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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을 하며 건너편 산을 보면 변해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위에서부터 파랗던 색이 점점 붉게 그리고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다음 주중에는 아래까지 내려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11월이니 그만한 때도 되었지요. 멀리만 보이던 연말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보입니다. 겨우 두 달도 남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길거리에서 달력을 파는 사람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기야 이제 집에 달력 걸어두는 사람도 별로 없지 않을까 싶네요. 그래도 저의 경우 걸어둡니다. 예전에는 여기저기서 주는 경우도 많은데 현직(?)에서 물러나고 나니 주는 곳이 별로 없습니다. 찾아나서야지요. ㅋㅋ 다행이랄까, 아직은 그래도 주문하는 곳이 있고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찾아 나서면 필요한 만큼은 얻습니다. ㅎㅎ
유튜브에 보니 우리나라 ‘아파트’가 노래가 되어 날리고 있더군요. 거 참 대단합니다. 야구장의 ‘삐끼춤’이 날리더니 이제는 또 아파트랍니다. 도대체 대한민국이 내놓으면 뭔가 터지는가 봅니다. 아직은 허황된 공상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다음 세대에서는 우리 한글이 국제 통용어가 되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좀 더 살아볼까 하는 욕심도 생깁니다. 세계 어디를 가나 한국어로 통할 수 있는 세상, 살아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하기야 어디서 총 맞을지, 홍수에 떠밀려갈지, 무슨 재난을 당할지 모르는 무서운 세상이 되고 있으니 함부로 떠날 생각을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우리나라 여기가 좋습니다. 여기서도 다녀볼 곳이 많은데 밖으로 눈 돌릴 여유가 있을까요? 하기야 밖은 밖, 안은 안, 다녀볼 수만 있다면 ----
찬란한 가을이 무르익어가니 괜스레 마음이 공중에 떠서 상상해보았습니다. 11월을 출발합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날들을 빕니다. ^)^
2024년 11월 2일 김종우 목사 드림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잠언 14 : 12 - 13)
<보통의 가족>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지, 얼마나 잘 변하는지 모릅니다. 아니, 알지만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흔히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다고 하는데 사실 그 사이에도 얼마나 기복이 심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한번 마음먹은 것을 꾸준히 이어가는 사람을 존경하게 됩니다. 쉽지 않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감정조절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과의 교제는 가능한 한 피합니다.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대화조차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언제 어떻게 반응이 나올지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마음 편하게 대할 수 없으니 교제를 피하려고도 합니다. 친구 되기 어렵습니다. 근래 종종 발생하는 거리 폭력사건에서 보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사람이 감정을 가지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이성의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 감정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잘 융합되어 나타나야 삶이 활기차고 생기가 돌 수 있습니다. 이성으로만 산다면 마치 로봇과 사는 맛이 되겠지요. 그렇다고 감정만 가지고 산다면 유지 자체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곳저곳 매양 쌈질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질서가 유지되는 가운데 삶의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고 싶다면 이성과 감성이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부분 어느 한 쪽으로 너무 기울어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너무 차가운 사람이라든지 아니면 너무 욱 하는 사람이라든지 하는 평을 듣게 됩니다.
문제는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같은 사람이 언제는 이랬다가도 언제는 저랬다 하고 다르게 자기를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똑같은 문제 앞에서조차 이랬다가 다른 때 가서는 저랬다 하고 변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가늠하지요? 어떻게 믿고 거래를 하고, 어떻게 함께 살 수가 있지요? 불안할 것입니다. 함께 살아야 하는 공동체 안에 그런 사람이 껴있다면 문제아가 되기 십상입니다. 어울리기 어려울 것이고 같이 일하고 싶지도 않을 것입니다. 혹 배우자가 그런 성격의 소유자라면 가정생활을 꾸려가기 쉽지 않겠지요. 그렇게 우왕좌왕 하는 삶 속에 살다가는 심각하게 헤어지기를 고려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감에 우리 자신이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매우 심각한 사태를 만나 매우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선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동기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흔히 선택이나 결정을 함에 있어서 작용할 수 있는 중요한 동기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이익입니다. 내게 유익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둘째 자존심입니다. 소위 자기 위신을 지킬 수 있는지 따집니다. 셋째 의(義)입니다. 올바른 것을 따르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명예이기도 하지요. 소위 정의를 지키고 따르겠다는 신념이고 자신의 삶의 최고 가치의 실현을 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넓게 이야기한다면 인간 됨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두 가족이 등장합니다. 사실 현제지간입니다.
변호사 ‘재완’과 ‘지수’(아마도 재혼한 아내인 듯) 그리고 고교생 딸과 갓난아기 하나 - 고급 아파트에 고급 승용차, 남부럽지 않은 집안입니다.
의사 ‘재규’와 프리랜서 아내 ‘연경’ 그리고 고교생 아들과 치매환자 어머니 - 괜찮은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역시 남부럽지 않은 중상류급 가정입니다.
변호사인 형 재완은 의보다는 돈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재판에 정의를 구현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승소하여 돈을 버는 것이 목적입니다. 어디선가 듣기도 했지만 재판은 정의를 실혀하기보다는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라는 말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만큼 실력이 인정된 사람이기도 합니다.
소아과의사 재규는 그래도 인간적인 정을 지니고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아내 연경도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시며 아들 하나 잘 키우려고 노력합니다. 동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고 요즘 꼭 그런 거 따지지 않으니 별문제는 안 됩니다. 어쩌면 두 집안 사이에서 그만한 거래도 있었으리라 짐작 할 수 있습니다. 두 아들 딸 즉 사촌형제 사이도 괜찮습니다. 같은 학교를 다니며 잘 어울려 지냅니다. 다만 성격은 좀 다릅니다. 아들은 다소 내성적인 반면 딸은 오히려 매우 외향적이고 발랄하며 자기 주장이 확실합니다. 그러면서 해외 유명대학에 유학의 길까지 닦아둡니다.
어느 날 유튜브에 아이들이 노숙자를 폭행하는 장면이 떠올라옵니다. 이미 퍼져서 경찰이 수사에 들어섰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연경이 먼저 보고 아들의 낌새를 살핍니다. 분명 그 보이는 아이들이 아들과 사촌입니다. 그 날 아들이 술에 취해서 들어왔습니다. 바로 그 복장이 빨래통에 담겨 있었습니다. 아들을 붙들고 사실여부를 따집니다.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그래서 넘어갔는데 재규도 알게 됩니다. 아들을 붙잡고 추궁합니다. 엄마가 역성을 들며 부인하지만 사실은 사실입니다. 나중에 부자지간이 따로 둘만의 시간을 가집니다. 아들은 앞으로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이 두 녀석이 둘만 있는 줄 알고 떠드는 이야기를 재완이 녹화 저장해둡니다. 놀라지요. 이럴 수가. 죽은 노숙자를 장난삼아 놀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감정이 없습니다. 이렇게 자라서 인간적인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 회의가 옵니다. 사람다운 면이 아니라 짐승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동생 부부를 불러 사실을 보여주고 경찰에 자수할 것을 제의합니다. 아니 이제 뭔가 제자리를 잡는 듯하였는데 찬물을 끼얹고 있습니다. 어쩌지요? 영화는 사람을 추돌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역시 비슷한 장면으로 마무리합니다. 대상이 외부인에서 가족으로 옮겨졌습니다. 감정폭발, 살인입니다. 영화 ‘보통의 가족’(A Normal FamilyP을 보았습니다.
마지막 때 오는 선지자
질문하겠습니다. 마 13장은 무슨 장이라고요? 예, ‘천국’장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해주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기에 앞서 먼저 ‘4 가지 밭’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여러 번 들어서 잘 알고 있듯이 이 4 가지 밭은 말씀을 듣는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비유를 친히 해석해주십니다. 간단히 정리해봅니다. 길가 밭은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마귀가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간다고 합니다. 돌밭은 듣고 깨닫기는 했는데 그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생겨서 그냥 넘어진다고 하지요. 가시떨기 밭이 있습니다. 온갖 세상염려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인하여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마지막 좋은 밭은 말씀을 깨닫고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한다고 하지요. 이 4 가지 밭 가운데 어느 밭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습니다. 선택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천국도 그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강제로 들여보내지 않습니다.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는 자기 선택이란 말이지요.
이 말씀을 하고 나서 천국에 대해서 몇 가지 비유의 말씀을 하십니다. 천국이 사람이 되었다가 겨자씨도 되고 누룩이 되었다가 보화도 되고 값진 진주도 됩니다. 그런가 하면 별 희한 것도 됩니다. 마 13 :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자, 천국이 무엇과 같다고요? 그물 같답니다. 천국과 그물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지요? 그러니 이런 말씀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바로 비밀이란 말입니다. 이 비유를 알아야 한다? 몰라도 된다? 알아야 천국 들어간다고 하지요? 이게 바로 천국 비밀번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배워야 하겠다 안 배우겠다? 이것도 강제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이 선택하는 겁니다. 저는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제가 강제로 먹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말씀하시고 저도 또한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 11 : 26 - 28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니 아버지 하나님 입장에서는 자녀 된 우리가 어느 쪽을 택하기 원하실까요? 당연히 생명과 복을 택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당신 백성이라 해도 강제하지는 않으십니다. 선택과 결정은 오로지 본인의 선택입니다.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강압적으로 밀어넣지는 않으십니다. 스스로 알아서 판단하고 결정하여 선택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전에 좋고 나쁨을 알려주십니다. 이렇고 저렇다, 그러니 이쪽을 선택하면 좋겠다, 라는 조언까지 해주십니다.
예수님이 이 천국 비유의 말씀을 마치고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뭐라고 대답하지요? 마 13 : 51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깨달았대요, 못 깨달았대요?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그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5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무엇을 당부하고 계신지 이해가 갑니까? 예수님이 앞에 있는 제자들을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라고 여겨주시는 겁니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지요? 집주인과 같이 행하라 그 말씀하시는 겁니다. 집주인이 무엇을 하는데요?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온답니다. 새것과 옛것은 무엇이고 그 곳간은 어디 있는 겁니까? 짐작하십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라고요?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신 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다음 제자들이 남아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도 무엇입니까? 그렇지요. 천국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일 것입니다. 천국복음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 말씀 속에 있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다음, 옛것은 무엇이고 새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지요. 구약과 신약입니다. 그게 어디 있다고요? 성경 속에. 그러니 성경이 곧 곳간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무엇 가지고 가르치셨습니까? 성경 가지고. 제자들도 하나님 백성 곧 성도들을 무엇으로 가르쳐야 하겠습니까? 성경 가지고. 우리도 뭐 배우고 있습니까? 성경. 왜 이렇게 열심히 성경을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까? 성경 속에 구원과 영생의 길 곧 천국 가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님 때 하나님 백성 유대인들이 왜 성경을 읽었대요? 영생을 얻으려고. 그 목적은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이 누구에 대해서 말씀한답니까? “내게 대하여” 내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문제는 유대인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 몰랐다? 몰랐다는 것입니다. 오직 아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몇 사람? 처음에는 12 제자였겠지요. 그래서 이들에게는 천국비밀이 허락된 줄 믿습니다.
아무튼 이제 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부하신 것이 바로 그겁니다. 너희들이 이제부터 천국의 서기관들이니 구약과 신약을 통달해서 가르치라 그 말입니다. 집주인은 누구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요? 자기가 알아서 이것저것 가져다 쓰면 됩니다. 그와 같이 맘껏 가져다가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모르면 전할 수 있어요, 없어요? 그래서 배워야 하는 겁니다. 아이고 뭐 이리 복잡해. 나만 잘 믿고 천국 가면 될 텐데. 그렇게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다음에는 자라야 하지요. 자란 다음에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요 15 : 1 - 2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예수님 믿고 예수님에게 붙어있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지가 되었으면 뭐 해야 한다고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가 없으면 어떻게 하신답니까? 제해버리신답니다. 잘려 나가면 불쏘시개밖에 안 됩니다. 무럭무럭 자라서 열매 맺는 자녀들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지런히 배우면 그 능력과 실력이 생깁니다.
처음에는 제자들도 긴가민가하면서 따라다녔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메시야이기를 소망하면서 따라다녔지요. 사실 그렇게 믿을 만한 증거들도 나타났습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낫게 할 수 있습니까? 날 때부터 소경을 어떻게 보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당시 개안수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요. 더구나 죽은 사람이 도로 살아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나잖아요. 그러니 이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주신 선지자, 곧 기다리고 기다렸던 메시야입니다. 그렇게 눈을 뜨게 된 소경이 직접 말합니다. 도무지 믿지 않으려는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들에게 말해줍니다. 요 9 : 31 - 33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래도 믿어요, 안 믿어요? 죽어도 안 믿습니다. 안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자기들을 버린 것입니까, 자기네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까?
예수님이 천국에 대해서 길게 가르치시고 그곳을 떠나십니다. 이제 어디로 가셨는지 보겠습니다. 마 13 : 53 - 54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어디로 가셨습니까?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이 잘 맞이해줍니까? 예수님이 이 복음을 가르치신 곳이 어디입니까? 회당입니다. 회당을 많이 이용하셨습니다. 왜요? 거기 누가 모이니까? 하나님 백성이라 하는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모여서 율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 바로 회당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구원하려고 오셨다고요?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막연히 ‘인류’가 아닙니다. 자기 백성 곧 하나님 백성입니다. 마 1 :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래서 어느 날 이방여인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려 찾아왔을 때도 말씀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주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마 16 :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왜요? 예수님이 누구를 구하려고 오셨다고요?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입니다. 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예수님은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오늘날은 누가 하나님 백성입니까? 예수를 믿는 우리인 줄 믿습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먼저입니까? 내 자식입니까, 다른 집 아이들입니까? 미안하지만 내 자식이 먼저란 말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만 먼저 당신 백성을 구원하고, 그리고 나서 인류입니다.
문제는 그래도 자기가 싫다고 하면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 23 :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렇지요? 누가 원하지 않은 일입니까? 하나님백성이 원치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문제는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탓하면 안 됩니다. 누구 탓이라고요? 하나님 백성인 우리 자신 탓입니다. 하나님 믿는다고 백날 부르짖어도 소용없습니다. 내가 알아야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잖아요. 제가 안 가르쳐준다고 한 적 없습니다. 언제든 와서 청하면 가르쳐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쫓아다니면서 여러분 잡아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지 말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오고 안 오고는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말이지요. 천국 가는 길,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영생을 얻는 길, 때마다 성경 말씀으로 가르쳐드리고 있습니다. 믿고 따라갈 것인가 말 것인가는 여러분의 선택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이 복된 길이고 저것이 저주 받는 길이다, 가르쳐드립니다. 따라가고 안 가고는 하나님 탓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향에 와서 하늘 복음을 전해주십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마 13 : 53 - 57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 어떻게 했다고요? 예수를 잘 영접했다고 합니까? 아닙니다. 배척했다고 하지요. 왜 그랬을까요?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라온 모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도 잘 알고 있지요. 그들은 자기네가 알고 있는 예수가 현재 어떻게 변해있는지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이미 알고 있는 그 예수로만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옛날이야기이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30세 이전의 예수와 그 후의 예수님은 같다, 다르다? 다릅니다. 그것을 왜 인정할 수 없을까요? 문제는 바로 그겁니다. 옛날의 예수로 머물러 있으라는 겁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 자신의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의 모습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좋아졌습니까, 나빠졌습니까? 다시 예수 믿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웬만해서는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이 정상입니다. 과연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믿는다면 분명히 하나님 믿기 전으로 돌아가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세상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전 3 :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우리 성도님들 혹시 이 땅에서만 살다가 끝내고 싶은 사람 있습니까? 그러자면 여기 교회 나오지도 않지요. 교회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찾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 나온 이유와 목적도 바로 그것입니다. 땅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 다가 아님을 알기에, 뭔가 영원한 것이 있다고 믿기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찾으려고 신앙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배워서 압니다. 그 길이 어디에 있다고요? 요 14 :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바로 예수님께 있습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이제 비로소 천국행 열차를 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타고 가야지요. 그냥 알고만 돌아가렵니까? 남들 출발하는 것을 구경 오셨습니까? 그게 아니지요. 바로 내가 타고 가야합니다. 그런데 타요, 안 타요?
자, 그런데 예수님의 어릴 적 자라온 모습을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변화가 있었지요? 마 3 : 16 - 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제 예수님에게 누가 함께 하십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하시는 일은 누가 하시는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습니다. 요 14 :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예수님 안에 누가 계십니까? 그런데 그게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그러니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심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동네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이 대부분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답답하여 무슨 말까지 하십니까? 요 14 :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그런데 아무리 놀라운 일이 눈앞에 벌어져도 믿지 않겠다고 고집하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들어도 모르고, 봐도 모르고, 도무지 모르게 됩니다. 우리가 마 13 : 15절에서 보았듯이 마음이 어떻게 되었다고요? “완악해져서” 죽어라 하고 똥고집 부리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 백성은 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고집 가지고 백날 예배드리고 기도해봐야 도루묵입니다. 사 1 : 12 - 13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하나님 백성의 악이 무엇입니까? 고집스럽게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예수님을 안 믿는 것입니다.
예수 초림 때 메시야를 기다리던 하나님 백성이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왜요? 구약성경 속의 하나님이 예언해두신 말씀에 대하여 무지하고, 나아가 완악해서 알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요?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신앙하고 있습니다. 다시 오실 때 알고 믿어야 하겠지요? 어떻게 알아봅니까?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동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고집부리고 안 배우면 모릅니다. 우선 예수님을 보신 분 있습니까? 그 후 2천 년이 지났는데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봅니까? 그저 막연히 다시 오신다, 정도만 알고 신앙하고 있을 뿐입니다. 더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죠? 내가 사는 시대에는 올 리가 없다는 심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렇게 교회 다니다 죽어 천국 가면 되지 하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만약 오시면 어쩌시렵니까? 생각해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럴 리가 없다고 100%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믿음 좋지요? 한 마디로 기막힌 신앙입니다. 때는 모르는 일, 그런데 어느덧 2천 년, 오실 만한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문제는 알아보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초림 때처럼 하나님 백성이라 자처하면서도 모르면 역시 여태의 신앙은 꽝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그림의 떡이 됩니다. 천국 아니면 어딥니까? 그야 지옥행이지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지금 그런 신앙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정신차려야 합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교회 다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언제까지 그런 신앙으로 살겠습니까? 생명이 달린 문제입니다. 여기서 한백년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다면 구태여 신앙도 교회도 필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과 영생을 믿기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니 헛걸음하지 않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초림 때처럼 육신을 입고 오시는지, 아니면 영으로 오시는지, 영으로 오시면 보이지도 않을 텐데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지, 그리고 어디에 오시는지, 누구에게 찾아오시는지 등등 최소한의 것이라도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초림 때처럼 눈앞에 보고도 모르면 꽝입니다. 알고 있어야 알아보지요. 안 그렇습니까? 배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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