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義士) 추산(秋山) 김일두(金一斗) 선생(先生) 기적비(紀蹟碑),
연못 산책로 우측(경내(境內)의 남동쪽).
비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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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士(의사) 추산(秋山) 金一斗(김일두) 先生(선생) 紀蹟碑(기적비)
秋山(추산) 金一斗(김일두) 義士(의사)의 貫鄕(관향)은 金海(김해)로 戊午士禍(무오사화)때 節義(절의)로 알려진 濯纓(탁영) 金馹孫(김일손) 先生(선생)의 血統(혈통)을 이어 金昌鎭(김창진) 翁(옹)의 長男(장남)으로 一八九一年(천팔백구십일년) 淳昌(순창)에서 태어나서 一生(일생)을 獨立運動(독립운동)에 바치고 一九五五年(천구백오십오년) 六十五歲(육십오세)를 一期(일기)로 全州(전주)에서 逝去(서거)하다. 우리 政府(정부)에서는 그의 功勞(공로)를 높이 讚揚(찬양)하여 獨立有功者(독립유공자)로 表彰(표창)하다. 一斗(일두)는 그의 이름이요 자는 東秀(동수)며 雅號(아호)는 秋山(추산)이다. 抗日運動(항일운동) 때 쓴 假名(가명)으로 鎭東(진동) 또는 東(동)으로 불리기도 하다. 일찍이 經書(경서)에 通達(통달)하고 늠름한 氣像(기상)과 軒軒(헌헌)한 體軀(체구)는 가히 將才(장재)로 囑望(촉망)되다. 乙巳脅約(을사협약)에 激憤(격분)한 그는 十六歲(십육세)의 어린나이로 抗日救國(항일구국)에 뜻을 품고 國軍(국군)이 强制(강제)로 解散(해산)되자 原州(원주)鎭衛隊長(진위대장) 閔肯鎬(민긍호) 幕下(막하) 義兵(의병)에 加擔(가담)하여 小隊長(소대장)으로써 抗日鬪爭(항일투쟁)에서 戰果(전과)를 거두다. 庚戌恥辱(경술치욕)을 當(당)하자 反抗會(반항회)를 組織(조직)한 후 全國(전국)의 日本(일본) 警察署(경찰서)를 爆破(폭파)하려다가 事前(사전)에 綻露(탄로)되어 滿洲(만주)로 亡命(망명)하여 大倧敎(대종교)에서 救國精神(구국정신)을 鼓吹(고취)하다. 趙鍾國(조종국) 崔銓九(최전구) 白貞基(백정기) 등과 大韓儒生獨立團(대한유생독립단)을 結成(결성)하여 團長(단장)에 推戴(추대)되고 抗日鬪爭(항일투쟁)에서 크게 戰功(전공)을 세우다. 한 때 國內(국내)에 潛入(잠입)하여 趙鍾國(조종국) 郭韓一(곽한일) 등과 獨立義軍府(독립의군부)를 組織(조직)하고 地下運動(지하운동)을 벌리다가 日警(일경)의 追跡(추적)을 받고 재차 滿洲(만주)로 亡命(망명)하여 獨立運動(독립운동)을 繼續(계속)하다. 北京(북경)에서 榮衛大學醫學部(영위대학의학부)에 在籍(재적) 中(중) 李始榮(이시영) 曺成煥(조성환) 申采浩(신채호) 등과 結義(결의)하고 獨立軍(독립군)에 加擔(가담)하여 軍資金(군자금) 調達(조달)l과 組織責(조직책)을 맡다. 大學(대학)을 卒業(졸업) 후에는 露領(노령)의 新韓村(신한촌)의 高平將軍(고평장군) 麾下(휘하)에서 獨立軍(독립군) 中將(중장)으로 活躍(활약)하여 혁혁한 戰果(전과)를 거두다. 다시 滿洲(만주)로 돌아와 藥局(약국)을 經營(경영)하면서 軍資金(군자금) 調達(조달)을 劃策(획책)하다. 臨時政府(임시정부)가 樹立(수립)되고 西間島(서간도)에서 大韓獨立團(대한독립단)이 結成(결성)되자 新興武官學校(신흥무관학교)에서 兵學(병학)을 講義(강의)하고 金鎭東(김진동)이란 假名(가명)으로 金煥(김환)과 더불어 國內(국내)에 潛入(잠입)하여 通信(통신) 및 同志糾合(동지규합)과 軍資金(군자금) 調達(조달)을 目的(목적)으로 活躍(활약)하던 중 日警(일경)에게 逮捕(체포)되어 三年(삼년)을 服役(복역)하는 동안 日本(일본) 總督(총독)의 巡視(순시)를 계기로 獄中(옥중) 鬪爭(투쟁)을 벌려 심한 拷問(고문)을 받고 五年(오년)의 獄苦(옥고)를 치른 후 다시 滿洲(만주)로 亡命(망명)하다. 金東(김동)이란 假名(가명)으로 재차 全北(전북)에 潛入(잠입)하여 金載石(김재석)의 庇護(비호)를 입어 地下運動(지하운동)을 벌리다가 日警(일경)에게 逮捕(체포)되어 三年(삼년)을 服役(복역)하다. 出獄(출옥) 후에는 全州(전주) 孝子洞(효자동) 셋방살이에서 惡刑(악형)의 餘毒(여독)으로 身體(신체)의 障碍(장애)를 일으키어 辛苦(신고)하던 중에서도 日帝(일제)의 監視(감시)를 받았으나 끝내 日帝(일제)의 戶籍(호적)을 拒否(거부)하여 獨子(독자)인 容錫(용석)은 僧侶(승려) 生活(생활)로 隱遁(은둔)하다. 美日戰爭(미일전쟁) 末期(말기)에 접어들자 日帝(일제)의 發惡(발악)으로 智異山(지리산)에 潛迹(잠적)하여 同志(동지)들의 遺族(유족)을 끌어들여 身邊(신변)을 保護(보호)하다. 祖國(조국) 解放(해방)을 맞이하여 全州(전주) 舊苐(구제=옛집)로 돌아오다. 한 때 金九(김구) 主席(주석)과 建國運動(건국운동) 및 南北統一政府(남북통일정부) 樹立(수립)에 盡力(진력)하였으나 主席(주석)이 不意(불의)의 兇彈(흉탄)으로 逝去(서거)하자 分斷(분단)된 祖國(조국)을 慨嘆(개탄)하다가 世上(세상)을 뜨다. 義士(의사)의 烈烈(열렬)한 憂國忠烈(우국충열)은 民族千秋(민족천추)의 龜鑑(귀감)으로서 우리 고장의 자랑이다. 이에 碑(비)를 세워 빛나는 功績(공적)을 길이 받들고저한다.
檀紀(단기) 四千三百十二年(사천삼백십이년) 己未(기미) 九月(구월)
趙炳喜(조병희) 撰(찬)
林仁煥(임인환) 書(서)
本(본) 碑文(비문) 考證(고증) 一部(일부)는 民族紙(민족지) 東亞日報(동아일보) 記事(기사)에
依據(의거)함.
義士(의사) 金一斗(김일두) 先生(선생) 紀蹟碑建立推進委員會(기적비건립추진위원회)
全州儒道會(전주유도회)
全州鄕校(전주향교)
高山鄕校(고산향교)
全州耆寧堂(전주기령당)
全州穿楊亭(전주천양정)
全州木曜會(전주목요회)
全北綜合體育館(전북종합체육관)
龍進安東權氏宗中(용진안동권씨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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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공원은 1978년 4월, 4만5천 평의 규모로 조성된 도시공원이다.
외지에서 오는 사람은 전주IC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팔달로(八達路) 변에 위치하여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곳 덕진 연못의 역사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타나는데 전주 땅의 완산부
(完山府)에 도읍을 정한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쌓은 것으로, 전주가 삼면(三面)이 둘러싸인
분지이나 북쪽만 열려 있어 땅의 기운이 낮아 제방(堤防)으로 이를 막아 지맥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를 만들었다.
전주 동쪽의 건지산(乾止山)과 서쪽의 가련산(可連山)사이가 허(虛)하여 이를 잇는 곳에다
풍수지리를 따라 덕진제(德津堤)라는 둑을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공원은 둑이 있다 보니 고려시대당시 만들어진 자연호수로 전체 공원면적의
2/3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의 연못의 형태는 연못 중앙에 위치한 연화교(蓮花橋)를 중심으로 보트장과 연꽃으로
동서를 가르고 있으며 연못의 주위에는 수양버들과 벚꽃나무 등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덕진 연못의 풍광(風光) 중에서 압권(壓卷)은 무엇보다도 연꽃이라 할 수 있다.
전주에서는 예로부터 ‘부성삼화(府城三花)’하는 말이 전해 온다.
말 그대로 예전에 전주가 전주부성(全州府城)이었던 시절에 아름다운 꽃으로 유명하였던
세 곳을 말하는데 동고산(東古山=僧岩山)의 진달래, 다가산(多佳山)의 입하화(立夏花=여름의
시작 무렵 피는 이팝나무)와 함께 덕진 연못의 연화(蓮花)를 말한다.
덕진공원의 연꽃은 매년 7~8월경 절정을 이루는데 연화정(蓮花亭)과 연화교가 어우러져 전주
팔경(八景)의 하나인 ‘덕진채련(德津採蓮)’이라고 하여 아름다운 정경을 만들어 낸다.
‘덕진채련(德津採蓮)’은 완산(完山) 팔경의 하나로서, “풍월정(風月亭)에 앉아 저녁노을과
달빛을 끼고 뜸부기 우는 호면(湖面)의 피리 소리 실은 어화(漁火)에 젖은 채 맞은 편
승금정을 내려다보는 덕진 연못의 풍경”을 말한다.
덕진공원에 가면 호수와 푸른 잎사귀들과 크고 작은 연꽃들을 머금고 있는 바람을 만날 수
있다. 어느 계절에 찾아도 운치 있는 곳이지만 봄부터 여름까지 유독 빼어난 경치를 자랑
한다.
어둠이 내린 덕진공원은 더욱 낭만적으로 변신한다. 분수 퍼포먼스와 영상에 음악이 더해져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음악분수쇼’가 열린다. 음악이 흐르면 오색조명을 받은 분수가
꽃처럼 피어나는 분수쇼는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해 사랑 고백이나 생일 축하 등을 할 수
있는 ‘이벤트데이’행사도 진행한다.
예전부터 전주사람들은 단오(端午)때가 되면 이곳에 모여들어 창포물에다 머리감기, 그네
뛰기 등 단오풍습을 즐기었는데 지금도 덕진공원에서는 연인(戀人), 가족을 비롯한 시민들이 함께 만나 평안과 건강, 나아가 이번 해에도 풍요롭기를 기원하는 다양한 민속행사 단오축제
마당이 펼쳐진다.
매년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약 50만 명 이상에 이를 정도로 이곳은 전주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