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레이 모트-케도심
산 자를 위한 추모사(Eulogies for the Living)
장례식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랍비는 고인의 훌륭한 품성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말 정직한 분이셨고, 다정한 남편이자 자상한 아버지셨지요. 너무나 관대하고, 사랑이 넘치며, 친절하셨던 분…”
미밍인은 몸을 기울여 아이 중 한 명에게 속삭였습니다. “저기 가서 관 안을 좀 들여다보렴. 그게 네 아빠인지 확인해 봐.”
세상을 떠난 이들에 대해선 언제나 칭찬할 만한 이야기만 가득한 것 같습니다. 그들의 업적과 선행, 지혜와 품격, 너그러움과 조건 없는 사랑 같은 것들입니다.
하지만 고인 역시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시련을 겪으며 실수도 저질렀을 법한 한 인간, 한 피조물이 아니었습니까? 정말 어제까지만 해도 그가 그렇게 완벽하다고 생각하셨습니까? 그의 실패와 나쁜 습관, 자만심과 욕망은 어찌 된 일입니까? 화를 내던 순간들은 또 어떻습니까?
이 일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묻습니다. 이 사람은 육신의 세상을 떠난 후 천사가 된 것일까요?
우리가 현재 읽고 있는 주간 토라 분량의 순서와 관련해 유명한 농담이 하나 있습니다. 아하레이 모트((אַחֲרֵי מוֹת), “죽음 이후”), 케도심(קְדֹשִׁים, “거룩한 자들”), 그리고 에모르(אֱמֹר, “말하라”)입니다. 이것들을 한 문장으로 읽으면 대략 "죽음 후에, 그가 거룩했다고 말하라"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한밤중에 고인의 영혼이 찾아와 불타는 막대기로 우리를 때릴까 봐 두려워서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변하는 것은 떠난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우리는 사소한 일들에 휩쓸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죽음이 닥치면, 우리는 만화경처럼 변화무쌍한 삶의 큰 그림을 가장 선명하게 들여다볼 기회를 얻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우리는 – 조금은 너무 늦게 – 고인이 살아온 아름다운 삶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소중히 여기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죽어야만 하나요? 설마,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를 잃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남편, 아버지, 형제”라는 말은 반드시 사후에나 붙이는 수식어여야만 할까요, 아니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마음껏 외칠 수 있는 것일까요?
가족이 살아 있을 때 화해합시다. 묘비 앞에서가 아니라요.(not with their tombstone).
영혼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을 용서합시다(Let us forgive people, not spirits).
지금 이 순간, 서로의 좋은 점을 봅시다(Let's see the good in each other now).
By Rabbi Levi Avtzon
▶글 전체 목차는 아래 배너를 클릭하시면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