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충청도 홍주는 호서의 거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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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0. 21:52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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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는 호서의 거읍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홍주는 호서의 거읍(巨邑)이다. 그 땅이 기름지고 넓으며 그 백성이 번성하고 많아서 난치(難治)의 고을로 일컬어졌다”라고 기록된 홍주는 1914년 결성과 이름을 합하여 홍성이 되었다. 이곳에 홍주성(洪州城)이 있다.
홍주성
부안 변산의 개암사 일대와 더불어 백제 부흥 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주류성일 것으로 추정되는 홍주성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천둥이 땅에 떨어지는 형세라고 한다.
부안 변산의 개암사 일대와 더불어 백제부흥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주류성일 것으로 추정되는 홍주성(사적 제231호)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천둥이 땅에 떨어지는 형세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지역에선 싸움이 많이 치러졌다. 열여섯 차례에 걸쳐 왜구들이 침입하였고 고려 중기의 문신 최향의 반란, 이몽학의 반란,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수많은 전란을 거치면서 1,772미터였던 홍주성벽은 810미터 정도만 남았으며, 이외에 홍주아문(洪州衙門)과 조양문(朝陽問) 등이 남아 있다.
조양문
조양문은 홍주성의 동문으로, 1894년 10월 28일 이곳에서 박인호가 거느린 동학농민군이 일본군ㆍ관군ㆍ유림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과 큰 싸움을 벌였다. 일본군은 이 전투를 “적의 한 부대가 동문 전방 약 600미터에 있는 숲 속으로 들어가 서서히 전진해왔다. 그리고 민가에 불을 지르고 연기와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을 이용하여 성 밖 100미터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연달아 맹렬히 진격해오므로 응원대를 동문으로 증파하여 응전시켰다. 적은 밤이 되자 야음을 틈타 대포를 동문 앞 40미터 지점으로 끌고 와 동문을 마구 쏘았다”라고 보고하면서, 싸움에 임한 농민군의 수를 3만 명으로 보았다. 30여 시간의 싸움 끝에 농민군은 해미 쪽으로 퇴각하였고, 그들의 시체는 동문의 거리를 메웠다.
우선봉장 이두황은 “군사를 이끌고 동문을 나와 보니 좌우의 민가는 불에 깡그리 타버려 그 참혹함에 볼 수가 없었는데 길 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동학도들이 성을 에워싸고 접전할 적에 그네들이 불을 질러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1백여 보를 걸어 나오니 적의 시체가 도로변에 가로세로로 산이나 숲처럼 쌓여 있었다”라고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에 기록하였다.
농민군은 서산 해안지방으로 흩어져 갔고 박인호는 부하 몇 사람만을 데리고 금오산의 토굴로 들어가 새우젓 장사로 위장한 홍종식을 만나게 된다. 광천읍 응암리에 있는 토굴에서 익힌 광천새우젓은 이처럼 동학농민운동과 관계가 있다. 1949년에 한 농부가 의병 싸움으로 이름난 홍주성 근처 대교리에서 9백여 구에 이르는 유골을 찾아냈는데, 동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유골들이 의병이 아닌 동학농민군의 것이라고 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주는 호서의 거읍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 : 충청도,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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