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속의 고사성어 -1
두문지의(杜門之義)
[요약] (杜: 팥배나무 두, 막다. 門: 문 문. 之: 갈지. 義: 옳을 의)
문을 막아 의로움을 지킨다는 말로,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를 섬기던 충신들이 조선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하며 두문동에 들어가서 고사리만을 먹고 나오지 않은데서 유래했다.
[문헌] 국사대사전(國史大事典). 고금청담(古今淸談)
[내용] 이성계(재위; 1392~1398)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朝鮮)을 건국(1392년)하니 고려를 섬기던 충신들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不事二君)고 하여 모든 명예와 영화를 버리고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골짜기로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며 끝까지 고려에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그때 고려 충신들이 몸을 씻은 샘을 세신정(洗身井)이라 불렀으며, 그들이 머물던 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 하였고, 그들의 충의를 두문지의(杜門之義)라 했으며 아무도 출사하지 않았기에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 했다.
기록에 나와 있는 그때의 충신들을 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장성 사람 서중보(徐仲輔)를 비롯한 우헌(迂軒) 허옹(許邕), 김해 사람인 허기(許 麒)등을 두문동 72현(杜門洞七十二賢)으로 꼽는다.
*임선미(林先味)·조의생(曺義生)·성사제(成思齊)·박문수(朴門壽)·민안부(閔安富)·김충한(金沖漢)·이의(李倚) 등의 성명만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문동72현 [杜門洞七十二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신규(申珪)·신혼(申琿)·신우(申祐)·조의생(曺義生)·임선미(林先味)·이경(李瓊)·맹호성(孟好誠)·고천상(高天祥)·서중보(徐仲輔)·성사제(成思齊)·박문수(朴門壽)·민안부(閔安富)·김충한(金沖漢)·이의(李倚)·배문우(裵文祐) 등의 이름이 밝혀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문동칠십이현 [杜門洞七十二賢] (두산백과)
*황희는 변절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재주를 아낀 동료들이 세상에 남아서 가지고 있는 재능을 세상을 위해 쓰라고 권유했고, 그는 거기에 떠밀려 나온 것이다.
둘째, 개별적인 기록으로는 부평사람 *이의(李倚), 개성사람 고천우(高天佑), 김해사람 김진문(金振門), 인천 사람 채귀하(蔡貴河), 변숙(邊肅), 성산 사람 전신(全信), 파평 사람 김인기(金 仁 奇), 청송 사람 심원부(沈元符), 진주 사람 강회중(姜淮仲)부자 등 10인과 *신규(申珪), *신혼(申琿), *조희생(趙羲生), *임선미(林先味), *이경(李瓊), *맹호성(孟好誠), *고천상(高天祥) 등이 있었다.
셋째, 태학생(太學生; 성균관 소속의 생원, 진사의 총칭) 69명이 분신자살했거나 끝까지 항거하다가 굶어 죽었다.
넷째, 무신 48인이 있으며, 조선에 충성하지 않아 끝내 몰상 당한 사람이 많았는데 이들을 위해 21대 영조(英祖) 때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配享)하였다.
다섯째, 두문동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궁녀동(宮女洞)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고려의 궁녀들이 의롭게 죽었다.
이상의 인원수만 해도 199명, 궁녀들을 합하면 200명이 훨씬 넘는 숫자다. 기록이 빠진 것을 감안하면 이 외의 수는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이다. 또 두문동이 아닌 명산대천을 헤매다가 죽거나, 벼슬하지 않고 의(義 )를 지켰던 숨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던 것을 감안하면 그 수는 짐작조차하기 어렵다.
조선 초기 수도를 옮기며 민심 수습을 위했던 것을 보면 고려 유민의 저항이 우리 생각보다 심각했던 갔다.
이글은 임종대(林鍾大) 편저 ‘한국 고사성어(故事成語)’를 조금씩 첨삭한 것임.
[우리속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천수봉우출유혈(天雖崩牛出有穴);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의미.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늘~~~
ㅇ아까운 목숨을...
지금도 가능할까
이합집산하는 요즈음???
글세요? 자기 이익 찾기 급급한데... 감사합니다.
杜門洞七十二賢이 머물던 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 하였고,
그들의 충의를 두문지의(杜門之義)라 했으며
아무도 출사하지 않았기에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 했다.
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네에. 감사합니다.
잘 배우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