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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송도(松都)는 성도(成都), 성도(成都)는 송도(松都)?
2024년 06월 16일
○ 「단군왕검(檀君王儉)」은 누구고, 「당요(唐堯)」는 누군가?
「왕건(王建)」은 누구고, 「왕건(王建)」은 누군가?
「이성계(李成桂)」는 누구고, 「주원장(朱元璋)은 누군가?
어떻게 보면 좀 ‘모자라’는 사람의 ‘모자라’는 질문(質問) 같기도 하고, 꼭 필요(必要)한 꼭 해야만 하는 “질문(質問)” 같기도 하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아 열거(列擧)하질 못하는 것이지, 아마도 위와 같은 ‘예(例)’는 “조선사(朝鮮史)와 중국사(中國史)”에서 매번(每番) 반복(反復)되는 이야기일 것 같다.
㈠ 단군왕검(檀君王儉) : 조선(朝鮮) 개국시조(開國始祖) 【BC 2,333 ∼ BC 2,240 [在位 93年]
【탄생설화(誕生說話)를 보면 :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이야기로 말 그대로 설화(說話)로 채워져 있다. 이건 한민족(韓民族)을 능멸(陵蔑)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곡필(曲筆)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걸 모르고 신화화(神話化), 설화화(說話化)하여 좋다고 설명(說明)하는 학자(學者)들을 보면 한심(寒心)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 〈단군왕검(檀君王儉)과 삼국유사(三國遺事) 및 위지(魏志)의 기록(記錄)에 따른 해설(解說)은, 오늘의 주제(主題)가 아니므로, 차회(次回) 게재(揭載) 분으로 남겨 놓는다.〉
㈡ 당요(唐堯) : 帝堯, 放勳【號 陶 唐 : 帝 王 紀 云 : 堯 都 平 陽 ,於 詩 為 唐 國 . 集 解 徐 廣 曰 : 號 陶 唐 . 皇 甫 謐 曰 : 堯 以 甲 申 歲 生 ,甲 辰 即 帝 位 ,甲 午 徵 舜 ,甲 寅 舜 代 行 天 子 事 ,辛 巳 崩 ,年 百 一 十 八 ,在 位 九 十 八 年 】 歷史年代表 : 唐堯 [在位 100年 BC 2,357?∼BC 2,258?]
㈢ 왕건(王建) : 고려(高麗) 태조(太祖) 【시호(諡號) : 神聖大王, 묘호(廟號) 태조(太祖), 능호(陵號) 현릉(顯陵) : 877∼943年 : ► 在位 AD 918년~943년, 25年 : 喪葬園陵制度, 依漢魏二文故事, 悉從儉約 : 장례와 무덤의 제도는 한(漢) 문제(文帝)와 위(魏) 문제의 고사(故事)에 기대어 모두 검약(儉約)을 좇으라고 하였다.】 송도(松都)에 현릉(顯陵)이 있다.
㈣ 왕건(王建) : 五代十国 前蜀王【廟號 高祖, 永陵, 847年∼918年 : 在位 907年∼918年】 : 전촉(前蜀)의 「王氏父子統治蜀地共“35年”」【“전촉(前蜀) 35년”이라고 하였으니, 「907 ∼ 943년(35년)」이다. : 新五代史 : 據前蜀書, 運歷圖, 九國志, 皆雲建以唐大順二年入成都為西川節度使,天復七年九月建號,明年正月改元武成,今以為定。惟舊五代史雲「龍紀元年入成都,天祐五年建號改元」者繆也。至後唐同光三年蜀滅,則諸書皆同。自大順二年至同光三年,凡三十五年】 성도(成都)에 영릉(永陵)이 있다.
㈤ 이성계(李成桂) : 조선(朝鮮)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 1,335 ~ 1,408(73세) 【在位 : 1392~1398(7年) 年號 : 洪武 25 ~ 洪武 31] 시호(諡號)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건원릉(建元陵)
㈥ 주원장(朱元璋) : 명(明)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 1,328.10.21 ~ 1,398.6.24【在位 1,368∼1,398 (30年) 廟號+諡號 : 태조 고황제(太祖 高皇帝) : 明史本紀 : 太祖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俊德成功高皇帝, 洪武三十一年, 閏月癸未, 帝疾大漸. 乙酉, 崩於西宮, 年七十有一, 葬孝陵. 諡曰高皇帝, 廟號太祖】
➨ 이단(李旦)【이성계(李成桂)】‘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는 ‘홍무제(洪武帝)’의 연호(年號)를 똑같이 사용(使用)했다. 곧 같은 연호(年號)를 사용(使用)했다는 뜻이다. 철저(徹底)한 뼛속까지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인가? 아니면 이들 두 사람은 두 사람이 아닌 한 사람 “동일 인물(同人)”인가? 이것이 문제(問題)다. 과연(果然) 사실(史實)은 무엇일까?
핵심(核心)은 중원대륙(中原大陸)을 차지하고 있던 종족(種族)은, 「수천(數千) 년 전(前)부터 동이(東夷)였고, 구이(九夷)였으며, 한(韓 : 馯)•구려(駒驪)•맥(貊 : 貉)•부여(夫餘)였다」는 것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이러한 사실(史實)은, 상서전(尙書傳)에서 고증(考證)이 되고 증명(證明)이 된다. 【尙書傳 ; 海東諸夷駒麗扶餘馯貊之屬。武王克商。皆通道焉。】
명(明)의 주원장(朱元璋)이 실존(實存)했다면 : 「고려왕(高麗王)의 신하(臣下)로 고려왕(高麗王)의 어명(御命)에 따라 반적(叛賊)들을 소탕(掃蕩)하여 수괴(首魁) 포로(捕虜)들을 고려왕(高麗王)에게 보냈다」라는 것은 ‘명사(明史)나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 이러한 동일인물(同一人物), 또는 속국(屬國)의 제후(諸侯) 등을 내세운 경우(境遇)의 개국(開國)과 탄생(誕生)은 그 확률(確率)이 얼마나 될까? “수백(數百)만분의 일(一)” 정도는 가능(可能)하기는 한 걸까?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 지금(只今)도 전국(全國) 구석구석을 뒤지며 옛 조선(朝鮮)의 흔적(痕迹)을 찾기에 여념(餘念)이 없다. 물론(勿論) 여기에는 정부(政府)나 지자체(地自體)로부터 지원(支援)되는 적게는 수천(數千) 만(萬)에서 수억(數億), 수십억(數十億) 원의 보조금(補助金)을 노리는 사냥꾼(獵師)들도 당연(當然)히 포함(包含)되어 있다.
그러나 안타깝고 미안(未安)하고 죄송(罪悚)한 일이지만 : ‘한반도(韓半島) 땅 온 구석구석을 모조리 파헤쳐 봐도’, ‘왕릉(王陵)이라고 전(傳)해지고 있다’라는 구릉지(丘陵地)를 모조리 파헤쳐도 그곳에서 옛 조선(朝鮮)의 왕(王)이 잠들고 있다는 직접적(直接的)인 증거품(證據品)은 나올 수가 없다.
옛 조선(朝鮮)은 이곳 한반도(韓半島) 땅에서 왕조(王朝)를 영위(營爲)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맨날 파헤쳐야 헛빨짓만 하는 것이다. 그래도 보조금(補助金)은 따박따박 나오는데 뭔 상관(相關)? 그래서 주인(主人) 없는 국고(國庫)는 받아쓰는 놈(者)들이 장땡인 세상(世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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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에 의한 “삼한통일(三韓統一) 곧 통일환영(統一寰瀛)”은, 곧 “천하통일(天下統一)”이었다. 곧 ‘수만리(數萬里)의 땅을 하나로 했다’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㊀ “압록강(鴨綠江) 이남(以南)•두만강(豆滿江) 이남(以南)”의 땅이 “천하(天下)”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말이다.
㊁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까지를 아우르던 78개 또는 79개 나라가 있었던 삼한(三韓) 땅을 하나로 한 것을 “삼한통일(三韓統一), 천하통일(天下統一), 통일환영(統一寰瀛)”이라고 한다」라면 :
「신라(新羅)가 삼국통일(三國統一)을 했다」라는 것에 대해서 후세(後世)인들은 “천하통일(天下統一)”이라는 말을 사용(使用)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問題) 제기(提起)다. 삼국통일(三國統一)을 한 적이 없으니 당연(當然)한 결과(結果)일 것이다. 신라(新羅)가 언제 삼국통일(三國統一)을 했나?
㊂ ‘고구려(高駒驪),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동서(東西) 수만리(數萬里) 남북(南北) 수만리(數萬里)의 땅이 있어야 하며,
㊃ 도성(都城)을 중심으로 동서남북(東西南北) 사방(四方) 각(各) 5∼6 천리(千里) 땅이 있어야 하며,
㊄ ‘장독(瘴毒)=장기(瘴氣)’가 만연(蔓延)한 아열대(亞熱帶), 동토지대(凍土地帶), 택국(澤國)이라 불릴만한 늪과 많은 호수(湖水)로 둘러싸인 땅이 있어야 하고,
㊅ 무인지경(無人之境)의 광활한 초원지대(草原地帶)와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는 땅이어야 한다.
➨ 이러한 조건(條件)은, ‘조선사(朝鮮史)와 중국사(中國史)’에서 말하는 것이다. “삼한통일(三韓統一) 곧 통일환영(統一寰瀛)”은, 곧 “천하통일(天下統一)”이었다. 여기에는 위에서 말하는 「㊁ + ㊂ + ㊃ + ㊄ + ㊅」에서 설명(說明)하는 지세(地勢)가 포함(包含)되어야 한다.
고려(高麗)의 영토(領土)에 대해 지리지(地理志) 기록(記錄)으로 들어가면 : 그 첫머리에,
➊ 〈惟我海東三面阻海一隅連陸輻員之廣幾於萬里 : 생각해 보면 우리 해동(海東)은 삼면(三面)이 바다에 막혀 있고, 한 모퉁이가 육지(陸地)에 이어져 있는데, 그 폭과 둘레는 수만리(數萬里)나 된다.〉라고 하였으며,
➋ 〈其十道, 一曰關內, 二曰中原, 三曰河南, 四曰江南, 五曰嶺南, 六曰嶺東, 七曰山南, 八曰海陽,九曰朔方, 十曰浿西, 其所管州郡共五百八十餘, 東國地理之盛, 極於此矣. : 그 10도는 첫째는 관내(關內), 둘째는 중원(中原), 셋째는 하남(河南), 넷째는 강남(江南), 다섯째는 영남(嶺南), 여섯째는 영동(嶺東), 일곱째는 산남(山南), 여덟째는 해양(海陽), 아홉째는 삭방(朔方), 열 번째는 패서(浿西)이었다. 그 관할(管轄)하는 주군(州郡)은 모두 580여 개이니, 동국(東國) 지리(地理)의 융성함이 여기서 극치를 이루었다〉라고 역설(力說)하고 있으며,
➌ 〈王京,開城府,本高勾麗扶蘇岬新羅改松嶽郡太祖二年定都于松嶽之陽爲開州創宮闕. :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는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부소갑(扶蘇岬)이다. 신라(新羅)에서 송악군(松嶽郡)으로 고쳤다. 태조(太祖) 2년(919)에 송악(松嶽)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여 개주(開州)라 하고 궁궐을 창건하였다. 立市廛辨坊里分五部.光宗十一年改開京爲皇都成宗六年更定五部坊里十四年爲開城府管赤縣六畿縣七.二十年京都羅城成 : 시전(市廛)을 세우고, 방리(坊里)를 구분하여 5부(五部)를 나누었다. 광종(光宗) 11년(960)에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로 고쳤다. 성종(成宗) 6년(987)에 5부 방리(坊里)를 다시 정하였다. 성종(成宗) 14년(995)에 개성부(開城府)가 되어, 적현(赤縣) 6개와 기현(畿縣) 7개를 관할(管轄)하였다. [현종(顯宗)] 20년에 경도(京都)의 나성(羅城)이 완공되었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황도(皇都)」란 황성(皇城)을 말하는 것으로, 황제(皇帝)가 있는 서울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설명(說明)한다. 말 그대로 「고려(高麗) 광종(光宗)은, 황제(皇帝)였다」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송(宋)이나 글란(契丹)이나 후금(後金)이 어떻게 황제국(皇帝國)이 될 수 있겠나?” 당연(當然)하게도 이들은 고려(高麗)의 제후국(諸侯國)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기를 : 기자(箕子) 8조를 받들며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거나 고려(高麗)의 땅에서 일어났다는 등의 기록(記錄)을 남겨 놓고 있는 것이다.
➍ 이때 완성(完成)된 황도(皇都)의 나성(羅城)은 : 《王初卽位徵丁夫三十萬四千四百人築之至是功畢.城周二萬九千七百步羅閣一萬三千*閒大門四中門八小門十三.又皇城二千六百*閒門二十. : 왕(王)이 처음 즉위(卽位)하여, 정부(丁夫) 304,400명을 징발하여 쌓았는데, 성(城)의 둘레가 29,700보(步)요, 나각(羅閣)이 13,000간(間)이요, 대문(大門) 4, 중문(文) 8, 소문(小門) 13개이며, 또 황성(皇城)은 2,600간(間)이며, 문은 20개이다.》
【宋史 地理志 開封府 : 新城周回五十里百六十五歩。大中祥符九年增築,元豐元年重修,政和六年,詔有司度國之南展築京城,移置官司軍營。舊城週四十八里二百三十三歩,周顯德三年築。 【신성(新城)과 구성(舊城) 둘레는 모두는 100리다.】 開封府。崇甯 戸二十六萬一千一百一十七,口四十四萬二千九百四十】
【성(城)의 높이(高)와 두께(厚) : 척(尺)은, 1자를 말하며, 약 32.21cm를 말한다.】
➨ 성(城) 높이가 27척(尺)이면, 약 ‘8.7’ m요, 성벽(城壁)의 두께가 12척(尺)이라고 했으니, 약 ‘3.86m’이다. 이러한 규모(規模)라면 어마어마한 시설물(施設物)이다. 【고려(高麗) 당시(當時) 척(尺)】특히 중요(重要)한 것은 이러한 대규모(大規模) 성(城)은, “토성(土城)”이었다는 사실(事實)이다.
성(城)의 길이(둘레) : 29,700보(步)【1보(步) : 1.386m】라고 했으니, 약(約) ‘41.1’ km이다. 100 리(里)에 달하는 규모(規模)이다. 「둘레 100리(里), 높이(高) 약 8.7 m, 두께(厚) 약 3.86m」라면, 성(城) 위에서는 기마(騎馬)가 교행(交行)할 수 있으며, 그 규모(規模)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할 정도(程度)의 대규모(大規模)를 자랑한다.
이러한 대규모(大規模) 나성(羅城)을 쌓은 것은, 당시(當時) 고려(高麗)의 국력(國力)이 왕성(旺盛)했다는 증거(證據)다. 「나성(羅城) 규모(規模)가 100리 넘었다」라는 것을 보면 :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예(例)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규모(規模)를 보면 : 「고려(高麗)는 천자국(天子國)이었고, 글란(契丹)이나 후금(後金)이나 송(宋) 등은 천자(天子)를 받들고 모시는 제후(諸侯)였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➎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 〈성종(成宗) 14년【AD 995】 : 秋七月,改開州,爲開城府,管赤縣六,畿縣 : 가을 7월에, 개주(開州)를 개성부(開城府)로 고치고, 적현(赤縣) 6현(縣)과 기현(畿縣) 7현(縣)을 관할(管轄)하게 하고, 又定十道,曰關內道,管二十九州八十二縣,曰中原道,管十三州四十二縣,曰河南道,管十一州三十四縣,曰江南道,管九州四十三縣,曰嶺南道,管十二州四十八縣,曰嶺東道,管九州三十五縣,曰山南道,管十州三十七縣,曰海陽道,管十四州六十二縣,曰朔方道,管七州六十二縣,曰浿西道,管十四州四縣七鎭 : 또 10도를 정하여, 관내도(關內道) 29주ㆍ82현, 중원도(中原道) 13주ㆍ42현, 하남도(河南道) 11주ㆍ34현, 강남도(江南道 ) 9주ㆍ43현, 영남도(嶺南道) 12주ㆍ48현, 영동도(嶺東道) 9주ㆍ35현, 산남도(山南道) 10주ㆍ37현, 해양도(海陽道) 14주ㆍ62현, 삭방도(朔方道) 7주ㆍ62현, 패서도(浿西道) 14주ㆍ4현ㆍ7진(鎭)을 관할(管轄)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 위의 글 「➊+➋+➌+➍+➎」를 보면 : 이 같은 규모(規模) 즉(卽), 도(道)•부(府)•주(州)•군(郡)•현(縣)•진(鎭)을 살펴보면 : 반도(半島)와 그 부속도서(附屬島嶼)에 넣을 곳이 없을 정도(程度)로 광대(廣大)한 조직(組織)이었고, 그 뒤로 「4 경(京), 8 목(牧), 15 부(府), 129 군(郡), 335 현(縣), 29 진(鎭)으로 발전(發展)하였다.【京四牧八府十五郡一百二十九縣三百三十五鎭二十九】」라고 전하고 있는데, 특히
「적현(赤縣) 6현(縣)과 기현(畿縣) 7현(縣)」이라는 말에서 적현(赤縣)은, 적현신주(赤縣神州)라는 말인데, 바로 천자(天子)【황제(皇帝)】의 도읍(都邑)을 말하고 있다.
조선사(朝鮮史)에 기록(記錄)된 위와 같은, 황성(皇城). 나성(羅城). 행정조직(行政組織)의 편제(編制)를 보면 : 한반도(韓半島)라는 조그마한 한정(限定)된 땅에서는 결코 설치(設置)할 수 없는 광대(廣大)하고 광활(廣闊)한 땅에서나 가능(可能)한 구조(構造)였다는 것을 알자.
「한반도(韓半島) 땅은, 위에서 말하는 “10”개 도(道)중의 “1”개(個) 도(道)에도 미치지 못하는 좁디좁은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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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주제(主題)로 넘어가자.
첫째는, 「고려(高麗) 또는 조선(朝鮮)의 사대부(士大夫), 유학자(儒學者), 대신(大臣)들이 남겨 놓은 ‘송도(松都)=송경(松京)’에 대한 이색적(異色的)인 몇 기록(記錄)과
두 번째로는, 「동국(東國)의 대표적(代表的) 지리지(地理志)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개성부(開城府) 기록(記錄)에서 큰 눈길을 끌지 않는 몇 기록(記錄)을 살펴보면서, ‘고려(高麗) 강역(疆域)’에 대하여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세뇌(洗腦)되어 사실(史實)에 대하여 사고(思考)조차 하지 못하는 뇌세포(腦細胞)를 깨워 활성화(活性化)해보자.」
(1) 해봉집(海峯集)【洪命元 1,573년(宣祖) 6)∼1,623년(仁祖 1)】卷二, 七言四韻
〈개성효발(開城曉發) : 松都形勝似成都. 四面靑山擁大途. 駝死石橋徵得失. 人歸星洞涉虛無. 風光謾自供揮筆. 節序居然近熟櫨. 鳳節卽今淹萬里. 幾時前席贊鴻謨〉라고 하였다.
즉(卽). 「새벽에 개성(開城)을 떠나다(開城曉發) : 松 都 形 勝 似 成 都 : 송도(松都)의 뛰어난 지세와 풍경【형승(形勝)】이 성도(成都)와 같다.」라고 하였는데, 이런 설명(說明)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사(似)는 ‘같다 또는 닮다’라는 뜻을 가진 한자(漢字)다. 이리저리 재 봐도, 뜻은 하나다. 곧 “송도(松都)의 지세(地勢)나 풍경(風景)의 뛰어남이 성도(成都)와 같다”라는 것이다.
(2) 팔곡집(八谷集)【具思孟 A.D 1,531(中宗 26)-1,604(宣祖 37)】八谷先生集, 卷二 / 五言古詩, “錦江亭(금강정)”
〈西蜀有錦江. 錦江在此邊. 名號偶相同. 景物誰當先. 孤亭枕水頭. 四顧富林泉. 莫說杜陵翁. 拜鵑心愴然. 未聞望帝亡. 祀典講自天. 宇宙何茫茫. 飜覆幾百千. 臨流發長嘯. 悲風生我前〉라고 하였는데,
위의 글 앞부분을 보면 : 「西蜀有錦江.錦江在此邊.名號偶相同. : 서촉(西蜀)에 금강(錦江)이 있다. 금강(錦江)은 이곳 근처에 있는데, 이름이 뜻하지 않게 서로 같다」라고 말하고 있다.
서촉(西蜀)에도 금강(錦江)과 백마강(白馬江)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3) 江左【權萬 1,688(肅宗 14)∼1,749(英祖) 25)】先生文集 1 : 詩 ‘望松岳山’
「巴陵西北古王州. 松岳蒼蒼天際浮. 覇業蕭條五百載. 漕船來入漢江頭 : 파릉(巴陵) 서북(西北)의 옛 왕주(王州 : 王京), 송악(松岳)은 푸르디푸르게 하늘 사이에 떠 있고, 5 백년(百年) 패업(霸業)이 쑥 가지가 되었구나. 조선(漕船)으로 와 한강(漢江) 입구에 들어가네」라고 하였다.
➠ 「파릉(巴陵)의 서(西)」에 바로 성도(成都)가 있다. 파릉(巴陵)【파릉현(巴陵縣) : 악양루(岳陽樓)가 있는 악양(岳陽)이다】 : 곧 파현(巴縣)으로 지도(地圖)에 표시(標示)되어 있다. 곧 가릉강(嘉陵江)과 장강(長江)이 만나는 곳에 파릉(巴陵)이 있다.
‘조선(漕船)’이란 물건(物件)을 실어 나르는 화물선(貨物船)인데, 이때 ‘권만(權萬)’은 이 배를 타고 한강(漢江)【파릉(巴陵)으로 보면 : 조선(漕船)을 타고 장강(長江)으로 무한(武漢)으로 갔다는 뜻이 된다】과 장강(長江)이 합류(合流)하는 무한(武漢)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위의 글로 보면 : 「파릉(巴陵)은 곧 악양(岳陽)인데, 이곳으로부터 서북(西北)쪽으로 성도(成都)인 송악(松岳)이 있었다」라고 말해주고 있다. 「성도(成都)가 곧 송악(松岳)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4) 사가시집(四佳詩集) 4권 詩類 : 松都懷古 [송도(松都)에서 옛일을 회상(回想)하다.]
〈碧瓦鱗鱗百萬家。當時歌舞鬪繁華。: 푸른 기왓장 나란히 줄 이은 백만(百萬) 가옥들, 당시엔 가무 오락으로 번화함을 겨뤘는데. 英雄一去風流盡。甓礫成塲薺有花。: 영웅이 한번 떠나서 풍류 또한 사라지자, 벽돌 부스러기 마당에 냉이꽃만 피었구나〉라고 하였다.
이때 「송도(松都)에는 백만가(百萬家)가 있었다」라는 뜻이다. 「사가집(四佳集)」은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시문집(詩文集)이다.」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백만가(百萬家)” 이걸 어떻게 설명(說明)할 수 있을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송도(松都)에 15만(萬) 여가(餘家)가 있었다고 말해주고 있다. 하물며 ‘백만가(百萬家)’라니… …이러한 기록(記錄)을 고증(考證)할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을 찾는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될 수 있으련만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직 발견(發見)치 못하고 있다.
송(宋)의 개봉부(開封府)는, 흥성(興盛)할 시에 “25만(萬) 여가(餘家)”가 있었다고 송사(宋史)는 전한다.
➡ ‘사천(四川)=사천(泗川)’의 ‘성도(成都)와 송도(松都)’는 무엇이 같다는 것이며, 무엇이 닮았다는 것일까? 「송도(松都)가 성도(成都)였다는 뜻인가? 성도(成都)가 송도(松都)였다는 뜻인가?」 문제(問題) 제기(提起)는 충분(充分)한 것이다.
(5) 성호사설(星湖僿說) 제2권 / 천지문(天地門) 서도관액(西道關阨) :
〈京都以西有松都之後西江又其西有豬灘又其西有大同江又其西有淸川江又其西有鴨綠江此其大較也 : 경도(京都) 이서(以西)에는 송도(松都)가 있고, 뒤에 서강(西江)이 있고, 또 그 서쪽에 저탄(豬灘)이 있으며, 또한 그 서(西)쪽에 대동강(大同江)이 있고, 또한 그 서(西)쪽에 청천강(淸川江)이 있으며, 또한 그 서(西)쪽에 압록강(鴨綠江)이 있는데 이것은 대강 따진 것이다.〉
➊ 여기서「경도(京都)」란 한양(漢陽) 곧 ‘한성(漢城)=왕성(王城)’을 말한다. 이러한 오늘날의 「서울[Seoul]의 서(西)쪽에 송도(松都 : 開城)가 있다」라는 것이다.
➋ 「송도(松都 : 開城)의 뒤(後)에 서강(西江)이 있다. 또 그 서(西)쪽에 저탄(猪灘)이 있다. 또 그 서(西)쪽에 대동강(大同江)이 있다. 또 그 서(西)쪽에 청천강(淸川江)이 있다. 또 그 서(西)쪽에 압록강(鴨綠江)이 있는데, 이것은 대략 비교해본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의 「서울[Seoul] 서(西)쪽에 송도(松都)가 있다」라는 것이고, 「송도(松都) 뒤(後)라고 했으니, 송도(松都)의 북(北)쪽에 서강(西江)이 있고, 그 서(西)쪽에 저탄(猪灘)이 있고, 또 그 서(西)쪽에 대동강(大同江), 또 그 서(西)쪽에 압록강(鴨綠江)이 있다」라는 뜻이다.
➨ 송도(松島)의 뒤(後)라면 : 「송도(松都)의 남(南)쪽을 말할 수 없는 것이 저탄(猪灘)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뒤(後)는 북(北)쪽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또 “서강(西江)”이란 어떤 강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저탄(猪灘)”은, 황해도(黃海道) 평산군(平山郡) 동(東)쪽에 있는 예성강(禮成江) 상류의 명칭이다. 이 저탄(猪灘)의 서(西)쪽에 대동강(大同江)이 있으며, 이 대동강(大同江)의 서(西)쪽에 압록강(鴨綠江)이 있다」라는 설명(說明)이다.
➨ 위에서 말하는 내용(內容)을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에 대입(代入)하면 :
➊ 왕도(王都)인 한성(漢城) 곧 오늘날의 「서울[Seoul] 서(西)쪽에 송도(松都)가 있다」라는 것인데 : 「한반도(韓半島) 서울[Seoul]의 서(西)쪽이 아닌, 북(北)쪽에 송도(松都)인 개성(開城)이 있다.」 따라서 한반도(韓半島) 땅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즉(卽) “성호사설(星湖僿說) 2권 천지문(天地門) 서도관액(西道關阨)”에서 말하는 지세(地勢)는, 「한반도(韓半島)의 지형지세(地形地勢)가 아니다.」 ‘서도(西道)’란 바로 서(西)쪽 땅을 말하는 것이다.
➋ 「송도(松都)의 북(北)쪽 저탄(猪灘)【예성강(禮成江)】서(西)쪽에 대동강(大同江)이 있고」라고 하였는데 : 「대동강(大同江)은 저탄(猪灘)의 서(西)쪽이 아니라 북(北)쪽에 있다.」 곧 한반도(韓半島) 지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➌ 「대동강(大同江) 서(西)쪽에 청천강(淸川江)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대동강(大同江)이든 청천강(淸川江)이든 압록강(鴨綠江)이든 동북(東北)쪽에서 발원(發源)하여 서남(西南)쪽으로 흐르는 하천(河川)이기 때문에 대동강(大同江) 서(西)쪽에 청천강(淸川江)이 있을 수 없다.」
한반도(韓半島) 지세(地勢)로 보면 : 대동강(大同江) 서(西)쪽이 아닌 “북(北)”쪽에 청천강(淸川江)이 존재(存在)하는 것이다.
➍ 「청천강(淸川江) 서(西)쪽에 압록강(鴨綠江)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 한반도(韓半島)의 지세(地勢)로 보면 : 청천강(淸川江)의 서(西)쪽이 아닌 “북(北)”쪽에 압록강(鴨綠江)이 있다.
곧 「한반도(韓半島)의 지세(地勢)가 아닌 전혀 다른 땅의 지세(地勢)를 기록(記錄)해 놓은 것이다.」
► 한반도(韓半島)의 강(江)과 산(山) 및 산맥(山脈)
(6) 月軒集卷之三 / 詩 七言律 松都故宮[송도고궁]。次南伯恭韻。【정수강(丁壽崗) : 1,454년(端宗 2)∼1,527년(中宗 22)】
〈四望依俙有土城。故宮遺址尙縱橫。花磚散地將承步。石獸顚溝欲吼聲。朝士當年鳴佩會。牧童此日跨牛行。惟餘滿月臺前月。寂寞光輝不禁淸〉
「四望依俙有土城, 故宮遺址尙縱橫。: 사방(四方)을 바라보니 희미하게 토성(土城)이 있는데, 옛 궁궐(宮闕)의 유지(遺址)는 사방(四方)에 있고」라는 말은, 송도(松都)의 나성(羅城)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當時) 성(城)을 쌓을 때 나성(羅城)은 흙으로 쌓았다【토성(土城)】’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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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개성부(開城府) 城郭(성곽)
〈羅城。卽外城。高麗顯宗時,姜邯贊請城京都,王命李可道築土爲城,凡二十一年而畢。: 나성(羅城) 바로 외성(外城)이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강감찬(姜邯贊)이 경도(京都)에 성 쌓기를 청하니, 왕이 이가도(李可道)를 명하여 흙을 쌓아 성을 만들게 하였는데, 모두 21년 만에 공사가 끝났다. 城周二萬九千七百步,羅閣一萬三千間。: 성의 주위가 2만 9천 7백 보요, 나각(羅閣)이 1만 3천 칸이다. 有崇仁、宣旗、保定、光德、德山、會賓、仙溪、泰安、弘仁、乾德、保泰、宣義、狻猊、永平、仙巖、慈安、彰信、迎陽、安和、成道、會昌、安定等門,今皆頹壞。: 숭인(崇仁)ㆍ선기(宣旗)ㆍ보정(保定)ㆍ광덕(光德)ㆍ덕산(德山)ㆍ회빈(會賓)ㆍ선계(仙溪)ㆍ태안(泰安)ㆍ홍인(弘仁)ㆍ건덕(乾德)ㆍ보태(保泰)ㆍ선의(宣義)ㆍ산예(狻猊)ㆍ영평(永平)ㆍ선암(仙巖)ㆍ자안(慈安)ㆍ창신(彰信)ㆍ영양(迎陽)ㆍ안화(安和)ㆍ성도(成道)ㆍ회창(會昌)ㆍ안정(安定) 등의 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內城。我太祖開國二年癸酉以甓築內城。周二十里四十步。有東大、南大、東小、西小、北小等門。: 내성(內城) 우리 태조(太祖)가 개국한 지 2년 계유[AD 1,393年]에 벽돌로 내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20리 40보이다. 동대문(東大門)ㆍ남대문ㆍ동소문(東小門)ㆍ서소문ㆍ북소문 등의 문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성계(李成桂)는 즉위(卽位), 2년 뒤에 송도(松都)【개성(開城)】에 내성(內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20리(里)에 이르렀으며, 벽돌로 만들었다」라는 뜻이다.
➊ 나성(羅城)은 곧 외성(外城)을 말하는 것인데 : 성(城)의 길이(둘레) : 29,700보(步)【1보(步) : 1.386m】라고 했으니, 약(約) ‘41.1’ km이다. 100 리(里)에 달하는 규모(規模)이다.
「둘레 100리(里), 높이(高) 약 8.7 m, 두께(厚) 약 3.86m」라면, 성(城) 위에서는 기마(騎馬)가 교행(交行)할 수 있으며, 그 길이가 무려 100리(里)에 달하는 전무후무(前無後無)【전(前)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음을 일컫는 말이다】한 규모(規模)였고, 이를 모두 흙(土)으로 만든 ‘토성(土城)’이었다는 사실(事實)이다.」
㈠ 徐兢의 高麗圖經에서는, ‘외성(外城)은 토성(土城)으로 둘레가 60리(里)요, 또 내성(內城 : 皇城)이 있다’라고 하였으나, 문제(問題)는 「그 많은 성문(城門)의 이름이 고려사(高麗史)에 기록(記錄)된 것과 같은 이름이 없다(無)」라는 것은,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일로 「둘 중의 하나는 분명 가짜(假 : 거짓)」라는 것이다.
㈡ 高麗史節要 2권 / 光宗大成大王, 庚申 十一年(960) [宋 太祖 建隆元年,遼 應曆十年] : 〈以開京,爲皇都,西京,爲西都. :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로 하고, 서경(西京)을 서도(西都)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광종(光宗)은, 말 그대로 ‘대성대왕(大成大王)’으로 천자(天子)였다는 것이다.
㈢ 〈顯宗 : 二十年, 京都羅城成 : 20년(1029)에 경도(京都)의 나성(羅城)이 완성되었다. 王初卽位, 徵丁夫三十萬四千四百人, 築之, 至是功畢. : 왕(王)이 처음 즉위(卽位)했을 때, 정부(丁夫) 304,400명을 징발해 쌓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사를 마쳤다. : 城周二萬九千七百步, 羅閣一萬三千閒, 大門四, 中門八, 小門十三, 曰紫安·曰安和·曰成道·曰靈昌·曰安定·曰崇仁·曰弘仁·曰宣旗·曰德山·曰長覇·曰德豐·曰永同·曰會賓·曰仙溪·曰泰安·曰鸎溪·曰仙嚴·曰光德·曰乾福·曰昌信·曰保泰·曰宣義·曰狻猊·曰永平·曰通德. 又皇城二千六百閒, 門二十, 曰廣化·曰通陽·曰朱雀·曰南薰·曰安祥·曰歸仁·曰迎秋·曰宣義·曰長平·曰通德·曰乾化·曰金耀·曰泰和·曰上東·曰和平·曰朝宗·曰宣仁·曰靑陽·曰玄武·曰北小門. : 성의 둘레가 29,700보(步)이고, 나각(羅閣)이 13,000칸이며, 대문(大門)이 4개, 중문(中門)이 8개, 소문(小門)이 13개로, 자안문(紫安門)·안화문(安和門)·성도문(成道門)·영창문(靈昌門)·안정문(安定門)·숭인문(崇仁門)·홍인문(弘仁門)·선기문(宣旗門)·덕산문(德山門)·장패문(長覇門)·덕풍문(德豐門)·영동문(永同門)·회빈문(會賓門)·선계문(仙溪門)·태안문(泰安門)·앵계문(鸎溪門)·선엄문(仙嚴門)·광덕문(光德門)·건복문(乾福門)·창신문(昌信門)·보태문(保泰門)·선의문(宣義門)·산예문(狻猊門)·영평문(永平門)·통덕문(通德門)이 그것이다. 또한 황성(皇城)은 2,600칸이고, 문이 20개인데, 광화문(廣化門)·통양문(通陽門)·주작문(朱雀門)·남훈문(南薰門)·안상문(安祥門)·귀인문(歸仁門)·영추문(迎秋門)·선의문(宣義門)·장평문(長平門)·통덕문(通德門)·건화문(乾化門)·금요문(金耀門)·태화문(泰和門)·상동문(上東門)·화평문(和平門)·조종문(朝宗門)·선인문(宣仁門)·청양문(靑陽門)·현무문(玄武門)·북소문(北小門)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㈣〈현종(顯宗) 15년(1,024)에 또 경성(京城)의 5부 방리(坊里)를 정하였다. 동부(東部)는 坊 7개, 里 70개 : 남부(南部)는 坊 5개, 里 71개 : 서부(西部)는 坊 5개, 里 81개 : 북부(北部)는 坊 10개, 里 47개 : 중부(中部)는 坊 8개, 里 75개【凡 : 坊 35, 里 344】〉
위의 글 「㈠+㈡+㈢+㈣」를 보면서, 그 규모(規模)를 상상(想像)해보면 : 우리가 중국사(中國史)라고 배우고 가르쳤던 중원(中原) 대륙(大陸)의 ‘5 천년(千年)’【BC 2,700∼오늘에 이르기까지】역사(歷史)에서 “ 위에서 말하는 거대(巨大)한 규모(規模)의 성곽(城郭)을 쌓고 도읍지(都邑地)를 건설(建設)한 왕조(王朝)를 찾아볼 수 없다.
흥망성쇠(興亡盛衰)에 따라 새롭게 문을 연 왕조(王朝)는, 늘 도읍지(都邑地)를 새롭게 건설(建設)하며 궁성(宮城)을 축조(築造)한 것은 변함없는 일이었지만 : 「이처럼 전례(前例)를 찾아볼 수 없는 거대(巨大)한 성곽(城廓)과 도읍지(都邑地)를 건설(建設)한 것은, 고려(高麗) 왕조(王朝)가 유일무이(唯一無二)하며,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왕조(王朝)였다」라는 사실(史實)은 변함이 없다.
또한,
➋ 「이성계(李成桂)가 즉위(卽位)한 후(後)【AD 1,293年】에도 이곳 송도(松都)에 내성(內城)인 황성(皇城)을 쌓았는데, 그 둘레(주위)가 “20리(里) 40보(步)”에 달하는 규모(規模)였으며, 이는 모두 벽돌(甓)로 만들어졌다」라고 하였다.
「황성(皇城)에는 5개의 큰 문(門)을 만들었는데, “동대문(東大門), 남대문(南大門), 동소문(東小門), 서소문(西小門), 북소문(北小門)”등이 있었다【有東大、南大、東小、西小、北小等門】」라고 하였다.
➌ 「AD 1,394년 11월 21일(음력 10월 28일)에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 하였는데, 한양(漢陽)은 한수(漢水)의 북(北)쪽이다.」라고 하였는데,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즉위(卽位) 2년(年)【AD 1,293년(年)】송도(松都 : 松京 : 開城)에 대규모(大規模) 황성(皇城)을 쌓은 이유(理由)가 무엇이냐? 하는 거다.
“甓築內城”이라고 하였다. 「“벽돌(甓)”【진흙과 모래를 차지게 반죽하여 틀에 박아서 높은 열[600~1,100℃]로 구워 만든다】로 견고(堅固)하게 내성(內城) 즉 황성(皇城)을 쌓았다」라는 것이다. 이미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 작업(作業)이 진행(進行)되고 있음에도 수천(數千), 수십만(數十萬) 인(人)을 동원(動員)하여 대규모(大規模) 황성(皇城)을 쌓은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 하는 거다.
그렇다면 「고려(高麗)의 황성(皇城)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하는 의문(疑問)은, 매우 합리적(合理的)인 것이다. 이러한 기록(記錄)은 생생(生生)하게 살아있음에도, 그 자취는 어디에서 잠자고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혹(或), 너무나 소중(所重)하고 귀중(貴重)하여 수억(數億) 광년(光年) 외계(外界)에서 달려온 미확인비행물체(未確認飛行物體)를 타고 온 외계(外界)인들이 주춧돌(基礎石)까지 싹쓸이해갔을까?
‘반도(半島) 고려(高麗)’를 역설(力說)하며, 침을 질질 흘리는 학자(學者)들은 뭔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고려(高麗) 왕도(王都)의 외성(外城)인 나성(羅城), 내성(內城)인 황성(皇城) 및 대규모(大規模) 궁궐(宮闕)과 관청(官廳) 건물(建物), 수십만(數十萬) 호(戶)에 달하는 민가(民家) 등 ‘삼한통일(三韓統一)=통일환영(統一寰瀛)=천하통일(天下統一)’을 했다」라고 하는 그 흔적(痕迹)은 고사하고, 자취조차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제영(題詠)」 편을 보면 :
㈠ 〈遷遺井邑市荒涼。大明太祖高皇帝御製詩: “遷遺井邑市荒涼,莽蒼盈眸過客傷。園苑有花蜂釀蜜,殿臺無主兔爲鄕。行商枉道從新郭,坐賈移居慕舊坊。此是昔時王氏業,檀君逝久幾更張” 천유정읍시황량(遷遺井邑市荒涼) 명(明) 태조 고황제(高皇帝)가 지은 시에 : “도읍은 옮겨지고 샘은 남아 있어 저자는 황량한데, 푸른 들판이 눈에 가득하니 지나가는 손의 마음이 아프다. 동산에 꽃이 있으매 벌은 꿀을 만들고, 궁전과 누대는 주인 없으매 토끼 고장이 되었다. 행상들은 길을 돌아 새 성곽으로 가고, 앉은 장사는 점포를 옮겼으나 옛 방(坊)을 그리워한다. 이것이 지난날 왕씨(王氏)의 기업이니, 단군이 가신 뒤로 몇 번이나 바뀌었을까.”하였다.〉
위의 기록(記錄)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었다」라고 한다면 주원장(朱元璋)은 고려인(高麗人)으로 “고려왕(高麗王)이 임명(任命)한 관리(官吏)였다”라는 것을 고증(考證), 확인(確認)해주는 내용(內容)이다.
즉(卽) 「이것이 지난날 왕씨(王氏)의 기업이니, 단군(檀君)이 가신 뒤로 몇 번이나 바뀌었을까」라고 했기 때문이다.
㈡ 〈秘記猶傳九百年。大明僧溥洽應制詩:“秘記猶傳九百年, 前人已去後人遷。三京白日來狐兔,五部靑春醉管絃。木落神嵩寒泣雨,草深名苑晩生煙。聖朝恩宥寬如海,懽動東夷得幸全。” : 비기유전구백전(祕記猶傳九百年) 명(明)나라 중 부흡(溥洽)의 응제시에 : “비기(祕記)가 9백 년을 전해 내려오니 앞사람은 이미 가고 뒤에 사람 옮겨갔다. 삼경【三京 중경ㆍ동경ㆍ서경】의 백일(白日)에는 토끼와 여우가 놀고, 오부(五部)의 청춘(靑春)에는 풍악 소리에 취하였다. 나무 떨어지는 숭악(崧岳)은 차갑게 비에 울고, 풀이 우거진 후원에는 늦게 연기나네. 성조(聖祖)의 은혜가 바다같이 넓으니 동이(東夷)가 다행히 보전되매 기뻐서 감동하네.” 하였다.〉
고구려(高駒驪)가 900년을 이었으며, 고려(高麗) 또한 가고, 고황제(高皇帝)는 도읍을 옮겨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고려(高麗) 또한 삼경(三京)을 갖췄는데, 서경(西京)과 중경(中京)과 동경(東京)을 두었다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을 말해주고 있지 않다.
즉(卽) 횡축(橫軸) 선상(線上)에서 「서(西)쪽에 “서경(西京)”을 두고 가운데에는 “중경(中京)”을 두고 동(東)쪽에는 “동경(東京)”을 설치했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당시의 명(明)의 승려(僧侶) ‘부흡(溥洽)’이 말한 것이다.
㈢ 〈人物南遷市井空。李孟畇詩:“五百年來王氣終,操鷄摶鴨竟何功?英雄一去山河在,人物南遷市井空。上苑鸎花微雨後,諸陵草樹夕陽中。秋風客恨知多少,往事悠悠水自東。” : 인물남천시정공(人物南遷市井空) 이맹전(李孟畇)의 시에, “5백 년 내려오던 왕기(王氣)가 끝났으니 계림(鷄林)을 점령하고 압록강을 취한 것 마침내 무슨 공인고. 영웅은 한 번 가고 산하만 남았고, 인물은 남으로 옮겨가고 시정(市井)은 비었네. 상원(上苑)의 벚꽃은 봄비 뒤요, 여러 왕릉의 초목은 석양 가운데네. 가을바람에 손[客]의 한(恨)이 얼마런가. 지난 일은 유유하고 물은 절로 동(東)으로 흐르네.” 하였다.〉
「往事悠悠水自東 : 지난 일은 유유하고 물은 절로 동(東)으로 흐르네」라고 한 것을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은 중국(中國)의 것을 차용(借用) 또는 인용(引用)한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 100%이다.
그러나 냉정(冷靜)하게 생각해 보자. 유학자(儒學者)나 사대부(士大夫)나 그들은 자신(自身)이 몸을 담고 있는 조국(祖國)에 대한 지세(地勢)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자. 조국(祖國)의 발자취를 말하고 있다.
구태(舊態)하게 “남의 것을 차용(借用), 인용(引用)”할 그 어떤 이유(理由)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고, 그저 조국(祖國)의 산하(山河)에 대한 비유(比喩)하여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지난 일은 유유하고 물은 절로 동(東)으로 흐른다」라는 말은, 「조선(朝鮮) 영토(領土)의 지세(地勢)가 서(西)쪽에서 발원(發源)하는 많은 하천(河川)이 동(東)쪽으로 흘러 바다로 유입되고 있다」라는 것을 말해준다.
여러 왕조(王朝)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생각해 보면, 영웅(英雄)은 사라지고, 그러나 산하(山河)는 변함없는데… …덧없는 세월(歲月)을 한탄(恨歎)하고 있는데, “산하(山河)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유유히 동(東)쪽으로 흘러간다”라는 뜻이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이러한 기록(記錄)을 보고 말하기를 : 「사대주의(事大主義)에 환장(換腸)한 사대부(士大夫) 유학자(儒學者)들이 사대(事大)한 중국(中國)의 장강(長江)과 황하(黃河)를 비유(比喩)하여 만년(萬年)토록 변함없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침을 튀기며 역설(力說)할 것임은 보지 않아도 100%다. 한심(寒心)한 자(者)들이다.
㈣ 〈漢宮駝泣魂應黯。前人詩:“《麥秀》詩成曲未終,浮雲往事轉頭空。漢宮駝泣魂應黯,蜀國鵑啼淚尙紅。天地已歸三尺定,山河誰借一丸封?憑君莫問前朝事,江、漢如今盡向東” : 한궁타읍혼응암(漢宮駝泣魂應黯) 서거정의 시에, “맥수시(麥秀詩)가 이루어졌으나 곡조는 마치지 못하였는데. 뜬구름 같은 지난 일은 머리를 돌이키는 사이 비어졌네. 한궁(漢宮)의 동타(銅駝)가 우니 혼(魂)이 응당 슬플 것이요, 촉나라의 두견새가 우니 눈물도 오히려 붉다. 천지는 이미 삼척(三尺)으로 정한 데로 돌아갔고, 산하(山河)는 누가 한 덩이의 진흙을 빌려 봉했는고, 그대는 전조의 일을 묻지도 말라. 장강(長江)과 황하(黃河)【필자(筆者) 주(注) : 번역(飜譯)은, 황하(黃河)라고 하였다. 그러나 원전(原典)은, 「한(漢)」이라고 하였으니 「한수(漢水)】를 말하는 것이다.】가 지금에는 모두 동(東)으로 흐른다네.” 하였다.〉
〈江、漢如今盡向東 : 장강(長江)과 한수(漢水)는 지금도 동(東)쪽을 향하여 흐른다〉라고 하였는데, “고전번역원”의 번역(飜譯)은 “한(漢)”을 “황하(黃河)”라고 하였다.
원문(原文)을 보면 : 〈漢宮駝 泣魂應黯。前人詩:《麥秀》詩成曲未終,浮雲往事轉頭空。云云,蜀國鵑啼淚尙紅。天地已歸三尺定,山河誰借一丸封?憑君莫問前朝事,江、漢如今盡向東〉라고 하였다.
“원문(原文) 이미지”를 봐도 「江、漢 如 今 盡 向 東」이라고 한 것을 보면 : “오류(誤謬)가 아니다”라는 것이고, 「당시(當時)에 황하(黃河)를 한수(漢水)라고 했다」라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개성부(開城府) 하(下) “제영(題詠)”편의 “漢宮駝泣魂應黯。前人詩”의 원문(原文) 이미지를 보면 : 「江、漢 如 今 盡 向 東 : 강(江 : 長江)과 한수(漢水 : 黃河)는 지금도 동(東)쪽을 향(向)하여 흐른다」라고 하였다. 【출처(出處) : 고전번역원 DB】
여기서 「한수(漢水)」는 두 곳에 있는데, ➊ 첫째 대륙(大陸)의 한수(漢水)는 남(南)쪽을 향하여 흐르다가 장강(長江)에 들어가는 하천(河川)이고, ➋ 두 번째 반도(半島)의 ‘한수(漢水)=한강(漢江)’은, 서(西)쪽을 향(向)하여 흐르는 하천(河川)이기 때문이다.
결국(結局) 위 원문(原文)에서 말하는 「“한수(漢水)”는 “황하(黃河)”의 다른 이름(異稱)이었다는 결론(結論)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다.
㈤ 〈金九容詩:“煙橫嵐嫩隱樓臺,瀟灑山川活畫開。初日上雲光照耀,晴雲低地影徘徊。東馳西走衣冠盛,萬戶千門紫翠堆。王國幾多豪傑士,可憐誰展濟時材。”: 소쇄산천활화개(瀟灑山川活畫開)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연기가 비끼고 산 아지랑이 부드러워 누대(樓臺)를 숨겼는데, 소쇄한 산천은 살아 있는 그림같이 펼쳐졌네. 아침 해가 구름 위로 올라오니 빛이 더욱 찬란하고 개인 구름이 땅에 낮게 내리니 그림자가 흔들거린다. 동(東)쪽으로 달리고 서(西)쪽으로 달리는 의관(衣冠)들은 성하고 만호 천문(萬戶千門)은 붉고 푸른 무더기네. 이 나라의 허다한 호걸들이 가련하다. 누가 세상을 건질 재주를 펼까.” 하였다.〉
고려(高麗)의 영토(領土)는 동서(東西)로 크게 확장(擴張)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내용(內容)이다. 즉(卽) 「東馳西走衣冠盛,萬戶千門紫翠堆。: 동(東)쪽으로 달리고 서(西)쪽으로 달리는 의관(衣冠)들은 성하고, 만호 천문(萬戶千門)은 붉고 푸른 무더기네」하였으니 말이다.
➊ 「東 馳 西 走 衣 冠 盛 : 동(東)쪽으로 달리고 서(西)쪽으로 달려가는 의관(衣冠)들은 성하고」라는 말은, 의관(衣冠)이란 옛 사대부(士大夫)가 정식으로 갖추어 입는 옷 즉 관리(官吏)들의 정식(定式) 복장(服裝)을 말하는 것이니, 「관리(官吏)들이 동(東)쪽으로 서(西)쪽으로 왕명(王命)을 받고 달려가는 자(者)들이 아주 많았다」라는 뜻이요.
➋ 「萬 戶 千 門 紫 翠 堆 : 만호 천문(萬戶千門)은 붉고 푸른 무더기네」라는 말은, 만호천문(萬戶千門) : 고려(高麗)의 대궐(大闕)로 드나드는 문호(門戶)가 아주 많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 「고려(高麗) 조정(朝廷)의 여러 부서(部署)에서 왕명(王命)을 받은 관리(官吏)들이 의관(衣冠)을 챙겨입고 이곳저곳의 대궐문(大闕門)을 나가 각지(各地)로 떠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라고 본다.
특히 고려(高麗) 땅은, 「남북(南北) 및 동서(東西)로 넓은 영토(領土)를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동서(東西)로는 더욱 커져서 왕명(王命)을 받은 관리(官吏)들이 동(東)쪽과 서(西)쪽으로 바삐 달려 다녔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惕若齋先生學吟集(척약재선생학음집)卷之上 : 通善郞晉陽大都護府判官兼勸農兵馬團練判官男明理編 / 詩 : 松京曉望 : 煙橫嵐嫩隱樓臺。瀟灑山川活畫開。初日上雲光照耀。晴雲低地影徘徊。東馳西走衣冠盛。萬戶千門紫翠堆。王國幾多豪傑士。可憐誰展濟時材。上雲字。疑空字。/ 김구용(金九容), 1338년(고려 충숙왕 복위 7)∼1384년(우왕 10)】
〈曠望苽田路,嵯峨柳院樓。夕陽行路却回頭,紅樹五陵秋。城郭遺基壯,干戈往事悠。村家童子不知愁,橫笛倒騎牛。 : 멀리 바라보이는 참외 밭길이요, 높이 솟은 유원루(柳院樓)에 석양에 길을 가다가 문득 오릉(五陵)의 붉은 나무 가을에 머리를 돌리다. 옛 성곽은 옛터가 웅장하고 난리는 지난 일 아득하다. 마을 아이들은 시름을 몰라 소를 거꾸로 타고 피리 불면서 간다〉라고 하였다.
「오릉(五陵)」 : 오릉(五陵)은 함양(咸陽) 부근에 있는 서한(西漢) 다섯 황제의 능을 말하는 것이다. 즉(卽) 위수(渭水)의 북(北)쪽, 함양(咸陽) 북(北) 오릉원(五陵原)에 있는 전한(前漢)=서한(西漢)의 “장릉(長陵)【高帝 劉邦】• 안릉(安陵)【惠帝 劉盈】• 양릉(陽陵)【景帝 劉啟】• 무릉(茂陵)【武帝 劉徹】• 평릉(平陵)【昭帝 劉弗陵】”의 오릉(五陵)」을 말하는 것이다.
이곳은 동(東)쪽으로는 고능현(高陵縣), 북(北)쪽으로는 경양현(涇陽縣)과 접하고, 남(南)쪽으로는 위하(渭河) 북안(北岸)에 닿는다.
위의 글을 음미(吟味)해 보면 : 진행형(進行形)이다. 즉(卽) 「曠望苽田路,嵯峨柳院樓。夕陽行路却回頭,紅樹五陵秋。城郭遺基壯,干戈往事悠。村家童子不知愁,橫笛倒騎牛。: 멀리 바라보이는 참외 밭길이요, ➡높이 솟은 유원루(柳院樓)에, 석양에 길을 가다가 문득 머리를 돌리니, 붉은 나무의 오릉(五陵)은 가을이다. 옛 성곽은 옛터가 웅장하고, 난리는 지난 일 아득하다. 마을 아이들은 시름을 몰라, 소를 거꾸로 타고 피리 불면서 간다」라고 하였으니… …【➡ 이 부분(部分)은, 필자(筆者)가 번역(飜譯)을 고친(修正) 것이다】
저자(著者)가 길을 가면서 바라보이는 장면(場面) 곧 풍경(風景)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남의 것을 인용(引用)한 것도 아니요, 차용(借用)한 것도 아니다.
높게 솟아있는 유원류【嵯 峨 柳 院 樓】, 붉은 나무로 둘러싸인 오릉(五陵)【紅 樹 五 陵 秋】의 흔적(痕迹)은 어디에서 찾을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當時)에는 분명(分明) 존재(存在)하고 있었으니 이런 기록(記錄)이 존재(存在)할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이 어디냐? 하는 문제(問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결국(結局), 「송도(松都)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릉(五陵)” 역시(亦是) 전한(前漢)의 것이 아닌 “고려(高麗)의 오릉(五陵)”이어야 올바른 것이다.
► 오릉(五陵) : ➊ 한반도(韓半島) 땅에서는 경주(慶州)의 「오릉(五陵)【박혁거세(朴赫居世), 알영부인(閼英夫人 : 허황후), 남해왕(南解王), 유리왕(儒理王), 파사왕(婆娑王)】」이라고 하지만 전혀 실체(實體)가 없는 허구(虛構)일 뿐이다.
➋ 고려(高麗) 오릉(五陵) : 「태조(太祖) 현릉(顯陵), 혜종(惠宗) 순릉(順陵), 정종(定宗) 안릉(安陵), 광종(光宗) 헌릉(憲陵), 경종(景宗) 영릉(榮陵)」을 말하는 것일까? 【광종(光宗)과 경종(景宗) 사이에 추존(推尊)된 대종(戴宗)의 태릉(泰陵), 안종(安宗)의 무릉(武陵)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확인(確認)된 바가 없다. 말만 앞세워 “존재(存在)한다”라고 주장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高麗史 世家 文宗 13年【AD 1,059年 5月 2日】 : 〈五月 乙未 盜入顯陵廟室, 下陵室侍衛大將軍殷貞等獄, 罪之 : 5월 을미(乙未) 일에 현릉(顯陵) 묘실에 도둑이 들었으므로 능실시위대장군 은정등을 하옥하고 벌을 내렸다〉라고 하였으니,
분명(分明) ‘현릉(顯陵)’은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重要)한 것은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송도(松都) 땅이 아니었다」라는 것이다.
“반만년(半萬年) 역사를 자랑한다”라는 한반도(韓半島)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의 수많은 군주(君主)의 왕릉(王陵)에서 분명(分明)하게 밝혀진 것이 있는가? 단 한 개의 왕릉(王陵)도 없다. 말로는 부여(扶餘)에, 경주(慶州)에, 개성(開城)에, 평양(平壤)에 있다고만 하지, 그 실체(實體)가 밝혀진 것은 단 한 곳도 없다는 것이다.
또 고조선(古朝鮮) 이래(以來)로 기자조선(箕子朝鮮), 위만조선(衛滿朝鮮), 삼한(三韓)의 78∼79개 나라, 삼국(三國)과 고려(高麗), 이단(李旦)의 조선(朝鮮)까지에 이르는 동안의 임금의 묘지(墓地)인 왕릉(王陵)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직접적(直接的)으로 밝혀진, 분명(分明)하게 밝혀진 왕릉(王陵)이 있느냐? 묻는 것이다. 그저 말로만, 한글 해설서(解說書)에서만이 “있다”라고 하며, 이곳저곳에 팻말을 박아놓고 설명(說明)한다고 해서 그게 왕릉(王陵)이 되는 건가!
㈥ 武陵雜稿卷之三 原集 / 詩 / 弘濟院橋。別許副使汝珍。伯琦號浩齋 金正郞原仲。同呈。 : 〈薊路八千遙。初過第一橋。兩京猶照月。獨鶴正橫遼。古廟尋周器。明庭聽舜韶。歸來富新什。莫遣二毛凋。 兩京松都,平壤. 〉【武陵雜稿의 저자(著者)는, 주세붕(周世鵬) 1,495년(연산군 1) ∼ 1,554년(명종 9)이다.】
「계로(薊路)란 계(薊) 곧 북경(北京) 땅을 말하는 것인데, 이곳이 8 천리(千里)로 아주 먼 곳에 있다」라는 것이다. 이때는 송도(松都)와 평양(平壤), 양경(兩京)을 두었다고 하였다.
「계(薊)」 땅인 “북경(北京)”까지 ‘8 천리(千里)’란 말은 연행록(燕行錄)에서 말하는 ‘3 천리(千里)’와는 전혀 다른 먼 서(西)쪽을 말해준다.
○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이야기다. 「(1)•(2)•(3)•(4)•(5)•(6)•(7)」의 경우(境遇)를 생각해 보면 : 틀림없는 것은 「고려(高麗)는 그 규모(規模)를 보면 : 한반도(韓半島)는 너무도 작고 좁아 3경【서경(西京)•중경(中京)•동경(東京)】 및 주군현(州郡縣)을 담을 수 있는 땅(領土)이 없다. 고려(高麗)의 수만리(數萬里) 땅은, 동방(東方)의 땅, 대륙(大陸)의 주인공(主人公)이었다」라는 것이다. 한반도(韓半島) 땅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역사(歷史)다.
성도(成都)와 송도(松都)! 한자(漢字)를 혼동(混同)할 수 있는 비슷한, 유사(類似)한 글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발음(發音)이 같은 글자도 아니다. 왜 성도(成都)와 송도(松都)는 형승지지(形勝之地)까지도 같아야만 했을까? 형승지지(形勝之地)가 같다는 말은 곧 지세(地勢)가 같다는 뜻이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성도(成都)를 성천도호부(成川都護府)를 칭(稱)한다」라고 헛소리를 지껄인다. 「그럼 성천도호부(成川都護府)의 지형지세(地形地勢)가 송도(松都)와 닮았냐? ‘헛소리’에는 ‘몽둥이’가 약(藥)이라고 한다.」
「5 백년(百年)!」
결코 짧은 세월(歲月)이 아니다. 그 500년(年) 세월(歲月)을 영위(營爲)하는 동안 그 많았던 황제(皇帝), 비빈(妃嬪), 황자(皇子), 공주(公主) 등의 황손(皇孫)들과 수를 헤아릴 수없이 많았던 제후(諸侯)들과 대신(大臣)들의 무덤은 왜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일까?
모두가 파괴(破壞)되었다고 한다고 이해(理解)될 수 있을까? 단 몇 년(年)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는 대륙(大陸)의 형편(形便)을 보면 : 「황제(皇帝), 비빈(妃嬪), 황자(皇子), 공주(公主), 배총(陪塚), 지방(地方)의 제후(諸侯), 태수(太守), 군수(郡守) 등등의 호화(豪華)스러운 무덤들은 오늘도 수천(數千) 년(年)을 이어 오늘날까지도 과거(過去)의 기록(記錄)을 증거(證據) 해주고 있다.」이건 무엇 때문인가?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고 주장(主張)하는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종이[紙:Paper] 위에 그려진 허구(虛構)의 봉건왕조(封建王朝), 그림자[影 : Shadow] 왕조(王朝)였는가? 반도(半島) 땅의 역사학계(歷史學界)에 있는 분들께 묻고 싶은 말이다.
아주 근소(僅少)한 차이(差異), 유사(類似)한 년대(年代), 수천(數千) 년(年) 이어온 역사(歷史) 속에서 수년(數年) 또는 수십(數十) 년(年)의 차이(差異)는 분별(分別)하기가 매우 어렵다. 대륙사(大陸史)와 조선사(朝鮮史)는 왜 이렇게 한 묶음으로 만들어져 있는가? 모든 것이 일란성(一卵性)쌍둥이다.
○ 좋은 뜻으로, 또는 비웃는 말로 재야학계(在野學界)라고 부르는 곳이 바로 사학계(史學界)에 존재(存在)한다. 우리가 아무리 새로운 것을 근거(根據)로, 증거(證據)로 내세워 본들 그저 우리들의 뒷마당에서 우리 끼리끼리 치고, 박고 있을 뿐이다.
먼 곳에 있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는 것 먼저 공략(攻略)하는 것이 순서(順序)가 아닐까 생각해보며, 더불어 복습(復習)에 복습(復習)을 더하는 세련(洗練)된 자세(姿勢)가 필요(必要)해 보인다.
또한 기록(記錄)을 앞세워 기록(記錄)을 고증(考證)하고 증거(證據)를 찾는 순서(順序)야 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록(記錄)이 없는 것은, 증거(證據)를 찾는다고 해도 결국(結局) 추측(推測)과 추정(推定)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럴 것이다. 추정(推定)한다. 추측(推測)한다. 비정(比定)한다」등은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의 전매특허(專賣特許)와 같다. 우리도 그들을 따라가서야 되겠는가?」
2024년 06월 16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다음 게재분에서는,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출생과 관련된 이설(異說) 곧 다른 기록과 주장"에 대해 알아보기로 할까 합니다.
물론 이설(異說)은,
'조선사'에서 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