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장 1절 – 20절) 2: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5 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 6 그 무리가 다…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8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 9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2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5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에게 취하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8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19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개역개정) 우리 기독교의 중요한 종교개혁 정신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다섯 가지 표제입니다. 다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오직 믿음으로’(Only by Faith)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 ‘오직 믿음’(Only Faith)이 아니라, 또 다른 ‘오직 믿음’(Only Belief)으로 변질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Belief의 믿음’(신념,信念)이 종교적 신조나 교리에 대한 지식적이며 신념적인 동의(I believe)를 의미한다면, ‘Faith의 믿음’(신앙,信仰)은 신앙 대상에 대한 충실하고 신의 있는 신앙적인 삶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사11:9)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호4:1)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빌3:8)으로 충만할 때, 그 자신의 삶과 그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 주님이 통치하시는 어떤 세계의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를 계시합니다. 여기서 “아는”이라는 것이, 단지 어떤 지식적인 동의가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교감하는 체험을 통한 삶의 실천을 의미하기 때문 아닌가요? 따라서 이것의 있고 없고의 차이를 하나님께서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9)와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호4:1-2)고 하신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차이는, 우리가 삶 속에서의 실현을 위한 믿음(Faith)이냐와, 단지 지식적인 전달을 통한 지식적인 동의를 위한 믿음(Belief)이냐의 결과입니다. 성경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히10:38)고 할 때, “살리라”가 ‘구원을 얻는다,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만이 아닌 ‘그렇게 살아간다’ 곧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의미가 함께 하는 것 아닌가요? 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어떻게 삽니까? 오늘의 성경 본문은, 하나님을 향한 하박국 선지자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과, 남 유다의 죄악을 징계하는 도구로 쓰임 받을 바벨론 제국의 악행에 대한 다섯 가지 저주의 선포가 담긴 내용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첫 번째 질문은, 신앙의 백성이라고 하는 남 유다의 정치 종교 지도자와 백성들의 불신앙적인 죄악을 하나님께서 왜 징계하지 않고 방관하시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인 바벨론 제국을 일으켜서 그들로 유다 백성의 죄악을 징계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하박국 선지자의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행하심에 순종하겠지만 어떻게 온갖 악행을 행하는 이방 민족인 바벨론 제국을 들어서 신앙의 백성인 유다 민족을 징계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반문의 질문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두 번째 질문을 마친 상황에서 하박국 선지자가 어떤 신앙자세를 취했다고 고백합니까?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2:1). 하박국이 초소병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선지자”(1:1)로서 시대와 민족의 영적 파수꾼으로서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곧 자기 본연의 사명의 자리를 지키겠다는 고백입니다. “성루”는 성벽의 망대로서, 멀리 바라볼 수 있는 “파수하는 곳”을 가리킵니다. 선지자는 지금 당장의 현실과 상황만을 바라보는 이들이 아니라, 장차 다가올 상황을 직시하며 직면하게 될 위기 상황을 백성들에게 미리 경고하여 자각과 각성을 촉구하는 예언자이자 선견자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을 듣기 위해 “내 파수하는 곳”에서 고요히 기다리는 자세를 어떻게 고백합니까?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2:1). “내게”가 ‘내 안에’라는 의미라는 점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귀가 아니라 마음의 내면에 들려주실 하나님의 내적 계시를 나타낸 것으로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그 뜻을 알고자 하는 관심의 질문이 필요하고, 질문했다면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한 “나의 질문”은, 첫째로 신앙인인 유대 백성의 악행을 징계하는 도구가 왜 하필이면 악행을 일삼는 이방인인 바벨론 군대냐고 하는 것이고, 둘째로 그러한 침략과 학살을 일삼는 바벨론 군대의 악행을 언제까지 방관하실 것이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2:1).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이 묵시”는,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응답으로 보여주실 계시를 의미합니다. 신앙인이 되었든 이방인이 되었든, 악행을 일삼는 악의 세력들에게 궁극적으로 임할 종말론적 심판에 관한 예언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하박국 선지자 혼자 알고 있지 말고 글로 기록하여, 누구든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을 두 가지로 해석하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누구든지 아무리 바빠도 보고 깨닫게 하라는 의미이자, 둘째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읽는 자는 누구든지 달려가서 그 내용을 전하게 하라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악행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있으리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될 것이고, 악행을 당하는 이들에게는 그 악행을 행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리라는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깨닫고, ‘자성과 회개의 기회’로 또 ‘위로와 소망의 기회’로 삼을 것을 어떻게 말씀합니까?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2:3). 하나님은 두 부류의 사람을 계시하면서, 우리가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가를 돌아볼 것을 어떻게 말씀합니까?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하나님은 아무리 악하고 혼란한 시대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을 지키는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이들이 생명의 구원을 얻는 복된 “의인”의 길을 걸어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2.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탐욕은 무엇입니까? 신앙인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지 못할 때, 악행을 행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방인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신앙의 사람들이 행하는 죄악에 대한 심판의 도구로 잠시 들어 쓰실 바벨론 제국의 “믿음”을 가리켜서,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1:11)며, 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1:15)하는 것은 오직 자신들의 능력과 권력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1:16)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저들의 잘못된 “믿음”의 마음 상태가 빚어내는 악한 자세와 윤리도덕적인 죄악을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2:4)다고 하나님께서 일깨우십니다. “교만”은 ‘부풀어 오르다’는 뜻으로, 자기만을 과시하고 뽐내려다보니 눈에 뵈는 게 없는 마음 상태입니다. 이것의 결과가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옳고 바른 길을 선택하지 않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기를 거부하는 이들의 탐욕 아닌가요? 그러다보니 자기 사명과 역할보다는, 자신의 힘을 키우기에만 집중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을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절규하며 탄원합니까?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1:17).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지 않는 이들이 저지르게 되는 끝없는 탐욕의 죄악을 어떻게 비유하여 말씀합니까? “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2:5). 자기 탐욕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다 보니,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자기의 욕심을 넓히며…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모으며…모으나니”라고 표현합니다. “술을 즐기며”는, ‘술은 반역을 행하리라’ 곧 술은 교만한 자를 망하게 하는 반역자와 같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잠20:1)고 말씀한 이유입니다. 탐욕의 “술”에 취하면, “교만”한 “자기의 욕심”의 성취를 위해서 “거짓”을 행하기에 급급합니다. 끝없는 그러한 탐욕의 추구를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라고 비유합니다. “스올”은 죽은 이들이 가는 음부와 무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망”과 같은 의미입니다. 사람이 죽고 또 죽어도 지하세계가 차고 넘치는 법이 없는 것을, 인간의 탐욕 곧 “자기의 욕심”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이것을 전도서에서는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전1:3-7)라며, 그렇기에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1:2,8)라고 우리의 각성과 자각을 촉구하지 않는가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자기만족이 없는 끝없는 탐욕만을 힘쓰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사람은 자족할 줄 알기에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며 함께하고자 절제하고 자제하며 멈출 줄 압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 분명한 은혜이고 축복이면서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느냐 살아가지 않느냐는 전혀 다른 생명과 사망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을 깨닫고 돌이키는 이들이 복된 “믿음”의 사람입니다. 3. 믿음이 아닌 탐욕의 저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사람과 “자기의 욕심”의 성취를 위한 ‘탐욕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사람의 결말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하나님이 말씀하신 의와 법을 의지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삶 전반에서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 자세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삶을 추구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는 말씀을, ‘거만한 자를 보라! 그의 영혼은 그 안에서 올바르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고도 해석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고자 하기보다 ‘탐욕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표상이 될 바벨론 제국의 다섯 가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어떻게 선언됩니까? 첫째는, 탐욕의 죄를 저주합니다. 탐욕으로 말미암아 행한 악행에 대해 그 악으로 반드시 멸망할 것이며, 이로써 세상의 조롱을 받게 될 것을 경고합니다. 힘이 없어 억압과 탈취를 당해야만 했던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2:6)고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평론하며”는, 바벨론이 저지른 악행을 자신들의 교훈으로 삼아 저들을 손가락질하고 비웃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악행을 행한 자들의 어떤 모습을 “조롱”하고 “풍자”하게 되리라고 말씀합니까?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너를 억누를 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힐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2:6-7). 불의한 방법으로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을 삼는 자들이 “언제까지” 그럴 수 있으리라고 보느냐고 경고합니다. “볼모 잡은 것”이라는 것은, 진흙더미 같이 쓸데없는 것을 긁어모았다는 의미이자, 도로 갚아야 할 빚 일뿐이라는 의미입니다. “언제까지” 남의 것을 약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며, 입장이 바뀌어서 바벨론을 “억누를 자들”과 “괴롭힐 자들”이 일어나서 남의 것을 “노략”했던 바벨론이 이제는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고 경고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2:8)고 저주합니다. 영원한 강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경고이자 당부입니다. 둘째는, 불의한 이득을 취한 죄를 저주합니다.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2:9). 남에게는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로서 “재앙”을 입히기를 즐겨하면서도, 자기는 당하지 않겠다고 만반의 준비를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을 경고합니다.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로 살아갔던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떠한 저주를 선언하십니까? “네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2:10). 우리가 악행을 저지르는 것 자체가 자기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일깨웁니다. 바벨론 제국이 번영을 구가하며 세운 성벽과 궁궐과 신전은 모두 포로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건설된 것이고, 이것들이 약탈한 물질로 세워진 증거물이자 철저하게 붕괴하게 될 것을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2:11)는 비유로 저주합니다. 셋째는, 피 흘림의 죄를 저주합니다.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2:12). 하나님은 불의한 수단과 방법으로 자기 번영을 누리던 이들인 바벨론 제국의 철저한 붕괴를 선언합니다.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2:13).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죄악으로 일군 저들의 번영이 마치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저들이 번영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 “피곤하게 되는 것”일 뿐이라며, 그러한 모든 수고가 저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불탈 것”이 되는 “헛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바벨론 제국은 하나님의 경고대로 주전 519년에 메대와 바사(페르시아) 연합군에 의해 불타서 멸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가리켜서,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2:14)고 선언합니다. 어쩌면 하박국 선지자가 듣고 싶어 했던 답변이었을 것입니다. 넷째는, 부도덕과 악행을 저지른 죄를 저주합니다.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에게 취하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2:15). 이것은 비유적 표현으로서, 바벨론이 점령하여 통치하는 속국들에게 자신들이 추구하는 죄악의 “술”에 도취하게 해서 심판받을 패역과 탐욕을 전염시켜서 멸망의 길을 걷는 수치스러운 삶을 살게 할 것을 나타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군사적 강대국을 선망하며 그들의 문화가 마치 대단한 것이나 되는 것처럼 도취하지만, 얼마나 부끄러운 것들이 많은가를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보다 연약한 자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것을 탈취하면서 그것이 마치 자기 영광이나 되는 것처럼 거들먹거리지만, 그것이 얼마나 수치스런 행위인가를 깨달을 것을 어떻게 말씀합니까?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리라”(2:16). 오늘날 재벌들이나 미국 중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들과 대형교회들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악행들이 무엇인지를 지켜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들의 존재가 필요하면서도, 또한 힘을 가진 이들이 전혀 양심의 가책도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고 당연시하며 행하는 악행들을 직시하라는 경고입니다. “이는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죽인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2:17). 자신이 힘이 있다는 것 때문에 행했던 모든 악행의 대가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치르게 하시겠다는 심판의 저주입니다. 다섯째는, 우상 숭배의 죄에 대한 저주입니다.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2:18-19). “새긴 우상”은 나무나 돌을 깎아서 만든 것이라면, “부어 만든 우상”은 금속으로 주조한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만든 것을 신으로 섬기는 죄악을 하나님께서 저주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2:19)고 우리를 일깨웁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신앙인들의 죄악을 방관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과 또한 악행을 행하는 신앙인들에 대한 심판을 안 믿는 사람들을 통해 하실 것이라는 말씀에 대한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에 하나님께서 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고 답변하셨는지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신앙인이던 아니던 악행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다섯 가지 죄악에 대한 심판의 저주를 통해서, 비록 바벨론 제국을 통하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남 유다를 심판하시지만, 바벨론의 죄악 역시 심판하시겠다는 선언에서 어떤 마음과 생각이 드십니까? 이 땅의 모든 질서와 체계와 지도자는, 사실 모든 것이 불완전합니다. 세계 질서나 국가 정치 체계나 종교 체계나 사회 체계 역시 불완전합니다. 자신에게 힘과 권위와 지위가 주어졌다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역할과 본분의 사명에 충실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힘을 자기 탐욕의 성취와 약한 자들을 억압하고 탈취하는 수단과 도구로 남용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시겠다는 것이 저주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경고하신 다섯 가지 죄악의 시발점과 그 모든 악행이 ‘자기 탐욕으로 말미암은’ 성취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이들이 복이 있습니다. 그 결말이 하나님께 대한 경배가 아닌 우상 숭배로 귀결될 것을 경고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탐욕의 “술을 즐기”는 이들의 행태를,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자기의 욕심을 넓히며…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모으며…모으”(2:5)기에만 힘쓴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고 하시며,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어떤 길을 가고자 결단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남 유다의 악한 힘을 행사하던 이들과 정치 종교 지도자들과 바벨론 제국의 번영과 힘을 혹시 나의 하나님으로 삼고자 하는 “믿음”(1:11)은 아닙니까? 왜냐하면 오직 나의 능력과 권력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1:16)을 “기뻐하고 즐거워”(1:15)하는 “믿음”이기 때문은 아닌가요?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답변을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2:20)는 선언으로 마무리하십니다. 여기서 “성전”은, 지상의 건축물이 아닌 만물을 통치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늘 보좌를 의미합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시며, 우리 신앙인들이 취해야 할 중요한 신앙 자세에 대한 계시입니다. 모든 것이 불완전하여 모순과 불합리로 가득한 세상의 혼탁한 죄악 현실 속에서도, 오직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고 말씀하신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