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대학2학년떄인가 같이 하숙하던 광주아이가 주말이면 서울에 있는 여자친구가
하숙집에 놀러오곤했다. 그리고 그들은 주일에는 인천답동성당에 다니는 천주교신자였지만
저는 종교라곤 없었다. 과친구덕분에 학교에서 하는 개신교동아리인 RCY에 참여하곤 하였다
그러나 어떤기회에 학교바로뒤에 있는 지금의 용현4동성당에서 예비자교리를 받았다
젊은수녀가 좋아서 교리를 받으면서 주일미사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 수녀가 종신서원하러 본원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나도 예비자교리를 그만두게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몇년간 흘러서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서
서울에서 삼성전자를 1년간 다녔다. 그러면서 고교은사가 요청해서 스승님을 도울려고
한양대학원에 지원 합격하고 아버지께말씀드렸더니만 아버지는 서울서 홀로 살기가 힘드니까
환경을 바꾸려니까 그런것 같다고 여기셨던 모양이다
그레서 같은 계열사인 대구 제일모직으로 올수있게 하셨다
서울명동이나 시청앞 번화가에서 사무실 생활하던 내가
어느날 공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제일모직 골덴텍스 제품은 화려하지만 공장내는 아주 시끄럽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공장은 3교대로 움직였다. 1개조는 40~50명으로 거의 1개중대병력 수준이었다
총무과 아는 친구가 있어서 알아보니 많은 여공들사이에 고졸출신은 한둘뿐이고
대부분 중졸출신이었다
회사를 창설하신 회장이신 이병철씨가 경남출신인지라 그곳 여자애들이
대부분 참석했다. 방적기는 일제 무라다회사것도 있었지만 독일제 하멜도 있었기에
학벌도 그다지 보지않았지만 키는 150cm를 넘겨야 했다
지금은 160cm도 안되는 여자애들을 찾기도 어렵지만 그당시는 키작은 여자애들은 많았다
더군더나 중학교졸업후 어린나이에 들어오기에 작은 키이었다.
그들은 나이가 20대중반쯤되면 그들과 같이 들어온 남자애들은 승진이 빠른사람은
거의 부장을 바라볼 수준까지 되었던 것이다.
회사내에는 기숙사와 그들이 다닐수가 있는 병설고등학교가 있었다.
외출은 주말에만 가능했고 여러가지 이유로 그것마저 마음대로 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은 대부분 중졸이라서 회사에서 부설학교를 다니게했다
그들은 쉴 여가가 없었다. 어려운 공장생활 그리고 가까로운 기숙사생활속에서도
부설학교를 다녔다. 시골에서 어린아이를 도시로 보내셨는 부모님은 내심 안심하는 모습이었다.
저는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그들이 야간작업할때외에는 자주 만나기에 어느정도 친분을 이루었다
저는 공장에서 만나는 유일한 사람이고 부딪치는 사람들이 그녀들이었다.
그녀들중에는 반장이 있었다. 회사경력이 10년이상이 되었다. 그녀는 어느날 한달에 한번 가는
수도공동체가 있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지금 그녀의 성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름은 분명
'분다'였다. 그녀덕분에 몇번 수도원에 다니면서 친분이 더욱 더 가까이왔고 회사생활에도 적응할수가
있었다.
삼성에는 여러 스포츠단체가 있었다. 다들 서울.경기권에 있었지만 그곳보다 대구가 따뜻하고
방적공장은 작업때문에 따뜻하게 유지해야 하기에 그들이 겨울동안 공장에 내려와 임시캠프를 치고
훈련을 했다.공장내에는 창고식 건물이 많았기에 그들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한해는 여자탁구부가
내여왔다. 그들을 구경할겸해서 그들과 공장여공간의 시합을 붙였다. 도저히 상대가 안되겠지만
그렇게라도 하고싶었기에 총무과에 이야기해서 공장여공들중에서 취미나 특기인 여공들을 선별해서
뽕아서 시합을 했다. 도저히 상대가 안된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당시 제일모직 여자부는 한국최강이었다.
기억하기로는 이수자같은 애는 거의 남자체격이었다.
어떤해는 삼성라이온스 남자 야구팀이 와서 훈련하기도 하였다.
그때에는 공설운동장에도 잔디가 깔려있지 않았을때였지만 공장내에는 잔디구장이었다.
야구선수들이 사용하는 야구공은 구경하기도 어려웠는데 그들은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그들 선수중에 어떤이가 야구공 몇개를 집어서 주곤하였다
저는 원래 방적과 현장이 근무처가 아니라 처음 몇개월간 실습차 그곳에서 근무했던 것이다.
저는 그곳에서 있던 6개월동안 그녀의 도움으로 대구 주교좌성당에서 세례를 받을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결혼하기 이전에 그녀는 결혼하기에 먼저 회사를 떠나갔고 그로 인해서
그와는 멀어졌다. 그녀에 대한 자세한 기억은 지금 별로 남아있지 않았지만
결론적으로 그녀의 영향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공장에서 하루종일 지내야하는 그녀는 걸어서 가까운 시내에도 마음대로 나갈수가 없었다.
그녀들은 하루8시간 근무하고 병설학교도 다니고 그나머지는 기숙사생활을 해야했다.
공장에서 특별히 맡은일이 없으면 쉬는시간에는 기숙사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간혹 특별한 일이 있을때에 회사직원이 그 사유서를 적어서 기숙사에 내게되면
그 시간에는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다. 이를 알기에 간혹 그녀들을 위해서 가짜 사유서를
적어주기도 하였다.
공장에서 얼마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수도공동체가 있었다 다른곳과는 달리
한국분3분과 일본등 외국여자들이 공동체생활을 하였다. 그곳이 바로 예수님의 작은자매들의 우애회였다
그당시 처음만난 노동을 하는 수도공동체였다. 그곳에 계시는 한분은 제일모직에서 같은방적과에서 근무했고
또다른 한국분은 안경공장에서 근무하셨다고 한다.
1979년 10월인가 그녀들을 처음만났고 불과 1년남짓 만남이었다
그녀들중에는 회사를그만두고 나는 전산과로 옮겨왔고 결혼하였기에 그녀들과의 연줄은 끊어지게
되었지만 그리고 그녀들과의 이야기를 떠오릴정도는 아닌 희미하였지만
제가 신앙을 시작할수 있는 진한 계기가 되었던 것은 틀림이 없었던 것 같다.
공장내에는 드물게도 식물원이 있었고 공장앞마당에는 벚꽃나무가 있었고 그옆은 잔디구장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들과 그곳에서 어울리지도 나가서 사진찍는것도 하지 못했다.
공장뒷문에는 관사가 있었다. 감나무가 있는 마당안에는 한옥이 있었고 이런집들이 몇채 골목을 따라
모여있었고 그곳중에 한집에는 방적과 과장님이 살고 계셨다 과장님은 남들이 퇴근할때에 나갔다가
저녁을 드신이후에 다시 돌아오셨던 것이다. 그무렵에는 통행금지라는 것이 있었기에
밤에 시내에 나갔다가 술한잔하고 통금이전에 집으로 갈수가 없을때에는 24시간 가동하는 공장내로 들어온곤 했다.
그래서 집에 계시는 어머니는 회사에서 일을 많이 시키는 것으로 짐작하셔서 회사로 찾아오곤하셨다.
그때 만난 남자로서 나보다 먼저 들어와서 선배격이지만 나이는 나보다 어려서
이런 인영으로 몇년이후에 그를 나의 대자가 되게 하였다.
그러나 지난해에 불행히도 그가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나에게는 특별하던 기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