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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예산 문인(2)
예산군에서 예산지명탄생 110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디지털 예산문화대전 편찬사업을 2017. 6월 공모신청하여 선정되었다. 군은 국비 1억 5000만원, 군비 3억 5000만원 등 총 사업비 5억 원으로 예산의 역사, 지리, 정치, 행정, 문화, 인물, 교육, 민속 등 다양한 정보를 수록해 2019년 「디지털 예산문화대전』을 편찬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주관으로 편찬하는 예산문화대전을 기존의 책자위주에서 발간 방식을 탈피했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웹 서버 디지털 방식으로 다양한 사진과 동영상을 수록해 자료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예산 문인(1)에서 빠진 문인을 「디지털예산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옮겨 조선시대의 예산 문인(2)의 글을 작성했다.
조선시대 예산 지역의 문학은 조선 4대 명필이며 인수체의 창시자이고 문장가였던 「화전별곡」의 자암(自庵) 김구(金絿)[1488~1534, 신암]로부터 시작한다. 우계 성혼과 성호 이익의 조카로 성호가학을 이었던 『혜환시초(惠寰詩抄)』의 혜환(惠寰) 이용휴(李用休)[1708~1782, 고덕]는 아들 이가환과 함께 당대 최고의 한시 작가였다. 이후 『완당전집(阮堂全集)』에 300여 수의 한시를 남겼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신암], 일본통신사, 속환사로 일본과 중국을 넘나들었던 『선석가사(仙石歌辭)』의 선석(仙石) 신계영(辛啓榮)[1577~1669, 신암],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의 동암(東岩) 박두세(朴斗世)[1650~1733, 대흥], 여류 시인 남정일헌(南貞一軒)[1840~1922, 예산읍]의 『정일헌시집』으로 이어지게 된다.
1. 이흡〔李洽, 1549 ∼1608〕조선 후기
1549년(명종 4) 예산에서 태어났다. 북애(北厓) 이증(李增) 문하에서 수학한 뒤 1573년(선조 6)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8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호조좌랑, 능성현감, 경기도도사 등을 역임한 뒤 1589년 경차관(敬差官)으로 관동 지방의 재난을 살피기도 하였다.
그는 1591년 헌납으로 재임 중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로 복직해 명나라 사신의 접반관(接伴官)‚ 양주목사, 숙천부사, 광주목사 등을 지냈다. 1602년 최영경(崔永慶) 옥사 사건이 다시 거론되면서 관직을 삭탈당하고 옥구(沃溝)에 유배되었다. 1607년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이듬해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은 시와 묘지명 등을 모아 엮은 『취암이공실기(醉菴李公實記)』가 전한다.
그의 묘소는 봉산면 봉림리 산5-1에 있으며, 1800년(정조 24) 호서지역 유림의 발의로 덕산 회암서원에 배향되었다.
2. 조진〔趙振, 1535 ∼ 〕
조정과 형제로 벼슬이 공조판서, 판중추부사에 올랐다. 이황의 문인으로 예제(禮制)를 만들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喪制禮抄』이다. 그의 묘소는 신양면 신양리에 있다.
3. 이영원〔李榮元, 1565 ∼ 1623〕조선후기
1565년 덕산현 고산면 높을미[현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서 태어났다.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권필(權韠)·임숙영(任叔英)과 벗으로 친하게 지냈다. 또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도 교류가 깊었다고 한다. 이영원은 일찍이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산과 강을 다니며 시와 술을 즐겼고, 성리학 연구와 이념을 실천하는 데 솔선수범하는 생활을 하였다.
선조 때 신하들끼리 붕당을 형성하여 당쟁이 매우 심해지자 이영원은 나라의 상황을 위태롭게 여기고 극단적인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을 알게 된 사람들은 걱정스럽게 생각하였는데 이영원은 매우 태연하였다고 한다. 이영원은 사람들의 다급한 일을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었으며 친족들과 함께 의창을 설립하여 굶주린 사람을 구제하고 상례와 제사를 치르도록 하였다. 1623년(인조 원년) 5월 9일 사망하였다.
스승인 송익필에게 학문적 감화를 받아 율곡(栗谷) 성리학의 지향처인 실천궁행(實踐躬行)이라는 뚜렷한 생활 목표를 확립하였다. 이이(李珥)가 38세 때 “일등인(一等人)은 과거에 매달리지 않는다.”라고 한 주장에 크게 공감해 과거에 응할 생각을 버리고 일등인을 자처하며 평생을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저서는 [遺稿』이다
4. 이재위〔李載威, 1745∼1826〕조선후기
1745년(영조 21) 덕산 장천리[現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가환과 더불어 만물의 품성은 인류의 과학적 분석에 의해 일상생활에 이용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실학의 성격상 모든 사물을 실질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요구되고 벌레나 물고기, 초목이라 하여 무심코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이재위 부자의 실학사상은 『물보』를 통해 더욱 체계화되었다. 1826년(순조 26) 사망하였다.
『물보』는 1770년경 이가환이 초고를 쓰고, 이재위가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서문은 이재위가 썼는데, “운포(芸圃)[이가환] 선생이 한국 사람이 물명(物名)에 소홀한 것을 병통으로 여겨 그때마다 수록해 두었다.”라고 저술 동기를 밝히고 있다. 내용은 천생만물(天生萬物)과 인위만사(人爲萬事)의 이름을 모아 놓은 것이다. 천생만물에는 초목부(草木部)·충어부(蟲魚部)·충치부(蟲豸部)·조수부(鳥獸部)가 있으며, 인위만사에는 신체·인도(人道)·기계(器械)·기용부(器用部) 등이 있다. 이름에는 한자명 외에 한글명을 달았다. 『물보』 말미에 있는 이가환의 문인 이기경(李基慶)의 발문에 따르면, 이기경이 이가환에게서 사본을 받아 다시 베껴서 가지고 있었는데, 뒷날 이재위를 만나 확인해 보니 편차가 있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이돈형본과 한글학회본의 차이는 이로 말미암은 듯하다.
그의 묘는 고덕면 상장리에 있었으나 1987년 후손들이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매산묘원으로 이장하였다.
5. 이서〔李漵 1662 ∼1723〕조선후기
1662년(현종 3) 서울 정동에서 이하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잠시 덕산[현 예산군 고덕면]의 숙부 이명진에게 나가 살았으며, 열 살 때부터는 숙부 이주진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에서 거주하였다. 아버지 이하진과 둘째 형 이잠이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벼슬에 나가지 않고 향촌에서 은거하였다. 이서는 지속적으로 예산 지역과 인연을 이어갔는데 형인 이침(李沈)이 덕산에 거주하던 숙부 이명진의 양자로 입적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이침의 자손들이 제자로서 이서의 서법을 전수받아 예산의 여주이씨 가풍으로 동국진체를 전파하였다. 사후에 이서는 서도(書圖)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서예 이론가이자, 성호 이익과 예산에 거주하던 이하진의 자손들에게 여주이씨 가문의 실학적 학풍을 이어 준 학자로 평가받았다.
조선 시대 최초의 서예 이론서인 『필결(筆訣)』을 저술하여 서예가 학문적으로 확립되는 데 기여하였으며, 영·정조 시대 조선의 특색을 잘 담아낸 동국진체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저술로는 문집인 『홍도유고(弘道遺稿)』가 있다.
그의 묘는 고덕면 상장리에 있었는데 여주이씨 후손이 강원도로 이장하였다.
1723년 문인들이 사시(私諡)[문장과 도덕이 뛰어난 선비이나 지위가 낮아 나라에서 시호를 내리지 아니할 때, 친척이나 고향 사람 또는 제자들이 올리던 시호]를 의논하여 홍도선생(弘道先生)이라 정하였다. 이서가 만들어 연주하던 거문고인 옥동금(玉洞琴)이 현존하여 경기도 안산의 성호기념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국가민속문화재 제283호로 지정되었다.
6. 이약수〔李若水 1486∼1531〕조선전기
1486년(성종 17) 현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태어났다. 1510년(중종 5)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18년 성수침(成守琛)·서경덕(徐敬德) 등과 함께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성균관에서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되자 성균관 유생 150여 명과 함께 궁궐에 나아가 상소를 올리고 통곡하였다. 이 일로 중종의 노여움을 사 윤언직(尹彦直)·홍순복(洪舜福)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1521년 평해(平海)에 유배되었다가 1531년 대흥으로 이배를 당하였고 같은 해 사망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시문집인 『우천유고(牛泉遺稿)』 1책이 전한다. 시 461수, 부록으로 연보·세계·중종실록초(中宗實錄抄)·제가차록(諸家箚錄)·제문·상향축문·상량문·기묘사화일문구현(己卯士禍一門九賢)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묘소는 예산군 대흥면 교촌리 산7-79에 있다.
1605년(선조 38) 설원(雪寃)[원통한 사정을 풀어 없앰]되었고, 1708년(숙종 34) 대흥현 우정사(牛井祠)[현 우천사우]에 봉향되었다.
7. 우계(牛溪)성혼〔成渾)[1535~1598〕조선전기
1543년(중종 38) 여덟 살 때 숙부 성수종(成守琮)이 덕산현감으로 부임하자 아버지를 따라 외할머니와 함께 잠시 덕산 가야사에서 거주하였다. 1544년 기묘사화 후 아버지를 따라 파주 우계로 옮겨 살았다. 1551년(명종 6)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다.
학문 경향은 이이와 1572년부터 6년간에 걸쳐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한 왕복 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서신에서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해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비판하기도 하였지만, 이후 이이와 이황의 학문을 절충하였다. 성혼의 학문은 외손자 윤선거(尹宣擧), 사위 윤증(尹拯)에게 계승되면서 소론학파의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문인으로는 조헌(趙憲)·황신(黃愼)·이귀(李貴)·정엽(鄭曄) 등이 있다.
그의 저서로 문집인 『금대관집(錦帶館集)』 10책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다른 저술로 『시문초(詩文艸)』 4권 4책, 『시문초』 1책, 『시문(詩文)』 2권 1책, 『금대시문초(錦帶詩文抄)』 1책, 『금대전책(錦帶殿策)』 등이 있고, 성수침의 유고와 아우 성수종(成守琮)의 『절효선생유고(節孝先生遺稿)』를 부편(附編)한 유문집 『청송집(聽松集)』이 전한다.
8 . 이철환(李喆煥)[1722~1779]
본관이 여주(驪州)이고 출생지는 덕산현(德山縣)[예산군 덕산면 지역의 조선 시대 행정 구역]이다. 이광휴(李廣休)와 해주 정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아우인 이삼환(李森煥)과 함께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상산삼매(象山三昧)』는 예헌(例軒) 이철환(李喆煥)[1722~1779]이 1753년 10월 9일부터 1754년 1월 29일까지 약 4개월에 걸쳐 충청도 가야산 [678m] 일대를 여행하고 기록한 유람기이다.
『상산삼매』는 이철환이 상산(象山), 즉 가야산에 들어가 절에서 기숙하며 승려들과 가야산을 유람한 뒤 적조암(寂照庵)에서 기록한 유람기이다. 가야산은 백제 때 상왕산(象王山)이라 불렀는데, 삼국 통일 후 산 밑에 가야사를 세운 뒤 가야산이라 하였다.
『상산삼매』는 이철환이 몇 달간 가야산에 머무르며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쓴 것이기에 당시 가야산 사찰과 암자에 관한 내용이나 가야산의 산봉우리들의 이름과 내력 등을 잘 묘사하였다. 자연 경관, 가야산의 명칭, 가야산 일대 100여 개의 사찰과 암자, 사찰에서 시행된 음악 연주와 연희, 꼭두각시놀이, 사찰 관련 전설, 수정봉에서의 깨달음, 증암(甑巖)에서 본 낙조, 적조암에서 쓴 후지(後識) 등을 기록하고 있다.
『상산삼매』는 가야산을 비롯한 인근 내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 중의 하나이다.
그는 스스로를 삼교주인(三敎主人)이라 할 정도로 유교, 불교, 도교에 두루 박식한 것은 물론 포용적인 자세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철환이 지은 저서로는 『상산삼매』가 있고, 편서로는 『섬사편(剡社編)』과 『물보(物譜)』가 있다.
『상산삼매』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 참고문헌
이글은「디지털예산문화대전』다음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의 원문에 기록된 내용을 검색하여
작성을 했습니다.
첫댓글 열정 높은 부회장님 잘 다녀갑니다
어제 새벽녁
대흥면에
서거정, 한문준, 도응,
신양면 김려, 박두세
덕산면 이안눌, 조희일 선배문인 만났습니다.
부지런한 최병교 선배님 감사합니다
귀중한 자료 2탄이네요. 두로 수고 많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