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2군단의 해체
어느 날 사라진 국군 군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군 2군단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다. 유엔군과 국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서울을 내줘야 했던 1.4 후퇴의 과정에서였다. 미 8군의 동쪽 어깨를 형성했던 국군 2군단의 와해는 중공군의 서부전선 공세에 커다란 힘을 보탰다.
당시 우리 아군이 급속히 무너져 38선까지 일거에 밀려내려 와 결국 수도 서울까지 내준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겉으로 먼저 드러나는 요인 중에 단연 손에 꼽을 만한 게 바로 국군 2군단의 붕괴였다. 중공군에게는 국군 2군단의 와해가 대거의 병력을 전진시켜 서부전선의 유엔군 배후를 압박할 수 있는 커다란 구멍과도 같았다.
이곳으로의 중공군 침투는 서쪽으로 인접한 미 2사단 등 미 9군단의 철수를 재촉했다. 연쇄적으로 서부전선의 미 8군은 그 때까지 북상했던 모든 전선을 내주고 평양에 이어 38선 이남으로 서둘러 후퇴를 해야 했다. 이는 중공군 지휘부가 의도한 작전의 일부였다.
중공군은 미군 대신 한국군을 골랐다. 화력이나 장비, 물자 등에서 미군보다 보잘것없던 국군을 본보기 삼아 먼저 무너뜨림으로써 모든 전선을 요동치게 하여 유엔군과의 싸움 국면을 일거에 전환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중공군 수뇌부 의도에 국군 2군단이 먼저 걸려들었던 셈이다.
서부전선에서 유엔군과 함께 중공군을 상대로 싸운 국군 사단은 미 1군단 배속 국군 1사단, 그리고 국군 2군단 소속의 6, 7, 8사단이었다. 내가 이끌고 있던 국군 1사단은 미 1군단 예하에서 병력과 장비를 거의 잃지 않은 채 후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2군단은 1.4 후퇴 과정에서 슬그머니 그 존재가 지워지듯이 없어졌다. 패배의 후유증을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손실이 매우 컸던 까닭이다.
나는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1950년 10월 말 북진 공세에서 며칠 동안 2군단장으로 가 있었다. 촌각을 다퉈야 했던 전시 중에 났던 이상한 인사발령이었다. 나는 며칠 동안 2군단장으로 가 있는 동안 압록강에 진출한 6사단이 벌써 중공군에게 둘러싸여 궤멸적인 타격을 받고 있던 상황을 알았다.
7사단과 8사단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급기야 약 한 달 뒤에 벌어진 ‘크리스마스 대공세’에 덕천과 영원을 거쳐 만포진으로 향하려던 7사단과 8사단은 중공군에게 참혹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내가 계속 2군단장으로 남아 있었다면 나는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있었을까.
그 점은 장담할 수 없다. 나 또한 어지러운 패배를 계속 당하면서 처절한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7사단과 8사단은 전투 경험에서 단련을 거치지 못한 상태였다. 부대는 훈련을 바탕으로 성장한다. 전투의 경험도 중요하다. 그런 모든 요소를 당시 7사단과 8사단은 충분히 갖추지 못했던 상태였다.
전선의 급격한 붕괴에 이어 38선으로까지 아군의 전선이 모두 밀린 데에는 다른 요인도 있다. 당시의 미군 역시 침착하지 못했다. 서둘러 후퇴길에 올랐던 당시의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점이었으나, 뒤에 정리한 사료들을 보면 미군 최고 지휘부의 당혹감 역시 급속한 전선 붕괴를 불렀던 한 요인임이 분명하다.
미군도 겁에 찌들었다
중공군의 실체를 과대하게 평가했던 것이다. 낯선 군대의 매우 기이한 전법에 일부 아군 전선이 무너지자 중공군의 실체를 과도하게 부풀려 상상함으로써 거대해진 공포감이 미군 지휘부의 냉철한 작전지휘를 가로막았던 듯하다. 역시 후퇴를 예상해 미리 상정할 수 있었던 방어선을 제대로 설정하지 못했다는 점이 그 이유다.
만약 한반도 북부에서 방어선을 설정한다면 평양과 원산을 잇는 라인이 가장 적당했다. 아군은 공세를 벌일 때에도 간과했던 그 라인을 후퇴 국면에서도 역시 놓치고 말았다. 전장 약 270㎞인 평양~원산 라인에 후퇴한 병력을 축차적으로 투입해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다면 아군의 급속한 38선 후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드러난 자료들을 보면 미 8군은 중공군에게 38선까지 밀리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다시 상정했다. 낙동강 방어선을 다시 설정함으로써 부산 교두보를 지키고, 이어 유엔군 병력을 일본 등으로 철수시킨다는 구상이었다. 뒤에 벌이는 가정이기는 하지만, 미 8군이 1~2차에 걸친 중공군 공세를 보면서 중공군의 실력을 냉정하게 파악했다면 이런 낙동강 방어선 설정과 해상으로의 철수는 매우 성급한 판단이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사라진 국군 군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군 2군단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다. 유엔군과 국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서울을 내줘야 했던 1.4 후퇴의 과정에서였다. 미 8군의 동쪽 어깨를 형성했던 국군 2군단의 와해는 중공군의 서부전선 공세에 커다란 힘을 보탰다.
당시 우리 아군이 급속히 무너져 38선까지 일거에 밀려내려 와 결국 수도 서울까지 내준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겉으로 먼저 드러나는 요인 중에 단연 손에 꼽을 만한 게 바로 국군 2군단의 붕괴였다. 중공군에게는 국군 2군단의 와해가 대거의 병력을 전진시켜 서부전선의 유엔군 배후를 압박할 수 있는 커다란 구멍과도 같았다.
이곳으로의 중공군 침투는 서쪽으로 인접한 미 2사단 등 미 9군단의 철수를 재촉했다. 연쇄적으로 서부전선의 미 8군은 그 때까지 북상했던 모든 전선을 내주고 평양에 이어 38선 이남으로 서둘러 후퇴를 해야 했다. 이는 중공군 지휘부가 의도한 작전의 일부였다.
중공군은 미군 대신 한국군을 골랐다. 화력이나 장비, 물자 등에서 미군보다 보잘것없던 국군을 본보기 삼아 먼저 무너뜨림으로써 모든 전선을 요동치게 하여 유엔군과의 싸움 국면을 일거에 전환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중공군 수뇌부 의도에 국군 2군단이 먼저 걸려들었던 셈이다.
서부전선에서 유엔군과 함께 중공군을 상대로 싸운 국군 사단은 미 1군단 배속 국군 1사단, 그리고 국군 2군단 소속의 6, 7, 8사단이었다. 내가 이끌고 있던 국군 1사단은 미 1군단 예하에서 병력과 장비를 거의 잃지 않은 채 후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2군단은 1.4 후퇴 과정에서 슬그머니 그 존재가 지워지듯이 없어졌다. 패배의 후유증을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손실이 매우 컸던 까닭이다.
나는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1950년 10월 말 북진 공세에서 며칠 동안 2군단장으로 가 있었다. 촌각을 다퉈야 했던 전시 중에 났던 이상한 인사발령이었다. 나는 며칠 동안 2군단장으로 가 있는 동안 압록강에 진출한 6사단이 벌써 중공군에게 둘러싸여 궤멸적인 타격을 받고 있던 상황을 알았다.
7사단과 8사단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급기야 약 한 달 뒤에 벌어진 ‘크리스마스 대공세’에 덕천과 영원을 거쳐 만포진으로 향하려던 7사단과 8사단은 중공군에게 참혹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내가 계속 2군단장으로 남아 있었다면 나는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있었을까.
그 점은 장담할 수 없다. 나 또한 어지러운 패배를 계속 당하면서 처절한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7사단과 8사단은 전투 경험에서 단련을 거치지 못한 상태였다. 부대는 훈련을 바탕으로 성장한다. 전투의 경험도 중요하다. 그런 모든 요소를 당시 7사단과 8사단은 충분히 갖추지 못했던 상태였다.
전선의 급격한 붕괴에 이어 38선으로까지 아군의 전선이 모두 밀린 데에는 다른 요인도 있다. 당시의 미군 역시 침착하지 못했다. 서둘러 후퇴길에 올랐던 당시의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점이었으나, 뒤에 정리한 사료들을 보면 미군 최고 지휘부의 당혹감 역시 급속한 전선 붕괴를 불렀던 한 요인임이 분명하다.
미군도 겁에 찌들었다
중공군의 실체를 과대하게 평가했던 것이다. 낯선 군대의 매우 기이한 전법에 일부 아군 전선이 무너지자 중공군의 실체를 과도하게 부풀려 상상함으로써 거대해진 공포감이 미군 지휘부의 냉철한 작전지휘를 가로막았던 듯하다. 역시 후퇴를 예상해 미리 상정할 수 있었던 방어선을 제대로 설정하지 못했다는 점이 그 이유다.
만약 한반도 북부에서 방어선을 설정한다면 평양과 원산을 잇는 라인이 가장 적당했다. 아군은 공세를 벌일 때에도 간과했던 그 라인을 후퇴 국면에서도 역시 놓치고 말았다. 전장 약 270㎞인 평양~원산 라인에 후퇴한 병력을 축차적으로 투입해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다면 아군의 급속한 38선 후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드러난 자료들을 보면 미 8군은 중공군에게 38선까지 밀리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다시 상정했다. 낙동강 방어선을 다시 설정함으로써 부산 교두보를 지키고, 이어 유엔군 병력을 일본 등으로 철수시킨다는 구상이었다. 뒤에 벌이는 가정이기는 하지만, 미 8군이 1~2차에 걸친 중공군 공세를 보면서 중공군의 실력을 냉정하게 파악했다면 이런 낙동강 방어선 설정과 해상으로의 철수는 매우 성급한 판단이랄 수밖에 없었다.
- 중공군 2차 공세와 직후 이어진 3차 공세로 다시 피난길에 오른 한국인들이 눈밭을 걸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먼저 봐야 할 점은 국군의 상태였다. 미군도 그런 공황감에 빠져 마구 밀린 점이 분명하지만 역시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는 당시 국군 사단의 후퇴 및 붕괴 상황에서 찾는 게 옳다. 국군 2군단이 해체의 상황에까지 이른 데는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다.
2군단 예하의 6사단은 나름대로 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1950년 10월 말의 북진에서 서둘러 압록강에 진출한 뒤 매복한 중공군에게 크게 당했지만 한 달여의 재정비, 군단 예비로의 전환 등을 거쳐 나름대로 병력과 장비 등을 보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7사단과 8사단이었다. 이 두 사단의 병력은 좀체 수습하기가 어려웠다. 후방으로 마구 밀려 내려오는 병력은 차분한 수습의 과정을 거쳐 다시 모이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재집결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사단은 무너진 상태였다. 평양 동쪽의 강동군 승호리에 집결했다고는 하지만 그 병력은 많지 않았다.
두 사단의 연대장 둘이 적에게 포로로 잡힐 정도였다면 그 부대의 붕괴 수준은 대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시 병력 수습이 매우 어려웠던 모양이다. 7사단의 경우는 약 6800명 정도가 모여들었고, 8사단은 그보다 적은 5700명 정도가 수습이 가능했던 병력이었다.
사단장이 있어야 했던 곳
그런 와중에서 사단을 이끄는 사단장은 어떻게 처신해야 옳을까. 사단장은 제가 거느렸던 병력을 결코 떠날 수 없는 법이다. 사단장의 권위와 역량은 제가 거느린 부대와 생사를 함께 할 때 크고 대단해진다. 사단장이 사단 병력을 통솔치 못해 서로 떨어진다면 그 사람은 더는 사단장이라고 할 수 없다.
나아갈 때도 그렇고, 물러설 때는 더욱 그렇다. 제게 운명을 맡긴 병력과 생사고락을 함께할 수 있어야 진정한 지휘관이다. 그 점에서 당시 7, 8사단의 사단장은 원칙에 충실하지 않았다. 국방부가 편찬한 <6.25 전쟁사>를 보면 8사단장은 황해도 시변리와 경기도 연천을 잇는 도로가 아군의 공중 폭격으로 곳곳이 끊긴 사실을 알고서는 전선의 지휘를 한 연대장에게 맡겼다고 한다.
이어 사단장은 먼저 사단본부와 중장비, 환자 등을 실은 차량을 이끌고 먼저 철수했다고 한다. 사단장이 당시 있어야 할 곳은 마지막까지 후퇴하는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 점이 우선 돋보이는 문제다. 그 뒤에 사단장은 서울에 왔던 모양이다. 7사단도 상황은 별반 다른 게 없다.
공간사에는 제대로 적은 기록이 없다. 그러나 내가 1.4 후퇴 뒤 전투를 치르면서 들은 바로는 7사단장 역시 제 병력을 뒤에 두고 서울에 체류하다가 문제가 생겼다. 내가 들은 내용에 따르면 두 사람은 서울에서 헌병대에 의해 체포당했다. 이어 곧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 6.25전쟁 때도 많은 여성들이 군대에서 활동했다. 당시 한국 여군의 모습.
이 모두가 준비도 없이 전쟁을 맞이한 국군이 보여줄 수 있었던 솔직한 상황이었다. 지휘관 개인의 책임으로만 떠넘기기에는 당시 우리 국군은 모든 것이 형편없었다. 훈련도 부족했고, 화력과 장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싸울 의지만은 잃지 말아야 했다. 슬그머니 사라진 국군 2군단은 많은 교훈을 우리에게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