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1년 6월 24일 경남 밀양군에서 태어났다. 경남 밀양의 사립 동화 중학에 입학하면서 항일 인사였던 김홍표 교장의 영향으로 항일정신을 키워갔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그는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 동지들을 규합했다. 13일 오후 1시쯤 수천 명이 모인 고향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동지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경찰의 수배를 피해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일본은 그 해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궐석재판으로 징역 1년6월을 선고했다.
1919년 11월 9일 죽마고우 김원봉 등 13명과 함께 조선의열단을 결성했다. 의열단에서는 일제 침략기관의 파괴와 원흉들을 처단키로 했다. 정보가 누설되어 체포됐다. 5년 4개월의 감옥생활을 했다. 1932년 여름 중국 남경으로 망명했다.
1932년 10월 20일 중국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단 제6대(약칭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에 입교, 1933년 4월 21일 제1기로 졸업했다. 1933년 한국대일전선 통일연맹을 결성해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됐다. 1933년 7월 5일 독립운동가들이 소망하던 단일정당인 민족혁명당을 탄생시키데 참여했다. 민족혁명당이 중국과 제휴하여 만든 조선의용대에서도 핵심부서인 편찬위원회 주편이 됐다.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중일전투에 참가했다. 타이항산 항일 근거지에 도착,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칭하고 중공 팔로군과 함께 항일 무장활동에 열중했다. 1942년 2월 일본군은 4만명의 군대를 동원해 타이항산을 공격했다. 항일 연합군사령부에서는 조선의용대에게 탈출로를 확보하고 전군이 탈출하도록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이 전투에서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3일 뒤 동지들이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선생을 발견했으나 중태였다. 6월 3일 석굴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이 41세였다. 정부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출처: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공적개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