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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智慧와 明哲 讚揚
1 智慧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明哲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Does not wisdom call? Does not understanding raise her voice?
Numquid non sapientia clamitat, et prudentia dat vocem suam ?
Σὺ τὴν σοφίαν κηρύξεις, ἵνα φρόνησίς σοι ὑπακούσῃ.
2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3 城門 곁과 門 어귀와 여러 出入하는 門에서 불러 이르되
On the heights beside the way, at the crossroads she takes her stand;
beside the gates in front of the town, at the entrance of the portals she cries aloud:
In summis excelsisque verticibus supra viam, in mediis semitis stans,
juxta portas civitatis, in ipsis foribus loquitur, dicens :
ἐπὶ γὰρ τῶν ὑψηλῶν ἄκρων ἐστιν, ἀνὰ μέσον δὲ τῶν τρίβων ἕστηκεν·
παρὰ γὰρ πύλαις δυναστῶν παρεδρεύει, ἐν δὲ εἰσόδοις ὑμνεῖται
4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人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To you, O men, I call, and my cry is to the children of man.
O viri, ad vos clamito, et vox mea ad filios hominum.
Ὑμᾶς, ὦ ἄνθρωποι, παρακαλῶ, καὶ προίεμαι ἐμὴν φωνὴν υἱοῖς ἀνθρώπων.
솔로몬이 말하는 지혜는 솔로몬 자신의 지혜가 아니라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원어에서는 지혜를 여성형으로 표현하지만 이는 그 언어들의 특성 때문에 그런것 뿐이다. 따라서 이 지혜를 비인격적인 무언가로 보기보다는 지혜의 근원이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것이 낫다. 참 지혜이신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최고 최상의 존재이심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낮추셔서 직접 사람들을 부르러 다니신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방방곡곡 돌아다니시면서 사람들에게 지혜의 말씀을 전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주님의 가치를 알지 못한채 살악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사람들이 주님과 그분의 지혜의 가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전재산을 팔아 보화가 감추인 밭을 사고 극히 귀한 진주 하나를 사듯이 주님께로 몰려들었을 것이므로 주님께서는 굳이 그렇게 돌아다니지 않으셔도 되셨을 것이다.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창세 전부터 당신 안에서 누구를 구원하실지 다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만 한명한명 콕찝어서 말씀을 전하시는 것이 아니라, 산 사람이나 죽은 자나 할 것없이 지혜의 말씀을 선포하신다. 주님께서 택함받지 않은 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에게도 말씀을 전하시는 것은 그들을 속이려 하신다거나 당신의 말씀을 그냥 의미없이 버리려 하신다는 것이 아니다. 설령 그들은 창세 전부터 택함받지 못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진정으로 원하시기 때문에 전하시는 것이다. 이는 부패한 사람의 지성으로는 모순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으므로 오로지 성령께서 주시는 믿음으로써만 받아들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 전부터 스스로 사람이셨기 때문에 당신의 지혜를 사람들에게 선포하시는 방식도 거의 대부분 통상적으로 사람의 방식을 취하신다. 즉, 사람이 보고 듣고 가르치고 학습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지혜를 전파하시는데 특별히 사람의 말과 글을 통해서 그리하시며 그 궁극의 결정체는 성경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주님께서는 성경을 기록해주신 것으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교사와 목사 등의 직분인들을 세우셔서 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고 가르치게 해주신다. 이와 동시에 펜, 종이, 활자술, 인쇄술 등의 기록매체의 발전을 통해서 성경을 비롯한 직분인들의 가르침들이 획기적으로 전파되어 누구라도 손쉽게 지헤의 말씀을 접할 수 있게 해주셨다. 오늘날에는 전자기기와 인터넷 매체와 언어번역의 발달로 인해 복음의 전파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영원 전부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선택받은 성도들이나 그렇지 못한 자들이나 가리지 않으시고 복음을 전하시는 이유에는 아무도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노라고 핑계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목적도 있으시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 민족들을 비롯해서 오늘날까지 복음이 전파되지 못한 지역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바울 사도가 교훈한 바와 같이 자연만물과 자기들의 양심에 비추어서 하나님을 더듬어 찾지 않은 그들 자신들의 책임일 뿐이다. 오늘날에는 인터넷 온라인 매체를 통해서 주님의 복음이 더욱 편만하게 전파되고 더욱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이러한 기반 시설이 갖춰진 지역민들은 더욱 더 자기들은 주님의 복음을 받지 못했노라는 변명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5 어리석은 者들아 너희는 明哲할지니라 미련한 者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
O simple ones, learn prudence; O fools, learn sense.
Intelligite, parvuli, astutiam, et insipientes, animadvertite.
νοήσατε, ἄκακοι, πανουργίαν, οἱ δὲ ἀπαίδευτοι, ἔνθεσθε καρδίαν.
6 너희는 들을지어다 내가 가장 善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正直을 내리라
Hear, for I will speak noble things, and from my lips will come what is right,
Audite, quoniam de rebus magnis locutura sum, et aperientur labia mea ut recta prædicent.
εἰσακούσατέ μου· σεμνὰ γὰρ ἐρῶ, καὶ ἀνοίσω ἀπὸ χειλέων ὀρθά.
7 내 입은 眞理를 말하며 내 입술은 惡을 미워하느니라
for my mouth will utter truth; wickedness is an abomination to my lips.
Veritatem meditabitur guttur meum, et labia mea detestabuntur impium.
ὅτι ἀλήθειαν μελετήσει ὁ φάρυγξ μου, ἐβδελυγμένα δὲ ἐναντίον ἐμοῦ χείλη ψευδῆ·
8 내 입의 말은 다 義로운즉 그 가운데에 굽은 것과 悖逆한 것이 없나니
All the words of my mouth are righteous; there is nothing twisted or crooked in them.
Justi sunt omnes sermones mei : non est in eis pravum quid, neque perversum ;
μετὰ δικαιοσύνης πάντα τὰ ῥήματα τοῦ στόματός μου, οὐδὲν ἐν αὐτοῖς σκολιὸν οὐδὲ στραγγαλῶδες·
9 이는 다 聰明 있는 이가 밝히 아는 바요 知識 얻은 이가 正直하게 여기는 바니라
They are all straight to him who understands, and right to those who find knowledge.
recti sunt intelligentibus, et æqui invenientibus scientiam.
πάντα ἐνώπια τοῖς συνιοῦσιν, καὶ ὀρθὰ τοῖς εὑρίσκουσι γνῶσιν.
주님의 지혜와 명철과 총명과 지식은 선과 정직과 진리와 의로운 것이다.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얻는데 약삭빠른 자들은 지혜롭다 하나 사실은 그리스도 여호와 앞에서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땅에서의 삶에서 누릴 한시적인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서 영원무궁히 이어지는 참된 복락을 내버리고 영원한 형벌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주님의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며 행하는 성도들은 비록 이 땅에서는 자신들의 복음대로 행하느라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므로 어리석고 미련하다 비웃음과 조롱을 당하게 마련이지만 그런 우리들이야말로 주님 보시기에 참으로 지헤롭고 현명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님의 성도들은 영원무궁한 복락된 생명을 바라보고 이 땅에서의 한시적인 손해와 고난과 어려움들을 넉넉히 견뎌내며 감수하기 때문이다. 가장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은 교회와 목사와 장로집사와 성도를 자처하면서도 정작 복음을 저버리고 세속적인 것만 추구하며 살다가 죽은 자들이다.
10 너희는 銀을 받지 말고 나의 訓戒를 받으며 精金보다 知識을 얻으라
Take my instruction instead of silver, and knowledge rather than choice gold,
Accipite disciplinam meam, et non pecuniam ; doctrinam magis quam aurum eligite :
λάβετε παιδείαν καὶ μὴ ἀργύριον, καὶ γνῶσιν ὑπὲρ χρυσίον δεδοκιμασμένον·
11 大抵 智慧는 眞珠보다 나으므로 願하는 모든 것을 이에 比較할 수 없음이니라
for wisdom is better than jewels, and all that you may desire cannot compare with her.
melior est enim sapientia cunctis pretiosissimis, et omne desiderabile ei non potest comparari.
κρείσσων γὰρ σοφία λίθων πολυτελῶν, πᾶν δὲ τίμιον οὐκ ἄξιον αὐτῆς ἐστιν.
금은보화는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얻기를 탐하는 물질이다. 그러나 주님의 훈계와 지식과 지혜와 명철 등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를 가지게 하는 것도 아니며 다독이는 위로보다는 다그치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라 사람의 성정에 기본적으로 거슬리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당신의 지식과 지혜와 훈계와 명철 등을 이 땅의 금은보화를 얻으려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추구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소멸되는 것보다 영원한 것을, 이 땅의 세속적인 것보다 하늘의 신령한 것을 바라보고 추구하라는 뜻이며, 이는 사람이 스스로 그렇게 할 수는 없고 오로지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주님의 이 말씀은 누구에게나 전파되는 것이어도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들의 영에 성령을 내주하시게 하심으로써 그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솔로몬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영원 전부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셨을 때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소작농과 지극히 갚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의 비유를 가르치셨다.
12 나 智慧는 明哲로 住所를 삼으며 知識과 謹愼을 찾아 얻나니
“I, wisdom, dwell with prudence, and I find knowledge and discretion.
Ego sapientia, habito in consilio, et eruditis intersum cogitationibus.
ἐγὼ ἡ σοφία κατεσκήνωσα βουλήν, καὶ γνῶσιν καὶ ἔννοιαν ἐγὼ ἐπεκαλεσάμην· κρείσσων γὰρ σοφία λίθων πολυτελῶν.
통상적으로 지혜는 문제해결을 위한 통찰력이라 할 수 있다. 지혜가 명철로 주소를 삼는다는 것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성조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다방면으로 신중하게 판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신중한 명철함으로써 해당 문제에 대한 제반 지식을 얻게 되고 차후에 그 문제가 재발되지 않도록 사전에 미리 조심하며 근신하는 것이 지혜인 것이다. 이 땅의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지혜를 발휘해서 각자의 문명을 발전시켜 온 것은 사실 주님의 지혜에 기인한 방식이다. 즉, 주님의 지혜의 방식이 먼저이고 이 땅의 사람들이 일군 지혜의 방식이 그로부터 파생된 나중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들의 지혜가 먼저이고 유일하고 최고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당신의 지헤를 가지라는 권면을 당신께로부터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세속 지혜의 방식을 통해 주님의 지혜를 바라보도록 가르치시는 것이다. 주님의 지혜를 추구하는 성도들은 성경을 알아가는데 성조금하지 않고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면서 신중하게 곱씹는다. 성경에서는 베뢰아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를 신사적이라 말하고 있다. 그렇게 성경이 과연 그러하다고 판단되면 이제는 이 성경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나에게 유익이 되는지를 신중하게 점검하게 되는데, 성도들은 내주하시는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인해서 성경말씀을 따라 살면서 겪게 되는 고난과 역경에 비해서 주님 나라에서 받게 될 영생과 상급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기꺼이 좁고 협착한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길을 가겠다는 결심조차도 경솔해서는 안되는데, 중도포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집을 지을 비용을 제대로 계산하지 않아서 짓다가 중단한 것과, 자국의 군사력과 국방비를 계산하지 않고 적군과 섣불리 전쟁하는 어리석은 군주와도 같은 것이다. 대표적으로 일시적인 신앙감정에 휩싸여 성조급하게 호기롭게 목사가 되었다가 재정과 생계의 압박으로 인해 이런저런 같잖은 핑계와 이유를 대면서 목회와 무관한 생계활동을 병행하는 자들이 어리석은 집주인과 군주와 같은 것이다. 성경을 아는 지식과 해석에는 누구보다도 탁월하면서도 아는대로 행하려 하지 않는 것은 결국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므로 그는 이 땅의 세속적인 유익을 위해 영원한 생명과 상급을 저버린 미련한 소탐대실자에 불과하다.
성도의 지혜활동은 처음부터 확연하게 완성된 것이 아니다. 성령의 지혜가 발현되는 시작은 성도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겨자씨만큼 미미하지만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으로 인해서 성도의 영혼이 겨자씨만한 지혜로부터 신중함으로 성경지식과 순종의 선행을 얻어나가게 되며,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를 이루고 열매를 맺듯이 성도의 신앙 지혜도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지속적으로 장성숙하게 되어 누가 보더라도 확연하고 명백한 신앙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성도의 신앙 지혜는 처음에는 너무나 유약하여 부드러운 젖과 같은 복음만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나중으로 갈수록 점점 단단한 복음도 능히 소화시킬 수 있게 된다. 처음에는 쉽고 즐거운 신앙활동만 가능했으나 갈수록 어렵고 힘든 신앙활동도 기꺼이 자원하는 심령으로 감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3 여호와를 敬畏하는 것은 惡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驕慢과 倨慢과 惡한 行實과 悖逆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The fear of JEHOVAH is hatred of evil. Pride and arrogance and the way of evil and perverted speech I hate.
Timor JEHOVAH odit malum, arrogantiam et superbiam, et viam pravam, et os bilingue detestor.
φόβος ΙΕΗΩΟΥΑ μισεῖ ἀδικίαν, ὕβριν τε καὶ ὑπερηφανίαν καὶ ὁδοὺς πονηρῶν· μεμίσηκα δὲ ἐγὼ διεστραμμένας ὁδοὺς κακῶν.
14 내게는 計略과 참 知識이 있으며 나는 明哲이라 내게 能力이 있으므로
15 나로 말미암아 王들이 治理하며 方伯들이 公義를 세우며
16 나로 말미암아 宰相과 尊貴한 者 곧 모든 義로운 裁判官들이 다스리느니라
I have counsel and sound wisdom; I have insight; I have strength.
By me kings reign, and rulers decree what is just;
by me princes rule, and nobles, all who govern justly.
Meum est consilium et æquitas ; mea est prudentia, mea est fortitudo.
Per me reges regnant, et legum conditores justa decernunt ;
per me principes imperant, et potentes decernunt justitiam.
ἐμὴ βουλὴ καὶ ἀσφάλεια, ἐμὴ φρόνησις, ἐμὴ δὲ ἰσχύς·
δι᾽ ἐμοῦ βασιλεῖς βασιλεύουσιν, καὶ οἱ δυνάσται γράφουσιν δικαιοσύνην·
δι᾽ ἐμοῦ μεγιστᾶνες μεγαλύνονται, καὶ τύραννοι δι᾽ ἐμοῦ κρατοῦσι γῆς.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리스도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나라와 족속들도 약간의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는 법률과 제도와 문화를 이루며 통치자는 다스리고 국민들은 다스림을 받았는데, 이는 그들이 비록 범죄로 말미암아 심령이 타락부패 하였어도 그들의 심령에 약간의 양심의 법이 남아있어 그리스도 여호와의 법을 따르기 때문인 것이다. 남들보다 자기 안의 양심의 법을 억누르는 통치자는 그만큼 포학하게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고, 남들보다 양심의 법을 추구하는 통치자는 그만큼 올바른 덕성으로 백성들을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이 땅에서 그리스도 여호와의 법을 따라 올바르게 통치하며 태평성대를 이룬 군주라 하더라도 그리스도 여호와께는 아무런 선행이 되지 못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 여호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여호와께서 이렇게 당신을 알지도 못하는 나라와 족속들에게 몇몇 선한 통치를 허락하신 궁극적인 이유는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을 보존하시기 위함이시다. 그래서 복음이 퍼지기 전에 복음과 상관없는 나라와 민족들의 흥왕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교회와 성도들의 보존을 위한 큰 그림의 배경으로 흥망성쇠를 반복하여 온 것이다. 따라서 양심에 남아있는 주님의 도덕법으로 통치되는 기간은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이 땅의 성도들을 부활승천 시키시기까지로 한정될 것이다. 양심의 도덕성에 기반한 통치는 주님 재림 이후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재림시까지 서서히 줄어들게 되며 용이 세운 바다와 땅의 짐승이 하나님의 두 증인을 대적하여 싸우고 죽이는 때에 본격적으로 급감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승천 이후에는 이 땅에 더 이상 주님의 교회도 성도도 남아있지 않게 되므로 주님께서도 굳이 이 땅의 악인들에게 양심의 도덕법을 유지하실 이유가 없으시다. 때문에 용의 짐승은 교회 말살을 위해 자기의 등에 태운 음녀 바벨론을 끌어내려 살을 찢어먹고 불태워 버리게 되고, 군주들은 자기들의 나라와 국민들을 돌보지 않고 개구리 같이 더러운 세 영들의 꾐에 빠져 아마겟돈으로 모여 하늘의 군대와의 전쟁을 준비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자기 군주들에게 버림받은 나라와 국민들은 무정부상태의 무법지대와 약육강식의 아비규환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 땅의 나라와 국가와 정부와 통치자들이 비록 교회와 성도들의 보존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간접적인 방식이다. 즉 정부와 통치자는 자기들의 방식으로 통치하지만 그 안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은 간접적으로 보존의 유익을 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와 신앙인들은 이 땅의 주인이나 통치자가 되려 해서는 안되고 마치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이방인과 나그네 또는 집에 세들어 사는 세입자와 같은 겸손한 자세를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 어떤 혈기넘치는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정부와 기독교인 통치자를 세우려고 혈안이 되기도 하는데 이는 예수님 시대의 열심당원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 이스라엘 조차도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만 잠깐 흥왕했을 뿐 나머지 기간은 그다지 선하지 않았고, 복음이 전파되어 기독교 국가를 표방하는 나라들도 하나같이 패역할 뿐이었다. 심지어 신앙개혁의 꽃을 찬란하게 피웠던 나라들에서조차도 참된 신앙과 복음은 유지되기 어려웠다. 따라서 교회는 소속된 나라와 정부의 통상적인 통치에 순복하되 정부의 권세에 대해서는 일절 개입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저지르는 가장 큰 죄악은 복음을 빌미로 정치이념을 우상숭배 하는 것이다. 기독교 보수주의라는 것은 성경의 원리를 가급적 변질훼손없이 보존하고자 하는 것인데도 이를 정치적 보수주의와 결합시켜서 이에 들어맞는 정부와 국가 지도자를 세우려고 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여기에 자기들의 정치이념에 맞지 않는 정부와 국가 지도자를 향해서는 적법한 통치도 거역하고 온갖 저주와 조롱과 비방과 악담을 스스럼없이 내지르는데 이는 그 정부와 통치자를 세우신 주님을 향한 패악질일 뿐이다. 설령 누가봐도 악하고 무능한 정부와 통치자가 들어선다 하더라도 교회와 성도들은 절대로 그들을 저주 비방 악담 조롱해서는 안되고 그 나라에서 제대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않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주님의 징벌로 여겨 참회함으로 잠잠히 순복하며 도리어 그들을 위해 축복할 수 있어야 한다.
통치자와 정부 공직자와 재판관들과 기업인 등 이 땅에서 남들에 비해 특별한 부귀영화와 존귀를 가진 자들은 그들이 설령 주님을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양심의 법에 의거해 주님의 법을 따를 의무와 책임이 그만큼 더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이 자기들이 받은 것으로 선하게 다스리지 않고 베풀지 않고 재판하지 않는다면 설령 이 땅에서는 별다른 징벌없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는 있다 하더라도 죽음 이후와 최종 심판 이후에는 주님의 엄혹하고 영원한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7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懇切히 찾는 이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I love those who love me, and those who seek me diligently find me.
Ego diligentes me diligo, et qui mane vigilant ad me, invenient me.
ἐγὼ τοὺς ἐμὲ φιλοῦντας ἀγαπῶ, οἱ δὲ ἐμὲ ζητοῦντες εὑρήσουσιν.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간절히 찾는 것은 사람의 본성적인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이는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창세 전에 당신 자신 안에서 구원하시로 선택하신 성도들에게만 보내신 당신의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갖게 되는 사랑과 간절함이다. 또한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은 대가라는 의미가 아니다. 도리어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만나시려고 우리에게 그러한 마음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우리 자신의 의지로 주님을 사랑하고 간절히 찾는 것처럼 여기셔서 그에 따른 당신의 상급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반면에 성도로 택함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간절히 찾는 마음도 주시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의 멸망의 책임을 주님께 전가할 수는 없다. 사람의 지성으로는 유기자가 멸망하는 책임을 주님께로 돌릴 수 밖에 없지만 성경에 따른 주님의 원리로는 그 책임이 오롯이 유기자 자신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셔도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육적으로 그분을 뵐 방법은 없다. 때문에 보이지 않으시는 그분을 사랑하고 간절히 찾는 방법은 오로지 사람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과 이 땅에 세워진 교회를 통한 신앙활동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가 주님을 사랑하고 찾는 것은 세속적인 사랑처럼 감정에 기반하기보다는 다분히 지성활동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라 하면서도 복음 사역을 소홀히 한다면 거짓 교회일 가능성이 크고, 신앙인이라 하면서도 성경을 읽고 배우는 것을 소홀히 한다면 거짓 신앙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어느 한 순간의 상태가 아니라 교회가 세워진 때부터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의 경향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 감성의 작용이기도 하므로, 그저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희열과 만족을 느끼며 머물러서는 안되고 반드시 배운대로 실천행 해야 한다.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데는 분명 수고가 있지만 이를 실천행하는데는 더 많은 수고가 요구된다. 우리가 성경을 백 개 배웠다면 그 중에서 단지 열 개만 깨달을 수 있고 그 중에서 단지 한 개 정도만 간신히 실천행할 수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실천행의 의무는 성경 지식에 비례하는 것이어서, 성경의 크고 비밀한 것을 많이 알고 깨달은 성도일수록 남들보다 더 많은 실천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간절히 찾는다는 것은 이런 실천행까지 아우르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자기의 신앙에 자부심을 가질수록 주님을 향한 사랑과 간절함에서 멀어지게 되고 자신의 신앙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행여나 넘어지지는 않을까 조심할수록 주님을 향한 사랑과 간절함이 커지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신체 건강하고 재물에 부족한 것이 없을 때보다 몸이 연약해지고 재물이 부족해서 점점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적어질 때 주님을 향한 사랑과 간절함이 커지게 된다. 그래서 질고와 노화와 가난은 세속자들에게는 피하고 싶은 재난이지만 성도들에게는 신앙을 향상시키는 방편이 되므로 바울 사도는 육신이 후패해질수록 영혼은 나날이 새로워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지금 건강하고 부유한 때에 언제 닥칠지 모르는 질고와 노화와 가난의 때에도 자신의 신앙이 더욱 장성숙 할 수 있기를 미리미리 기도로 준비하여야 한다.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가시적으로 만나주시는 것은 요한 사도를 밧모섬에서 만나주신 것으로 종결되었으므로 성도들은 그런 방식으로 주님을 뵈려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주님께서 성도들을 만나주시는 방식은 우리에게 내주하게 하신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감동으로 말미암은 확신을 통해서이다. 우리의 신앙이 나날이 장성숙해가고 선한 열매를 맺는 것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앙으로 말미암은 고난과 역경과 손해를 기꺼이 감내하는 것에서 주님의 동행하심을 알게 된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는 상황속에서도 우리의 신앙이 보존되는 것에서 주님의 동행하심을 알게 된다. 우리의 성품이 신앙으로 인해 점점 더 온유순 겸손해지는 모습에서 주님의 동행하심을 알게 된다.
18 富貴가 내게 있고 長久한 財物과 公義도 그러하니라
Riches and honor are with me, enduring wealth and righteousness.
Mecum sunt divitiæ et gloria, opes superbæ et justitia.
πλοῦτος καὶ δόξα ἐμοὶ ὑπάρχει, καὶ κτῆσις πολλῶν καὶ δικαιοσύνη.
통상적으로 이 세상에서는 정직한 교회와 성도들은 부귀영화를 누리기가 어렵고 불의하고 약삭빠른 세속자들이 부귀영화를 독점하기 마련인데 그것은 사람이 그리스도 하나님께 범죄함으로써 부패타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불의한 세속자들이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자자손손 넘겨준다 한들 자기의 생명이 유지되는 동안에만 가질 수 있을 뿐이다. 반면에 정직한 교회와 성도들이 아무리 이 땅에서 손해를 당하고 빈천해진다 하더라도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만 겪게 되는 고난일 뿐이다. 불의한 세속자들에게는 그리스도 여호와의 공의로 말미암아 영원한 빈천함과 고난과 고통만이 있을 것이나, 정직한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주님의 공의로 말미암아 영원한 부귀영화와 기쁨만이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교회와 성도들 모두가 이 땅에서 빈천한 것은 아니고 몇몇은 부귀영화를 누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하게 부여하신 것이기 때문에 부유한 교회와 성도들은 다른 교회와 성도들에 비해서 이 땅에서 더욱 더 물질적인 선행을 수행해야 하는 책임무를 가진 것이다.
19 내 열매는 金이나 精金보다 나으며 내 所得은 純銀보다 나으니라
My fruit is better than gold, even fine gold, and my yield than choice silver.
Melior est enim fructus meus auro et lapide pretioso, et genimina me argento electo.
βέλτιον ἐμὲ καρπίζεσθαι ὑπὲρ χρυσίον καὶ λίθον τίμιον, τὰ δὲ ἐμὰ γενήματα κρείσσω ἀργυρίου ἐκλεκτοῦ.
금은보화는 가시적으로 직접적인 효용가치가 있는 것이나 주님과 그분의 지혜는 보이지도 않고 직접적인 효과도 없으며 매우 긴 시간이 지나야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인데, 이는 사람이 스스로 그 가치를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성령을 받은 성도들만이 가능한 것이다. 또한 주님과 그분의 지혜가 세상 무엇보다도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깨달음은 한순간에 완전히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생물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듯이 점진적으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늘의 신령한 것보다 이 땅의 세속적인 것들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그의 신앙의 진정성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어느정도 오랜기간 교회 구성원으로 몸담았다가 주님과 복음을 완전하게 저버리는 배교자들이 두 번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한 번 하늘의 신령한 것의 유익을 맛보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땅의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기로 결심함으로써 더이상 신앙으로 돌이킬 마음 자체를 품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가난한 목사가 생계활동을 병행하는 것이나 게으른 교인들이 무교회주의에 빠지는 것은 주님의 열매와 소득보다 금은보화를 선택하여 점진적으로 배교의 길로 가는 것이다.
이 땅의 금은보화 대신 주님의 열매와 소득을 얻는 것은 그저 여러 개의 물건 중에서 아무거나 하나를 고르는 식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도리어 주님의 열매와 소득을 얻는 것은 좁고 협착한 길을 복음의 멍에를 지고 평생동안 가야하는 힘든 과정이다. 게다가 이 길은 금은보화를 얻는 넓은 길과 분리단절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닥에 그어놓은 금 정도로만 구분될 뿐이어서 손쉽게 넘나들 수 있는 그런 길이어서 매순간 수시로 유혹을 받게 마련이다. 더욱이 주님의 좁은 길로 가는 도중에 힘들다고 복음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바닥의 선을 넘어 넓고 평탄한 금은보화의 길에 한 번 들어서게 되면 두 번 다시 좁고 협착한 주님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게 된다. 강제적으로 막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다시 돌이키고자 하는 마음 자체를 품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20 나는 正義로운 길로 行하며 公義로운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21 이는 나를 사랑하는 이가 財物을 얻어서 그 庫間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
I walk in the way of righteousness, in the paths of justice,
granting an inheritance to those who love me, and filling their treasuries.
In viis justitiæ ambulo, in medio semitarum judicii,
ut ditem diligentes me, et thesauros eorum repleam.
ἐν ὁδοῖς δικαιοσύνης περιπατῶ, καὶ ἀνὰ μέσον τρίβων δικαιώματος ἀναστρέφομαι,
ἵνα μερίσω τοῖς ἐμὲ ἀγαπῶσιν ὕπαρξιν, καὶ τοὺς θησαυροὺς αὐτῶν ἐμπλήσω ἀγαθῶν. [1] ἐὰν ἀναγγείλω ὑμῖν τὰ καθ᾽ ἡμέραν γινόμενα, μνημονεύσω τὰ ἐξ αἰῶνος ἀριθμῆσαι.
주님의 공정의한 길로 가고 행하는 것은 이 땅에서는 자족할 수 있는 만큼의 일용할 양식과 재물을 얻게 되는 것이고 하늘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풍성한 상급을 얻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재물이 주어지면 거의 대부분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한 허망한 죄악에 쓰일 뿐이나, 하늘의 신령한 상급은 아무리 풍성하게 주어지더라도 오로지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하게 쓰이게 될 뿐이다. 이 땅에서 교회와 성도들이 일용할 것들로써 주님의 공정의한 길로 가고 행하는 것은 하늘에서 그리 할 것을 미리 훈련습 하는 것이다.
22 여호와께서 그 造化의 始作 곧 太初에 일하시기 前에 나를 가지셨으며
JEHOVAH possessed me at the beginning of his work, the first of his acts of old.
JEHOVAH possedit me in initio viarum suarum antequam quidquam faceret a principio.
ΙΕΗΩΟΥΑ ἔκτισέν με ἀρχὴν ὁδῶν αὐτοῦ εἰς ἔργα αὐτοῦ,
여호와께서 태초 전에 가지신 분은 솔로몬이 아니라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킨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그분의 인성과 연합하신 신성이신 성자 하나님도 포함된다. 그럼에도 그분의 인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전부터 창세 전부터 영원 전부터 사람으로 존재해오셨다는 진리가 오랜동안 가려지고 묻혀져왔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신 여호와와 독자적인 존재로 표현된 것으로 봤을 때 이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즉,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께서는 창세 전부터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독생하신 아들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시공간 안에서 창조되신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영원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존재하신 분이시다.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과는 독생자로서, 성자 하나님과는 실체적으로 연합하심으로써, 성령 하나님과는 인성의 영에 완전충만히 내주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세 위격과 일체적으로 연합하신 분이시다.
23 萬歲 前부터, 太初부터, 땅이 생기기 前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Ages ago I was set up, at the first, before the beginning of the earth.
Ab æterno ordinata sum, et ex antiquis antequam terra fieret.
πρὸ τοῦ αἰῶνος ἐθεμελίωσέν με ἐν ἀρχῇ, πρὸ τοῦ τὴν γῆν ποιῆσαι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前에 내가 이미 났으며
When there were no depths I was brought forth, when there were no springs abounding with water.
Nondum erant abyssi, et ego jam concepta eram, necdum fontes aquarum eruperant ;
καὶ πρὸ τοῦ τὰς ἀβύσσους ποιῆσαι, πρὸ τοῦ προελθεῖν τὰς πηγὰς τῶν ὑδάτων,
25 山이 세워지기 前에, 언덕이 생기기 前에 내가 이미 났으니
Before the mountains had been shaped, before the hills, I was brought forth,
necdum montes gravi mole constiterant : ante colles ego parturiebar.
πρὸ τοῦ ὄρη ἑδρασθῆναι, πρὸ δὲ πάντων βουνῶν γεννᾷ με.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世上 塵土의 根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before he had made the earth with its fields, or the first of the dust of the world.
Adhuc terram non fecerat, et flumina, et cardines orbis terræ.
ΙΕΗΩΟΥΑ ἐποίησεν χώρας καὶ ἀοικήτους καὶ ἄκρα οἰκούμενα τῆς ὑπ᾽ οὐρανῶν.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穹蒼을 海面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When he established the heavens, I was there; when he drew a circle on the face of the deep,
Quando præparabat cælos, aderam ; quando certa lege et gyro vallabat abyssos ;
ἡνίκα ἡτοίμαζεν τὸν οὐρανόν, συνπαρήμην αὐτῷ, καὶ ὅτε ἀφώριζεν τὸν ἑαυτοῦ θρόνον ἐπ᾽ ἀνέμων·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堅固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when he made firm the skies above, when he established the fountains of the deep,
quando æthera firmabat sursum, et librabat fontes aquarum ;
καὶ ὡς ἰσχυρὰ ἐποίει τὰ ἄνω νέφη, καὶ ὡς ἀσφαλεῖς ἐτίθει πηγὰς τῆς ὑπ᾽ οὐρανόν,
29 바다의 限界를 定하여 물이 命令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基礎를 定하실 때에
when he assigned to the sea its limit, so that the waters might not transgress his command, when he marked out the foundations of the earth,
quando circumdabat mari terminum suum, et legem ponebat aquis, ne transirent fines suos : quando appendebat fundamenta terræ ;
καὶ ὡς ἰσχυρὰ ἐποίει τὰ θεμέλια τῆς γῆς,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創造主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恒常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then I was beside him, like a master workman, and I was daily his delight, rejoicing before him always,
cum eo eram, cuncta componens. Et delectabar per singulos dies, ludens coram eo omni tempore,
ἤμην παρ᾽ αὐτῷ ἁρμόζουσα· ἐγὼ ἤμην ᾗ προσέχαιρεν, καθ᾽ ἡμέραν δὲ εὐφραινόμην ἐν προσώπῳ αὐτοῦ ἐν παντὶ καιρῷ,
31 사람이 居處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人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rejoicing in his inhabited world and delighting in the children of man.
ludens in orbe terrarum ; et deliciæ meæ esse cum filiis hominum.
ὅτε ἐνευφραίνετο τὴν οἰκουμένην συντελέσας, καὶ εὐφραίνετο ἐν υἱοῖς ἀνθρώπων.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세 전부터 만물의 창조주이자 소유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세우심을 받으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육일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리스도의 인성은 방관인으로서가 아니라 실제 제작인으로서 직접 참여하셨다. 그것도 수동적으로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을 따르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세 위격과의 신비한 연합에 의한 인성의 판단과 의지와 능력으로써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보이시는 형상이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당신 자신의 인성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고 그들과 더불어 지내시려고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특별히 에덴 동산을 구별해 놓으셨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동산에서 사람이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지냈었던 것이다. 그들이 범죄하여 숨어있을 때 느꼈었던 주님의 인기척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아니라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기척이었다.
32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道를 지키는 이가 福이 있느니라
And now, O sons, listen to me: blessed are those who keep my ways.
Nunc ergo, filii, audite me : beati qui custodiunt vias meas.
νῦν οὖν, υἱέ, ἄκουέ μου.
33 訓戒를 들어서 智慧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
Hear instruction and be wise, and do not neglect it.
Audite disciplinam, et estote sapientes, et nolite abjicere eam.
34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門 곁에서 기다리며 門설柱 옆에서 기다리는 이는 福이 있나니
Blessed is the one who listens to me, watching daily at my gates, waiting beside my doors.
Beatus homo qui audit me, et qui vigilat ad fores meas quotidie, et observat ad postes ostii mei.
μακάριος ἀνὴρ ὃς εἰσακούσεταί μου, καὶ ἄνθρωπος ὃς τὰς ἐμὰς ὁδοὺς φυλάξει, ἀγρυπνῶν ἐπ᾽ ἐμαῖς θύραις καθ᾽ ἡμέραν, τηρῶν σταθμοὺς ἐμῶν εἰσόδων.
35 大抵 나를 얻는 이는 生命을 얻고 여호와께 恩寵을 얻을 것임이니라
For whoever finds me finds life and obtains favor from JEHOVAH,
Qui me invenerit, inveniet vitam, et hauriet salutem a JEHOVAH.
αἱ γὰρ ἔξοδοί μου ἔξοδοι ζωῆς, καὶ ἑτοιμάζεται θέλησις παρὰ ΙΕΗΩΟΥΑ.
36 그러나 나를 잃는 者는 自己의 靈魂을 害하는 者라 나를 미워하는 者는 死亡을 사랑하느니라
but he who fails to find me injures himself; all who hate me love death.”
Qui autem in me peccaverit, lædet animam suam ; omnes qui me oderunt diligunt mortem.
οἱ δὲ εἰς ἐμὲ ἁμαρτάνοντες ἀσεβοῦσιν τὰς ἑαυτῶν ψυχάς, καὶ οἱ μισοῦντές με ἀγαπῶσιν θάνατον.
그리스도 여호와께서는 창세 전에 당신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성도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시지만 그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있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적극적으로 주님과 그분의 도를 따르도록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방식으로 이끄신다. 즉 외적으로는 여러 방면으로 우리에게 훈계하시고 내적으로는 우리의 영에 내주시키신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통해서 우리가 의지적으로 그 훈계를 기꺼이 따르고 순종하도록 하신다.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택함받은 성도들은 비록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어렵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순종하고자 하게 되나, 택함받지 않은 교회의 위선자들은 이런저런 자기합리화와 핑계를 대며 따르려 하지 않으며 이것이 바로 주님을 미워하고 자기의 영혼을 해하며 사망을 사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