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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잉카 제국(Inca Empire)
잉카 제국, 혹은 타완틴수유는 1438년부터 1533년까지 약 100년 간 남아메리카 지방을 다스린 제국이다.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이전의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대제국으로 군림하면서 남미 대륙 태평양 연안 대부분을 다스렸다. 현재의 페루, 에콰도르 서부, 볼리비아 남서부, 칠레, 아르헨티나 북서부, 콜롬비아 남서부 등 총 6개국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도 했다.
잉카족은 12세기 현재의 쿠스코 근방에 거주하던 부족이었다. 전설적인 지도자인 망코 카팍의 시대에 잉카 제국의 전신인 쿠스코 왕국이 세워졌으며, 정복군주이자 초대 황제인 파차쿠티-쿠시 유판키의 재위기에 인근의 창카족을 정벌하고 페루 지역 대부분을 빠르게 먹어치웠다. 쿠스코 왕국은 파차쿠티의 시대에 영토를 4방위로 나누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등 소규모 부족국가에서 본격적인 제국으로 탈바꿈했다. 파차쿠티가 1471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투팍 잉카 유판키가 그의 뒤를 이어 치모르 왕국을 정복하고 손자인 우아이나 카팍이 에콰도르 남부까지 진출하면서 잉카 제국의 강역을 최대로 넓혔다. 잉카 제국은 북쪽 뿐만 아니라 남쪽과 동쪽으로도 확장 사업을 펼쳤으나, 남쪽에서는 마푸체족의 극렬한 저항으로 더이상 영토를 넓히는 데에 실패했고 동쪽에서는 아마조니아의 원주민들의 게릴라전에 휘말려 포기했다.
강대했던 잉카 제국도 우아이나 카팍 황제가 천연두로 사망한 이후 형제들끼리 내전이 벌어지며 흔들리기 시작한다. 황제의 두 아들인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 사이에서 제위계승전쟁이 일어났고, 제국은 두쪽으로 갈라져 분열되었다.
그 상태에서 결정적으로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이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건너왔고, 168명의 스페인군이 옮겨온 전염균들에 면역이 없었던 잉카인들이 떼로 죽어나가면서 안그래도 약해진 잉카 제국은 더더욱 세력이 줄어들었다. 우아스카르를 내전에서 꺾고 황제에 오른 아타우알파는 잉카를 정복할 기회만을 노리던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계략에 휘말려 포로로 잡혔고, 몸값으로 방 하나를 2번 채울 정도로 많은 양의 황금을 바쳤으나 결국 풀려나지 못하고 사망했다. 아타우알파 황제가 교수형 당해 죽은 이후, 피사로는 후임으로 망코 잉카 유판키를 새로운 꼭두각시 황제로 추대했고, 허수아비 제국을 부여잡은 채로 남미의 재물을 약탈하고 본격적인 식민지 작업에 열을 올렸다. 망코 잉카 유판키는 처음에는 스페인인들에게 협력하는 체 하다가 결국 빌카밤바로 도망가 신잉카국을 세우고 스페인에 대한 저항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 저항운동마저 최후의 사파 잉카인 투팍 아마루가 사로잡혀 처형당하면서 끝났고, 이후 남아메리카 지방은 스페인 제국의 혹독한 통치 하에서 신음하게 된다.
현대에는 마추픽추 등 험한 산꼭대기에 거대한 도시들을 세운 문명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보통 황금과 보물이 넘쳐났던 신비한 고대 문명 정도의 인식을 가지고 있다. 같은 아메리카 대륙의 아즈텍 제국이나 마야 문명과도 자주 혼동되는 편인데, 잉카 제국은 아즈텍 제국이나 마야와는 달리 거대한 피라미드들을 세우지 않았으며 정글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건조한 산맥 지대가 주 터전이었다. 보통 미디어물에서 황금으로 가득한 남미풍의 제국이라고 하면 열 중 아홉이 이 잉카 제국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잉카의 신왕(神王) 제도와 막대한 부를, 아즈텍의 호전성과 인신공양을, 마야인들의 신비스러운 분위기와 피라미드 등을 모두 모아 만들어진 가상의 문명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더더욱 잉카와 아즈텍, 마야를 헷갈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잉카 제국은 타 남미 왕국들처럼 공식적인 국기가 없었다. 심지어는 독자적인 문자조차 갖추고 있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제국을 상징하는 문장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었기에, 잉카인들은 자신들을 대표하는 문장으로 황제의 제관인 '마스카파이차'를 사용했다. 마스카파이차는 쿠스코의 2대 국왕 신치 로카가 고안해낸 독특하게 생긴 왕관으로, 속이 빈 황금 원통에 붉은색 털실을 꿰어 이를 이마 앞쪽으로 달고다니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위에 카라카라 새의 깃털을 두세개 쯤 꽃아 장식했다고 한다. 이 왕관은 절대적인 신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기물이었고, 오직 황제 즉 사파 잉카만이 쓰고 다닐 수 있는 상징물이었다. 때문에 즉위할 때에 잉카의 대사제에게 직접 건네받았고, 이를 건네받지 못한 황제는 정식으로 황제로 인정받지 못했다.
가끔씩 '잉카 제국의 국기'라면서 알록달록한 무지개색 국기를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게이들을 상징하는 프라이드 플래그의 모습과도 굉장히 흡사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경우가 많은데, 결론부터 말하면 그 깃발은 잉카 제국의 깃발이 아니다. 해당 무지개 깃발은 잉카 제국의 깃발이 아니라 현대 쿠스코의 시 깃발이고, 1973년에 처음 등장한 깃발이다. 다만 잉카의 후예들과 원주민들이 각종 축제나 행사에 이 깃발을 사용하면서 마치 잉카의 깃발인 것처럼 굳어진 것이고, 실제로 페루 의회에서도 이 깃발이 잉카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인정한 바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잉카 제국은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이었다. 현재의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 등 6개국에 걸친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는 대제국이었으며, 남아메리카 대륙의 태평양 연안 대부분을 지배했다. 당시 잉카 제국 동쪽으로는 빽빽한 산림이 우거진 세계 최대의 열대우림인 아마존 우림이 버티고 있고 남쪽 지방은 추운 아한대 기후로 사람이 많이 거주하기 어렵고 북쪽으로는 거의 콜롬비아까지 진출한 것을 감안해보면 당시 남미 대륙에서 인간이 대규모로 거주하고 있는 지방 대부분을 통치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때문에 유럽인들이 오기 전까지 잉카 제국은 원주민들이 세운 아메리카 대륙 역사상 최강의 제국이었고, 당시 유럽인들을 제외하면 잉카 제국에 단독으로 맞서 이길 수 있을만한 세력은 아메리카에 존재하지 않았다.
콜럼버스 이전 아메리카에서 잉카와 함께 양대산맥으로 꼽히는 아즈텍 제국 역시 잉카 제국과의 국력을 비교해보면 차이가 확연했다. 일단 영토만 보아도 잉카 제국이 아즈텍 제국보다 9~10배 가량 더 거대했고 인구 수로 따져도 아즈텍이 6백만 명이 채 되지 못했던 것에 비해서 잉카 제국은 전성기 시절 인구가 1,200만 명에 달하면서 남미 원주민들 대부분을 다스렸다. 또한 테노치티틀란을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들의 연합에 더 가까웠던 아즈텍 제국과 달리, 잉카 제국은 훨씬 더 중앙집권적인 구조를 이룩하고 있었다. 아타우알파가 사로잡혔을 때에 잉카 제국 전역에서 황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방을 가득 채울만한 황금을 보낸 것을 생각해보자. 뒤집해 생각해보면 최고지도자인 황제가 부재한 상황에서도 각지에서 보물들과 병력들을 끌어 모을 정도의 행정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소리다. 아시아나 유럽에 비해서 부족사회의 성향이 짙게 남아있었던 남미에서 이정도면 대단한 거다.
또한 아즈텍 제국이 크게 비판받는 이유들 중 하나인 인신공양 풍습도 잉카에서는 훨씬 덜했다. 물론 잉카에서도 인간 북을 만들어 세워놓는 등 미친 짓거리를 많이 하기는 했고, 가혹한 탄압 정책을 펼친 것은 사실이지만 아즈텍처럼 그토록 체계적이고 대규모로, 그리고 연례행사처럼 사람들을 죽여대지는 않았다. 아즈텍 제국에서는 수십만명의 포로들과 이웃 원주민들을 죽이고 식인하는 것을 정치적 행사나 유흥거리로 생각했으나, 잉카 제국은 그 정도는 아니었고 주로 이웃 부족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어서 함부로 황제에게 저항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잉카 제국의 기술력도 최근들어 재조명받고 있는 주제들 중 하나이다. 유럽인들 이전의 아메리카에는 바퀴나 수레 같은 문명의 기초적인 발명품들이 등장하지 않았고, 심지어 철기 시대의 핵심이 철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기에 구리나 청동 같은 기본적인 금속들에 머무르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잉카 제국은 로마 제국의 그것에 비견될만큼 길고 탄탄한 도로들을 수도 쿠스코를 중심으로 전국 곳곳에 깔았고, 끌과 망치같은 단순한 연장만으로 안데스의 험준한 산맥들에 길을 내고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도 했다. 게다가 길을 낼 수 없는 절벽 등에는 줄로 다리를 꼬아 길을 잇는 등 여러모로 유라시아권의 문화와는 굉장히 다른 모습으로 기술을 발전시켰고, 당시로서는 남미와 북미를 통틀어서 가장 발달된 문명을 지닌 문화권들 중 하나였다.
잉카 제국의 경제체제는 타 문명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꽤나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었다. 다만 동시기 한반도도 동전과 지폐가 정부의 노력에도 그리 통용되지 못하고 옷과 옷감이 주 화폐로 쓰였고, 물물교환도 활발히 이루어진지라 잉카의 경제체제가 마냥 낯선것은 아니었다.'아이유'라고 불리는 집단 농장 단위로 경작하면서 교육, 음식, 보건, 의료와 같은 공공 서비스들을 함께 나누어 쓰기도 했다. 잉카인들은 화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농사지은 것으로 자급자족하는 선에서 어느 정도 만족했다. 농사와 조세를 포함한 대부분의 경제 활동은 대가족 단위로 진행이 되었고, 가족들의 모든 구성원들이 무언가 맡을 일들이 주어졌다. 또한 산악 지방으로 이루어져 왕래가 불편한 상황 속에서도 굉장히 조직화된 경제를 구축하는 데에 성공했고, 제국의 북쪽 끝 콜롬비아의 특산물이 저 먼 아마조니아의 특산물과 거래되기도 하는 등 상당히 물산의 이동도 자유로운 편이어서 처음에는 이 곳에 도착한 스페인 군인들이 놀랐을 정도였다.
주된 산업은 당연히 농업이었다. 험난한 안데스 산맥의 기질적 특성상 밀이나 쌀 따위는 키울 수 없었고, 주로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나 옥수수 등이 주요 작물이었다. 그 외에도 토마토나 칠리 페퍼, 목화, 땅콩 등을 주로 키웠으며, 퀴노아나 아마란스 같은 부식들도 따로 재배하고는 했다. 스페인은 남미를 정복한 직후 잉카의 작물들을 구대륙으로 가져가 널리 퍼뜨렸는데, 덕분에 유라시아 세계의 남미의 대표적인 작물이었던 감자나 고추 등이 전해지면서 식문화가 굉장히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 주로 태평양과 인접한 해안 지대에서 농사를 많이 지었고, 안데스 산맥의 비탈에 계단식 밭을 만들어 농사를 짓기도 했다. 또한 비가 많이 내리는 아마존 일대에서도 나름대로 농사를 많이 지었다. 특히 이 안데스 산맥의 계단식 밭이 굉장히 유명한데, 잉카 제국은 이 계단식 농법 덕분에 인구가 크게 증가할 수 있었다. 계단식 농법을 쓰면 산의 토양이 비 등에 유실되지도 않고, 상대적으로 물을 끌어올리기도 쉬웠기에 산지가 대다수인 잉카에서는 이만한 농법이 또 없었다.
잉카인들은 '쿨카스'라고 불리는 창고들을 지어 이 곳에 생산물들을 저장했고, 주로 옥수수나 감자 따위가 주된 저장물이었으며 안데스의 서늘한 바람을 이용해서 동결건조시켜서 가루 형태로 저장하기도 했다. 감자 등을 발로 짓밟은 다음,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태양빛을 맞히면서 몇날몇일 간을 그대로 두면 이 감자가 바싹 말라 쉽게 썩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감자가 먹고 싶다면 저장해둔 마른 감자 가루들에 물을 섞기만 하면 되었다. 잉카인들은 곡물 외에도 라마나 알파카 등 고산지대에 자생하는 동물들을 키워 단백질과 지방을 섭취하였으며, 가끔씩은 기니피그나 야생 비쿠냐 등을 잡아먹기도 했다. 참고로 잉카인들은 주로 생선이나 채소를 중심으로 한 식단을 가지고 있었으며, 옥수수로는 '치차 맥주'를 만들어 먹었다. 이 치차 맥주를 만들었던 방법이 참 희한했는데, 여자들이 옥수수를 열심히 씹은 다음, 그 옥수수를 커다란 자루에 모두 뱉는다. 이 상태로 며칠 놓아두면 침 속의 효소와 옥수수의 영양분들이 발효되면서 치차 맥주가 만들어진다. 이후 이 자루 속 액체를 거름망에 거르면 완전한 치차 맥주가 되는 것이다.
잉카는 시민들을 미타(mit'a)라는 노동력 단위의 세금으로 관리했다. 잉카의 시민은 1년에 108일 동안 국가에 자신의 노동력을 바쳐야 했다. 이시기에는 부역에 나가 도로를 닦고, 요새를 건설하고, 신전을 건설하는 등 노동을 해야했다. 또한, 노동을 하는 날짜를 가족에게 나누어줄 수도 있었는데, 가족이 4명일 경우 1인당 27일을 일하고, 가족이 12명이면 1인당 9일을 일하고, 가족이 54명이면 1인당 이틀을 일한다(15~60세의 남자에게만 해당한다). 이런 이유로 잉카의 가족은 대부분 대가족이었다. 잉카 정부는 주민을 원시적이지만 효과적인 방법으로 관리했다. 10개의 푸릭(가구)을 충카라고 불렀으며, 충카의 관리자를 '충카 카마욕'이라 하였다. 그리고 충카 카마욕, 파차카 쿠라카(100명), 와랑가 쿠라카(1,000명), 우누 쿠라카(10,000명)가 각각 10개의 하위 쿠라카를 관리하였다. 이것이 잘 되고 있는지 감시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보는 자'라는뜻의 '토코이리콕'이며, 우누 쿠라카와 토코이리콕의 상관이 전국 88개 지방 수도를 담당하는 '토크리콕', 토크리콕의 위에는 '아푸'라고 하는 4개의 수유(쿤티수유, 친차수유, 안티수유, 코야수유)를 관리하는, 사파 잉카 바로 아래에 위치하는 최고 귀족이 존재했다.
잉카의 정복 전쟁은 격렬하고 매우 잔인했으나, 일단 정복한 뒤에는 그 지방의 풍습을 인정하고 그곳의 우두머리를 쿠라카(curaca)라는 관리로 인정하여 고향을 다스리게 했다. 가장 작은 행정 단위로는 아이유라는 집성촌 비슷한 것을 만들고 한 사람이 10명씩을 책임지고 이런 책임자 몇몇을 또 다른 한 사람이 책임지고 하는 식으로 사회를 구성했다. 아이유는 위에서도 말했듯 집성촌 같은 것으로 잉카가 정해준 땅을 마을에서 함께 관리했다. 마을 땅, 종교행사에 쓸 물건을 얻으려고 쓰는 땅, 잉카의 땅으로 나뉘었다. 전쟁에 징병되는 것도 세금의 하나. 잉카는 백성들이 놀고 먹는 것을 싫어하여 엄청 가난한 사람들은 해마다 벼룩을 잡아서 바치게 했다.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늙었거나(50세 이상이 기준) 병든 사람, 과부와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마을에서 무조건 도와주도록 되어있었다. 어쩌다 가뭄이라도 나면 마을 창고를 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면 잉카의 창고를 열어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또한 제국 차원에서 의료제도도 상당한 수준으로 정비되어서 평민도 병이 들면 당대 기준으로 상당한 의료 혜택을 받을수 있었다. 다만 이 혜택은 전부 통치자인 쿠스코의 잉카인에게 해당되는 내용이며, 정작 변방이나 국경 지대의 피지배 부족에겐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잉카는 아즈텍 제국과 비슷하게 지방 영주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통치에는 잘 간섭하지 않았다. 각 지방마다 일정한 양의 공물을 정기적으로 부과하였는데 이 양이 너무 막대하고 과중하여 반란의 불씨를 낳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아마존 지방의 부족에겐 마코앵무새의 꼬리깃을 모아오라는 식으로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을 공물로 부과했다. 물론 수확물과 모직물 등 다른 형태의 공물도 꾸준히 받았다.
잉카 제국은 또한 마을 주민의 강제 노동을 이용하여 산비탈을 개간하거나 계단식 밭을 일구어 새 경작지를 만들었고, 이 새 경작지는 당연하게 쿠라카나 잉카의 군사 지도자들 혹은 잉카제국에 공을 세운 귀족에게 돌아갔다. 이 사유지들은 아이유 공동제에서가 아니라 야나코나라는 잉카제국에 의해 탄생한 새로운 노예 계층에 의해 경작되었다. 또한 복속된 부족은 미타라는 제도하에서 길을 닦고 관개용 운하나 성채 건설에 무급으로 동원되고, 광산에서 일해야 했으며, 병사나 귀족에게 입힐 일정량의 옷을 생산하여 바쳐야만 했다. 미타는 스페인 식민지 시기에도 포토시 은광 같은 중노동에 동원할 인원을 차출하는 용도로 유지되었다. 이런 통치 방식에서 잉카를 과도하게 찬양하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사회주의나 복지국가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 당시 잉카의 각종 사회보장제도들은 피지배민족이 아닌 잉카 황족, 귀족, 사제, 전사, 관리 등 오직 잉카인들만을 우대하는 방식이었다. 잉카 제국이 한 일은 국가의 땅이나 사원의 땅에서 농민들의 강제 노동으로 생산된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를 세우는 것뿐이었다. 이 창고에 보관된 옷과 곡식은 군대, 황제를 위해 일하는 수공업자, 공공사업을 위해 징모된 노동자, 쿠스코와 그 외 도시에 거주하는 관리들을 입히고 먹이기 위한 것이었다.
잉카의 여인들은 보통 16세 정도에 결혼했고, 남성의 경우 20세 정도가 결혼 적령기였다. 신분이 낮은 남자들은 오직 일부일처제만이 가능했으나 지방의 유력자들처럼 많은 아내들을 모두 먹여살릴 수 있는 경우 일부다처제도 상관없었다. 때문에 많은 아내를 거느린다는 것은 곧 해당 남성의 능력과 재력, 사회적 위치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하류층 남성들은 오직 하나의 아내와만 평생을 살아야한다는 것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박탈감이 있었다고 하며,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시 조용히 죽인 다음 새로운 아내를 찾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잉카에서는 아내가 갑작스레 사망하고 홀아비가 된 남편이 새 아내를 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내를 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잉카 결혼 문화에서 굉장히 독특한 것이 바로 동거 제도였다. 아직 미혼인 두 남녀가 서로 같이 1년 정도 동거하면서 서로가 마음에 드는지 알아볼 수 있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바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마음에 들었다면 곧바로 예식을 올렸고, 보통 비슷비슷한 계급의 사람들끼리 혼인했다.
한편 의복의 경우, 관료들은 독특한 문양의 화려한 튜닉을 입고 다니며 스스로를 구분했다. 이 문양들을 가지고 관리들의 계급과 하는 일들을 구분할 수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흑백 체크무늬에 분홍색 삼각형으로 장식이 된 튜닉을 입고다니는 자들은 군대에 종사하는 장교들이었다. 잉카의 복식은 크게 3개로 나뉘었는데, 맨 첫 번째 갈래가 '알라스카'라고 불리는 일상복이다. 주로 라마의 털로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더 고급품이었던 두 번째와 세 번째 갈래를 묶어서 '큅스'라고 부르는데, 큅스도 각자 종류가 달라서 남성들이 알파카 털로 짰던 옷들은 주로 세금으로 사용되었으며 제국 전역에서 활발하게 생산되었다. 그러나 태양신전에 소속된 신녀들이 짠 큅스는 그 차원이 달랐는데, 값비싸고 부드러운 비쿠냐 가죽으로 직접 만들었으며 주로 황제나 고위급 신관들만이 입을 수 있는 최고급품이었다. 의복 외에도 상류층들은 '라우투'라고 하는 머리장식을 하고 다니기도 했고, 황제 아타우알파의 경우에는 과시를 위해서 흡혈박쥐로 만든 머리 장식을 하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당대 잉카에서 가장 중요했던 식물들에는 현재 마약으로 분류되는 코카나무가 있었다. 진통제 기능과 환각 기능이 있는 코카나무의 잎사귀를 잉카인들은 신이 내려준 작물로 신성시했고, 주로 의료용이나 마취용, 혹은 마약 대용 등 만능통치약처럼 사용했다. 사람들은 코카 잎사귀를 씹어 기력을 보충하거나 각성제처럼 주로 썼고, 일부 지방에서는 화폐처럼 쓰기도 했다. 참고로 잉카인들의 의료 수준은 우리의 예상 외로 꽤나 높았는데, 두개골을 열어 머리 안쪽에 찬 '사악한 기운'을 몰아낸다는 명목으로 천공 수술도 실시했고, 환자의 생존율도 무려 80%에 달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꿀에 재운 박쥐를 통째로 씹어먹기도 했고, 키나 나무에서 추출해낸 퀴닌 성분으로 해열제를 만들어 썼다. 다만 당연히 동시대 유럽이나 아시아 지방에 비해서는 의료 수준이 현저히 떨어졌고, 질병에 걸리면 주로 미신이나 사제들에게 의존하는 등 전반적인 수준은 원시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고대 잉카에서 가장 독특한 특징으로 꼽히는 것이 잉카의 건축물들이다. 잉카 건축은 2세기 경의 티와나쿠 문화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건축술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며, 반쯤 깎아놓은 거친 돌들을 틈 하나 없이 일일이 짜맞추어 벽들을 쌓아올리는 것이 특징이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면도날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다. 유라시아 지방과는 달리 돌 사이사이에 석회나 시멘트를 쓰지 않은 것이 특징으로, 실제로 현재 남아있는 유적을 보면 모두 돌 사이에 아무 것도 고정하고 있는 물질이 없다. 또한 목재가 흔하지 않았던 안데스 산지 특성상 보통 석재를 사용해서 건물들을 지었다. 잉카 제국에서 가장 흔한 형태의 건물은 직육면체로 지은 낮고 긴 형태의 석조 건물로, 내부에는 지탱할 벽이나 기둥이 없었고 목재로 대들보와 서까래를 얹은 뒤에 짚이나 풀 등으로 지붕을 올렸다.
건물 내부에 지탱용 벽이나 기둥들이 없었기에 당연히 유라시아의 건물들처럼 넓은 내부공간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고, 아무리 건물이 커봤자 몇 십평을 넘기지 못했다. 이는 황제의 궁전에서부터 일반 평민들의 가옥까지 두루 적용되었고, 심지어 제국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신전이었던 코리칸차 역시 유럽의 건물들과 비교해보면 딱히 거대한 편은 아니었다. 다만 워낙 그 안을 황금으로 도배해놓았기에 그 화려함으로 유명했던 것뿐이지 그 크기 때문에 유명하지는 않았다. 또한 대부분의 건물들은 단층 건물이었고, 2층 건물들의 경우는 찾아보기가 극히 힘들었다. 굳이 만든다고 해도 경사진 지반 위에 건물을 짓기 위해서 간이로 2층과 1층을 구분하는 정도였다. 이 경우에는 보통 계단을 만들어서 1층과 2층을 이었으며, 아예 건물 내부에는 1층과 2층을 연결하지 않고 외부에서 각각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했다. 또한 대다수의 건물들은 딱딱한 직선 모양이었으며, 만드는 데에 오랜 시간이 필요한 부드러운 곡선의 벽을 가진 건물들은 일부를 제외하면 없었다. 담장이나 벽 역시 마찬가지여서 현재 잉카의 유적들을 보면 모두 곧은 직선형의 벽들만이 주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잉카의 주된 건물 배치법을 '칸차'라고 불렀는데, 중앙의 공터를 중심으로 3개에서 4개 정도의 낮은 직육면체 모양의 건물들이 공터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였다. 황제의 궁전, 태양신의 신전, 귀족의 저택, 평민들의 집들 모두가 이러한 형태로 지어졌으며, 차이점으로는 건물들의 수와 장식하는 화려함의 정도만이 있었다. 현재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잉카의 칸차 유적은 오얀타이탐보 지역에 남아있는 유적으로, 잉카 정착민들이 새로운 도시들을 개척할 때에 지었던 칸차 건물군들이 일부 남아있다. 잉카 건물들의 출입문들은 대부분 사다리꼴 모양이었고, 그에 맞게 문을 만들어 달거나 천으로 만든 휘장을 드리우기도 했다. 또한 벽에 난 창문들은 좁은 사각형 모양이었으며, 창문틀을 따로 만들거나 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건물 외관과 내관 모두를 장식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는데, 기껏 해보았자 금속으로 긴 띠를 만들어 이를 건물 외벽에 두르거나 아니면 가죽을 마치 태피스트리처럼 장식하는 정도에 그쳤다. 극히 일부만이 벽에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려넣기도 했지만, 이는 정말 극히 소수였고 대부분의 건물들은 벽이 황량했다. 잉카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건물들을 꾸미고 살지 않았다.
잉카인들이 거대한 암석들을 정교하게 하나하나 맞추어서 쌓아올린 석벽을 보고 옛날에는 외계인이 지은 것이 아닐까하는 소리까지 나왔지만, 실제로 분석해보면 이 석벽을 만드는 데에는 큰 기술력이나 건축 기술을 요하지 않는다. 잉카인들은 석회암이나 화강암처럼 주변에 널린 암석들을 가지고 벽들을 지었고, 자연적으로 갈라진 금을 따라서 구리나 청동으로 만든 끌로 대충 다듬은 다음 이 선에 맞춰 돌들을 쌓아올린 것에 불과하다. 이런 식으로 다듬는 공법은 현대에도 비슷한 기술이 이미 있다.
바퀴나 수레가 없었으니 이 암석들을 겹겹이 쌓을 때에는 통나무를 굴려서 올렸고, 공공건물이나 성벽을 만들 때에 필요한 인력은 사회공동체 단위인 '미타'에서 충원했다. 보통 15세에서 50세 사이의 건장한 남성이라면 누구나 이 노역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또한 잉카인들은 건물의 벽들을 쌓아올릴 때에 일부러 약간 안쪽으로 경사지게 지었고, 기초적인 내진설계를 갖추도록 만들었다. 건물에 석회를 쓰지 않았던 덕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에 건물이 통째로 흔들려 무너지지 않았고 대신 짜맞추어진 돌들이 서로 흔들리다가 알아서 제 자리로 돌아갔으며, 과도하게 하중이 집중된 부분도 없었다고. 이 덕분에 스페인 통치기에 쿠스코에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에 신전 코리칸차 위에 지어진 성당은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잉카인들이 지은 벽과 기반만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는 후문이 있다.
잉카 제국의 군대는 수많은 민족과 부족들이 모여 만들어진 혼성 군대였다. 우아이나 카팍 황제 시기에 규모 면에서 절정을 찍으면서 이때는 정규군으로만 무려 2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운용하기도 했다. 병사들은 모집병이나 징집병 모두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징집된 경우에는 고향의 가족들에게 국가에서 대신 식량과 의복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대주었다. 때문에 잉카 제국에서는 몸이 좋고 무술이 뛰어나다면 차라리 집에 묶여 농사를 짓기보다는 군대에 말뚝을 박는 것이 썩 나쁜 선택이 아니었고, 오히려 사회 피라미드 내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사다리들 중 하나였기에 패기 넘치는 청년들이 다수 군대에 자원하고는 했다. 참고로 군의 장교들은 젊은이들이 모여 스스로를 증명하는 행사였던 '와라치쿠이' 축제에서 뽑혔다. 이 축제에서 장교 지원자들은 격투술이나 리더십, 지휘 능력 등 기본적인 장교로서의 소양은 물론 얼마나 오랫동안 깨어있을 수 있는가 등 다양한 면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이들중 훌륭한 성과를 낸 남자들만이 장교로 임관할 수 있었고, 실력이 매우 좋은 사람들은 특별히 황제의 근위대로 뽑혀가기도 했다.
잉카의 군대 모집력은 꽤나 좋은 편이었다. 농사와 제사처럼 기본적인 의식주를 공동체 내에서 해결했던 잉카 사회에서는 '미타'라고 불리는 사회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했고, 군병들을 모집할 때에도 이 미타를 기준으로 젊은 남성들을 데리고 갔다. 잉카 정부는 시민들에게 약 6~7년 정도의 병역의 의무를 지웠고, 대략 25세에서 50세 사이의 남성들이 주요 징집 대상이었다. 고산 지대의 마을에서는 이 병역을 이행하는 것이 사회적 명예이자 신분 상승의 기회로 여겨졌고, 특히 귀족들의 경우 병역을 이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 굉장히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어쨌든 이렇게 모은 징집군들을 케추아어로 '와카 카마유크'라고 한다. 와카 카마유크는 투석부대, 투창부대, 그외의 일반 보병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들 중 투석부대는 케추아어로 '와라카'라고 불렸다. 와라카들이 사용했던 슬링인 볼라는 위력이 굉장히 강했는데, 상태가 좋지 않은 철제검을 두동강내버릴 정도라고 전해진다. 한편 투창부대는 아틀라틀과 유사한 투창기를 사용했다. 이들 중에서는 '아이유스'라는 볼라로 무장한 병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 기병 부대였고, 볼라로 기수나 말을 넘어뜨릴 수 있었다고 한다. 보병 대부분은 촌타라는 나무로 만들어진 나무곤봉으로 무장했으며 돌도끼나 나무곤봉에 날카로운 청동을 두른 둔기로 무장한 경우도 있었다. 잉카군의 청동기는 그래도 당대 아메리카에선 혁신적인 무기였다.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타라스칸 또한 청동기를 이용하기는 하였으나 무기로서 정교하고 섬세하게 다듬어서 사용할 수준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렇게 모인 병사들은 지방의 유력자들인 '쿠라카'들이 명목상의 총사령관을 맡았고, 전장에서의 야전 지휘관들은 충분한 능력을 갖춘 장교들이 맡았다.
잉카 군대가 전장에서 사용했던 전술은 대략 이렇다. 먼저 전투가 개시되면, 일단 소리를 질러 적들의 기세를 꺾은 다음 요란한 음악과 춤을 추면서 아군의 전의를 붇돋았다. 병사들은 열과 줄을 정확히 맞추어 서있었고, 대체적으로 침묵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들이 소리를 지를 때는 오직 전투 개시 직후에 적들에게 고함을 지를 때 뿐이었다. 보통 전선의 맨 앞줄에는 슬링을 사용하는 병사들과 투창병, 궁병처럼 상대적으로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병사들이 자리했고, 이들은 전투 초반에 최대한 적에게 피해를 많이 입히는 것이 목표였다. 이후 적과 아군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져 근접전이 예상되면 이들은 곧바로 뒤로 빠졌고, 그 뒤에 버티고 있던 도끼와 장창 등으로 중무장한 병사들이 난전을 벌였다. 난전을 벌이기 시작하면 군대는 크게 3갈래로 나뉘어 중앙의 군대는 적들의 공격을 막아냈고, 나머지 2갈래의 병사들이 뒤로 우회하여 적들의 측면을 찔렀다. 참고로 이같은 전법이 거의 언제나 먹혔던 이유는 잉카 군대의 압도적인 물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남미 지방에는 더이상 잉카와 같은 대제국을 상대할만한 세력이 남아있지 않았고, 그랬기에 잉카의 대군과 맞붙으면 거의 항상 잉카의 승리로 끝났다. 황제 등 고위급 사령관들은 뒤에서 전투의 형세를 지켜보았고, 간혹 눈에 띌 정도로 용맹한 병사가 있으면 전투가 끝나고 그에게 훈장을 내려주기도 했다.
잉카 군대는 언제나 엄청난 수의 민간인들을 함께 데리고 다녔다. 대부분이 병사들의 아내나 가족들이었는데, 주로 남편의 옷을 손질해주거나 음식을 만드는 역할을 맡았다. 전투가 끝난 후에는 병사들을 구조하고 상처를 치료하고 시신들을 수습하는 등 전형적인 비전투인력의 모습을 보였다. 참고로 잉카 군대는 절대로 밤에 싸우지 않았다. 이유는 밤에 전투를 벌이면 태양신 인티의 가호를 받지 못해서. 잉카 군대는 종교적인 이유로 사제들도 함께 모시고 다녔고, 이 종군사제들은 주로 신에게 제물을 바쳐 승리를 기원하거나 적들에게 저주를 퍼부어 병사들의 심리상태를 안정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또한 물자 수송이나 무기 운송의 경우 라마를 주로 활용했다. 잉카 군대에서는 궁수를 거의 쓰지 않았다. 궁수들은 안티스(아마존 강 유역 원주민)에서 지원받은 부대로, 극소수였다. 하지만 궁수와 같은 사격 병력이 소수에 불과하니 스페인 군인들한테 큰 피해를 입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물론 잉카 군대 역시 슬링 같은 돌팔매 부대처럼 원거리 공격에 특화된 부대가 있기는 했지만, 이 슬링이라는 것이 활이나 총보다는 그 정확성이 지나칠 정도로 떨어졌고 말그대로 짱돌을 던지는 것이다보니 그 살상력도 스페인 병사들이 가지고 있던 총기류와 비할바가 되지 못했다.
잉카 군대가 타 선아메리카 문명의 군대와 확연히 달랐던 점은 지휘체계가 굉장히 일사불란했다는 점이었다. 고대 로마처럼 잉카 역시 10인장, 50인장, 백인장, 오백인장, 천인장, 만인장까지 지휘할 수 있는 병사의 수들에 따라서 장교의 계급이 나뉘었다. 잉카 군대에서 장교들 중 가장 계급이 낮았던 십인장은 10명의 병사들을 지휘할 수 있었고, ‘춘카 카마유크’라고 불렸다. 굳이 현대식 계급으로 따지면 중위 정도에 해당한다. 그다음으로 50인장은 '피시카 춘카 카마유크'라고 불렸고, 현대의 대위에 해당했다. 백인장인 '파치크 카마유크'는 현대의 소령 정도였고, 500인장인 '피시카 파치크 카마유크'는 중령 정도였다. 천인장인 '와란카 카마유크'는 대령이었고, 오천인장인 '피시카 와란카 카마유크'는 준장이었으며 만인장인 '우누'는 소장부터 시작해서 대장까지에 해당하는 고위 계급이었다. 마지막 대원수에 해당하는 계급인 '아푸키스페이'는 군대의 총사령관이었으며, 지휘할 수 있는 병사들의 수에 한계가 없었고 대부분 황제가 맡았다.
잉카의 군인들은 당시 남미의 병사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발달된 장비를 사용했다. '야퀼라'라고 불리는 두꺼운 알파카 털로 만들어진 망토를 둘렀으며, 이 망토는 워낙 두꺼워서 전투 도중 가벼운 화살이나 심지어는 가벼운 총탄까지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장교들의 경우에는 두꺼운 솜으로 만들어진 체크무늬의 흉갑을 둘러 가슴 부분을 보호하였으며, 목판을 붙여서 보강하기도 했다. 황제나 최고위 장군들은 전장에서 구분을 위해서 흉갑에 황금으로 장식을 했다. '우마 추쿠'라고 불리는 투구를 쓰고 다니기도 했고, 이 투구를 깃털이나 목재를 덧붙여서 보강했다. 한편 주요 방어구였던 방패는 두꺼운 목재로 만들어 가죽으로 위를 덮어 만들었고, 방패 아래쪽에는 가죽으로 치렁치렁하게 띠를 늘어뜨려서 다리 부분까지 가볍게 방어할 수 있도록 했다. 주된 형태는 직사각형이나 사각형, 원형 모양이었으며 체크무늬나 줄무늬를 넣어서 장식했다.
한편 무기도 다양하게 사용했다. 주 무기는 '치크타나'라고 불리는 도끼로, 잉카 제국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가장 흔한 무기였다. 도끼 다음으로 흔하게 사용되던 무기가 볼라라고 부르는 돌을 줄에 묶어 휘두르는 무기였다. 대략 3개에서 4개의 돌들을 줄에 묶어서 휘둘렀으며, 공격 범위가 상당히 넓었기에 잉카 제국에서 주된 무기였다. 짱돌치고는 꽤나 위력도 강하고 잘만 던지면 녹슨 칼도 부술 정도로 강력했기에 그나마 스페인 군대에 맞서 싸울 때에 위력을 발휘한 무기들 중 하나였다고 한다. 활도 있기는 있었다. '와키나'와 '와키'라고 불렀으며, 잉카 군대의 주력 병종은 아니었고 지방 소왕국에서 올라온 병사들이 간간히 사용하는 정도였다. 또 '와크타나'라고 하는 나무 곤봉도 자주 썼다. 기다란 목재 곤봉으로 돌조각이나 청동 조각을 박아 살상력을 극대화했으며, 전장에서는 워낙 무거웠기에 두 손으로 사용해야만 했던 양손무기였다. 다만 그 무게 때문에 전사들이 애용하지는 않았고, 주로 과시용으로 썼다. 잉카 보병들이 야전에서 가장 많이 쓰던 무기는 '참피'라고 부르는 메이스였다. 별모양의 뾰족뾰족한 금속을 막대기 끝에 달아 사용했다. 한편 활이 없었으니 대신에 슬링을 사용했는데, 이 슬링을 다루는 군인들을 후아라카라고 불렀으며 어릴 때부터 특수 교육을 시켜 만들어낸 특수 병종이었다. 잘만 던지면 시속 120km에까지 달하는 속력으로 돌을 던질 수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