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그랬다.
쌩장피드포르에서 산티아고까지 걸어서 800km 순례길을 삼등분해서 말할 수 있는데,
처음 1/3은 육체와의 싸움이고, 그 다음 1/3은 정신과의 싸움이며
마지막 1/3은 영혼과의 싸움이라고.
처음 이 말을 대하고는 과장된 수사학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까미노를 완주를 하고 이 글을 쓰는 지금의 감회는
그 말은 전혀 과장되지 않았으며 가장 적확하게 표현한 말 중에 하나라고 공감한다.
순례길 첫날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한다는 것은
어느 무엇 하나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부딪치는 큰 도전이다.
작은 돛배가 넓은 대양에 나서자마자 거대한 파도와 맞부딪치는 격이다.
피레네 산맥은 대서양에서 지중해까지 남북으로 491km에 걸쳐 뻗어있으며
최고봉의 높이는 3,404미터에 달한다.
피레네 산맥은 불란서와 스페인의 국경을 이루는 산맥이기도 하지만
유럽 대륙과 이베리아 반도를 갈라놓는 거대한 산맥이다.
피레네 산맥 때문에 스페인은 여타 유럽 국가들과는 사뭇 다른
이질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데,
나폴레옹이 스페인은 ‘유럽이 아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현대의 스페인 사람들의 혈관에는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711년 북아프리카 무어족이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장악한 이후
1492년 이사벨라 여왕이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무스림 왕국인 그라나다를 점령할 때까지
무어인들은 수 세기동안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문화를
스페인 반도에서 꽃을 피웠었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오갈 때 자주 이용했다는 프랑스 길(Camino Frances) 루트를 택한다면
첫날에 쌩장피드포르에서 론세스바에스(Roncessvalles)까지
25.1km의 거리에 1,450m의 높이의 고갯길을 넘어야 한다.
경사도를 감안한다면 약 32Km에 달하는 거리이다.
다행인 것은 오랜 세월동안 수백만 명의 순례자들이 이 길을 넘었으며
요즈음도 순례자들의 60%가 이 길을 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일에서 첫 걸음이 중요하다.
간난 아기의 첫 걸음마에 온 가족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것은
인생을 건강하게 완주할 것을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순례길 첫 걸음도 마찬가지이다. 과연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 것인지,
도중에 어떤 어려움이 닥칠 것인지 두렵지만 설렜다.
미명이 밝기도 전인 꼭두새벽 5시부터 순례자들은 부산하게 짐을 챙긴다.
그리고 피레네 산맥을 향해 발진한다.
전날 생짱에 도착해서 내뿜었던 흥분과는 다른 분위기이다.
순례 첫 걸음을 내딛는 순간은 다들 비장하다.
한 방에 12명이 함께 묵는 공립 알베르게에서의 첫 날 밤은
삐꺽대는 이층 철제침대였는데도 불구하고 의외로 잠을 잘 잤다.
시차 등으로 너댓 시간 자다가 깨어났지만 컨디션은 과히 나쁘지 않았다.
알베르게에서는 조식으로 마른 빵과 우유를 제공해줬다.
아침 7시에 순례자 사무소 옆 건물, 택배 서비스 하는 곳에 찾아가 무거운 배낭을 맡기고
가벼운 룩섹만 달랑 매고 순례자들을 따라 길을 나섰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활기차게 굿모닝, 굿모닝 영어로 인사를 하거나
스페인어로 부엔 까미노(buen camino), 부엔 까미노를 외친다.
순례길 마칠 때까지 ‘부엔 까미노’라는 순례자들의 인사를
수백 번, 수천 번 넘게 나누게 된다.
언덕길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해서 얼마 되지 않은 지점에서 산에서 내려오는 청년을 만났다.
젊은 친구가 신통치 않게 숙소에 무엇을 잊어버리고 놓고 왔구나 하고 지레짐작한 내가
‘You are missing something?'하고 물었다. 아니란다,
자기는 산티아고 대성당을 찍고 지금은 로마를 향해가고 있다고 한다.
이건 정말 '걷는 놈 위에 나는 놈' 격이다.
옛적부터 기독교의 순례지는 로마, 예루살렘, 산티아고, 이렇게 세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로마나 예루살렘은 성지 순례지에는 포함되지만
순례자들이 걸어서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젊은 청년이 산티아고를 돌아서 로마까지 걸어서 간다고 하니 기막힐 일이다.
순간 오기가 생겼다, 결단코 이 길을 중도포기하지는 않겠다고.
불란서나 독일 등 유럽국가 순례자들은 집에서 출발해서 산티아고 성당까지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왕복순례가 전통적인 방식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오는 순례자들 중에서도 쌩장에서 산티아고까지 갔다가
쌩장으로 다시 돌아오는 왕복 순례자들이 제법 있다고 들었다.
갈 때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햇볕을 등지고 걷고,
돌아올 때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햇볕을 안고 걸으면서
다른 느낌의 풍광을 즐기는 맛이 있겠다 싶다.
실은 그 보다도 순례를 다시 한번 더 반추하는 시간여행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변덕스럽기로 악명이 높은 피레네 산맥의 날씨가 그 날은 무척 쾌청했다.
전날까지 한 주간 내내 비바람 뿐 만아니라 진눈깨비까지 내렸다고 하던데,
우리가 피레네 산맥을 넘던 그 날은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청명했다.
쪽빛 파란 하늘, 산들산들 산들바람,
게다가 가끔씩은 뭉게구름이 햇빛을 가려줘서 발걸음이 가벼웠다.
시야는 확 트여 가까이 그리고 멀리 있는 봉우리들이
‘여기가 피레네 산맥일세. 잘 오셨네.’ 하며 반기는 듯
평화롭고 웅장한 자태를 한껏 들어내고 있었다.
호주에서 온 노부부에게 말을 건넸다. ‘참 좋은 날씨입니다. 우리는 복이 많네요.’라고.
그 노부부도 ‘I know we are so much blessed.'라며 긍정한다.
남편 70세 생일기념으로 산티아고 순례 길을 나서게 됐다며 부인은 눈물을 흘린다.
왜 눈물이 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다.
참으려 해도 뜨거운 눈물이 계속 솟아 흘러내린다고 한다.
산티아고 까미노를 걸으면서 적어도 한 번은 자기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고 하던데,
맞는 말인가 보다. 그리고 산티아고 길에서는 사람들을 이렇게 만났다 헤어진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몇 차례씩이나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거나
또는 목적지까지 동행하기도 한다.
인연이 있으면 만나고, 만났다가는 헤어지고, 비껴가고 스쳐가는 것이
저 하늘의 구름과 같다.
살면서 알게 모르게 스쳐 지나가버리는 인연이 그 얼마나 많은가.
산티아고를 향해 걷는 순례자들은 다들 한 방향으로 걷기 때문에
앞선 사람들의 뒷모습만 본다.
순례자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뤄 걷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혼자 걷는다.
비탈길 굽어진 길을 오르는 순례자들을 멀리서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하나둘씩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 모습이 마치 각자 주어진 수명을 다하고 자기 차례가 되면
하나씩 하늘나라에 올라가는 죽음의 행렬처럼 보이기도 한다.
출발해서 8km 지점에 첫 번째 바(Bar)인 오리손(Orrison) 산장이 나온다.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용변도 보고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한다.
피레네 산맥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하루 밤을 묵기 위해
상당히 일찍 이 산장에 예약을 했었다.
오리손 산장의 예약은 좀체 힘든데 운이 좋게 예약에 성공했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로 출발을 1주일 연기해야하는 바람에
피레네산맥에서 1박의 꿈은 허공으로 날아갔다.
세상사가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닌가보다. 그리고 무엇이 꼭 더 좋다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이 정말 행복하고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래서 이 길을 혼자서 간다.
부처님 말씀을 담은 최초의 경전인 숫타니파타의 구절들이 생각났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르는 법
연정에서 근심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숲 속에서 묶여있지 않은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중략)
물속의 고기가 그물을 찟듯이
한번 불타 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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쌩장에 있는 순례자 사무소에서는 산티아고까지 800km를 33일 일정으로
33개 구간별 거리와 표고가 표시된 안내 자료를 준다.
물론 하루 40km씩 20일에 완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 20km 미만씩 40여일에 걸쳐 걷는 사람도 있다.
33일로 일정을 잡는 경우,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2일차에는 론세스바예스를 출발해서
수비리(Zubiri)까지 22km를 걷고 3일차에는 수비리(Zubiri)에서 출발하여
팜플로냐(Pamplona)까지 21km를 잘라서 걷는다.
물론 조금씩 더 걸을 수도 있고 단숨에 43km를 주파할 수도 있다.
이 구간은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서 혹독한 시련을 견뎌낸 순례자들에게
숨을 터주는 코스인 듯하다. 다소의 오르막내리막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내리막길이다.
표고 950m인 론세스바예스에서 표고 400m인 팜플로냐까지 내리막길 평지를 걸으며
육체는 조금씩 까미노에 익숙해지는 법을 터득한다.
떡갈나무 숲으로 길은 이어지고 간혹 나타나는 마을에는 바(Bar)가 있어서
순례자들은 짬짬이 여유를 가지고 휴식을 취한다.
아르가 강(rio Arga)을 끼고 있는 중세풍의 마을들을 지나며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는 여유까지 생긴다.
헤드랜턴을 밝히고 새벽길을 나설 때에는 뿌연 어둠 속에 안개비가 내렸다.
안개비는 연한 보슬비가 됐다가 어느새 가랑비로 바뀌더니
결국에는 굵은 장대비로 변했다.
오전 내내 우의를 걸쳐 입고 걸어야 했다.
안개비, 보슬비, 가랑비, 장대비의 각각 다른 촉감을 얼굴로 느낄 수 있었다.
비의 질감을 얼굴로 느끼는 게 좀체 쉬운 일인가.
빗속을 걷는 이 자유로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숲속 나뭇잎들은 야금야금 모아 두었던 빗방울을 살짝 스치기만 해도
여지없이 순례자 머리 위로 후두두둑 쏟아 붓는다.
비 오는 날의 비릿한 숲 냄새는 바닷가의 싱싱한 생선 냄새를 닮았다.
마을의 교회 종소리도 은은하게 숲으로 스며든다.
평화롭고 자유롭다. 행복하다. 오감이 충만하다.
수년 전에 본 ‘퍼펙트 센스 Perfect Sense'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감각상실 바이러스‘라는 괴질이 지구상에 퍼지면서
사람들이 오감을 차례로 하나씩 잃어가는 상황을 그린 영화이다.
원인 모르는 질병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갑자기 슬픔과 우울감에 빠지더니
어느 한 순간에 후각을 잃어버린다.
후각을 잃어버리자 사람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다.
후각을 잃으면서 추억들을 함께 잃는다.
냄새와 추억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새로운 상황에 맞춰나가며 차차 익숙해져간다.
사람들의 일상은 그렇게 계속된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갑자기 공포와 허기를 느낀다.
너나할 것없이 아귀가 되어 아무거나 먹어치운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은 일순간에 미각을 잃는다.
일상생활은 엉망이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어진 상황에 또 익숙해져간다.
단맛, 신맛, 짠맛, 쓴맛 대신에 부드러운 맛, 바삭대는 맛 등으로 입맛이 바뀐다.
다음에는 갑자기 분노와 증오가 뒤끓어 오르면서 사람들이 폭력적으로 변한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은 청각을 잃는다. 교통사고 등 각종 사고가 발생한다.
패닉에 빠졌던 사람들은 또 적응하면서 삶을 이어간다.
이런 모든 사태가 바이러스에 의한 것임을 깨닫는 바로 그 때,
사람들은 이제 시각마저 잃어 간다.
점점 흐릿해져가는 가운데 젊은 연인 한 쌍이 서로를 껴안는다.
이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화면은 깜깜하다. 영화는 먹먹하다.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Life goes on, like that’이라는 자막이 뜨면서 영화는 끝난다.
깜깜하고 먹먹한 세상에서도 삶이 그렇게 계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가.
영화제목 '퍼펙트 센스'가 암시하는 것은 무엇일가.
알 것 같다. 그건 사랑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한 쌍의 젊은이는 서로를 찾아가 껴안는다.
사랑이야말로 퍼펙트 센스이다.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이유이다.
비 오는 날에 숲이 뿜어내는 오감에 감사하며 걸었다.
‘부엔 까미노’하며 여성 순례자가 인사를 건네 왔다. 그녀의 발걸음이 힘차다.
함께 걸어도 좋겠냐고 물었더니 물론 좋다고 대답한다.
까미노는 혼자 걸으면 혼자 걸어서 좋고, 호흡이 맞는 사람과 걸으면
또 다른 에너지가 생겨 기분이 좋아진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컨설팅회사에서 간부로 일하고 있다는 Joanne는 비즈니스 관계상
한국에도 몇 차례 방문해서 한국을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
한 시간반가량을 함께 걸었다.
어디서 왔냐, 왜 왔냐, 혼자서 왔냐, 며칠 계획이냐 등
순례자들이 의례하는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은 후 산티아고 순례 외에
각자 했던 트레킹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화제가 돌고 돌아 한반도 긴장상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그녀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서 노골적인 반감을 나타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가 미국에서 떨어져나가
캐나다에 귀속됐으면 좋겠다고 해서 크게 웃었다.
마을이 나타나 바(Bar)에 들렀다.
젖은 우의를 벗고 커피를 마시고 맥주를 마셨다.
비 맞으며 걸어가는 순례자들의 모습을
바(Bar)에 앉아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여유도 좋았다.
그녀는 28일 완주목표로 일정을 잡았기 때문에 33일의 일정을 잡고있는 나보다
오늘 중에 걸어야 할 거리가 많다며 서둘러 일어났다.
짧은 시간의 조우였지만 산티아고 까미노에서 기억에 남는 인연이었다.
스페인을 정열의 나라로 담금질하는 것은 작열하는 한 낮의 땡볕이다.
한 낮의 땡볕은 스페인만 담금질하는 것이 아니다.
순례자도 담금질한다. 정말 대단하다.
땡볕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서 다른 순례자들보다 서둘러 새벽 6시 전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아르가 강(rio Arga) 다리를 건너면서 조각달이 떠있는 새벽하늘을 본 순간,
온 몸이 신비로운 정령에 휩싸인 느낌을 받았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우아한 코발트 빛깔 때문이었던가.
이승에서 삶을 다한 영혼이 저승으로 떠나는 시간은 아마도 이런 새벽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새벽하늘 코발트빛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서울 강남삼성의료원 장례식장 앞에 하늘을 향해 비스름히 세워진 조형물의 색이
이 빛깔이었다.
엉뚱한 생각에 빠져서 그랬던지 그만 갈레 길에서 길을 잃고 시커멓게 광석더미를
쌓아놓은 마그마 공장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온 길을 다시 돌아갔어야 했었는데,
TV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의 이순재 선생처럼 마구 직진하는 습관이 있는
나는 앞만 바라보고 마냥 걷다보니 어느 순간 앞에도 뒤에도 사람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너무 오래, 너무 많이 와서 낭패스러웠다.
한참을 서서 귀기우려 봤더니 멀리 인기척이 느껴졌다. 순례자들이었다.
공장 낮은 담을 넘어 그들과 합류했다. 그들을 따라서 걷는데 또 다시 이상한 기미에
빠졌다. 언제 이 길을 걸어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혹시 내가 데자뷔(deja vu)에 빠져 있는 게 아닌지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걸었더니 갈레 길이 다시 나왔다.
그때서야 내가 마그마 공장에 잘 못 들어가는 바람에 새벽 출발했던 원점으로
거반 회귀했다가 순례자 행렬을 만나서 같은 길을 다시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갈레 길에서 왼쪽 길로 빠지라는 표지가 있었는데 그걸 놓치고 반대 방향으로
들어섰던 것이었다. 새벽 어둑컴컴할 때 갔던 길을 날이 밝아진 다음에
다시 한 번 재현했으니 결국 데자뷔였다. 그렇다면 그간 살면서 몇 차례 어렴풋이
경험한 적이 있었던 데자뷔도 이런 것들이었나.
중세부터 산티아고 까미노 순례길은 마을과 마을을 이어서 연결돼 왔다.
주민이 백 명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마을부터 중규모 시골 마을까지
순례자들이 걷는 길은 마을과 마을로 이어져있다. 최근 산티아고 까미노가
세계적인 각광을 받으면서 부쩍 늘어난 순례자들 덕분에 몇 세기 동안 폐허가 됐던
마을들이 지금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한다. 산티아고 까미노 경제효과라고 한다.
우리나라 제주도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도 마찬가지이리라.
스페인 마을이나 도시의 특징 중에 하나는 그 규모에 관계없이 반드시 광장이
있다는 것이다. 광장에는 성당이 있고 레스토랑과 바(Bar)가 있다.
광장은 축제를 즐기고 춤과 노래를 즐기고 포도주와 맥주를 즐기며
격한 토론을 즐기는 정열이 넘치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삶의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팜플로냐(Pamplona)까지 강을 끼고 있는 이 코스에는 작은 마을들과 성당들이 많다.
아르가 강을 따라 이어진 중세풍의 시골 마을들의 정경은 하나하나가
정겨운 그림엽서와 같다. 작은 교회당이 나오면 잠시 들러보면서 짧게나마 기도했다.
그리고 바(Bar)가 나오면 맥주로 목을 축이고 간단하게 요기했다.
평안한 마음으로 하루치 거리를 걸었다. 멀리서 팜플로냐 대성당과 니콜라스 성당의
첨탑이 보이고 구시가의 성채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뿌엔테 막데레나 다리를 지나 팜플로냐 도시에 들어섰다.
지난 사나흘동안 호젓한 산길과 숲길, 들판을 걸어온 순례자에게
도시는 반가움보다는 분주한 교통과 도시의 소음으로 오히려 정신이 산만해지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대형 성당들과 현대식 빌딩들이 솟아있는 팜플로냐는 중세 나바레 왕국의 수도였다.
인구 20만 명의 팜플로냐는 대학도시로도 명성이 높다고 한다.
숙소로 예약해놓은 헤밍웨이 호스텔(Hostel Hemingway)을 찾아가기 위해
지도를 손에 들고 넓은 공원을 가로 지르며 신호등이 있는 횡단도로를
몇 개씩이나 건넜다. 뿐만 아니라 몇 차례 걸쳐 행인들에게 묻고 또 물어야만 했다.
헤밍웨이 호스텔은 도미토리 형태의 숙소로서 방 하나를 투숙객 4~5명이 공동 사용했다.
그간 수없이 많은 해외출장을 다녔지만 도미토리 형태의 호텔에서 숙박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가난하지만 마음이 부자인 순례자에게 공동 침실, 공동 샤워시설, 공동 키친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 샤워를 마치고 근처 슈퍼마켓에서 몇 가지
필요한 것을 챙긴 후, 구시가지를 찾아 나섰다.
미국 작가 어네스트 헤밍웨이를 기리는 조각상과 조형물들을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헤밍웨이는 젊은 시절, 이 도시에 머물면서 ‘태양은 다시 뜬다. The sun also rises.'란
그의 첫 번째 장편소설을 썼는데, 이 소설 덕분에 팜플로냐는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됐다.
헤밍웨이는 이 소설에서 요즈음도 매년 TV를 통해 흥미로운 해외 토픽뉴스로 보도되곤 하는
산페르민(San Fermin) 축제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 지역출신으로 A.D. 303년에 순교한 페르민 성인을 기리는 축제가
매년 7월 6일부터 14일까지 일주일 기간 열린다.
종교적인 축제이기는 하지만 축제의 열기가 광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매년 백만 명 이상의 인파들이 몰려드는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황소들이 사람들과
어울려져 거리를 내달리는 엔시에로(encierro) 행사이다.
구시가지 좁은 골목길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달리면, 그 뒤를 쫒아
육중한 투우장 황소들이 뿔을 휘두르며 질주해온다.
인파의 후미에 처진 사람은 황소 뿔에 치받혀서 공중에 나가떨어진다.
때로는 달리던 사람 중 한 사람이 넘어지면 우르르 걸려 넘어지면서 황소들이
그 위를 덮치며 달려간다.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서너 명씩
사망자가 발생한다. 재밌자고 하기에는 너무 무모하다.
그러나 이 행사의 광기는 전혀 사그라들 기미가 없다.
혹자는 인간의 재미 때문에 투우장에서 죽어야만 하는 황소들이
인간에 대해 복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말한다.
과연 그러할까.
구시가지 골목은 시민들과 관광객들로 붐비고 활기가 넘쳤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부터 팜플로냐에 오면 불세출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사라사테의 생가를 꼭 찾아가보리라 마음먹었었다. 골목길들이 방사선으로
펼쳐져 있어 한참을 헤맨 끝에 마침내 사라사테 기념관을 찾았다.
그런데 보수공사로 잠정 운영하지 않는다는 고지문이 문 밖에 걸려있다. 맥이 풀렸다.
수년전 노르웨이 중서부 도시 베르겐에 출장을 갔을 때 어렵게 시간을 내어
작곡가 그리그(Grieg)의 생가를 들러었다. 그리그의 생가는 바닷가 언덕 위 이층집으로
삼면을 통해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창문이 있다.
그 이후 ‘솔베이지의 노래 Solveig's song'를 들을 때마다 바닷가 이층집
그리그의 생가 창가가 함께 떠올랐다.
그래서 사라사테의 생가도 꼭 둘러보고 싶었었는데 유감천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천재 음악가로 인정받았던 사라사테는 수많은 여성으로부터
구애를 받았지만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부자였지만 관대하고 겸손한
그는 시민들로부터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산페르민 축제 때에는 팜플로냐에 돌아와 이층 발코니에 앉아
골목길을 질주하는 황소 떼와 젊은이들을 내려다 봤다.
발코니에서 손을 흔드는 사라사테를 올려다보며 시민들은 환호했다고 한다.
그는 모든 재산을 팜플로냐 시에 기증했고 그 유산을 토대로 팜플로냐 음악학교가
세워졌다고 한다.
그 발코니에서 황소 떼가 질주하는 골목길을 내려다보고 싶었었는데,
섭섭한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사춘기 시절,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 Solveig's song’와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 Zigeunerweisen'곡을 처음 들었었다.
처음 들었었던 그때, 가슴이 촉촉하게 젖어들면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었다.
왜 그랬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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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새벽과는 달리 법석을 떨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오랜만에 침대 속에서 뜸도 들이며 느긋하게 일어났다. 덕분에 지난
며칠간 피로와 긴장에 절었던 몸이 한결 가뿐해졌다.
이삼십 여명이 함께 자야하는 공립 알베르게 이층 철제침대 방에 비해
다섯 명이 함께 사용한 호스텔 도미토리가 확실히 편했다.
공립 알베르게의 숙박료가 10유로 안팎인데,
호스텔 헤밍웨이에서는 19유로의 거금을 지불했지만
잠을 푹 잤으니 충분히 본전을 뽑은 셈이다.
늑장을 부린 이유가 또 하나 있다.
핑계 아닌 핑계 같지만 번잡한 도시 시가지를 걷고 싶지 않았다.
호스텔 직원에게 택시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택시를 타고 팜플로냐 도심을 가로 질러 시수르메노르 Cizur Menor까지
약 5km를 단숨에 달려갔다.
순례자 무리 속에 은근슬쩍 끼어들었는데, 기분은 묘했다.
절묘하게 새치기한 느낌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를 준 것이 아닌데도
미안함이 섞여 있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키가 190cm가 넘는 장신의 독일 신부님이 검은 사제복을 입고 수녀님을 비롯한
한 무리의 순례자들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굿텐모르겐 Guten Morgen’ 독일어로
아침 인사를 했더니 큰 손으로 악수를 건네 왔다.
내가 택시에서 내린 것을 혹시 보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팜블로냐에서 뿌엔테 라 레이나 Puente la Reina까지 23.8km 거리의 중간쯤 되는 위치에
용서의 언덕 Alto del Perdon이라는 790m의 제법 높은 고개를 넘어야 한다.
우리나라 강원도 대관령이나 한계령 같은 고개이다.
정상 능선에는 풍력발전용 바람개비들이 도열하듯이 세워져 있다.
한발 한발 내디딜수록 까마득하게만 보였던 바람개비들이 한발 한발 다가온다.
처음에는 성냥개비처럼 작게 보였던 바람개비 기둥들이
점차 제우스 신전의 기둥처럼 우람한 자태를 들어낸다.
단지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씩 걸음을 옮겼을 뿐인데,
산이 다가오고 마을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 사람의 발걸음은 참 무섭다.
까미노를 걸을 때 대개의 경우 아무 생각 없이 걷는다.
그야말로 무상무념 상태이다.
주변 경관과 마을 모습도 막연한 느낌으로 무심히 바라본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머릿속이 온통 용서의 언덕에 꽂혔다.
왜 용서의 언덕이라고 했을까.
인간의 여러 감정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용서’인데 말이다.
사랑이나 희망 등 많고 많은 개념어를 놔두고
왜 ‘용서’라는 이름을 이 언덕에 붙였을까.
수십만 명 아니 수백만 명의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이 길목에서
무슨 암시를 주기 위함인가.
‘용서’란 과연 무엇인가.
‘그 놈은 결코 용서 못해’와 같은 경우에는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이다.
‘너희 놈들이 우리 동족에게 한 짓을 결코 잊을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어’와
같은 경우에는 종족이나 국가 등 집단과 집단 간의 충돌에서 발생한 문제이다.
다른 한편, ‘신이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와 같은 경우에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구원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좀 다르지만 이런 경우도 있다.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미워하고
번민하며 자학하며 자신을 고립시킨다.
이 경우는 자아의 내면 문제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한문시간에 배운 ‘불구대천지원수 不俱戴天之怨讐’란 말이 생각났다.
하늘을 같이 이지 못할 원수, 다시 말해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원수를 뜻한다.
부모나 가족을 해한 자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응징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2002년도에 민관조사단의 단장자격으로 보스니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보스니아는 1992~95년 기간 중 혹독한 내전을 겪었다.
구유고연방이 해체된 이후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계 등
인종적인 갈등에다가 신교도, 구교도, 회교도 등 종교적인 갈등까지 겹쳐서 상황이
복잡하게 엮여 있었다. 결국 수 세기 동안 내려온 역사적 반목이 한 순간에 터져서
벌어진 사단이었다. 게다가 주변 열강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민감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발칸지역은 세계의 화약고 중에 하나로 꼽힌다.
보스니아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첫 총성이 울렸었다.
20세기에 또 다른 3차 세계대전이 이 지역에서 발발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할 정도로 내전은 심각했다.
20만 명 이상이 죽었고 5만 명 이상의 여성들이 강간을 당했으며 살던 지역을 떠난
사람이 220만 명에 달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인종청소가 단행되기도 했다.
한 마을에서 오순도순 함께 살았던 사람들끼리의 살육 현장은 오히려 끔찍했다.
그래서 내전 후의 후유증은 더 심각했다. UN평화군이 파견되어 질서를 유지했다.
어쩔 수 없이 지역평화를 위해 상대방을 용인하지만 결코 잊지 않겠다는 분노는 대단했다.
복수나 보복 대신에 용서와 화해의 길을 택한 넬슨 만델라의 결단은 무엇인가.
27년간의 비인간적인 구금생활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접었을 뿐만 아니라
남아공의 흑인들에게 무자비하게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를 자행한 백인들을
처단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백인들의 진정한 참회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만델라의 용서는 과연 인간적인 용서였던가.
아닌 것 같다.
만델라의 용서는 보복이 또 다른 보복을 불러오는 불행을 막기 위한
정치적인 용서였다. 남아공의 미래를 위한 용서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속에서도
‘저들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니 저들을 용서하소서’하며
용서를 구했던 그런 종교적인 용서와도 다르다.
정치적인 용서, 미래를 향한 용서를 결단한 만델라의 용기와 포용은 그래서 위대하다.
만델라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하며 자책하는 경우에라도,
그것이 불가항력적이거나 대안이 없거나 되돌릴 수 없는 경우에는
누군가가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It's not your fault.'라는 말을 해준다면 어떨까,
아니 스스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가장 먼저 용서해야 할 건 자기 자신이지 않을까.
자기 자신을 포용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평소 나는 가톨릭교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나서
그 자리에서 용서받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내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내 경우에도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괴로워했던 적이 있었다.
한 평생 살다보면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치는 경우가 있다.
절벽처럼 답답한 상황은 무거운 압박감으로 가슴을 짓눌러 왔다.
억제할 수 없는 분노로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꼭두새벽에 차를 몰고 자유로의 넓은 길을 무작정 달렸다.
작정한 것도 아니었는데 문산가는 길에 군대 생활했던 옛 부대자리를 찾아갔다.
아마 한창 젊은 시절의 나를 만나러 갔던 게 아닌지 모르겠다.
아직 기상나팔이 불기 전의 막사와 연병장을 건너편 언덕에서 망연하게
바라본 후 일어섰다.
돌아오는 길에 ‘낙원공원’이란 안내판이 보였다. 대체 뭐가 낙원이란 말인가.
안으로 들어가 봤더니 공원묘지였다.
허허! 공동묘지가 낙원이라니,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럴만 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묘지를 걷다가 대체 누가 누워 있는가하고 묘비를 살펴봤다.
아~! 그런데 거기에 내가 있었다.
첫 번째 묘비에 내 이름이 적혀있었다. 한문 이름도 같다.
순간 가슴이 철렁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57세 나이로 작고한 김인식 옹이 거기에 누워있다. 간단하게 목도로 참배하고 돌아섰다.
북망산에 묻히면 그만인 인생인데 반 푼어치도 못되는 분노 때문에 그렇게 헤맸던
내가 얼마나 옹졸한가.
용서에 꽂힌 상념의 실타래는 끝이 없었다.
그러면 나는 다른 사람을 용서했는가, 내가 용서를 빌어야 할 것들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용서의 언덕을 향해 비탈길을 오르는 길이 묵직한 십자가를 메고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자기 십자가는 자신이 짊어지고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인데.
한발 한발 내디디면서 마음속으로 주기도문을 외웠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
또 행운이었다.
피레네산맥을 넘을 때와 마찬가지로 축복 받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용서의 언덕은 대관령 정상처럼 몰아치는 칼바람 때문에 제대로 서있기 조차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웬일인지 바람은 미풍으로 살랑살랑 불어오고
날씨는 한껏 화창했다.
맑은 날씨 덕분에 원근 정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한 쪽으로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내려 보이고
다른 쪽 방향으로는 앞으로 걸어 가야할 길이 쭈~욱 뻗어 있었다.
고개 정상에는 비바람을 헤치며 걸어가는 중세 순례자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있다.
걷는 모습의 순례자, 당나귀를 탄 순례자, 노새를 끌고 가는 순례자 등 여러 모습의
순례자 조형물들이 모진 바람에 버티기 위해 한결같이 머리를 앞으로 숙이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 길에서는 매서운 비바람을 헤치며 나가거나, 아니면
작열하는 태양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 순례자의 숙명인가보다.
순례자들의 조형물 맞은편에 세계 주요 도시까지의
거리와 방향을 나타내는 표지가 높이 세워져 있다.
뉴욕, 베를린, 시드니, 사웅파울러 등 대륙별 주요도시가 명기되어 있는데,
아시아의 대표로 서울 3,700km이란 표지가 가장 윗자리에 새겨져 있다.
아시아 국가 중 산티아고 까미노에 오는 순례자가 제일 많은 나라는 단연코 한국이다.
까미노에서 간혹 일본인, 대만인, 필리핀인, 인도인 등 아시아계 순례자들을 만나지만
그 수를 다 합쳐도 한국인 순례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국에는 아직까지 덜 알려져서 그런지,
아니면 종교 때문에 그런지 중국인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왜 한국 순례자들이 많은지에 대해 가끔은 유럽이나 미국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그 질문에 대답하면 또 다시 왜 한국이 주변 중국이나 일본, 태국 등
여타 아시아국가들에 비해 기독교가 번성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한국이 짧은 기간에 심한 격동의 역사를 겪었기 때문일거라고 답변해준다.
격변을 겪은 한국인들에게 기존 종교나 가치관이 제대로 영적 위안이나 충족감을
주지 못했던 것이 아니였나 하는 개인적인 견해로 대답한다.
여하튼 수많은 한국인 순례자들을 산티아고 까미노에서 만난다.
상당수의 알베르게에서는 한국 순례자들을 위해 한글로 된 안내문을
부착해놓고 있을 정도이다.
산티아고 까미노 순례길을 향한 한국인들의 열기는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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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째 날에는 뿌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에서
에스테야(Estella)까지 22.4km를 걷고,
엿새째 날에는 에스테야에서 로스 아르코스(Los Arcos)까지 21km를 걸었다.
한 낮의 땡볕 이외에는 큰 어려움이 없는 길인데도 순례자들은 점점 말수가 적어져 갔다.
순례자와 관련된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를 관람한 적이 있다.
베를린에서 근무할 때, 도이취 오퍼(Deutch Oper)에서
라스트 미닛 티켓을 5유로에 구해서 봤다.
장중하게 울려 퍼지는 바그너의 음악은 히틀러가 가장 선호하여 제3제국을
꿈꾸던 나치 행사에서 많이 연주됐다.
오페라의 주인공인 탄호이저는 관능적인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우기며
쾌락의 여신 베누스를 찬양한다.
그러다 징벌을 받게 되는데, 속죄를 위해 순례를 떠나게 된다.
유명한 ‘순례자의 합창’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무사히 순례를 마친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용서받지 못한 탄호이저는 돌아오지 못한다.
탄호이저를 기다리며 기도하던 에리자베트는 성모 마리아 상 앞에서 끝내 숨을 거둔다.
그 때 누더기 옷에 지친 모습의 탄호이저가 긴 십자가를 끌면서 고향으로 돌아온다.
에리자베트의 지순한 사랑과 희생으로 탄호이저가 결국 속죄를 받게 된다는 것이
오페라의 줄거리이다. 헐벗고 지친 주인공이 긴 십자가를 끌고 쓰러질듯
무대를 가로 질러가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순례는 왜 하는 걸까.
종교에 따라서는 순례가 의무사항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사람에게 순례는 구원의 몸부림일수도 있다.
어떤 때는 징벌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불치병으로 고향을 등져야 하는 사람이
나설 수 있는 마지막 길이기도 했다.
이슬람교도들에게는 반드시 지켜야할 다섯 가지 계명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평생에 한 번은 메카에 성지순례를 다녀와야 하는 하즈(Hajj)이다.
선지자 무하마드가 죽기 전 아라비아 반도에서 행한 순례를 답습하는 의식이다.
이슬람 달력으로 마지막 달 8일에서 12일까지 전 세계 이슬람 국가들로부터
메카에 몰려드는 순례자는 수백만 명에 달한다,
몰려드는 수많은 인파로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이 순례 때문에 가산 탕진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고 한다.
그런 반면, 사우디아라비아로서는 성지순례로 벌어들이는 돈이 석유수출 다음으로
큰 수입원이 되고 있다. 아이러니다.
힌두교인들의 순례도 엄청나다. 힌두교에서는 순례가 종교적 의무사항은 아니다.
윤회와 업을 중시하는 힌두교 교리는 해탈의 방법으로서 출가유행과
고행을 한다. 이런 차원에서 순례가 권장되고 있으며 순례 대상지역도 여러 곳이다.
이름난 강가나 사찰이 순례의 주요 대상지가 되고 있다.
매년 갠지스 강가 쿰멜라(Kumbh Mela) 지역으로 힌두교인들의 인파가 구름떼처럼
몰려든다.
가장 치열한 순례를 꼽는다면 단연 티베트 불교의 오체투지라고 할 수 있다.
삼보를 걸은 다음 온 몸을 땅에 던진다. 석존 앞에 자신을 가장 낮추는 자세이다.
양 무릎과 양 팔꿈치 그리고 이마 등 신체의 다섯 부분을 땅에 닿게 한다.
3,500미터 고지대에 위치한 라싸(Lhasa)를 향해 무려 2,000Km에 달하는 산악 길을
오체투지를 하면서 나간다. 장장 7개월에서 1년이 걸리는데,
숙연하면서도 전율이 느껴지는 순례가 아닐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어느 경우이든 순례는 고행이었다. 그리고 고생길이었다.
집 떠난 순례자를 노리는 위험이 도처에 산재했다. 강도와 도적들을 길에서 만나
알량하지만 순례자에게는 전 재산인 봇짐이 털리는가 하면 때론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다.
중세에는 각 지역의 영주들이 순례자들의 안전을 위한 보호 대책을 세웠다.
중세에 활약했던 기사단도 당초에는 순례자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발족된 것이었다.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시설도 마찬가지 목적이었다.
순례 지역의 주민들은 음식이나 잠자리 등을 제공하는 등 외지에서 온 순례자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러다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돌면서 상황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전통에 힘입어 오늘날에도 순례자들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배려는 상당히 따뜻하다.
공립 알베르게에서 수고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원봉사자로 무료봉사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수확한 포도를 트럭으로 가져와 순례자들에게 한 송이씩 나눠주는 착한 농부를
만난 적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도네이션(donation)을 강요하는 가짜 봉사자들도 제법 많다.
중세마을인 에스테야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순례자들에게 특별한 기쁨을 주는
샘터가 있다. 이 곳 주민의 말로는 론세스바예스에서 100km 걸어온 순례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는데, 보데가스 이라체 (Bodegas Irache)라는 포도주 양조공장에서
생명수를 무료로 제공한다.
양조장 담벽에 수도꼭지가 두 개 나란히 붙어있는데, 오른쪽 꼭지를 틀면 시원한 식수가
콸콸 나오고 왼쪽 꼭지를 틀면 적포도주가 콸콸 나온다.
순례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한 잔씩 마신다. 그리고 물병에 담아간다.
공짜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하는데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나.
물병에 남은 물을 쏟아버리고 적포도주로 꽉 채워 담았다. 오전 내내 적포도주로
입안을 적시면서 걸었다. 왜 예수님은 당신의 첫 번째 기적으로 물이 담긴 독을
포도주 담긴 독으로 변하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면서.
로스 아르코스(Los Arcos)에 도착해서 카사 데 아우스트리아 (Casa de Austria)라는
독일계 알베르게에 들어갔다. 산티아고 까미노를 걷는 독일인이 상당히 많은데
독일인의 특성답게 자기들끼리 뭉치는 경향이 강하다. 독일인 순례자들을 위한
알베르게가 도처에 있으니 말이다.
독일인 순례자를 위한 알베르게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것은 없지만
‘트트 크크 흐흐’하며 목구멍 깊은 곳에서 나오는 독일어의 탁한 발음이
유난하게 들린다. 한국에 나와 있는 독일인에게 한국말은 어떤 느낌으로
들리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랬더니 웃으면서 ‘까까까 따따따’ 소리가 유난스럽게 들린다고 했다.
한국말에 쌍기역, 쌍디귿, 쌍비읍, 쌍시옷, 쌍지읒 등 된소리가 많은 까닭인 듯하다.
공동 주방 냉장고에 있는 야채들을 넣고 볶음밥을 해먹은 후 저녁 미사에 참석했다.
이삼일 전 길에서 만났던 190cm도 넘는 장신의 독일인 신부님이 집전을 했다.
가톨릭 의식이 생소한 나는 다른 사람들을 좇아서 일어섰다 앉기를 반복했다.
미사가 끝난 후 순례자들을 국가별로 앞으로 나오게 한 다음
축수하면서 각 나라 언어로 적힌 순례자의 기도문을 나눠줬다.
무사히 순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신의 은총을 비는 기도문이었다.
이슬람교도나 힌두교도나 오체투지를 하는 티베트 불교도를 막론하고
모든 순례자의 간절한 기도일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은총내리소서.
순례자의 기도
가는 여정 동안 저희의 동행이 되어주시고
갈림길에서는 저희의 인도자가 되어주시고
피로로부터 저희의 휴식처가 되어주시고
위험으로부터 저희를 지켜주시고
가는 여정에 저희의 쉼터가 되어주시고
더위에 저희의 그늘이 되어주시고
어둠 속에 저희의 빛이 되어 주시고
좌절로부터 위로와 안식을 주시고
계획을 위해서는 이루고자 하는 강인함을 주소서
당신의 보호로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하고
여정 뒤에는 기쁨과 함께 무사히 집으로 도착할 수 있도록
신의 은총을 내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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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렛날에는 로스 아르코스(Los Arcos)에서 출발하여 비안나(Viana)까지 19.5km를 걷고
여드렛날에는 21.5km를 걸어 나바레테(Navarrete)까지 갔다.
날씨는 쾌청했고 길도 순탄한 평지 길이었다.
드넓게 펼쳐진 스페인 들판은 파스텔화처럼 은은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별로 색상이 변하지만 은은한 색조는 변하지 않는다.
추수를 마친 9월 중순의 들판은 옅은 황갈색 계통의 앙상블이었다.
여름 내내 작은 바람에도 출렁거렸을 연초록의 밀밭은 이젠 텅 비어 있었다.
추수 끝난 뒤에 텅 빈 들판은 부끄럼이 없다.
굴삭기로 여기저기 땅을 뒤엎어놓은 밀밭은 파란 하늘을 향해
붉은 속살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놓고 있었다.
햇볕과 비를 내린 하늘이 아버지이라면 싹을 틔우고 생장시킨 대지는 어머니이다.
한 해의 갈무리를 마친 들판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수년전에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왔던 지인은 나에게
이왕이면 봄에 다녀오라며 오월을 적극 권했다.
연초록 밀밭과 지천에 핀 들꽃의 향연이 눈앞에서 한없이 펼쳐진다고 했다.
나도 잘 안다, 푸른 밀밭 사이로 간간히 피어 있는
붉은 색 양귀비꽃의 고혹적인 자태까지도.
그러나 지독한 들풀 알레지가 있는 나에게는 오월의 밀밭은 치명적이다.
코가 붓고 귀가 붓고 눈이 붓고 목이 부어오른다.
몰골이 엉망일 뿐 아니라 정신도 혼미해진다. 그래서 구월에 길을 나섰다.
산티아고 까미노 순례자는 한 해 30여만 명이 된다.
산티아고 도착 기준으로 8월이 약 5만8천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7월 약 4만7천명과 6월 약 4만2천명 순이다.
5월에는 3만 명이 조금 넘었다. 가을에 접어든 9월은 약 4만2천명이고
10월에는 약 3만 명 정도였다. 늦은 봄부터 시작해서 여름철에 많이 몰린다.
흥미로운 것은 추운 겨울 거센 바람을 뚫고
눈덮힌 산과 평원을 걷는 순례자들이 의외로 많다.
1월과 2월 두 달 사이에 산티아고에 도착한 순례자들이 3천 명이나 됐다.
겨울철에는 문을 닫는 알베르게들도 많은데, 여하튼 불굴의 순례자들이다.
순례자들이 통과하는 마을은 마을마다 특색이 있지만,
비안나(Viana)는 중세부터 순례자들이 특히 많이 찾는 마을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을 규모에 비해 마을 중앙에 있는 산타 마리아 성당은
제법 웅장하고 화려했다. 예수 상을 비롯해 조형물들을 실제 살아 있는 것처럼 채색했다.
산티아고 까미노를 탄생하게 만든 예수의 제자 중에 하나인 야고보의 조각상이 있다.
산티아고는 야고보의 스페인어식 이름이다.
산타 마리아 성당 내부에 산티아고 순례의 내력에 대하여
스페인어, 불어, 영어로 적힌 설명문이 있다. 설명문의 요지는 이렇다.
9세기 초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순례가 시작됐으며,
문헌상에 기록된 최초의 순례자는 950년에 고테스탈로(Gotestalo) 주교였다.
통신 수단이 미비했던 시절에는 순례가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하나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예수의 제자인 야고보의 무덤을 찾아가는 순례가
마치 크리스챤의 특권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순례자가 증가하면서 산티아고까지 가는 루트가 정해졌는데,
출발점은 불란서의 파리(Paris), 베즐레(Vezeley), 르퓌(Le Pui), 아를(Arles) 등 네 도시였다.
이들 도시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의 네 개의 루트는
뿌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에서 만나게 된다.
산티아고 순례는 종교적인 신앙심에다가 문학적인 상상력이 가미되고
산티아고 순례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기적들이 사람들 입에 회자되면서 더욱 활성화됐다.
이들이 지나는 지역의 교회와 수도원, 영주들은
순례자들을 위해 숙소와 병원들을 건립해서 지원했다.
그러다 차차 잊어져갔는데, 20세기 후반 들어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산티아고를 방문한 것이 큰 계기가 됐으며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순례자’가 촉매역할을 단단히 했다.
정식 이름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는
순례자들이 은하수를 따라 걸어서 도착했던 ’산티아고 별들의 들판‘이라는 뜻이다.
비안나 마을을 떠나 라 리오하(La Rioja) 지역으로 들어서면서
나무 그늘이 사라져 내려쬐는 땡볕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여기서부터는 밀밭 대신에 포도밭이 구릉을 끼고 한없이 펼쳐진다.
포도나무의 키는 우리 어깨 정도로 낮다.
작업하기 편하도록 종자개량을 한 모양이다.
낮은 키의 포도나무에 까맣게 익은 포도가 줄줄이 달려있었다.
포도 알 하나하나에 작열하는 태양이 담겨져 있는지 까맣게 익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알알이 잘 여문 포도송이는 풍요와 자손번창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스페인은 이태리, 불란서에 이어 세계 3위 포도주 생산국이다.
뜨거운 햇볕과 건조한 날씨, 팍팍한 토양이 품질 좋은 포도주를 만든다.
스페인 포도주 중에서 리오하(Rioja) 브랜드는
가격 대비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시쳇말로 가성비가 높은 와인이다.
향도 풍부하고 맛도 제법 묵직하다.
3~5유로 가격대에서도 충분히 좋은 와인을 골라 마실 수 있다.
저렴한 가격에 좋은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지친 순례자들에게는 생명수이기도 하다.
참, 복이 많다는 것을 또 실감했다.
두 시간 남짓 걸어서 로그로뇨(Logrono)라는 도시에 들어서는 순간
거리에서 악대의 연주와 함께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것을 목격했다.
마을 축제였다.
어떻게 할까하고 잠시 망설였지만 곧바로 군중 속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
길만 걷는다고 해서 순례냐?
아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도 순례다.
무슨 축제냐고 물었더니 내일부터 산마테오(San Mateo) 축제가 시작되는데 오늘은
전야제라고 한다.
로그로뇨의 산마테오 축제는 매년 9월20일부터 26일까지 일주일간 열린다.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삶 자체가 축제다.
종교적인 축제 이외에도 지역마다 수호성인을 기리는 축제가 있어 스페인에서는
사시사철 방방곡곡에서 축제가 끊이지 않고 열린다.
산마테오 축제는 추수감사를 겸한 행사이다. 추수한 지역특산품들을 들고 나온다.
그리고 축제기간동안 먹고 마시며 공연과 퍼레이드, 불꽃놀이, 투우 등을 즐긴다.
로그로뇨 산마테오 축제 중 특이한 것은 리오하 포도주 산지답게
민속의상을 입고 나무통에 들어가 포도를 밟아 즙을 내는 전통행사가 있다.
영화 ‘구름 위의 산책’에서 나무통에 들어가 포도를 밟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의 무대가 스페인이 아니고 미국 나파 지역이지만
청순하게 생긴 여주인공과 동네 처녀들이 스커트 자락을 걷어 올리고
나무통에서 맨발로 포도를 밟아 으깨며 춤추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전야제 날이기 때문에 준비들을 하느라 모두들 분주했다.
부스마다 추수한 특산물을 진열하거나 음식재료를 나르는 등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러나 포도주를 선보이는 부스들에서는 와인 시음이 이미 시작됐다.
멀리 동양에서 온 순례자를 알아보고 포도주 시음을 권해왔다.
포도주가 담긴 호리병 모양의 가죽주머니를 꽉 눌러 짜면 포도주가 입안 목젖을 타고
넘어가는데 자칫 잘못하면 얼굴이 포도주 범벅이 된다. 그러면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안주로 치즈나 하몽 조각을 얻어먹기는 했지만 빈 뱃속에 이 부스 저 부스에서 얻어 마신
포도주로 제법 알큰해졌다. 잔디밭에 앉아 한참을 쉬어야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다.
나보다 사나흘 후에 로그노료에 들렀었던 한국 젊은이가 하는 이야기는
축제거리가 노상방뇨를 하는 등 고주망태들로 엉망진창이었다고 한다.
며칠간 계속 술독에 빠져 있었다면 당연한 일일게다.
나에게 이야기해준 젊은이는 빈정대는 투로 말을 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축제를 제대로 즐길 줄 아는 로그로뇨 사람들이 내심 부러웠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이자 광란과 야성의 신이다.
디오니소스는 출생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제우스는 테베의 공주 세멜레에게 반했다.
질투심에 불타는 헤라여신의 꾐에 넘어간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본래 모습을 보여 달라고 조른다.
그러마 하고 약속을 먼저 해버린 제우스는 자기의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는데
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 때문에 인간인 세멜레는 타들어가 재가 되고 만다.
제우스는 재빨리 세멜레 배 속에 있는 태아를 꺼내 자신의 허벅지에 넣었다.
그렇게 신과 인간 사이에서 생겨난 아이가 디오니소스였다.
님프들의 도움으로 자라난 디오니소스는 산과 들을 누비며 포도를 발견한다.
디오니소스는 가는 곳마다 포도 재배법과 포도주 제조하는 방법을 전파했다.
술의 마력으로 도취와 해방을 맛 본 사람들은 디오니소스를 열렬히 따랐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위한 축제가 이어졌다.
축제는 술에 취해 춤을 추며 무아지경에 빠지는 쾌락의 축제로 변했다.
체력이 소진되어 지쳐 쓰러져 그 자리에서 잠이 들면 축제는 끝났다.
대학 일학년 때 미학 강의에서 디오니소스에 대해 들었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디오니소스였기 때문에
신과 인간의 경지를 넘나들게 하는 술의 신이 됐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비극과 희극의 걸작들이
디오니소스 의식에서 처음으로 탄생했으며,
이미 기원전 5세기에 비극과 희극의 작품들이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공연됐다고 한다.
독일 동부지역의 아름다운 도시인 드레스덴에 가면 두 얼굴의 디오니소스를 만날 수 있다.
드레스덴 미술관에 디오니소스를 소재로 그린 대형 그림 두 점이 있는데,
하나는 술 먹기 전에 디오니소스와 그를 따르는 여인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술에 취해 완전히 녹초가 된 디오니소스와 술 취한 숭배자들의
헝크어진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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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렛날에는 나바레테에서 아소프라(Azofra)까지 23km를 걸었고
열째 날에는 아소프라에서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St. Domingo de la Calzada)를
지나 그라뇽(Granon)까지 27km를 걸었다.
이틀 내내 그늘 없는 길을 땡볕 아래 묵묵히 걸어야 했다.
새벽에 길을 나서면 평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그 중에 하나가 달팽이다.
껍데기를 짊어진 달팽이가 이슬 머금은 길섶을 빠져나와 자갈길에서 곰작거리는 모습을
볼라치면, 배낭을 걸머지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가는 순례자의 모습을 빼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달팽이는 욕심을 버리고 안분지족하는 지혜를 지녔음에 분명하다.
쓸데없이 큰 껍데기를 갖거나 얍삽하게 작은 껍데기를 갖지 않는다. 자기에게 맞는
껍데기를 짊어진다. 급하다고 뛰지도 않는다.
순례자도 마찬가지다. 이것저것 욕심을 버리지 못해 큰 배낭을 꾸리면 배낭 무게에
허리가 휘게 된다. 그렇다고 이것저것 다 빼놓고 짐을 싸면 엄청난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리고 마음이 급해 달려가면 반드시 발병이 나고 만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새벽길에서 달팽이로부터 안분지족의 지혜를 배운다.
언젠가 어느 사찰에 갔을 때 문화해설사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석가모니 불상의 뭉치뭉치 뭉쳐있는 머리칼 모양은 108개의 달팽이들이
부처님 머리 위에 올라가 앉아있는 것이란다.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밤새 좌선한 석가모니 머리 위에 내려앉은 이슬을 먹기 위해
달팽이들이 석가모니의 어깨를 타고 머리 위로 올라갔단다.
불심 깊은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펄쩍 뛴다. 엉터리로 꾸며진 속설이라며
그런 얼토당토하지 않은 말은 꺼내지도 말란다. 그런데 이렇게 얼토당토하지도 않은
엉터리 같은 말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어이된 일인가.
그 상상력에 공감하는걸까, 아니면 마음에 신심이 부족한 탓일까.
법정스님이 남긴 이슬 같은 글이다.
‘채우려면 먼저 버려야한다.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 것이 들어 설 수 없다.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여백이 본질과 실상을 떠받쳐주고 있다.’
길에서 네 명의 미국 할머니들을 만나서 인사를 나눴다.
자기들은 일흔한 살의 나이로서 여고 동창들이라고 소개했다.
매년 이렇게 여행을 다닌다고 한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재재거리고 깔깔댄다.
활기가 넘쳤다. 이 할머니들은 노인네들이 아니다.
산티아고 800km가 마냥 즐겁기만 하단다. 하루 20km씩 40일 일정으로 걷는다고 하는데,
더 걸려도 괜찮다고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고행길이 아니라 즐거운 산보길이다.
버리고 비우는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해내고 있었다.
아소프라에서 그라뇽까지 한참을 가다보면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St. Domingo
de la Calzada) 라는 마을이 나온다. 중세 시대부터 수많은 순례자들이 통과하는
이 마을에는 산토도밍고 성인의 기적이 전설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수도원에 들어가고 싶었던 목동 출신 도밍고는 일자무식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무식한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한 평생을 바쳤다. 우직하게 순례자들을 위해
길을 닦고 다리를 놓았다. 훗날 도밍고는 성인으로 추앙되고 그를 위한 성당이 세워졌다.
전설로 내려오는 기적 이야기는 이렇다.
부모와 함께 순례에 나선 잘 생긴 청년에게 반한 여관집 주인 딸이
청년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만 거절당한다. 그러자 앙심을 품은 처녀가
은잔을 청년의 봇짐에 몰래 넣어 누명을 씌웠다.
청년은 절도죄로 교수형에 처해지게 되는데 부모는 산티아고까지 계속해서
순례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 때까지 교수대에 매달린 채 죽지 않고 살아있는
아들을 발견한 부모는 재판관 집에 달려가 그 사실을 알렸다.
마침 저녁식사를 하던 재판관은 식탁 위의 구운 닭이 다시 살아난다면 모를까
그들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자 식탁 위의 닭이 튀어 오르며 큰소리로 울었다고
한다. 재판관은 교수대로 달려가 청년을 풀어주었다.
문학적으로 풍부하게 부풀려진 상상력이 만들어낸 기적은 아름다운 전설이 되어
수세기에 걸쳐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것을 기리기 위해
산토도밍고 대성당에는 실제로 암탉과 수탉의 닭장이 있다.
기적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일까, 땅에서 솟구치는 것일까.
아무래도 땅에서 솟구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양미 삼백 석을 부처님께 바치면 눈을 뜰 수 있다는 스님의 말에 무턱대고 약속을 해버린
아버지 심봉사를 위해 인당수 제물이 되어 거친 바다에 뛰어든 효녀 심청의 이야기 역시
문학적인 상상력이 만들어 낸 일종의 기적이 아닐까.
부처님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신심을 북돋고 부모에 대한 효심을 깨우치는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식탁 위의 구운 닭이 다시 살아났다는 전설 역시
산티아고 순례의 공력을 입증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런데 문제를 일으킨 여관집 주인 딸은 어떻게 됐을까.
산토도밍고 기적의 전설은 빗나간 짝사랑에 대해 앙갚음한 가슴시린 처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무거운 발을 끌고 그라뇽 마을에 들어섰다.
삼백 명 남짓한 주민이 사는 그라뇽 마을은 작지만 중세 마을로서의 시간의 무게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성당 옆, 수도원이 운영하는 알베르게(Albergue Parroquial San Juan)에서
하루 밤을 묵었다.
돌로 된 비교적 육중한 건물에 비해 작은 출입구를 지나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다락방이 나왔다. 좁은 계단참에 순례자들의 신발과 지팡이가 모아져 있었다.
30여명의 순례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널따란 다락방에 구석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뒤따라 들어온 백인 순례자가 한참을 망설이더니 돌아선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바닥에다 매트 깔고 자는데 자신이 없단다.
삐꺽대는 이층 철침대보다 바닥에 매트 깔고 자는게 훨씬 편한데, 익숙치 않은가 보다.
수도원이나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에서는 대개의 경우
숙박료나 식대를 받지 않는다. 그 대신 입구에 있는 도네이션(donation) 박스에
자발적으로 알아서 재량껏 넣는다. 저녁과 다음날 아침까지 두 끼 식사와 잠자리까지
해결하면 보통 10유로 정도 낸다.
저녁식사에는 포도주도 맘껏 마실 수 있으니 얼마나 싼가.
돈이 넉넉지 않은 젊은이들은 2유로 정도 내거나 아예 공짜를 즐긴다.
수도원이나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만 찾아다니며 세상에서 가장 싼 여행을
하고 있다며 자랑하는 젊은이를 본 적이 있다.
주방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할 때, 가서 거들었다.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온 순례자들과 함께
감자를 까고 양파를 썰어 넣고 콩 스튜를 만들었다.
사십여 명이 식탁에 빙 둘러앉아서 야채 사라다와 치즈 바른 바켓트 빵,
그리고 콩 스튜로 저녁식사를 했다.
포도주가 서너 잔씩 들어가니 얼굴들은 불콰해지고
실내는 여러 나라의 언어로 왁자지껄해졌다.
술을 허용한 가톨릭의 편협하지 않음에 감사한다.
포도주는 순례의 피로감을 씻어내는 생명수임에 분명하다.
남자들이 설거지를 했다. 잠시 쉰 다음 구석진 다락방에 다시 모였다.
중앙에 세워진 큰 촛대에 불을 밝히고 산티아고 순례를 온 이유나 느낌, 기도 제목들을
돌아가면서 짧게들 말했다. 영어, 스페인어, 불어, 독일어 등 여러 나라 말들로 한다.
한국어도 그중에 하나였다. 상대방이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아무런 상관이 없다.
거대한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닿으려했던 인간의 끝없는 호기심과 오만함에
분노한 하나님이 사람들의 언어를 갈라놓았다고 한다.
성경 창세기에 의하면 땅 위에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언어를 쓰고 있었는데,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돌 대신 벽돌을 구워서 쓰고 흙 대신 역청을 쓰자.
그리고 성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자'라고 했다.
사람들이 성과 탑을 쌓는 것을 보시고 '이 일은 그들이 하려고 하는 일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들은 하려고만 하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언어를 뒤섞어 놓자.' 해서
언어를 흩으러 놓았더니 성 쌓는 일이 중단됐다고 한다. 온 땅의 언어를 뒤섞어 놓은 곳의
이름이 바벨이다.
바벨탑 이야기도 또 다른 문학적인 상상력이 만들어낸 신화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세상 사람 모두가 한 가지 언어를 사용했다면 어찌 됐을까.
더 평화스러웠을까, 아니면 더 이악스러워졌을까.
21세기 접어들면서 무섭게 질주하고 있는 인공지능 A.I.가 또 다른 바벨탑이 아닐까.
그라뇽 수도원 다락방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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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루 날, 그라뇽에서 벨로라도(Belorado)까지 아주 짧게 16km를 걸었고
열두 째날, 산환 데 올데가(San Juan de Ortega)를 지나 아헤스(Ages)까지
30km를 걸었다. 가끔 구름이 낀 대체로 맑은 날이었다.
일정의 약 삼분지 일이 지나면서 서툴고 어색했던 것들에 적응되고 익숙해져
어느새 모든 일들이 순례자의 일상이 돼버렸다. 이른 새벽 침대에서 일어날라치면
팔다리며 어깨 등 온몸이 쑤시고 뻐근한데도 이상하게 신발 끈을 잡아매고 배낭을 짊어지면
힘이 다시 솟아났다. 새벽 정기 때문이다.
새벽을 여는 자연의 생명력과 동이 트기 전의 은밀함은 순례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밤 세계의 유혹이 도시인들을 밤으로의 여행으로 안내한다면, 이른 새벽 우주의 싱그러운
기운은 순례자를 영원에 이르는 길로 안내한다.
사막을 횡단하는 유목민에게 오아시스가 있듯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이베리아 반도를 횡단하는 순례자에게는 바르(Bar)가 있다.
바르는 까미노의 오아시스이다. 멀리 마을이 보이면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마을이 반가워서가 아니라 바르가 있어서 그렇다.
바르는 다기능의 오아시스이다.
바르에는 배고프고 목마른 순례자를 위해 간단하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준비돼있다.
바르는 참았던 용변을 처리할 수 있는 고마운 해우소이기도 하다. 또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동행이 있다면 만남의 장소가 된다.
게다가 글로벌 통신소의 역할을 한다. 와이파이(wifi)를 이용해 이역만리 떨어져있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간단하게 안부를 전하고 받는다.
사막 어딘가에 유목민과 낙타의 타는 갈증을 적셔줄 오아시스가 있듯이
산티아고 순례길 어딘가에는 순례자의 타는 갈증을 풀어줄 바르가 있다.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 800km를 큰 어려움 없이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바르 덕분이었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미카엘 천사 덕분이었다. 미카엘 천사는 가브리엘 천사, 라파엘 천사와함께 구약성서에서 나오는 삼대 천사장이다.
바르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곧바로 산미구엘(San Miguel) 브랜드의 생맥주 그란데(grande)
한 잔을 주문하곤 했다. 미구엘은 미카엘의 스페인어 표기이며 그란데(grande)는 큰 잔을
뜻한다. 산미구엘 생맥주를 그란데 잔으로 쭈~욱 들이키면 스페인 한낮 땡볕에 갈증으로
타들어 가던 온 몸의 세포들이 다시 촉촉하게 생기를 되찾았다.
나를 지켜준 고마운 수호천사, 미카엘 천사, 산미구엘 덕분에 순례길 800km를 지치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아스트로가(Astroga) 성당 안에 미카엘 천사장의 조형물이 있는데,
다정다감한 훈남의 모습이었다. 미카엘 천사의 인기는 대단하다.
미카엘의 영어식 이름은 마이클(Michael)인데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등지에서
가장 많은 사내 이름 중에 하나인 것만 봐도 미카엘 천사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
그라뇽에서 벨로라도(Belorado)까지는 고작 16km 짧은 거리라서 배낭을 택배로
보내지 않고 짊어지고 걸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인지, 순례자의 오아시스인 바르가
10km 이상을 걸었는데도 나타나질 않았다. 이럴 수가.
내친 김에 쉬지 않고 걸었더니 벨로라도 공립 알베르게에 일등으로 도착했다.
등록을 하려는데 1인실 15유로 안내 팻말이 눈에 띄었다. 1인실이 딱 하나 있단다.
얼씨구, 좋다, 무조건 택했다. 일등으로 도착한 상급인가 보다.
1.5평가량의 좁은 방에 침대하나 달랑 놓인 게 전부다. 화장실이나 욕조도 따로 없다.
아래층에 내려가 공동 화장실, 공동 샤워실을 사용해야 했다.
방 안에는 그 흔한 거울도 없다. 그런데도 로또에 당첨돼 벼락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열하루 만에 나만의 공간이 생긴 셈이다. 사글세 생활 11년 만에 내 집 마련해서 들어온
가장의 가슴 뿌듯한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
이층 철침대의 삐거덕대는 금속성 소리, 옆 침대 사람의 부스럭거리는 소리,
코 고는 소리, 화장실 오가며 문 여닫는 소리 등 30-40명이 함께 머무는 방의
온갖 소음으로부터 해방됐다.
뭐니 뭐니해도 제일 신나는 것은 내 마음대로 불을 켰다 껐다 할 수 있는 자유였다.
전기스위치를 공연히 올렸다 내렸다 해봤다. 한 밤중에 일어나 불 켜고 문자도 보내고
사진도 보냈다. 혼자만의 공간이 이렇게 소중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가.
소소한 것의 소중함을 절감한 시간과 공간이었다.
다음 날, 벨로라도에서 출발해서 산환 데 올데가를 지나 아헤스까지의 약 30km 길은
멀고 힘든 코스였다. 오르막 비탈길을 여닐곱 시간 마냥 걸어야 했다. 오르막길이 힘들어서
그랬는지 외롭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대학생 때에나 생각했음직한 그런 생각에 빠졌다.
언젠가는 한 번 캔버스 위에 유화로 내 자화상을 그려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초상화가 아닌 자화상을. 자화상이 나의 또 다른 허구의 모습일지 몰라도 언젠가
한 번은 내가 나를 그려봐야겠다.
특별히 내세울게 없는 사람인데, 어떤 이미지의 나를 그려내야 할까.
나중에 언제가 자화상을 그린다면, 영성을 찾아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선 지금의 모습을
그리거나 아니면 몇 년 전 미국 씨에라 네바다 산맥의 죤뮤어 트레일을 완주했을 당시의
야성이 번득였던 내 모습을 그려야겠다.
자화상에 한참 몰입해 걷고 있는데, 돌아가신지 오래된 선친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평소 생각하지도 않고 마냥 잊고 살았는데 어인 일인지 모르겠다. 어찌 보면, 그간 내 안에서
애써 아버지를 지우고 살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한전에 근무하셨던 어린 시절에는
상당히 안정된 환경에서 자랐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겠지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셨다. 동업이었다.
처음 잠깐 반짝했던 사업은 일 년도 못 채우고 망했다. 그리고 우리 집도 망했다.
그런데 동업자는 전혀 망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일학년 어느 날,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난장판이었다.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빚잔치였다.
그 당시는 파산이나 회생 같은 법적보호 제도가 없었던 때였나 보다. 빚쟁이들이
저 마다 집안 살림살이들을 들고튀었다. 마치 하이에나들 같았다.
그 날 어두워질 무렵, 우리 식구들은 용달차 뒤 칸에 실려 달동네로 갔다.
용달차에는 어머니가 사수한 재봉틀 한 대와 내가 엎드려 사수한 책상 하나가 실려 있었다.
아버지는 재기를 하려고 발버둥 치셨지만 허사였다. 삼사년 지난 후, 화병으로 병석에 눕게 되고
꽤 오랜 동안 자식들에게 짐이 되셨다.
한번도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는데 왜 그 말이 떠올랐을까.
아들이 서울대 합격했다며 아버지가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고 고모가 전했던 그 말 말이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흐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소리내우는 것도 아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뜨거운 눈물이 쭈르르 흘러내렸다. 아~! 아버지.
순례길에서 한번은 눈물 흘린다는데, 내가 그럴 줄은 몰랐다.
옹이 없는 나무 없듯이 상처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애써 외면했던 아버지를 순례길에서 만나다니, 정말 놀라웠다.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지는 않았다. 그러나 화해는 한 것 같다.
뜨거운 눈물이 그랬다.
졸업50주년 성금
신한은행 : 110-450-428201
예금주 : 강석완
산티아고 순례길 9편 : 엘시드의 고향, 부르고스
열사흘 째날, 아헤스를 떠나 엘시드의 고향 부르고스(Burgos)을 향해 19km를 걸었다.
어제 오르막길을 힘들게 오른 수고를, 오늘 내리막길이 그 보상을 해주었다.
날씨는 쾌청했다.
먼발치 앞서 가는 사람의 랜턴 불빛을 따라 새벽길을 걸었다. 약 3km정도 지나
작은 마을이 나타났는데, 골목길에 접어 들어서자 어디에선가 달콤한 빵 냄새가 났다.
순례자를 위해 새벽 일찍 문을 연 바르(bar)였다. 따뜻한 커피의 향긋한 향과 갓 구워낸
토스트 빵 냄새는 순례자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다.
아직 잠이 덜 깬 서벅서벅한 오십대 부부가 분주했다. 고마운 사람들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결코 부지런하지 않은데, 순례자들을 위해 꼭두새벽에 문을 열었으니
고마울 수밖에.
마을을 빠져나가기 직전, 어둠 속에 특이한 입간판을 발견했다. 인류 조상의 유적을
발굴한 장소임을 알리는 간판이었다. 아타푸에르카(Atapuerca)라는 마을에서
12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직립 원인들의 집단거주지를 발굴하고 있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직립을 하고 도구를 사용해 사냥하며 불을 사용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조상인 셈이다. 순례 길에서 벗어난 곳에 있는데다가 너무 이른 새벽이라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인간을 비롯한 지구 위의 생명체에 대한 끝없는 논쟁이 생각났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발표한 ‘진화론’이냐, 아니면 창조주에 의한 ‘창조론’이냐에 대한 논쟁 말이다.
나는 애매모호한 ‘불가지론’에 기대고 있는데, 어찌 보면 ‘불가지론’이 가장 현명한
대답인지도 모르겠다. 천동설이던 지동설이던 우주는 우주 그 자체이며,
창조론이던 진화론이던 인간은 미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미약하기 그지없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이제는 신의 경지를 넘보는
호모 데우스(Homo Deus)를 향해 맹렬하게 도전하고 있다.
120만 년 전에 인간의 조상인 직립 원인(Homo Erectus)이 존재했던 것처럼
120만 년 후에도 인간의 후손은 존재할까.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마을을 벗어나자 가파른 언덕이 나타났다. 언덕길을 따라 철조망 쳐진 목장 안에는 양떼들이
새벽이슬을 맞은 채 서있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놔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목자의 이야기가 잠시 생각났다.
조금 지나서 돌길이 나왔는데 느낌이 묘했다. 송구공만한 크기의 거무칙칙한 색상의 돌들이
널브러져 있는데 마치 해골바가지들이 산지사방에 널브러져 뒹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해골이 널려있는 골고다 언덕인가.
언덕 꼭대기에 돌무덤이 쌓여있고 정중앙에 높다란 나무십자가가 서있었다.
아무런 장식이나 꾸밈이 없는 단아한 나무십자가였다. 산티아고 순례 길을 걷다보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수천 개가 넘는 십자가를 만나게 되지만, 동터오는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있는 이 나무십자가가 내 마음에, 그리고 내 영혼에 가장 와 닿았다.
십자가가 서있는 돌무덤 곁 넓은 평지에는 순례자들이 만들어가는 현재진행형의 걸작품이
하나 있다. 순례자들이 언덕길에서 돌멩이 하나씩을 집어 와서 동그라미를 만든다.
호수 위에 동심원이 퍼져나가듯 언덕 위에는 순례자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만들어가는
동심원이 점점 넓게 퍼져나가고 있다. 신비의 동심원(mystic circle)이다.
나도 돌 하나 들어다 동그라미에 보탰다. 전설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거다.
중세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가는 순례자들이 찾아와 머물고 가는 부르고스는
중세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답게 위용이 당당하다. 수많은 성당의 첨탑과 수도원 건물, 궁전,
대학교와 병원 건물들이 쉽게 범접하지 못할 중세 도시의 위용을 과시한다.
대성당 바로 뒷켠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에 1시 조금 넘어 도착했는데, 한참 길게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려야했다. 진화론에 따르면 알베르게도 빠르게 진화하고 있는게 분명하다.
위치도 좋을 뿐 아니라 시설도 현대식으로 진화됐다. 그걸 어찌 아는지, 1시 반에 등록이
시작되는데도 불구하고 부르고스 공립 알베르게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오는 순례자들로
붐볐다. 침대를 배정받고 샤워 후에 곧장 대성당을 향했다.
부르고스 대성당은 1984년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1221년에 건축이 시작된
대성당은 15~16세기에 크게 증축됐으며 18세기에 고틱 양식으로 개축됐다.
부르고스 대성당은 규모면에서나 실내장식에 있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성당 중에 하나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 있는 크고 작은 수많은 성당들은 항상 개방되어 있는데, 부르고스
대성당의 경우 입장료 7유로를 받는다. 순례자들에게는 다소의 할인혜택이 있다.
대성당 외벽 파사드(facade)와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의 위용을 스마트폰 카메라로는
담을 수가 없었다. 대성당 내부에는 넓은 회당이 중앙에 자리하고 있고, 대회당 곁으로
15개가 넘는 작은 예배당(chapel)들이 회랑을 따라 배치돼있다.
각각의 작은 예배당(chapel)들은 당대의 재력가의 후원으로 최고의 건축가, 조각가, 화가들이
동원돼 만든 제각기 다른 분위기의 성소를 이루고 있다.
각각의 예배당들은 대리석으로, 혹은 타일로, 혹은 옥으로, 혹은 상아(ivory)와 흑단(ebony)으로
장식돼 있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예배당 구석구석에 있는 조각품이나 부조물, 그림들은 하나같이 보물이다.
한때 세계를 제패했었던 스페인의 부귀와 위용을 느낄 수 있었다.
대성당에는 스페인의 전설적인 영웅인 엘시드의 시신을 모셨던 목관과 그림이 있다.
찰톤 헤스톤과 소피아 로렌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로 우리에게 친숙한 엘시드(El Cid)는
스페인 사람들이 제일 존경하는 전설적인 영웅이다.
엘시드는 스페인 안에 있는 이슬람 세력들을 포용하는 지도력을 발휘하여 국가의 위난을
극복했다. 국왕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추방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는데도 불구하고
국왕과 왕국에 충성을 다하다가 장렬하게 죽음을 맞았다.
두 차례나 백의종군하는 수모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12척의 배로 왜군을 물리쳤던
이순신 장군과 같은 국민적인 영웅이다. 이순신 장군이 ‘싸움이 중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하며 최후를 맞은 것 까지도 흡사하다. 엘시드나 이순신 장군, 두 사람 모두
전설적인 국민영웅으로 소설, 영화, 드라마, 게임의 주인공이 되는 것 까지도 같다.
대성당 광장 한 구석에서 특이한 조형물을 발견했다. 벤치에 앉아 있는 병들고 지친 순례자의
모습이다. 온 몸에 피고름이 흐르는 듯, 순례자의 모습은 처연하기 그지없다.
중세 때에 순례자들이 마을과 마을에 소식을 이어주는 역할도 했지만 마을과 마을에
전염병을 퍼트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몹쓸 병을 얻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순례자들에게 치유의 기적은 일어났을까.
하나님은 이들의 처절한 기도에 어떻게 응대하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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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닷새 째날, 순례길에서 일탈했다.
살다보면 일상에서 일탈하는 날이 있다. 아니 일탈하고 싶은 날이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일매일 같은 궤적을 살아가는 것이 지겨워질 때, 우리는 일상에서 탈출을 꿈꾼다.
그러나 탈출을 꿈꾸지만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탈출을 감행하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되고 게다가 용기까지 필요하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걷기 보름 만에 순례자의 일상에서 과감하게 일탈을
감행했다. 지인으로부터 기왕지사 스페인 간 김에 빌바오(Bilbao) 구겐하임 미술관
(Guggenheim Museum)을 둘러보라는 권유가 있었다.
길을 걸으면서 삼사일 망설였다, 갈까 말까 하면서.
순례길에서 빌바오로 가려면 두 군데가 가능하다. 로그로뇨에서 빠져나가거나 부르고스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인데, 이제 부르고스를 지나면 기회는 물 건너가게 된다.
전날 저녁 부르고스 대성당 옆 골목에 있는 관광객과 순례자들이 몰리는
엘모리토(El Morito)라는 유명한 맛집 레스토랑에서 포도주 한 병 마시면서 마음을 정했다.
‘갈까 말까 망설일 때는 가라’는 세속적인 지혜를 따르기로 했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보러 가려고 마음먹은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쇠락해가던 도시가 어떻게 다시 회생할 수 있는지를 보고 싶었고
또 다른 이유는 이 시대에 현존하는 천재 건축가의 걸작품을 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새벽 일찍 배낭을 챙겨 길을 물어물어 부지런히 시외버스 터미날에 도착한 게 7시 직전이었다.
그런데 첫 버스가 6시 30분에 떠났다고 한다. 그러면 그 다음 버스가 7시 30분, 8시 30분 등
시간별로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게 왠일인가. 다음 버스는 10시에나 출발한다고 한다.
순간 갈등이 일었다.
3시간을 기다려서라도 당초 마음먹은 대로 빌바오를 갈 것인가,
아니면 빌바오를 포기하고 순례길로 복귀할 것인가.
이른 새벽부터 이게 무슨 낭패인가. 슬그머니 오기가 발동하고 뚝심이 발동했다.
ALSA 고속버스 회사와 스페인 사람들에게 속으로 욕을 바가지로 퍼부으면서 기다렸다.
객지 남의 나라 교통편 이용이 내 마음대로 될 턱이 있겠느냐만은.
부르고스에서 빌바오까지는 버스로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스페인 북부 해안에 위치한 빌바오는 철강과 조선 산업으로 번성했던 도시였다.
그런데 주력 산업인 철강과 조선 산업이 한국, 일본, 중국 등에 밀려 쇠락의 길을 걸으며
도시는 황폐해져갔다. 그러자 빌바오가 속해있는 바스크 주정부는 빌바오를 문화예술산업을
통한 도시발전 모델로 정하고 뉴욕의 솔로몬 구겐하임 재단과 교섭한 후 1억불의 건축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솔로몬 구겐하임 재단은 천재건축가인 프랑크 게리(Frank Gehry)에게
창의적이면서도 대담한 미술관을 설계토록 주문했다.
그 결과 이 시대 최고의 건축물로 평가받는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 1997년 10월에 개관하게 됐다. 마냥 쇠락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던 빌바오 시는 구겐하임 미술관건립으로 일약
세계 문화예술의 도시로 각광을 받으며 회생하게 됐다. 빌바오 미술관을 보기 위하여
인구 30여만 명의 소도시인 빌바오에 한 해 13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관광객이 뿌리는 돈으로 흑자로 돌아선 빌바오 시는 미술관에 이어 공항, 교통시스템, 호텔 등
관광 인프라 구축으로 도시화에 가장 성공한 모델이 됐다.
현재 빌바오는 ‘최고의 유럽도시(The Best European City)’로 선정되는 등 도시화 분야의
국제적인 상을 휩쓸고 있다.
이 정도면 도시의 회생이 아니라 찬란한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빌바오 미술관은 미술관건물 자체가 뛰어난 예술작품이다.
첫 인상은 ‘거대하다’라는 느낌이었다. 미술관의 건축소재는 티타늄과 유리인데
거대한 건물외벽 파사드(facade)는 완만한 곡선으로 이뤄져있다.
곡선을 이룬 은빛 티탄늄 외벽은 시시각각 변하는 광선에 따라 짙음과 옅음을 다르게
반응한다. 스페인 넓은 들판에 있는 구릉들이 빚어내는 빛의 음영을 닮았다.
미술관 내부에 들어서면 높고 넓은 아트리움이 나온다.
아트리움 역시 곡선으로 비대칭이다. 천정 벽 유리창을 통해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광이 쏟아져 들어온다.
이 아트리움을 천재건축가인 프랑크 게리는 ‘꽃(The Flower)'이라고 명명했다.
천재들은 싱겁다. 천재들은 싱거운 장난을 좋아한다.
미술관 건물 앞에는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어마어마한 크기의 강아지 조형물을 앉혀 놨다.
강아지를 꽃으로 장식하다니, 발상이 참신하다.
건물 뒤쪽에는 튤립 조형물이 있다. 곡선으로 된 튤립 꽃봉오리는 바라보는 사람을 곡선으로
반사한다. 꽃봉오리마다 다른 색상으로 피사체를 길쭉하게, 또는 짤록하게 반사한다.
육교 있는 쪽으로는 거대한 발로 땅을 딛고 있는 거미가 있다. 공상과학의 영화에서처럼
거대한 거미가 거리를 누빌 기세이다.
천재의 천진난만한 아이디어가 관람객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미술관 규모가 크다보니까 전시장이 크고, 전시장이 크고 넓다보니까 전시된 작품들의
크기도 상상을 불허한다. 마침 미국 작가인 Richard Serra의 철판을 이용한 작품이
전시돼 있었는데, 대여섯 군데에 몇 십 톤씩 나가는 철판 코일들을 세워놓았다.
'이게 무슨 예술작품이냐, 단지 엄청난 크기의 철판 코일들을 전시장 안에 세워놓은 것'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두 겹, 세 겹 둥글게 말려들어간 황토색 철판 사이로 걸어 들어가면서 느끼는 감각은 달랐다.
원초적인 느낌이 들었다. 소라껍질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가 빠져나오는 것처럼
거대한 철판 속에서 수렴과 확산이 느껴졌다. Richard Serra는 몇 년 전 쇠로 만든
100미터 길이의 ‘뱀(Snake)’이란 작품을 빌바오 전시장에서 전시했다고 한다.
각 층별로 산재된 넓은 전시장들에서는 비디오아트 작가인 Bill Viola 등을 포함하여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현재 솔로몬 구겐하임 재단은 뉴욕과 베니스, 그리고 빌바오에서 미술관을 건립하여 운영 중에
있는데 중동지역인 아부다비에 새로운 미술관 건립을 추진 중에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부러움을 가지고 넓은 전시장을 돌아보았다.
순례길 걷는 것보다 전시장 돌아보는게 훨씬 힘들었다.
빌바오 오며가며 길에서 보낸 시간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래도 이 시대 천재 건축가의
걸작품을 보기 위해 순례길에서 일탈한 것은 정말 잘한 결단이었다고 스스로를 칭찬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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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째날, 구겐하임 미술관을 전날 오후 내내 돌아보고 빌바오 시내에서
하루 밤을 잔 후, 다음날 아침 일찍 ALSA 버스를 타고 부르고스로 돌아왔다.
부르고스에서 온타나스(Hontanas)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 이동한 후
순례길에 합류했다. 들판 길 위로 햇볕이 쨍쨍하게 쏟아졌다.
일탈 하루 만에 다시 순례자 본분으로 돌아왔다.
메세타 지역의 땡볕은 장난이 아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땡볕을 피할
그늘이 없다는 것이다. 땡볕은 사람을 멍한 상태로 만든다. 가로수 그늘조차
없는 길을 묵묵히 걸었다.
이런 멍한 상태를 무념무상의 경지라고 한다면 조만간 득도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에서 묵을 요량으로 한참을 걷고 있는데
허물어진 나지막한 성벽과 성문이 나왔다.
성벽에서 Ruinas del Convento de San Anton이라고 쓰인 작은 안내판 하나를
발견했다. 영어와 스페인어는 4촌 내지는 6촌지간이라 무슨 뜻인지 감이 왔다.
‘안톤 성인의 수도원 폐허’라는 뜻이 분명하리라.
순간 호기심이 발동됐다. 호기심은 참 좋은거다. 호기심을 잃으면 젊음도 잃는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까미노 옆길로 들어서서 수도원 폐허를 찾아갔다.
거기서 산티아고 순례길 최고의 보물 중에 하나를 발견하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폐허가 된 수도원 성곽 안에 돌로 지어진 작은 집이 있었다.
몇 백 년이 되고도 남음직한 고색창연한 이 건물을 알베르게로 사용하는데,
전기도 없고 수도도 없고 와이파이도 없고 숙박료도 없다고 한다.
전기가 없고 와이파이가 없는 것은 이해가 된다. 숙박료는 도네이션하면
되니까 그것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온종일 땀 흘린 순례자에게 샤워할 물이 없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도랑에 나가 물을 길어와 수건에 적셔 닦으란다.
안을 들여다보니 이층 철제침대 여섯 개가 달랑 놓여 있었다. 다시 말해 수용인원이
딱 12명이라는 뜻이다. 여하튼 망설임은 짧았다. 이런데서 언제 자볼 것인가.
수백 년 전, 아니 천 년 전 중세시대 순례자들이 머물던 이 곳에,
지금 여기 내가 와있는데 무엇을 망설인단 말인가.
산안톤(San Anton) 성채는 순례자들을 보호하며 이슬람군에 대항하기 위해
설립된 기사단의 성채와 수사들의 수도원으로 약 900년 전에 세워졌다.
아울러, 순례자들을 위한 큰 규모의 병원도 운영되었다.
과거 영화스럽던 시절의 성채와 건물은 이제 폐허가 되어 잔재들만
드문드문 남아있다.
무너진 건물 벽 첨탑에 서있는 'T'자 형태의 타우(Tau) 십자가가 지나온
세월의 풍상을 말해주는 듯 했다. 타우(Tau)는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이
출애급할 때 모세를 통해 마지막 징벌로 행했던 장자 죽임을 피하기 위해서
집 문틀에 양이나 염소의 피로 발랐던 T자 모양의 표시였다.
또, 일설에는 예수님이 매달렸던 실제 십자가 모양이 T자형이라고도 한다.
산안톤 수도원은 타우 십자가를 수도원의 심볼 마크로 사용했었다.
‘없으니까 불편하다. 그렇지만 없으니까 좋은 것도 많다.’
이 말은 분명 역설이다.
그런데 산안톤 수도원 폐허에서 역설의 지혜를 얻을 줄이야.
땡볕 길에서 수고한 몸을 한바탕 샤워하고 나면 한결 개운해지는데
샤워를 못하니까 칙칙하고 불편했다. 별수 없이 도랑에 나가 물 한통 길어와
수건에 적셔 땀을 닦아냈다. 마당에 나와 평상에 누웠다.
무너졌지만 높이 치솟아있는 성채는 흥망성쇠의 덧없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마당 한가운데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니 솟아있는 성채가 깊은 우물의 벽이 됐고
파란 하늘은 깊은 심연이 됐다. 한참을 무념무상의 멍때림 상태로 누워있었다.
하늘에 떠있는 것인지, 깊은 우물에 빠져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알베르게 사무실 입구에 놓여있는 자료들을 읽어 보았다.
산안톤 수도회의 창시자는 이집트 출신의 성자 앤소니(Saint Anthony)이다.
부유한 집안 출신인 그는 20세 때에 ‘온전하기를 원하면,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라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영적으로 듣고 그대로 실행
했다고 한다.
‘경건, 금식, 기도’만이 온전함으로 이끌 수 있는 길임을 깨닫고 실천하며
추구했던 구도자였다. 산안톤 수도회의 수사들은 청색 타우 십자가를 새긴
검은색 사제복을 입었다.
전염병이 창궐한 시기에 스웨덴, 스코틀랜드, 헝가리까지 유럽 대부분 지역에
병원을 설립 운영하는 등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옛 중세시절, 성직자나 왕족들은 산안톤 성채 수도원에서 묵었으며
수많은 종자들을 데리고 순례길에 나선 귀족들은 성채 근처에 야영지를
마련해 머물렀다.
이들을 따라온 예술가들은 각지에서 올라온 이야기꺼리들을 주고받으며
문화적 상상력을 보태서 기이한 전설들을 새롭게 엮어갔다.
그런 한편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기사단의 기사들은 나름 분주했을 것이다.
성채 안에 순례자를 위한 숙소가 있었는데 그 때에도 12명의 순례자만 수용했다고
한다. 건강한 순례자들은 병들거나 죽어가는 순례자들과 같은 공간에서 기꺼이
잠자리를 함께 했다고 한다. 오늘 우리가 묵는 이 자리가 바로 옛날 그 숙소 자리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머물다간 이 자리에 나도 잠시 머물다가 스쳐지나갈 것이다.
하늘에 구름이 잠시 머물다 스쳐지나가듯 그렇게.
한참을 멍 때리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데 알베르게 주방에서 음식 만드는
소리와 냄새가 났다. 주방에 가서 도울게 없냐고 물었더니 마당에 놓인 식탁을
닦고 세팅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한다.
산안톤 알베르게 관리인인 로버트(Robert)는 60대 초노의 스페인 사람이었다.
순례자들을 위한 자원봉사자답게 표정과 말소리가 온화하고 맑았다.
또 다른 한 사람의 봉사자는 호주에서 온 젊은 여성봉사자인데 쾌활하고
에너지가 넘쳤다. 4개월 예정으로 산안톤에 와있다는 이 여성봉사자의 이름은
잊었는데 웨이브가 된 검은색의 긴 머리칼을 나풀대며 주방과 식탁을 오갈 때의 모습은
집시 카르멘이 연상됐다.
순례자들을 위해 알베르게에서 봉사하는 사람을 오스피딸레로(Hospitalero)라고
부르며 여성의 경우에는 여성어미를 붙여서 오스피딸레라(Hospitalera)라고 한다.
국제적으로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는데 지원자의 조건은 산티아고 순례를 완주한
경험이 있어야하며 전화를 받을 정도의 스페인어와 영어 구사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숙소청소 등 궂은일을 처리하며 많은 사람들과 교유할 수 있는
영육이 건강한 사람이어야 한다.
어둑해질 무렵에 미국, 호주, 불란서, 독일, 화란, 일본, 한국 등지에 온
12명의 순례자와 2명의 오스피딸레로 등 14명이 저녁 식탁에 빙둘러 앉았다.
와인을 마시며 식사를 하는 가운데 관리인인 로버트씨가 일어나 좌중을 이끌었다.
자기소개와 산티아고 순례길을 오게 된 동기나 걸으면서 느낀 소감 등을
자연스럽게 발표하라고 했다.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했는데, 그중 두 사람의
이야기가 관심을 끌었다.
78세 나이라고 자기소개를 한 자그마한 몸집의 불란서 할머니는 빼곡하게
적은 수첩을 내보이며 불란서 르쀠(Le Puy)에서 출발한지 60여 일이 된단다.
불란서 중남부를 동서로 관통하여 쌩장을 지나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산티아고까지
1,600km되는 순례길을 걷고 있는데 지금까지 1,100km 이상을 걸었다고 한다.
대단한 노익장의 할머니였다.
또 한 사람은 독일에서 온 훤칠한 청년이었는데, 그 청년은 농아였다.
자기 차례가 오니까 머뭇거림없이 일어나 까미노 순례길의 감동을 손짓 발짓
몸짓 얼굴표정으로 진지하게 표현했다.
백 마디의 언어보다 마임으로 전달한 청년의 진정성이 큰 감동으로 전해져왔다.
어둠이 깔리자 공기가 차졌다.
오스피딸레로인 로버트가 마무리 발언을 했다.
‘이 길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 그리고 이 길 위에서 만나 함께 걷고 대화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놀랍고 신비한 힘의 역학 작용을 느낀다.’고 말하는
그의 눈가에 옅은 물기가 어린 것이 보였다.
폐허가 된 성채주변에 전기불빛이 한점도 없으니까 하늘의 별빛이 더욱 찬연했다.
반구체인 하늘에서 주먹만한 별들이 콧등에 마구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없으니까 불편했지만, 없으니까 좋은게 많다는 역설은 전혀 억지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