여 현재의 가야구곡(伽倻九曲)이 되었다.
그의 저서는 60권 30책의 『병계집(屛溪集)』이 있다
현상벽〔玄尙壁, 1673∼1731〕은
예산 사람으로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여 외암 이간과 함께 낙론파(洛論派)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계승·발전시켰다. 예산읍 관작리에 송시열(宋時烈)·권상하 등을 배향하는 사우인 집성사(集成祠)의 건립을 주도하였다.
그의 저서는『관봉유고(冠峰遺稿)』이다.
한홍조〔韓弘祚, 1681∼1712〕는
강필팔학사 중 한명이다. 예산 사람으로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을 갈고 닦으며 일생을 보냈다.
그의 저서는『강상문답(江上問答)』, 『동유록(東遊錄)』, 『구봉선생래파변(九峰先生來派辯)』이다.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다, 경주김씨(慶州金氏) 일문이 예산과 관련을 맺게 되는 것은 김정희의 증조할아버지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입향한 이후부터이다. 그는 박제가(朴齊家)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선행 실학자의 실증적 연구 방법을 계승하는 동시에 청나라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실사구시적인 새로운 경학을 수립하였다. 서예에 있어서도 추사체(秋史體)라는 서체를 남길 만큼 조예가 깊었다. 그의 고택과 묘소, 필적 암각문 등의 유적이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남아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져 저서는 생략했다.
수당 이남규〔李南奎 1855∼1907]는
한말의 문신이자 독립운동 가이다. 신채호(申采浩)의 스승이기도 하다. 관직에 있으며 일제에 강하게 대응할 것을 수차례 상소하였다
그의 저서는『수당집(修堂集)』과『기삼비사(記三婢事)』이다.
남 정일헌〔貞一軒 남씨, 1840∼1922〕는
그의 남편은 성대호(成大鎬)이다. 그녀는 16세에 예산의 성씨 집안으로 시집와 20세에 남편을 잃었다. 남편을 여의고 슬픔을 견디지 못해 나뭇더미에 불을 붙여 분신하려 했으나 시어머니가 구원하고 타일렀다. 『주역』과 『시경』 탐독했다. 도고산과 덕봉산 아래 있던 자신의 집을 도운각(道雲閣)이라 이름 짓고 정일헌(貞一軒)이라는 편액을 붙였다. 정일헌 편액의 ‘정일(貞一)’은 “사물의 변화는 무궁하나 그 이치는 하나로 돌아간다.”라는 『주역』의 한 구절을 딴 것이다. 이에 남씨의 호가 ‘정일헌’이 되었다.
1894년 11월, 간양리 앞에서는 북접 동학군과 관군의 관작리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정일헌은 피난을 하면서 자신의 일부 원고를 불태웠다. 이후 남아 있는 원고를 모아 1896년 경 시문집을 간행하고자 조선 말기의 학자 이건창(李建昌)의 서문까지 받아두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일헌(貞一軒)남씨(南氏) 사후 양자 성태영(成台永)이 어머니의 유고 시를 모아 1923년 정일헌시집(貞一軒詩集)』간행했다.
그녀의 저서는「정일헌시집(貞一軒詩集)』이다.
「존구이구명사행차파주(尊舅以求螟事行次坡州)』는 아직 양자가 없을 때 시아버지가 파주에 양자를 구하러 간일을 읊은 시이다.
尊舅以求螟事行次坡州(존구이구명사행차파주) 1
此身無子又無夫(차신무자우무부) 이 몸은 아들 없고 남편도 없어
只恃舅姑竟失姑(지시구고경실고) 시부모만 믿었으나 끝내 시어머니 여의었네.
望弟生兒兒未育(망제생아아미육) 시동생의 아들 바랐으나 기르지 못했으니
何時蜾臝負蒲蘆(하시과라부포로) 어느 때에나 양자를 데려올 수 있으리오?
尊舅以求螟事行次坡州(존구이구명사행차파주) 2
他人有子我求螟(타인유자아구명) 남들은 자식 있으되 나는 양자를 구하니
病舅登程淚幾零(병구등정루기령) 병든 시아버님 길 떠나매 그 얼마나 눈물 흘렸던가?
日夜祈望惟在此(일야기망유재차) 밤낮으로 기도하고 바라는 일 오직 예 있으매
鳳雛何處生寧馨(봉추하처생영형) 총명한 아들 어느 곳에서 찾아오시려나?
예산군은 조선시대 문인·학자·예술가가 다양하였다. 관련 유적이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남아 전한다. 그 의의가 매우 크다.
과거로부터 문학은 인간의 삶의 표현이다. 개별화된 구체적인 기록이다. 생명이 있는 표현으로 역사와 변별성을 가진다. 당시대의 개별적인 삶과 그 삶을 통하여 상상화 된 구체성을 띤다. 사회와 역사의 발전을 위해 문학이 기여했다. 이러한 조선시대 문인을 계승하여 일제 강점기와 현대시대에 예산에서 문인 많이 배출하였다.
조선시대 예산문인 박두세의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는 교과서에 실린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다. 예산문인이라 이글을 쓰면서 기쁨을 만끽했다.
정일헌은 예산읍 간양리로 시집와 어려운 생활 속에 여성으로 「정일헌 시집』을 발간할 정도로 많은 글을 남겼다. 조선시대 여성으로서 우리나라의 문학적 가치가 크다.
남인 실학의 성호학파의 본부인 덕산, 고덕의 여주이씨의 이용휴 가문이 자연스럽개 고덕면 상장리에 정착하여 자유롭게 학문에 정진했다. 이런 사상은 수학을 주목하거나 사학(사학)으로 위험시되던 천주교와 관련이 잇다.
앞으로 고려시대, 조선시대 예산 문인의 행적과 문학에 끼진 영향 등의 연구가 절실하다. 조선시대 문인을 만나 행복하다. 조선시대 선배문인의 구체적인 작품설명과 자료는 방대하다. 개략적으로 설명을 올렸다. 자세한 글은 추후 올리려고 한다.
※ 참고문헌
1. 「고덕면지」총사 - 최완수
2. 「충남학의 이해」- 충청남도, 충청남도평생교육진흥원
3. 「예산의 고지도와 지리지」- 여지도서
4. 「디지털예산문화대전』-다음 검색
5. 「내포의 예산학 』- 묵향·문향으로서의 예산(이향배 충남대교수)
6. 「한국학중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7. 「충청도예산동학농민혁명』-인문지리학적 관점에서 본 내포정신의 형성과정(예산지역을 중심으로) -안외순(한서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8. 우리 한시 삼백수(칠언절구) -정민 평역
첫댓글 고생하였소. 중요한 글, 깊이 숙고할만한 가치가 무궁하다는 생각이오. 새롭고 신선한 글이오.
신익선 고문님 감사합니다.
교정과 퇴고중입니다.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예산에도 조선시대 문인들이 많았네요.
자료 찾아 글로 정리하시고 ~~~~
예산의 문인들 정리할 때 참고자료로 귀하게 쓰일 것 같네요
추가할 문인이 더 있습니다.
시조나 관련된 작품 1편을 이해하도록
추가하려고 합니다.준비단계입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오늘은 9시부터 삽교농공단지에서
재난대비 긴급구조종합훈련 참가
하고 습니다.
부회장님 아름답습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정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