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노동운동을 촉발시킨 전태일
열사를 기리는 기념관을 손주
와 찾아가는 일은 가슴 뿌듯한
일이다.
불합리에,
반기를 드는 용기로 노동의 가치
를 온몸으로 외친 그가 아닌가.
전태일은,
1948년, 봉제 노동자였던 전상수
와 독립운동가의 딸 이소선 사이
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매스컴에서 마이크 잡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씨.
생존하기,
위해 신문팔이, 우산 장사부터 리
어카뒤밀이 등의 몸 쓰는 일도 마
다하지 않았다.
1964년,
식모살이를 떠난 어머니를 찾아
막내 동생과 함께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대구와 부산, 서울을 오가
며 노상에서 천막집까지 떠돌이
생활을 했다.
잘 곳이,
없어 덕수궁 수위실, 서울역, 중앙
시장, 야채가게 주변 등에서 새우
잠을 자는 밑바닥 생활을 했다.
그러니까,
전태일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고
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1965년 18세의 전태일은, 평화시
장 봉제노동자로 첫 삶을 시작한다.
평생의,
첫 직장에 대한 기대감도 잠시 비
참하고 끔찍한 노동 현실과 마주
하게 된다.
당시,
미싱사 평화시장 노동자는 하루 기
본 15시간의 장시간 노동은 물론,
밤샘 야간작업으로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
노동자들은,
하루 15시간 이상을 허리 한번 펴
지 못하고 햇볕도 들지 않는 작업
장에서 먼지를 마셔가며 일을 했다.
당시 미싱 작업하던 다락방
열악한,
작업 환경으로 영양실조, 만성소
화불량, 신경계통 및 호흡기 질환,
안질 등 대부분의 노동자가 질병
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에게는 건강 검
진이나 휴가 등 복지는커녕 병세
가 악화되면 해고조치 되는 일도
잦았다.
이쯤에서,
전태일 열사 나이 때 나의 과거
가 주마등처럼 훑고 지나가는 건,
어쩔 수 없겠다.
나는,
프로판 가스통(음식점 가스쓸 때 밸
브를 열면 가스를 공급해주는 철판통)
만드는 공장에서 용접을 했는데,
아침 8시 30분부터 잔업까지 밤
9시 30분까지 일했으니까.
돈을,
더 벌기 위해 잔업까지 한 달에
28일 동안 일하다 보니, 하늘이
노랬다.
그 번 돈으로,
검정고시 학원 다녀 오늘날 밥
술이나 먹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러한,
노동착취 현장에서 전태일은 정직한
재단사가 연약한 직공들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게 하겠다는 일념
으로 곧 재단사가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마침내 전태일은 1969년 12
월 19일 근로감독관에게 진정서를 보
낸다.
전태일,
기념관을 나와 청계천을 걷다가 내가
좋아하는 이육사의 ‘광야’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날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서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청계천,
버들다리에 자리한 전태일 동상.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기준
법 준수를 외치다 분신한 현장이다.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기억해
주기 바라네’
1969년 11월, 전태일 씀.
세상은,
분명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열사를 잊지 말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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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와 역사탐방[35]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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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7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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