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성심여중 배지를 본 차장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너희 학교에 대통령의 딸이
다닌다면서?”
“네.”
“전차 타고 다닌다던데 사실이니?”
“그렇다나 봐요.”
“예쁘게 생겼니?”
“글쎄요.”
“공부는 잘하니?”
“잘하나 봐요.”
“키가 얼마만하니?”
“저만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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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이 될 무렵부터 내 안에 가장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어머니가 자리 잡았다. 어머니의 언행과 훈육방식이 일관되지 않았다면 청와대에서 사춘기를 나는 동안 내 자아는 적지 않은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의 시선이 우리 가족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짜여진
규범 안에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지내는 생활은 숨 막히는 일이다. ‘대통령의 딸’이란 남들 눈에 공주처럼 보이겠지만, 정작 당사자에게는 감옥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전문■
청와대에서 산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경험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자식이기 때문에
혜택을 누린 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내게 청와대생활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청와대생활은 하지 말아야 할 금기사항이 빼곡한 날들이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자랑해서는 안 된다’며 어머니는 몇 번이고 우리에게 이런 지침을 당부하셨다. 어렵던 시절, 대통령의 딸이라는 자리는 자칫 우쭐한 특권의식을 키워줄
수 있는 위험한 명함이었다.
성심여중에 다니던 어느 날, 단짝
친구 몇 명이 청와대에 놀러왔다. 가족실과 내 방을 둘러본 한 친구가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우리 집하고 다를 게 없잖아. 공주처럼 꾸며놓고 사는 줄 알았는데∙∙∙.”
점심시간이면 친구들은 내 도시락 반찬은 뭔가 좀 다를 거라고 여겼는지 흘낏 반찬통을
들여다보곤 했다. 하지만 내 도시락도 친구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보리가 섞인 잡곡밥에다가 달걀말이, 콩자반과 깍두기 정도가 다였다.
내가 입학할 당시 성심여중은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학교였는데, 그곳에는 학생을 위한 기숙사가 있었다. 어머니는 내게 기숙사생활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다. 나는 청와대에서 벗어난 1년
동안 학교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고 잠자며 어울려 지냈다. 참 재밌는 시간이었다.
잠은 한 방에서 여러 명이 자도록 되어 있었는데 칸칸이 커튼이 쳐져 있었다. 취침시간이 되면 선배들이 커튼 너머로 빵이나 과자를 건네주곤 했다. 우리는
수녀님 몰래 야참을 먹으며 소곤소곤 수다도 떨었다. 순정만화 책이 오고 가기도 했다. 수녀님들은 우리의 잘못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감아주실 때가 많았다.
2학년으로 진급할 즈음, 학교는 교실 확장 계획에 따라 기숙사를 폐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나는
다시 청와대로 돌아가 전차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아침마다 청와대에서 효자동을 거쳐 원효로로 가는 전차를
탔다.
이 소문이 전차 차장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지면서 대통령의 딸이 누구일까 궁금한
마음에 성심여중 학생들을 한 명 한 명 눈여겨보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하루는 성심여중 배지를 본 차장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너희 학교에 대통령의 딸이
다닌다면서?”
“네.”
“전차 타고 다닌다던데 사실이니?”
“그렇다나 봐요.”
“예쁘게 생겼니?”
“글쎄요.”
“공부는 잘하니?”
“잘하나 봐요.”
“키가 얼마만하니?”
“저만할 거예요.”
나는 시치미를 뚝 떼며 대답했다. 혹시
주위 사람들 중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날 밤, 식구들이 모인 저녁 식탁에서
등굣길에 겪은 일을 이야기했더니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겉으로는 웃으시면서도 부모님은 사람들이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안도하는 눈치셨다. 어머니는 내가 대수롭지 않게 행동한
것을 칭찬하셨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어느덧 청와대에서 보낸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추억이 되어가고 있었다. 청와대로 온 이후 가족들이 가장 아쉬워한 것은 어머니의 요리를 자주 맛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어머니는 청와대 안주인 역할을 하느라 대통령인 아버지 못지않게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셨다. 청와대 사람들로부터 ‘신문고’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편지 한 통도 소홀히 하지 않고 직접 챙기시는 걸로 유명했다. 또한 조용히 여기저기
시찰을 다니셨다.
어머니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시면서도 청와대 식단을 돌보셨지만, 당신이 직접 요리를 하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그래도 가족이 모두
모이는 휴일 저녁식사만큼은 손수 장만하셨다. 봄이면 쑥국이나 냉잇국을 끓이셨고, 여름에는 냉면을 준비해 식탁 위에 올리셨다. 매일 밤, 우리의 저녁 간식을 챙기는 것도 어머니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밤늦도록
공부를 하고 있으면 토마토를 직접 갈아 내오시거나 떡 한두 조각에 국화차 같은 전통차를 준비해주셨다.
신당동 살던 때 아버지는 무엇보다 어머니의 요리 솜씨를 자랑스러워하셨다. 손님이 찾아오면 어머니는 수산시장에 나가 싱싱한 횟감을 구해 직접 회도 뜨셨고, 순대나 약식을 만들어 이웃과 나눠 먹곤 했다. 어머니의 별미 요리를
먹어본 사람은 두고두고 어머니의 음식 맛을 잊지 못했다. 저녁 식탁에 어머니가 빚은 만두전골 같은 특별
요리가 올라온 날이면 아버지는 맛있게 드시며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셨다.
끼니를 거를 정도로 바쁜 어머니의 일정 때문에 가족 누구도 어머니에게 예전처럼
맛있는 요리를 해 달라고 조르지는 못했다.
‘남편이 부정을 저지르는 책임의
태반은 아내가 져야한다.’ 청와대 안주인으로서 어머니의 사명감은 무척 높았다. 어머니를 도와 해외 순방 길에 나섰던 비서 한 분이 언제나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해외 순방을 하다 보면 하루
종일 서 있는 일이 많아 저녁에 숙소로 돌아가면 발이 퉁퉁 부어 있어요. 당시 우리나라에서 만든 구두는
신축성이 떨어져서 다음날 딱딱한 구두를 신는다는 건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니거든요. 하루는 여사님
발이 심하게 부어 있기에 제가 편한 구두를 한 켤레 구해오겠다고 했더니 단박에 거절하셨어요. ‘혹 국산
구두가 질이 나쁘다는 식의 소문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느냐’면서요. 밤마다
얼음찜질로 발의 붓기를 빼느라 고생을 하시면서도 티를 내지 않으셨죠.”
어머니는 해외에서 절대 쇼핑을 하지 않으셨다. 부모님이
해외 순방을 마치고 돌아와도 우리에게 선물을 주는 일은 없었다. 어머니의 짐 꾸러미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스푼 몇 개가 전부였다. 어머니의 유일한 취미가 세계 각국의 스푼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것은 청와대 내의 훌륭한 전시물이 되기도 했다. 어머니는 당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나라의 이미지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셨고, 그만큼 자기관리에 철저하셨다.
고등학생이 될 무렵부터 내 안에 가장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어머니가 자리 잡았다. 어머니의 언행과 훈육방식이 일관되지 않았다면 청와대에서 사춘기를 나는 동안 내 자아는 적지 않은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의 시선이 우리 가족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짜여진
규범 안에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지내는 생활은 숨 막히는 일이다. ‘대통령의 딸’이란 남들 눈에 공주처럼 보이겠지만, 정작 당사자에게는 감옥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어머니는 주변 환경에 동요하지 않고 자식들이 평범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배려하셨다. 어머니의 이런 교육 때문에 무리 없이 사춘기를 지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첫댓글 위대한 분이십니다
위대한 어머님을 두신
박근혜 대통령님 강건하십시요.
안뇽하세요 ~
여기 지나가셨길래 반가워서요
걍 인사 올려봅니다
잘 지내시죠~^^
@Domidomi 네. 도미님.
도미님도 여름철 건강조심하세요.
25일 집회때 뵐게요.
굳모닝~하늘님
어젠 함께 못해 아쉬웠어요
즐거우셨죠~^^
대통령님 책소개를
매일매일 동지님들이 원하네요
변화는 그렇게 시작되나봅니다
비오는 주일이네요
오늘도 유쾌하게~굳럭!!~^^
하늘님 고맙습니다
진정 위대하신 분들 입니다.
고맙습니다 하늘님^^~😘😘😘
감사합니다. 하늘님 .^^
쳐 죽일놈의 문가족속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