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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0. 묵상글 들 ( 2022년 12월 20일. - 은총에 관하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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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0. 2022년 12월 20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은총에 관하여
성탄이 가까워질수록 마리아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성탄을 예고하는데
성탄의 주인공이 되는 은총을 받았다고 얘기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그런데 ‘은총이 가득한’이란 어떤 것, 어떤 상태입니까?
마리아에게는 은총에 부족함이 없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마리아가 은총으로 가득하다는 뜻일까요?
우리에게는 은총에 부족함이 있지만 마리아에게는 부족함이 없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마리아가 은총으로 가득하여 다른 것은 있을 자리가 없다는 뜻일까요?
우리에게도 하느님의 은총이 부족할 리 없을 겁니다.
한 방울의 사랑이라도 우리를 채우고도 넘칠 겁니다.
그러니 은총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우리에 비해
마리아가 은총으로 가득하다는 뜻일 겁니다.
마리아가 출산을 위해 베틀레헴이 갔을 때 여관은 사람들로 만원이었던 데 비해
마구간은 텅텅 비어있어서 주님께서 여관이 아닌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던 것처럼
우리는 종종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어서 은총의 자리가 없을 때가 많지만
마리아는 은총으로 충만하여 다른 것이 있을 지리가 없다는 얘기일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님을 모시기에 은총이 가득하다는 뜻일 겁니다.
주님이 은총이고, 최고의 은총이며, 충만한 은총이라는 말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에서 “당신은 선, 모든 선, 지상 선,
완전한 선, 충만한 선”이라고 하느님을 노래했는데, 은총도 마찬가지이고,
마리아에게도 우리에게도 주님만이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은총일 겁니다.
그리고 거룩하고 순수한 사랑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에 주님을 모실 때
그분의 어머니가 된다는 프란치스코의 가르침 대로 우리가 마리아처럼
성령으로 주님의 어머니가 된다면 우리도 은총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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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0. 2022년 12월 20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나이다.”(루카 1,38)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고합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이사야의 예고대로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잉태하게 된 경위를 말해줍니다. 그런데 주님의 탄생예고는 성전 ‘성소’에서 전해진 세례자 요한의 탄생예고와는 달리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던 “이방인의 갈릴래아"(마태 4,15)에 있는 작은 동네 나자렛의 시골 처녀의 ‘집’에서 전해집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처를 성전 안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두시게 됩니다.
그런데 천사의 인사말은 마리아가 이미 “은총이 가득한 이”(루카 1,28)였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기 전에, 믿음으로 충만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즈카르야는 ‘의심’하여 자신의 목소리까지 잃어버리고 벙어리가 되었지만, 마리아는 ‘믿음’으로 응답하여 구원의 말씀을 품으셨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마리아는 몸으로 우리 주님을 잉태하시기 전에 마음으로 먼저 잉태하셨다."
또 즈카르야에게는 아기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루카 1,17)이라는 ‘사명’이 예고되지만, 마리아에게는 아기가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외아드님”(루카 1,35)이라 불리게 될 것이라는 ‘신원’이 예고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루카 1,35)으로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드러납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나이다.”(루카 1,38)
여기에서 드러나는 마리아의 ‘희망’에 대해서 보고자 합니다. 이는 마리아 자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 그것을 저도 바랍니다.’라는 뜻입니다, 곧 그분의 희망을 희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리아의 희망과 하느님의 희망이 같아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시도록 그분의 뜻에 승복하는 일이요, 그분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품고 자신의 희망이 아니라 그분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이요, 당신의 사랑을 이루시도록 우리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고 수락하는 일이요, 그리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고, 그분의 은총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그분이 하시는 일에 함께 일하는 협조자가 되는 일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삼으십니다. 저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시고, 저희 안에서 사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마리아와 함께 진정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희망이 있다는 이 사실이 말입니다. 우리를 희망하는 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이 사실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큰 기쁨인지요! 내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놀이터요 일터라니! 이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야곱의 “Eureka!”, 그 깨달음의 외침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창세 28,17)
오늘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바야흐로 성탄의 기쁨이 몰려옵니다. 희망이 이미 수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주님의 희망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희망이 진정,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하오니,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항상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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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0. 2022년 12월 20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연말을 맞이하면서 나라의 안녕을 위해 기도합니다. 매스컴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나라의 크고 작은 일들이 우리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남의 탓만 하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아프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인은 맑고 밝은 세상을 희망해야 합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우리의 빛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울타리를 고집하는 이들에게 성령의 역사를 이루시길 소망합니다.
제네시스 수도회 토마스머튼의 평화를 묵상합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당신이 평화라고 생각하는 것을 사랑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당신 생각에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 보다는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십시오! 그것들이 전쟁의 원인입니다. 평화를 사랑한다면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며 욕심을 미워하십시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 안에 있는 그것들을 먼저 미워하십시오."
성모님께서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며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일상 안에 주님의 뜻을 ‘종’으로써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종은 자기를 포기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순종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사실 믿는 이들은 서로에게‘종’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7-8). 그리고 사도들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2고린4,5)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주님의 종으로, 서로의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많은 직책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모든 것을 희생하고 감수하며 다 버리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하신 성모님처럼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성모님을 ‘경청의 달인’이라 칭하시며 성모님을 가득 채운 것은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곰곰이 되새기는 성모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매 순간 삶의 자리에서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천사는“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1,30).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는 내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지만 발견되느냐? 안 되느냐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은총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종 여러분,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두려워하고 떨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현세의 주인에게 순종하십시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기쁘게 섬기십시오”(에페6,6-7). 하고 권고합니다. 서로 섬기라는 간청입니다. 그러나 저는 대접받기 좋아하고 윗자리를 좋아합니다. 겸손하게 남의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가르치려고 하는 마음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신자 한 분 한 분의 마음을 헤아리는 넉넉함과 하느님의 종으로서 행동하는 삶을 새롭게 다짐하며 오시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삶을 살기를 원하오니, 몸으로 응답하는 오늘을 강복하소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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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0. 2022년 12월 20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의 지문’으로 잘 알려진 그레이엄 헨콕은 넷플렉스를 통하여 ‘고대의 아포칼립스’를 제작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기원전 12,800년경에 지구에는 대재앙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구 곳곳에 ‘대홍수’에 대한 신화와 설화가 있는 것은 당시 대재앙에 대한 인류의 기억이라고 합니다. 그때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문명이 있었는데 대홍수와 해수면의 상승으로 그 문명은 바다 속으로 사라졌거나, 없어졌다고 합니다. 다만 대재앙의 혼란 중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식과 문명을 당시 신석기인들에게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레이엄 헨콕은 고대의 아포칼립스를 통하여 당시 문명인들이 남긴 유적을 찾아서 보여 주었습니다. 대표적인 유적들은 “멕시코 촐룰라, 인도네시아 구눙 파당, 마이애미 대홍수 흔적, 고대의 거석문화, 튀르키예 지하 도시 데린쿠유, 괴베클레 테페’ 등이 있습니다. 그레이엄 헨콕은 고대 문명인들이 하늘을 관측하기 위해서 높은 사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인류의 문명이 직선으로만 발전하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35억년 지구의 역사에 최소 5번의 멸종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류의 문명 또한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선형으로 발전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고고학, 천문학, 유전공학은 고대의 문명을 찾는 학문이 되고 있습니다. 신화, 설화는 고대 문명이 우리에게 남겨준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또 다른 표징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여러 가지 이정표를 남겨 주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바라보면 보이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머물고 사는 지구는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정표입니다. 온 우주에 우리가 머무는 지구처럼 아름다운 별은 없습니다. 불, 땅, 공기, 물은 아름다운 자연에 생기를 넣어줍니다. 구름, 꽃, 새, 나무, 강, 바다, 산은 하느님의 엄위하심과 사랑을 느끼게 해 줍니다. 예술가들은 노래, 미술, 건축, 연극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였습니다. 흐르는 강물에 빛이 여울지는 걸 보면 참 아름답습니다. 산들바람에 단풍이 흔들리는 걸 보면 아이가 노래에 맞추어 춤추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은 도와주려고 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는 매주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라는 지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신문의 내용을 보시고 많은 분이 후원해 주십니다. 지금 힘들고, 아프고, 외로운 이들의 이웃이 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업적과 능력을 드러내기보다는 숨어서 향기를 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날의 허물과 잘못을 뉘우치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청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도 좋지만, 넓은 바다처럼 모든 것을 품어주고 받아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양심이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정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언자는 철학, 사상, 문학, 예술, 종교를 통해서 정의와 공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앞날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우리가 지구별에 왔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성찰하게 해 줍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 줍니다. 처음부터 길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언자들의 뒤를 따라가니 길이 되었습니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조금씩 동이 트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스름하지만 칠흑 같은 밤은 지나가고, 여명이 시작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새벽을 밝히는 여명이었다면,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이정표를 약속하십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이젠 이정표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거라 말하고 있습니다. 여명은 사라지고, 붉은 태양이 떠오르면 천지 만물이 환하게 보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느 시간과 장소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는 지금 이곳이 하느님 나라가 되는 겁니다. 드디어 복음(福音)의 시대가 열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참된 자유, 참된 평화, 참된 행복이 시작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기쁜 소식은 마리아의 응답으로 현실이 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능력, 업적, 재능, 권력, 재물, 명예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마리아처럼 우리가 응답하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됩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 천사의 아룀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시어 성령의 빛으로 주님의 성전이 되셨으니 저희도 동정 마리아를 본받아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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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0. 2022년 12월 20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면 당황해하며 어쩔 줄을 모르게 됩니다. 그러나 예상 밖의 일도 사실은 예상할 수 있고, 그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당황해하는 것은 아직 그 상황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갑곶성지에서는 봉안당에 들어오실 때 사제가 직접 안치 예식을 합니다. 고인을 위한 마음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금 살아서 힘들어하는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유가족 중의 몇은 고인의 죽음을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분명 언젠가는 자기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잘 알고 있지만, 지금의 죽음을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기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상 밖의 일은 우리 인생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특히 예상 밖의 일도 또 예상하는 일도 모두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상 밖의 일이라고 불평불만 속에서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하느님과 함께하는 희망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듣습니다. 예상했던 일이 아닌, 분명 예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아기를 잉태한다는 것, 당시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아기를 가지면 간음했다고 공개 처형으로 돌에 맞아 죽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왜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면 자기는 죽을 수밖에 없으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가브리엘 천사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라는 말에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7)라고 고백하십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예상 밖의 일에서도 하느님께서 계심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이라는 옷으로 보이는 예상 밖의 일이 자주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주님을 찾고 또 주님을 믿고 있습니까? 주님을 찾고 믿기보다, 고통과 시련 자체에만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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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살아가기에 너무 짧고, 증오하기에는 너무 길다(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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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0. 2022년 12월 20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 삶의 영원한 모범이신 성모 마리아
-성모 마리아 예찬禮讚-
오늘 12월20일은 대림2부 넷째 날입니다. 날마다의 M후렴이 참 아름답고 주님 오심에 대한 좋은 준비가 됩니다. 오늘 M후렴은 “오! 다윗의 열쇠여(O Clavis David)”로 시작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 알렐루야 환호송과 일치합니다.
“오 다윗의 열쇠여, 이스라엘 집안의 홀이시여, 주께서 여시면 아무도 닫지 못하고, 닫으시면 아무도 열지 못하오니, 오시어 죽음의 땅과 어둠속에 앉아있는 우리를 결박에서 풀어 주소서.”
노래할 때는 모르겠는데 이렇게 공부하는 마음으로 써보니 참 깊고 은혜롭습니다. 강론 쓰는 시간은 공부하는 시간, 회개하는 시간,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대림 제1주일부터 2월1일까지 끝기도후 라틴어로 부르는 성모 찬송가 역시 내용이 참 은혜롭습니다.
“구세주의 존귀하신 어머니,
영원으로 트인 하늘의 문, 바다의 별이시여,
넘어지는 백성 도와 일으켜 세우소서.
당신의 창조자 주님 낳으시니, 온 누리 놀라나이다.
가브리엘의 인사받으신 그 후도 전과 같이 동정이신 이여.
죄인을 여여삐 여기소서.”
오늘 복음의 배치도 절묘합니다. 월요일 대림 제4주일 주인공은 성 요셉이었고, 어제 월요일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그리고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이 예고되며 주인공은 마리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의 순종으로 아기 예수가 잉태된 사실은 인류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이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 세계에 들어오시기로 선택하신 장소는 로마도 아테네도 알렉산드리아도 즉 당시 세계의 권력, 문화, 학문의 중심지도 아닌 이름도 미미한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 나자렛입니다. 하느님의 한없는 겸손과 자기비움에 감격하게 됩니다.
시골 동네 처녀 마리아를 당신의 도구로 삼으실줄을 세상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새삼 깊이 묵상할 성탄의 신비중 하나입니다. 주님의 천사인 가브리엘은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를 만나자 마자 축복의 인사를 바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바로 이 말씀은 제가 고백성사 보속으로 드리는 ‘말씀 처방전’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본 어느 수녀의 감동에 벅찬 환성歡聲도 잊지 못합니다.
“아, 신부님, 보속補贖이 아니라 보석寶石입니다. 살아 있는 보석같은 말씀입니다.”
도대체 성모 마리아의 위대한 점은 어디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도 은총 가득한 존재로 살 수 있을까요? 사실 깊이 들여다 보면 위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도 해당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또한 주님의 축복 받은 존귀한 존재로 존엄한 품위를 유지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을까요? 성모 마리아의 삶의 모습이 예수님의 양부 성 요셉과 흡사합니다.
첫째, 정주의 삶입니다.
안주가 아닌 늘 새롭게 시작하는 정주입니다. 밖으로는 님기다리는 산같은 정주에, 내적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흐르는 맑은 강같은 내적여정의 삶입니다. 안주로 녹슨 삶이 아니라 늘 정주 수행으로 반짝이는 영혼이요,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이 아니라 늘 맑게 흐르는 삶입니다.
바로 나자렛 고을에서 마리아는 참된 정주의 삶중에 끊임없이 깨어 하느님을 찾으며 주어진 책임을 다하며 삶의 중심인 하느님께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렸음이 분명합니다. 눈밝은 하느님이 이를 놓칠이 없습니다. 그러니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탓할 것이 아니라 부단히 정주의 삶에 충실한지 자성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은 당신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이런 마리아를 찾아 얼마나 축복받은 존재인지 확인시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둘째, 경청의 삶입니다.
마리아는 분명 침묵과 고독을 사랑했던 영혼이었을 것입니다. 침묵과 고독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만을 찾는 수도승들의 생래적 영적 본능에 속합니다. 고립단절의 침묵과 고독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과 연대해 있는 사랑의 침묵, 사랑의 고독입니다.
얼마나 경청하는 관상가의 모습인지 특히 천사의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마리아의 모습에서 관상가의 진면목이 일정한 경지에 이른 렉시오 디비나의 수준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요셉처럼, 마리아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천사를 통해 하느님은 자기 속내를 다 드러냅니다. 도대체 마리아에게는 비밀이 없는 듯 투명하게 다 밝힙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모험입니다.
“보라, 이제 네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릴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선물이기 보다는 참 버거운 짐같은 느낌입니다만 이어지는 말씀들을 마리아는 충분히 경청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경청이요 ‘경청 훈련’ 또한 참으로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셋째, 순종의 삶입니다.
마리아는 충분히 경청한 후 제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물어봅니다. 결코 허술하지 않고 아주 야무진 마리아의 일면을 봅니다. 결코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라 주눅들지 않고 참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사랑과 신뢰를 가득 담아 진심으로 묻습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주님의 천사의 자상한 설명을 통해 마리아에게 지극 정성으로 배려하는 하느님의 친절이, 하느님의 겸손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필시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진실과 겸손에 감동한 마리아의 즉각적 순종임이 분명합니다. 그대로 전폭적 신뢰와 사랑을 담아 고백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 이 말씀이, 마리아의 응답이 인류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이 됩니다.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으로 비로소 하느님은 세상에 들어오셔서 차질없이 구원역사를 펼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마리아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온세상이 깊은 침묵중이었다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주석도 생각납니다.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조마조마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이 하느님께는 얼마나 고마웠겠는지요! 아마도 하느님께서도 성모님을 통한 우리의 전구를 거절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침내 마리아의 순종으로 이사야의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예언도 실현됩니다. 이를 가톨릭 교회는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밝힙니다.
“신앙의 눈으로 계시 전체와 연관시켜 보면, 하느님께서 당신 구원 계획에서 당신 아들을 동정녀에게서 태어나게 하고자 하셨던 신비한 이유들을 발견할 수 있다”.(가톨릭 교리서502).
“마리아의 동정성은 강생에서 취하신 하느님의 절대적 주도권을 나타낸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오로지 하느님뿐이시다. 그분께서 취하신 인간 본성 때문에 성부에게서 멀어지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 인성으로는 어머니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이러한 두 본성 안에서 그분은 바로 성부의 아들이시다.”(가톨릭 교리서503).
성모 마리아는 우리 삶의 영원한 모범입니다. 정주의 삶, 경청의 삶, 순종의 삶을 통해 날로 성모님을,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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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0. 2022년 12월 20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루카 1,26-38 (예수님의 탄생 예고)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주님께서 나에게
당신의 무엇이 아니라
당신을 송두리째 주십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그 무엇을
내가 바랄 까닭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오롯이 믿고
나는 오롯이 바라고
나는 오롯이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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