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일
본문 : 막4:35-41
제목 : 온전한 신앙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마가 요한입니다. 마가 요한의 '요한'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마가'는 로마식 별칭입니다. 과부였던 마가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애제자였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향한 사역에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그녀의 남동생은 신약의 사역자들 중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그 유명한 바나바였습니다. 부유한 레위 가정에서 태어나 구브로에서 살았던 마가는 어려서부터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귀한 믿음의 영향을 받아서 바른 신앙인으로 성장했으며, 나중에는 바울과 누가의 글에 언급될 정도로 사도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는 조력자의 사명도 감당했습니다.
마가 요한의 어머니의 집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터전이었습니다. 야고보가 당시 왕이었던 헤롯에게 칼로 죽임을 당한 후 옥에 갇혔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빠져나온 베드로가 마가 요한의 어머니의 집에 갔을 때 그곳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다고 사도행전 12장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가족인 성도들끼리 뭉쳐 사도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마가의 어머니의 집,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 초대교회였던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과 오순절교회의 탄생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가 요한은 나중에 힘들다는 이유로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지에서의 사역을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에게 섭섭한 마음을 품은 바울이 바나바와 다투게 되었고, 결국 그들의 선교 사역이 둘로 나누어져 바나바는 조카 마가를 데리고 키프로스로 갔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새로운 선교 사역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 20년 후 마가의 이름이 골로새서에 재등장했습니다. 4장 10절에서 바울은 주님의 이름으로 마가 요한에 대한 관용과 사랑과 신뢰를 드러내며 자신의 사역에 꼭 필요한 일꾼이자 주님의 귀한 종이라고 그를 소개하면서,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가 너희에게 가면 잘 영접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이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외롭고 힘든 시절을 보낼 때 그를 끝까지 지키며 충성을 다해 보필했던 3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마가 요한이었습니다. 순교가 머지않았던 사도 바울의 인생의 마지막을 함께했던 것입니다. 마가 요한은 베드로에게도 귀한 믿음의 아들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마가를 '나의 아들'이라고 칭했습니다(벧전5:13). 신학자들은 이 구절을 통해 베드로가 마가를 전도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마가 요한은 바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동역자이자 조력자였으며, 베드로에게는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저서인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 그리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특별한 손길과 역사하심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으며, 성령의 조명 아래 특별 계시로 인정받아 성경에 실렸습니다. 평생 함께한 바울과 베드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저술한 책이 성경의 일부분이 되는 복 중의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오늘은 마가복음 4장 35~41절을 중심으로 신자들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흔하게 저지르는 실수와 그 해결책에 대해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열심히 기도하거나, 예배에 성실하게 참석하거나, 헌금을 잘하거나, 전도를 잘하는 모습으로 사람의 믿음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보시며 신앙생활을 정말 잘한다고 칭찬하고 격려하실 만한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 한 절, 한 절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속적으로 가르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분의 사람들을 세우셨고, 악한 영들에게 잡혀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해방하심으로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강력하고 거룩하신 음성으로 예수님이 곧 메시아이심을 증언해주셨습니다. 성령님의 인도로 광야에 가셔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주님은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어부들 즉, 시몬 베드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불러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이후 가버나움에 가셔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사건을 통해 갈릴리 전역에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궁금해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와 그 동네의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후 아침 일찍 전도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그 속에서 나병 환자들, 중풍병자들,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교제하시며 일꾼으로 삼으셨고, 참된 금식에 대해 가르쳐주셨으며, 안식일에 손이 마른 환자를 고쳐주심을 통해 안식일의 참 주인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셨고,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이 진리이신 예수님께 와서 은혜와 고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후 열두 제자를 불러 세우시고 전도 및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주셨으며,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놀이 한다고 예수님을 모독하는 자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더럽고 무서운 죄인지를 가르치셨고, 설교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러 온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참된 하나님의 가족이 무엇인지 알려주셨고, 비유를 통해 진리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주셨으며, 제자의 참 의미를 알려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어 높이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본문의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는 은혜의 복과 지혜를 당시의 제자들과 오늘날의 주님의 일꾼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 모두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인 35절을 보면 주님께서 날이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아이 같은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주님께서 계시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같은 시대, 같은 장소를 살았던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바알세불의 힘으로 일하신다고 모욕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던져버리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보이시고, 가르치시며, 인도하시는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참된 진리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제자들을 당황하게 만든 사건이 터졌습니다. 바로 주님과 함께 배에 탔던 제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할 정도의 엄청난 광풍이 불어 닥친 것입니다. 점점 거세지던 물결이 큰 파도가 되어 배가 뒤집어질 지경에 이르자 제자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살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께서 이 배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타신 것이 생각난 한 제자가 "예수님, 어디 계세요? 우리 어떡해요?"라고 소리치며 주님을 찾았고, 이토록 요란하고 위험한 처지와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깊은 잠을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발견한 제자들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큰 광풍 때문에 놀랐고, 그 상황에서 무사태평으로 주무시는 예수님을 보며 또 한 번 놀란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주님이 현실감 없고 상황 파악도 못하는, 그저 맘 좋고 점잖은 선비 정도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지은 죄, 즉 불신의 죄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전하기 위해 본문 이전 장들의 말씀들과 사건들을 모두 거론한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을 주시는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굳건히 서기를 간절히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사도라고 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중구난방으로 중심과 믿음을 잃은 채 그저 환경과 처지와 상황에 매몰되어 하나님도, 말씀도, 언약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생초짜' 새 신자도 이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다음 행동은 더 가관입니다. 마치 군대에서 조교가 훈련병을 깨우듯 예수님을 혼내면서 깨웠는데, 예수님을 주님이 아닌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우리가 다 죽게 되었는데 잠만 주무시냐고 소리치며 흔들어 깨웠습니다. 이 얼마나 방자하고 불신의 죄가 가득한 행동입니까?
폭풍이 오기 전 배 안은 '교회'였습니다. 주님과 제자들이 함께 있는 물 위의 유일한 생명선, 예배의 터였습니다. 아픔, 슬픔, 염려, 걱정이 없는 평안한 그곳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가득 찬 예배당이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 않게 변하자 그 믿음 좋던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에게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모질게 외쳤던 죄인들의 목소리가 여과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제자들은 살기 위해, 즉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들의 배만 부르면 된다는 전형적인 죄인의 모습, 즉 우상숭배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갈멜산에서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저주를 퍼부으면서 자기들이 살기 위해 자기들의 신을 깨웠던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에게도 예배 잘 드리고, 목사님께 잘하고, 성도들끼리 사이좋은 믿음의 사람처럼 지내다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배척하는, 배 위의 제자들과 같은 습성이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며, 높여드려야 했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며 목소리 높여 사랑하고 경배한다고 신앙 고백했어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신앙의 태도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렇게 주님과 우리의 마음이 이어져 우리가 주님께 속하게 될 때 주무시는 주님에게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며 일하시는 리더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는 제자들과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제자들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거울을 보면 내가 보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영적 거울입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다면 이 시간 꼭 회개하시길 바랍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일어나셔서 상황을 모두 진정시키셨습니다. 저는 제자들을 보며 저와 그들의 놀라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자들은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며 놀랐지만, 저는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혼내며 깨우는 그들의 불신이 이제껏 살아온 저의 모습을 낱낱이 드러내는 것 같아서 놀랐고, 슬펐고,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고 연구하고 회개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더욱 죄송하고 송구스럽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의 믿음의 정곡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배에 탄 것이, 예수님께서 주무신 것이, 큰 폭풍이 온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 없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과 추진력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 없이 하는 모든 것을 죄로 여기십니다. 우리의 부끄러운 허물과 자화상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선물로 값없이 주신 십자가의 믿음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믿음을 잃지 맙시다.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으로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