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광종의 개혁과 왕권 강화

태조 왕건이 재위 26년만에 주고 뒤를 이어 혜종이 즉위했다. 태조가 생존해 있을 대에는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공훈을 세운 공신이나 강력한 지방 세력들이 진심으로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태조 사후에는 배다른 왕자들 사이에 왕위 계승을 놓고 불화가 발생했으며. 신하들 역시 분열되어 권력 투쟁을 벌임으로써 고려 정국은 불안하게 되었다.
태조의 큰아들 혜종은 장화왕후 오씨 소생이다. 태조가 궁예의 장군으로서 나주를 경영할 때 목포 해안에 배를 대고 상륙하려고 육지를 바라보니 시냇물 위에 오색 구름이 떠 있었다. 이상히 여겨 가보았더니 아리따운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로 사랑하게 되었는데 이 여인이 후에 장화왕후에 봉해진 오씨 부인이다. 이 무렵 태조 왕건의 나이가 이미 30여 세에 달해 당시로는 자식이 늦은 셈이었는데, 맏아들 태자 무까지 낳아 주자 태조의 사랑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왕건이 즉위한 후 후계자를 정하는데 있어서 큰 고민이 생겼다. 태자 무가 7 살이 되자 태조는 그가 왕위를 계승할만한 덕성을 가졌음을 알고 후계자로 삼고자 했으나, 어머니 장화 오씨의 친정 집안인 목포 오씨 가문이 견훤군의 침략으로 몰락함으로써 태자 무를 도와줄 세력이 너무도 미약했던 것이다. 그래서 태조는 국가에 공훈을 세워 조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충남 면천의 세력가 박술회를 후견인으로 정해 주고 태자 무를 후계자로 정한 후 눈을 감았다.
그러나 혜종 즉위 초년의 상황은 태조가 우려했던 것 이상으로 혼란스러웠다. 태자 무의 이복 동생 태자 요와 태자 소는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던 외척 충주 유시 가문의 후광을 업고 왕권을 잡을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두 딸을 주어 태조의 자인이 되었던 왕규 역시 태조와 자기의 작은 딸 사이에서 태어난 광주원군을 왕으로 삼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헤종은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대장부다운 용맹을 뽐냈던 태자 시절과는 다리 소극적이 자기 방어에만 급급한 나머지 항상 주변에 용사를 대동하고 생명 보전에만 전전긍긍하다 병사함으로써, 그의 후견인이었던 박술희도 힘도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피살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혼란 중에 왕규 일다의 반역을 염려한 요왕자는 서경을진수하던 오촌 당숙 왕식렴을 비밀리에 부러들여 왕규 일당을 제거한 후 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정종이다.
정종은 고려의 종묘 사직을 안정시킨 공로로 후에 『정종』이란시호를 받긴 했지만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자신이 죽은 후 별 무리 없이 왕위를 동복 아우인 태자 소에게 물려준 것이나 조정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신껏 서경 천도를 단행하려고 한 것 등으로 볼 때 어느 정도는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고려 왕조의 안정된 기반이 다져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종은 최승로가 시무책에서 평가한 바와 같이 즉위 후 8년까지는 중국의 3대에 견줄 만한선정을 베풀어 고려의 정치와 사회를 안정시켰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주현공부법』을 발표하여 전국 주현의 특산물 제도를 정상화시켰고, 국가에 공훈한 자와 가족들에 대한 보상을 후하게 하여 인심을 얻었다. 국방에도 힘을 써 북쪽으로 계속 영토를 넓혀갔으며, 송과 국교를 맺어 긴밀히 왕래하며 거란족의 침략에 대비했다.
이렇게 온건한 정치로 국정을 안정시킨 다음 광종은 과감한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과료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혁신적인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것이 공신 세력 및 호족 세력들과 충돌하는 계기가 된다.
광종은 먼저 후삼국 혼란기에 포로나 전재민으로 전락한 농민 중에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불쌍한 백성을 조사하여 자유민으로 해방시켜 주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했다. 이 법을 실시한 결과 공신이나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세력은 약화된 반면, 자유민이된 노비들이 국가에 대해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지게 되어 국력이 강해지고 왕권이 강화되는 일석이조의 이득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공신 세력을 비롯한 여러 세력들이 이 법에 반대했고 심지어는 광종의 부인인 대목황후 황보씨까지 적극 거부했다. 그러나 과감히 반대를 뿌리치고 적극적으로 노비안검법을 실시함으로써 많은 자유민이 생기게되어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또한 공종은 공신의 자제를 우선적으로 등용하는 종래의 무질서한 관리 등용하는 종래의 무질서한 관리 등용 제도를 철폐하고 과거 제도를 도입해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들을 다수 고려 조정에 진출시켜 신구 세력간의 세대 교체를 꾀했다. 그리고 과거 출신 관료들을 중심으로 왕권강화를 위한 관료 체제를 구축하여 공신 세력의 반대와 원망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광종은 이에 굴하지 않고 관료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자 자, 단, 비, 록으로 구분하는 4색 공복 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광종 11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공신과 호족 세력의 탄압에 나서 왕권에 대항하는 다수의 세력자를 축출, 살해하여 왕권의 전제화를 이룰 수 있었다. 이것 때문에 최승로는 시무책에서 광종 이후 경종이 즉위할 때는 훈신 숙장으로 살아남은 자가 불과 40여명뿐이었다고 비평한 것이다.
한편 광종은 강화된 왕권을 배경으로 ⌈칭제 건원⌋을 실시하여 스스로 황제가 외었고, 광덕, 준풍 등 자주적 연호를 사용했으며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라 부르도록 했다.
이로써 국초의 공신과 호족 세력이 크게 꺾인 반면, 유학을공부한 문신들을 중심으로 한 관료 체제를 구축하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데 성공하여 고려 왕조의 기반을 튼튼하게 했다. 이러한 광종의 업적을 기반으로 성종 때에는 중앙 관제를 완비하고 본격적인 지방 통치 체제를 구축하는 역사적 발전을 성취할 수 있었다.