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어찌 기쁨만 있으랴?
모질게도 긴 여름더위다. 태풍의 기운이 한차례 휘젓고간 하늘, 창밖엔 둥근 달이 떴다. 칠십이 넘은 이 나이에 어린애처럼 문득 부모님 생각이 떠올랐다. 냉장고에서 막걸리 한통을 꺼내들었다. 한동안 보관만 되었던 것이다.
한컵 술에 달한번 쳐다보고, 부모님 생각하기를 거듭했다. 일제와 6.25 그리고 보릿고개, 가난하게 살다가신 부모님...막걸리 향에 취하여 생각하니 눈물이 핑돈다.
어린 시절 이때쯤이면 마당에 모깃불 피우고 대청마루에 가족 모두 둘러앉아 풍성한 가을을 기다리며 달구경을 하였을 터이다.
세상을 살아가다 언젠가는 울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내가 울어 본 적이 그 언제이던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버님이 돌아 가셨때나 어머니가 떠나셨을 때도 입술을 깨물며 눈물은 흘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남자라고 울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일생에 세번은 운다고 하였다. 그런데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음은 세파에 오염되어 눈물주머니가 말라버리고 만 것일까?
강자의 눈물은 승리의 감격이고, 약자의 눈물은 슬픔이고 고달픈 삶의 아픔이다.
세상살이가 어려워질수록 싸움질도 자주하게 된다. 옛날엔 일어나지도 않았던 자동차 주차문제, 잡다한 사연들이 비대면 휴대전화가 그 매개체가 된다.
쓸데없이 대가리 큰넘들은 군대를 일으켜 전쟁을 일으킨다. 알고 보면 탐욕덩어리, 부질없고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다 서글픈 세상살이의 단면이다.
싸움의 결과는 감정이 상하거나 이별과 일시적 슬픔일 수도 있다. 그리고 전쟁은 수많은 사상자와 기아를 만들어 낸다.
어릴 때 동네에서 어린 자식을 두고 부모가 죽으면 사람들 모두가 눈물을 같이 흘리며 슬퍼했다.
장지를 떠나는 상여를 마당에 두고 발인제를 지낼 때 자식들은 상여를 보고 자지르지게 울고, 동네 사람들은 두고 떠나는 어린 자식들을 바라다보며 슬퍼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끝까지 참는 사람들도 돌아서 안그런척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당시엔 죽은 사람의 유가족이 별로 없는 집에서는 문상객이 오면 동네사람들이 대신 형식적으로 울어주는(조선시대에는 통곡비 : 痛哭婢라고 하였음) 흐뭇한 광경들을 보았다. 죽은 사람을 추모하고 남은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요즘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장례식장에서도 그렇게 슬픈 기색을 보기가 드물다. 죽음을 예측하고 세련되어서 일까? 어쩌면 고인이 남기고간 잿밥에 더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느 인간은 부모에게서 얻을게 없더고 일년 가까이 사체를 장례식장에 두고 찾아가지도 않더란다.
우리네 사회에서는 진정한 슬픔의 눈물도 많다. 나는 오래전에 읽었던 빅토르 위고의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못한다.
'가난한 어부의 아내 잔니는 남편이 차가운 비바람 부는 어둠속에서 쪽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후 걱정에 쌓였다. 평소 먹을 것이 부족하여 보리빵을 먹고, 맨발로 뛰어 다니던 다섯 아이들이 곤히 잠들고, 거센 찬바람이 드세지자 평소 남편이 걱정하던 가난한 이웃의 과부가 생각났다.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다 발견된 과부는 자신의 자켓을 벗어 두아이를 덮어주고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쟌니는 찢어지게 가난하면서도 과부의 두아들을 데려다 돌보았다.'
자신도 가난하면서도 더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자유와 박애정신, 사람에 대한 연민을 이 작품에서 엿볼수 있었다
옛날 아이들은 배고픔이나 질병의 아픔으로 울었다. 울음 자체도 순수하였고 울다가 지치면 땅바닥에 나딩굴어져 자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아이들은 시대를 잘 타고나서 배고프지도 않고, 질병으로부터의 고통도 적은 편이다. 그런데도 그 울음소리는 옛날보다 더 구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럴까?
요즘 아이들은 울면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많은 것들을 부모들이 다 충족시켜 주어서 부족함이 적으면서도 자신들의 마음을 부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영특함이 나타난다. 말 그대로 부모와의 의견대립이고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려는 고집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래도 나는 그러한 어린애들의 울음소리가 더욱 더 처량하게 느껴진다.
‘울고 싶어’라고 노래했던 가수 배호는 남보다 너무 일찍 먼 길을 떠났고, ‘울고 싶어라’며 거지왕초 같고, 어쩌면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 같던 이남이도 중병이 걸렸으나 말년에 중광스님 등 문인들과 어울리는 삶을 살다가 길을 떠났다고 하였다.
유행가 가사가 그렇다고 그들이 일찍 우리들의 곁을 떠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이 울고 싶은 세월을 남겨두고 자신들의 가까운 이웃들에게 이별의 슬픔을 안겨주고 떠났는지도 모르겠다.
눈물은 슬픈 마음의 거울이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울고, 살아가면서 인생의 고달픔의 과정에서 눈물짓고, 죽어 나의 육신이 형체가 변해가는 순간 남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울어주는 것이다.
눈물짓는 사람의 가슴은 아프다. 새벽엔 하늘도 슬픈지 거칠게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인간이 함부로 자연을 회손하고, 반성의 기미가 없는데 대한 분노의 눈물이었으리라.
울고싶은 감정을 구태여 숨길 필요는 없다. 기쁘면 기쁜대로...그러나 세상사 기쁨만 있겠는가? 슬플땐 울자.
살아가면서 슬픔의 눈물을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자연과 인륜에 순종하며 때론 어려움을 헤치고 나가는 감격의 눈물을 흘릴 기회가 종종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