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1부, 한글해설서, 훈민정음 해례본출처: 문화유산채널
설명글 더보기 1. 광화문의 세종대왕 동상. 세종대왕의 왼손에 들려있는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새로운 문자 훈민정음의 창제 이유와 글자를 만든 원리가 설명돼 있는 일종의 해설서이다. 세종 28년인 1446년 간행된 이 책은 오랜 시간 자취를 감추었다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됐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은 한글 창제를 둘러싸고 계속되던 논란을 일순간에 정리한 사건이었다. 세종은 왜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책을 펴냈던 것일까? 한글해설서, 훈민정음 해례본. 2. 세종,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내다. ‘이달에 임금이 직접 언문 스물 여덟자를 만들었다... 글자는 간단하고 쉬우나 변화가 무궁하니, 이를 훈민정음이라 이른다.’ 세종실록에 남아있는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기록이다. 1443년, 세종 25년의 일이다. 하지만 문자를 만들었다는 사실만 적어놓았을 뿐, 문자에 대한 다른 기록은 없다. 그리고 약 3년 뒤인 세종 28년의 실록에 ‘이 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졌다’는 언급과 함께 훈민정음 해례본에 실린 세종의 서문과 정인지의 서문이 기록돼 있다. 새로운 문자 훈민정음을 창제한 지 3년 만인 1446년, 해례본의 간행과 함께 훈민정음을 반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은 새로운 문자를 가리키는 말이자, 세종이 집현전 학자 8명과 만들어 낸 책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책을 ‘훈민정음 해례본’이라 부르는 것은 문자의 사용법을 자세히 풀이해놓은 ‘해례’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책은 세종이 쓴 서문과 새 문자 훈민정음을 소개한 예의, 집현전 학자들이 풀이한 해례, 정인지의 해례 서문으로 구성돼 있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새로운 문자를 만들려고 했던 것일까?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세종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단서가 있다. 바로 ‘삼강행실도’이다. 세종 10년, 진주 사람 ‘김화’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세종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능지처참의 벌을 내리긴 했지만 형벌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한 세종은 효자, 충신 등의 사례를 담은 삼강행실도의 간행을 지시한다. 책에는 내용에 맞는 그림을 함께 넣어, 글을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백성이 그림만으로 제대로 뜻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세종의 걱정이 실록에 남아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아직도 쉽게 깨달아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림을 붙이고 이름하여 삼강행실이라 하였으나... 다만 백성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여 책을 비록 나누어 주어도 남이 가르쳐 주지 아니하면 어찌 그 뜻을 알아 감동하고 착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으리오’ 문자의 필요성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라 볼 수 있다. * 세종 권64, 16년 4월 27일 두 번째 기사 ‘삼강행실을 인쇄하여 반포하고 가르치도록 하고 그에 대한 교서를 짓게 하다’ 어리석은 백성과 문자에 대해 다시 언급한 것은 세종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서이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로는 서로 통하지 않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나타내지 못할 사람이 많다. 이를 위해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배우고 익혀 쓰기에 편하게 하고자 한다.’ 세종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언어를 만들고자 했다. 예조판서 정인지가 남긴 서문에서도 훈민정음 창제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 새로운 문자를 만들며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백성이 막힘없이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으로 시작된 훈민정음 창제의 과정은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책으로 마무리 된다. 해례본에는 자음과 모음이 만들어진 원리와 실제 적용해 사용할 수 있는 방법 등이 상세히 설명돼 있다. 발음기관을 본떠 만든 자음, 천지인을 본떠 만든 모음, 기본글자에서 파생되는 또 다른 글자들. 훈민정음 해례본은 새로운 문자 훈민정음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문자인지를 입증하는 중요한 유산이다. 4. 훈민정음 언해본 백성들에게 새 문자를 알리기 위한 세종의 노력은 한글 책 편찬으로 이어졌다. 훈민정음을 반포한 이듬해부터 조선왕조의 창업을 기리는 노래 용비어천가, 석가모니 일대기를 한글로 펴낸 석보상절, 세종이 지은 불교 찬가 월인천강지곡 등 한글로 쓰여진 책들이 만들어졌다. 한문으로 기록된 훈민정음 해례본을 한글로 풀어쓴 ‘언해본’도 간행됐다. 세종의 서문과 새 문자들을 소개한 '예의’편을 한글로 풀어쓴 것이다. 한문을 몰라도 새로운 문자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해례본에 실린 정인지의 서문 그 마지막에는 해례본을 함께 만들 이들의 이름과 책을 펴낸 이유가 남아 있다. 집현전 응교 최항, 부교리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과 함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우치게 하려고 이 책을 펴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정통 11년 9월 상한’이라고 이 책이 만들어진 때를 기록해 두었다. 이 기록은 한글날의 지정에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상순의 끝 날인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10월 9일이 한글날로 결정된 것이다.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배우고 익혀 쓰기에 편하게 하고자 한다’ 훈민정음 서문에 밝힌 것처럼 세종은 누구나 쉽게 익히고 쓸 수 있는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의 열정과 노력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