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진보-3rd
“빈곤으로 나락에 빠지고 게으름에 푹 잠겨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부유하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의 빚은 다 청산되었고, 우리의 자본은 증가했으며, 우리의 땅의 가치는 세 배로 올랐다.” 여기서 우리는 백인이다. 미국 버지니아의 대표 작물은 담배였다. 담배 농장보다 면화 농장은 규모가 컸고 엄격한 규율하에 가차없이 노동이 진행되었다. 면화 가격이 오르면 더 가혹하게 일에 내몰렸다. 흑인에 대한 가혹한 처우와 폭력은 조면기가 남부의 경작 가능한 땅으로 열어젖혔을 때 한층 심해졌다. 미국에서 ‘진보’의 비젼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지점이 바로 여기였다. 자연 질서에서 백인의 위계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생각에 토대를 제공한 개념이 부각되어서 노예제에 기반한 농장 시스템의 존재가 미국 전체에 더 잘 용인될 수 있었다.
면화산업은 개량된 조면기 같은 혁신을 포함한 지식덕분에 노예의 희생을 바탕으로 번성했다. 트랙터, 콤바인 등의 기계가 농사현장에 적용되면서 성장했지만, 소비에트 경제는 수만만 명의 소농이 희생되었다. 농업집단화를 추진했다. ‘쿨락’이라 불리는 소농들이 부유해지자 이들을 반 공산주의 세력으로 간주했다. 스타린이 농업 집단화를 결정하자 공산당 프로파간다 시스템이 작동해 이를 ‘진보’라고 홍보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공산당원을 설득해야 했다. 스탈린은 가능한 모든 프로파간다 수단을 총동원하여 국내 모든 집단화를 승리로 내세웠다. 그리고 집단 농장 운동의 성공은 무엇보다 농장 운동의 자발적인 속성 덕분이었고,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여건을 고려한 덕분이었다. 집단 농장은 강요로 지어져서는 안 된다.
1851년 런던 세계박람회를 보러 지역 유지 노동자들이 런던가는 기차를 탄다. 증기기관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제력을 괄목할 만하게 진전시켰고 박람회에 온 사람들은 생애에 광산, 면직물, 교통 등에서 사용되는 테크놀로지의 변화를 목격했다. 유럽의 인당 산출이 두 배로 증가했다. 당시 부자들은 철도 건설을 반대했다. 운하를 소유해 높은 소득을 올리던 사람들이다. 철도건설의 책임은 ‘스티븐’이 맡았는데 그는 가방끈이 짧아서 캠브리지 대학을 나온 반대파에 쩔쩔맺다. 그는 증기 동력으로 철도 위를 달리는 기관차를 만든다. 당시로는 놀라운 속도인 시속 10킬로미터로 약 50킬로미터 구간을 안전하게 운행해 입증한다. 이 기관차의 등장으로 전국적인 관심은 물론 전 세계에서도 이것을 보러 사람들이 찾아왔다. 철도는 물질, 제품, 서비스의 운송도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우유 같은 식품이 대도시에 날마다 운송되었고, 먼 지역도 조달이 가능하니 마차로 닿는 거리의 작은 농장들이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1829년 “리버풀-맨채스터 철도회사”가 기관차 공급업체를 선정하기 위한 경주대회를 연다. 4-6개의 바퀴와 보일러 압력 장치가 달린 기관차가 궤간이 1435mm의 레일 위에서 기관차 무게 1톤 당 화물 3톤을 끌고 70마일을 시속 10마일 속도로 달릴 수 있어야 했다. 여기서 조지 스티븐슨과 아들 로버트 스티븐슨의 “로켓”이란 기관차가 승리한다. 실용적인 혁신가들은 아들 교육에서도 단적으로 들어난다. 아들 로버트가 엔니지어가 되는 데 필요한 지식에 가장 잘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했다. 로버트는 학교를 다니다 16세에 그만두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광산에서 측량에서, 엔진 개조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에 뛰어든다.
산업혁명이 “왜 영국에서 가장 먼저였는가”에 다양한 가설을 제시한다. 지리적 요건, 문화적 요인, 경제적 요인, 정부 정책에 주목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유럽의 번영은 지중해 일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영국은 새로운 식민지 경영의 이득을 얻는 데 스페인, 포르투칼, 네델란드에 뒤처져 있었다. 영국은 수차를 돌리기에 좋은 강이 많고 처음에는 내륙 수로가 도로보다 더 편리하고 운송 비용이 적게 들었다. 지리적으로 행운의 위도에 장점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영국과 중국을 구별하지 못한다, 중국은 중심부에 큰 강들이 있고 긴 해안도 있다. 하지만 중국은 과학적 발달을 산업 테크놀로지로 전환하지 않았다.
영국이 다른 나라들과 차이를 보이게 된 것은 개천 용들의 나라가 될수 있게 해준 오랜 사회적 변와였다. 중간 계층의 사람들이 사업적 성공과 테크놀로지 개발을 통해 현재의 처지보다 훨씬 높이 올라갈 수 있으리라 기대를 품고 있었다. ‘대인얼 디포’가 말한 “프로젝트의 시대”로 표현되는 정신이 영국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초창기의 혁신가들은 선철을 만드는 ‘토머스 뉴커먼,’ 방적기를 만든 ‘리처드 아크라이트’, 증기기관을 개선한 ‘제임스 와트’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소규모 자영농의 아들이거나 대장장이의 아들, 이발사의 아들이었다. 공식교육을 받지 못했고 실용적인 문제에 천착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등장했을 무렵이면 진행되어 오던 사회적-정치적 변화과정이 잉글랜드 사회의 위계 구조에서 경직되도 억압적인 부분을 잠식한 상태였고, 그 덕분에 이러한 대담함이 생겨날 수 있는 길이 놓여 있었다.
새로운 것이 꼭 더 포용적인 것은 아니다. 영국에서 빈민은 정치적 대표성을 가질 수 없었고 간헐적인 시위 외에는 집합적인 요구를 드러낼 방도도 없었다. 논평가 ‘소암 제닌스’의 말을 빌리면 “상인은 거대 저택, 탁자, 가구, 마차 등으로 귀족과 경쟁했다. 이 나라의 중간 계층이, 다 나은 사람을 모방하느라 열심이었다는 말이다. 중간 계층은 농촌과 도시의 빈민을 휘그 사관식 귀족주의의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를 받아들인다. 빈민은 더비천한 종류의 사람들이고 자신들, 즉 시스템 안에 통합될 수 있는 사람들인 야망 있는 중간 계층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여겼다. ‘그레고리 킹’은 이들 빈민이 국부에 기여하지 않고 오히려 ”국부를 줄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니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데 관심이 있을 뿐 노동자와 공동체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진보의 피해자. 1842년의 왕립위원회 실태 보고서는 충격적이다. 어린아이들이 지하 갱도에서 장시간 고된 노동을 하고 있었다. 작은 아이들이 갱도에서 트랩도어를 열고 닫는 일을 했고 ”트래퍼“라고 불렸다. 몸집이 커지면 석탄차를 끌었다. 이들은 ”허리어“라고 불렸다. 광산은 작은 공간에 어린이가 들어가지 좋기 때문에 지하에서 아동 노동력이 매우 가치 있다고 말했다. 석탄 채굴의 첨단 장비 사용은 영국에서 가장 잘 확립된 현대적 산업 분야 중 하나였다. 테크놀로지의 방향이 노동 대중에게 적대적인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고 더 이상 임금을 내리누를 수 없게 되었을 때 다수의 인구가 더 나은 결과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은 공장주와 부요한 지배층에 맞서 일터에서, 이어서 정치 영역에서 길항 권력이 발달하면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더 적게 받고 더 많이 일했다. 생산성 밴드왜건의 논리대라면 산업혁명 초기 테크놀로지가 빠르게 발달하면서 임금이 올라야 한다. 하지만 실질 임금을 정체되었다. 동시에 노동 시간은 늘었고 노동 여건은 심하게 악화되어서 점점 더 많은 노동이 더 적은 시간 당 임금으로 추출되었다. 생필품은 식생활에서 식품형태와 음료형태가 주류이다. 곡물은 밀이고 국내에서 재배되었다. 방적기의 발명은 면화 45키로를 잣는 데 1000시간에서 135시간으로 줄였다. 직조공은 숙련노동자로 대우를 받았지만 자동화가 되면서 일자리가 없어졌다. 산업혁명은 사실항 ”근면 혁명‘이었다고 지적한다. 공장을 의미하는 factory는 기름 짜는 도구나 방앗간을 의미하는 라틴어가 어원이다. 산업재해가 수도 없이 일어났지만 회사는 노동자의 안전이나 재해 보상에 관심이 없었다. 고된 노동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노동 여건, 규율, 위험, 모두가 문제였다.
지옥문이 열리다. 악명 높은 오염이 일어났고 런던의 스모그는 주로 석탄에서 발생했는데, 한 세기도 넘게 200명당 한 명꼴로 사망할 만큼 심각한 “급형 공해 노출”문제를 가져왔다. 수인성인 콜레라는 수그러지지 않았다. 1000명당 14.6명에서 27.2명이 사망하게 된다. 변소는 대부분이 하수 시스템에 연결되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결핵이 무섭게 등장했다. 연간 6만 명이 결핵으로 사망했다. 근로자는 술로 인한 알콜 중독이 만연했다.
2024.11.22.
권력과 진보-3rd
대런 아세모글루. 사이먼 존슨 공동 지음
김승진 옮김
생각의힘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